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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화제|프로용병들의 한국살이

그녀 앞에만 서면 ‘우람한 우즈’, ‘맥빠진 맥도웰’

  • 육성철 sixman@ilyo.co.kr

그녀 앞에만 서면 ‘우람한 우즈’, ‘맥빠진 맥도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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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웰이 한국 농구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데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이 한몫 했다. 소주와 삼겹살, 순대에 떡볶이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식성, 감독과 코치 앞에서 다짜고짜 “나에게 주장을 맡겨달라”고 요구하는 뚝심, 5반칙 퇴장을 당하고도 “심판이 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소리치는 넉살…. 농구팬들에게 맥도웰은 바라만 봐도 즐거운 선수다.

하지만 최고의 용병 맥도웰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프로농구가 수입 용병의 신장제한 규정을 재조정하면서 맥도웰의 입지가 좁아진 것. 지난 시즌까지 장신 용병은 205cm, 단신 용병은 193cm가 제한선이었다. 이것이 다음 시즌부터는 장신 208cm, 두 용병 합계 398cm로 재조정된 것(단신 규정은 사라졌다). 이럴 경우 그동안 경쟁력이 떨어졌던 194∼199cm급 선수들이 대거 영입될 것이 확실하다(한국농구연맹에 기록된 맥도웰의 신장은 190.5cm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실제 키가 195cm라고 주장하고 있다).

용병이 들어온 순서는 축구가 가장 빠르고, 농구와 야구가 그 뒤를 잇는다. 최초의 용병은 83년 프로축구 포항제철(포항의 전신)이 브라질에서 임대해온 미드필더 세르지오 루이스 코고와 호세 로베르트 알베스. 84년에는 네덜란드의 랜츠베르겐이 현대에 입단해 어시스트상을 받았다. 1년 뒤엔 태국의 축구영웅 피아퐁이 럭키금성 유니폼을 입고 득점상과 어시스트상을 휩쓸었다. 이때부터 프로축구에서는 용병이 ‘플러스 알파’의 전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로야구의 경우 용병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용병 도입시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용병은 ‘외국에서 활동하는 선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83년부터 한국 프로야구에 뛰어든 재일동포 선수들도 이 부류에 든다. 한 시즌 30승의 대기록을 세운 장명부, 절묘한 투수 리드로 해태 전성시대를 열었던 김무종도 83년에 한국 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들 또한 한국에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눈물젖은 빵을 씹었다.

재일동포 최초로 타격왕에 오른 고원부(빙그레), 삼성의 이만수와 치열한 타율 경쟁을 펼친 홍문종(롯데) 등은 한국 프로야구의 텃세를 서러워했다. 시즌 막판으로 가면서 한국 투수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볼을 던지지 않았다는 것. 여기에 화가 난 재일동포 투수들이 한국 타자들을 계속해서 볼넷으로 내보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용병은 ‘보이지 않는 적’과도 싸워야 한다. 그만큼 ‘코리언 드림’을 실현하는 게 힘들다는 뜻이다.



야구의 우즈, 농구의 맥도웰에 비길 만한 프로축구 용병은 누구일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부산 대우와 수원 삼성에서 뛰었던 유고 용병 드라큘리치 샤샤를 꼽을 수 있다. 샤샤는 95년 유고의 명문클럽 레드스타에서 부산 대우로 이적했다(이적료 20만달러). 2년여의 탐색 끝에 그의 진가가 나타난 것은 97시즌. 샤샤는 부산의 공격진을 리드하며 프로축구 최초의 3관왕을 이끌었다. 97시즌 성적은 11득점, 5도움.

끈질긴 귀화 유혹

98시즌 중 샤샤는 신흥 명문으로 떠오른 수원으로 이적했다. 이번에도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샤샤는 팀을 옮기는 와중에도 10득점, 12도움을 기록했다. 99시즌은 샤샤의 독무대였다. 시즌 초반부터 골 폭풍을 일으키더니 무려 23골을 터트렸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샤샤는 친정팀 부산과 겨룬 최종 결승전에서 손으로 골을 넣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샤샤의 거짓 골 세러모니에 속은 중국인 심판은 득점을 인정했고, 그해 프로축구의 마지막 잔치는 엉망이 됐다.

이런 사태가 없었다면 우승팀의 득점왕인 샤샤에게 MVP가 떼논 당상이었다. 하지만 축구계는 그의 ‘부도덕성’을 집요하게 따졌다. 비난의 화살이 줄기차게 쏟아진 데는 용병이라는 이유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기자단 투표에서 안정환에게 밀리는 아픔을 겪었다. 한때 한국 귀화설까지 나돌았던 샤샤는 운명의 ‘손장난’으로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후 재기를 다짐하고 뛰어든 일본 J리그. 하지만 그곳에서 샤샤는 특유의 뚝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미 한국식 축구에 익숙해진 몸이 일본 스타일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샤샤는 황선홍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다시 한국행, 올해 K리그를 뛰게 됐다.

