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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무정’ 탄생 100주년 기념 | 이광수 연구자 하타노 세쓰코

“춘원의 자필 시집(‘내 노래’), 일본에 있어 애석”

  • 이혜민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무정’ 탄생 100주년 기념 | 이광수 연구자 하타노 세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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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만난 한 한국 여대생이 춘원에 대해 ‘친일파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자업자득이다’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근대문학 작가를 친일파로만 정의하는 건 사고(思考)의 정지가 아닐까. 춘원은 시대상을 반영해 행동한 인간이자 문인이다. 춘원의 문학상, 기념관이 성사되지 않아 안타깝다. 춘원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차단되는 것 아닌가. 춘원이 납북되지 않고 한국에서 문학작품을 지속적으로 썼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청강생으로 연구 시작

‘무정’ 탄생 100주년 기념 | 이광수 연구자  하타노 세쓰코

1917년 1월 1일자에 실린 소설 ‘무정’ 첫회와 춘원 이광수(왼쪽), 매일신보 편집자 나카무라 겐타로.

이광수는 연행된 채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도망친 어떤 사람이 형무소에서 이광수를 보았다고 이야기한 것이 최후의 목격 증언이다. 1991년 7월 베이징을 경유해 북한으로 향했던 이영근 씨(춘원의 아들)는 평양 근교에 있는 부친의 묘로 그를 안내한 인물에게서 이광수가 자강도의 강계에서 노동하던 중 1950년 10월 25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광수가 강계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정화 씨(춘원의 딸)가 조선족 김학철 작가에게서 받은 편지에 따르면 이광수는 1952년에 병으로 베이징에 이송돼 베이징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298쪽



▼ 이 책은 어떻게 쓰게 됐나.





‘무정’ 탄생 100주년 기념 | 이광수 연구자  하타노 세쓰코

평양 용성구역 ‘재북인사묘’에 있는 춘원의 묘비.[동아일보]

“2008년 연구서 ‘무정을 읽는다’를 낸 이듬해에 한 출판사에서 ‘이광수 평전을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춘원을 일본인에게 알리자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출판사 편집자가 (출판사가 있는) 도쿄에서 (내가 사는) 니가타까지 찾아와 설득해 마음이 움직였다. 교수로 일하다 보니 책을 쓸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기 퇴직했다.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자료를 준비하는 데 6년이 걸렸지만 책은 1년 만에 썼다.”

▼ 이력을 보니 아오야마학원대학 문학부만 졸업하고 교수가 됐더라.

“내가 석·박사 학위 없이 대학교수가 된 마지막 세대일 거다. 1990년대 한국 관련 학과가 생겨났을 때 교원으로 채용됐다. 난 1993년 현립니가타여자단기대학에서 전문강사, 조교수를 거쳐 정교수가 됐다. 단기대학이 2009년 니가타현립대학(4년제)이 됐고 이곳에서 국제지역학부 교수를 지냈다. 문학 공부는 1980년대 말 동경외국어대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청강하면서 했다. 수강생이 2,3명에 불과해 ‘나만을 위한 수업’ 같았다.”

▼ 대학 졸업 후 바로 한국문학을 공부한 건가.

“아니다. 불문학에 관심이 있어 대학 졸업 후 1973년부터 1년간 프랑스에서 살았다. 일본으로 돌아와 결혼한 뒤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부동산회사에서 일했다. 통역자격증을 취득해 국립니가타대학 시간강사로 일주일에 한 번씩 불어 강의도 했다. 아들을 낳곤 파트타임으로 일했고, 한국어는 1982년쯤, 아들이 유치원생이 되면서 배웠다.”

▼ 왜 한국어를 택했나.

“한국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살면서 이웃나라 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일본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더라. ‘일본어를 이해하려면 지역 방언, 조선어를 알아야 한다’는 대학 은사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프랑스에 머문 시간이 있었기에 넓은 시야를 갖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기 어렵진 않았나.

“내가 대학 1학년 때 어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기를 낳았다. 그 남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시베리아에 억류돼 죽었고, 북한에서 홀로 키우던 아기는 죽고 말았다.’ 그 얘기를 듣곤 충격을 받아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과거사가 나와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 4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한국 시절에 대해 듣지 못해 아쉬웠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춘원 연구에 몰두하는 것 같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

▼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일본정부가 재외한국인을 위해 만든 교육원에서 무료로 배웠다. 교육원 강사는 한국정부가 파견했다. 한국 초등학교 교사가 열심히 가르쳐주셨다. 선생님들을 보며 은혜를 갚고 싶었다. 한국어 공부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한국문학은 그렇지 않았다. 읽으면 언제나 가난하고 슬픈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무정’은 달랐다. 무정 논문을 쓰고, 무정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춘원 평전을 만들며 인생의 절반을 이광수에 빠져 살았을 정도로 무정은 매력적이었다.”

▼ 어떤 점에서 끌렸나.

“전개 과정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끝까지 읽었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정한 짓을 많이 하며 괴로워한다. 주인공 형식의 욕망, 여인 영채의 슬픈 허영심, 일제 무단 통치시기를 잘 담아냈다. 읽고 나서 뭔가가 남는, 아주 드문 소설이다. 이런 소설을 본 적이 없다. 무정이 첫 근대문학작품으로 거론되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다. 하지만 김동인은 1934년 ‘춘원연구’에서 ‘주인공 성격의 불통일은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 ‘무정’은 한글로 쓰였다는 이유로 근대 장편소설의 효시로 평가받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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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 동아일보 출판국 디지털미디어팀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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