프로축구의 특급 용병들에게는 끈덕진 유혹이 따라다녔다. 포항의 라데, 일화의 샤리체프, 전남의 마시엘, 수원의 샤샤 등이 절정의 기량을 뽐낼 무렵 축구계는 ‘귀화’라는 비장의 카드를 흘리곤 했다. 여기에는 월드컵에 4회 연속으로 진출한 축구강국이면서도 아시아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비애가 담겨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용병을 내세워서라도 세계 무대로 진출하고 싶은 욕망이라고나 할까.

이 가운데 최초로 귀화한 선수는 발레리 사리체프다. 천안 일화의 골키퍼로 4년 연속 베스트 11에 올랐던 사리체프는 소속팀을 정규리그 3연승 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92년부터 4년간 내리 0점대 실점률을 기록한 사리체프의 ‘신화’ 때문에 타 구단들은 앞을 다투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 했고, 이 때문에 협회는 ‘골키퍼에 한해 용병을 제한한다’는 특례조항을 만들기도 했다.

사리체프는 올시즌 안양 LG의 골문을 지키고 있다. 족보가 바뀌어서 이제 그의 이름은 구리 신씨 1대인 ‘신의손’이다. 하지만 그가 태극마크를 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이(40세)도 나이지만, ‘(다른 국적으로) A매치(국가대표팀간의 경기)에 뛴 선수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단서조 항이 그의 행보를 가로막고 있다.

현재 축구협회가 강력히 귀화를 추진하고 있는 선수는 전남의 마시엘. 97년 영입돼 수비수로는 드물게 3년 연속 베스트 11에 뽑힐 만큼 기량이 출중한 선수다. 성실하고 성격까지 원만해 소속팀에서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마시엘은 귀화 제의에 시큰둥한 반응. 그는 조국 브라질이 A매치에서 이겼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창문 밖에 국기를 내걸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는 ‘애국자’다.

마시엘은 무관심해도 그에 대한 축구인들의 짝사랑은 계속될 듯하다. 월드컵을 2년 앞둔 상황에서 마시엘 같은 수비수를 찾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 축구는 늘 고질적인 수비 불안에 허덕이는 실정이다.

악동 列傳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용병들에게 한국은 낯설고 거친 땅이다.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기량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근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지나치면 표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한국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한 스타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불명예스럽게 따라붙는 별명이 바로 ‘악동’이다.

99시즌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4번타자 펠릭스 호세도 ‘악동’ 별명을 얻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91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발된 전력을 인정받아 99년 용병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됐다. 롯데 구단의 기대처럼 호세는 홈런포를 펑펑 날리며 부산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99시즌 롯데와 삼성의 플레이오프 7차전(10월20일). 호세는 대구 구장의 열성팬들 앞에서 보란 듯 승부에 쐐기를 박는 홈런을 터트렸다. 이 순간 관중석에서 물병이 날아들었고 그중 하나가 호세의 머리에 명중했다. 흥분한 호세가 관중을 향해 욕설을 퍼붓자 이번엔 라면 국물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호세는 덕아웃에서 들고온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응수했다. 이 사건은 대구와 부산의 야구팬들을 자극했다. 대구에서야 호세가 ‘죽일놈’이었지만, 부산에서는 ‘의지의 사나이’였다. 부산이 연고지인 롯데가 보기에 호세는 밉지 않은 선수였다. 그러나 호세는 롯데를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메이저리그에 재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펠릭스 호세와 이름이 같은 해태의 말래브 호세는 엉뚱한 해프닝으로 전국방송을 탔다. 해태가 타선을 보강하기 위해 영입한 호세는 김포공항에 입국할 때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해태의 호세는 야구도 열심히 했고 성격도 원만해 기대를 모았지만, 결정적으로 실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호세의 방망이가 신통치 않음을 확인한 김응용 감독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퇴출을 결정했다.

프로농구의 용병들은 한술 더 뜬다. LG 세이커스의 버나드 블런트는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만 ‘내신성적’은 낙제점이었다. 98∼99시즌을 앞두고 일본 세미프로리그 팀과 이중계약을 맺는가 하면 99∼2000시즌 직전엔 연봉에 부과된 세금을 구단이 내라고 떠넘겼다. LG는 블런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김인양 부단장과 이충희 감독을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절단’으로 급파하는 성의를 보였지만, 블런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협상이 벽에 부딪히자 블런트는 곧바로 짐을 꾸렸다. 이 바람에 LG는 지난 시즌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충희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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