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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현주소

비정한 세상살이에 고개숙인 국민영웅들

벤처사업 실패한 김재엽, 시간강사 전병관, 보증섰다 2억날린 김원기

  • 이영미·스포츠라이터

비정한 세상살이에 고개숙인 국민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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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국민적 성원을 한몸에 받던 스포츠계의 영웅들. 그들 가운데 ‘제2의 인생’을 성공시킨 선수는 의외로 드물다. ‘국민영웅’의 대다수는 비정한 세상살이 앞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금메달을 딴 마라톤의 손기정. 시상대 위에서 월계관을 쓰고 승리의 감격을 맛보았던 그의 가슴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선명했다. 민족은 있어도 국가가 없는 설움 속에서 그의 금메달은 슬픈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로부터 40년. 레슬링의 양정모가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건국 이래 첫 금메달을 따내자 감격과 흥분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녀 출전한 이래 느껴오던 금메달에 대한 갈증이 40년 만에 풀린 것. 이후 1984년 LA올림픽에선 무려 6개의 금을 캐냈고 동서냉전을 극복한 88서울올림픽에선 금메달 12개를 획득한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은 한국을 위한 잔치였다. 여자 공기소총에서 여갑순이 첫 총성을 울리더니 마지막날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감격적인 금메달을 따냈다. 금 12개로 종합 7위. 한국은 4년 뒤 애틀랜타에선 금 7개로 세계 10위에 오르며 스포츠 강국의 위용을 과시했다.

그동안 한국이 따낸 올림픽 금메달만 모두 47개(동계올림픽 금메달 9개 포함). 올림픽 무대를 통해 국민을 감동시켰던 금메달리스트들. 지금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국민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의 양정모 선수가 마침내 금메달을 땄습니다.” 정규 방송을 중단한 채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국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TV와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고 반복해서 들리는 아나운서의 멘트에 전국이 들썩거렸다. 한국 올림픽 역사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47). 23세의 청년에서 어느덧 불혹의 중년이 된 그는 선수와 지도자로 25년간 몸담았던 조폐공사 레슬링팀이 98년 해체되면서 레슬링계를 떠났다.

양정모와 김재엽의 외로운 싸움

그런 그가 한때 투사로 돌변한 적이 있다. 일명 대진표 조작 사건에 대한 정부의 올바른 조사를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 것. 97년 전국학생레슬링선수권대회 당시 부산협회 부회장의 아들을 4강에 진출시키기 위해 대진표를 조작,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레슬링 관계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를 벌이는 현장에 양정모가 나타난 것이다.

양정모는 당시 상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만신창이가 된 레슬링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며 핏대를 올리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 다만 “한평생 레슬링만 해온 사람이 레슬링을 떠나 살 수 있겠냐”는 여운만 남겼다. 한때 한국 레슬링의 병폐를 고쳐보겠다고 투지를 불사르던 열정은 세월과 함께 가슴 한켠에 묻어둔 모양이다.

88서울올림픽 유도 60kg급 금메달리스트 김재엽(36)은 은퇴 후 쌍용양회와 마사회에서 코치로 생활하다 현재는 벤처사업가라는 거창한 명함을 새로 달았다. 김재엽이 평생 업으로 삼았던 유도를 버리고 뜬금없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김재엽은 국내 유도계의 대표적인 ‘야당’으로 불려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해대는 직언 때문에 유도협회 관계자들과 항상 불편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유도계는 용인대 총장인 김정행씨가 유도협회 회장을 겸직하면서부터 용인대 출신과 비용인대 출신의 판정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비용인대 출신인 김재엽은 시합 때마다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에 강하게 어필해왔고 96애틀랜타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선 심판판정에 항의하다 일시적으로 연금 지불을 정지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98년 8월이었다. 마사회가 김재엽에게 전기영, 윤동식이 96방콕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을 문제삼아 사표를 종용하자 김재엽은 눈물을 머금고 짐을 꾸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서울올림픽이 낳은 금메달 커플로 동성동본의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결혼, 화제를 뿌렸던 아내 김경순(핸드볼)과 합의 이혼하는 불행까지 맛보았다.

그후 김재엽이 부딪힌 세상살이는 끔찍할 정도로 냉정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도통 손에 잡히는 아이템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처한 처지가 한심하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꼬리표가 원망스러웠다. 방황의 나날을 보내다 시작한 사업이 이동전화용 무선 데이터 컨텐츠를 제공하는 정보 통신업. 서울 코엑스(한국종합전시장)에 사무실을 내고 (주)TNS란 벤처기업을 설립했는데 얼마 못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정확한 자료와 준비 없이 주변 사람들의 말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실패의 쓴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최근 매형의 주선으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아스팔트나 대형 간판 등에 첨가되는 필름을 미국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이다. 가족끼리 믿고 하는 일이라 사기 당할 염려는 없지만 무역 지식이 없고 영어실력도 부족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 사업을 한다니 쉽지 않은 게 당연하지요. 컴퓨터도 켤 줄 몰랐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전 성공할 겁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다시 유도계로 돌아갈 거예요.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도 계속 할 생각입니다.”

체육교사로 변신한 박시헌

88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챔피언 박시헌(35)은 현재 진해남중학교에서 체육교사와 복싱부 코치를 겸하고 있다. 경남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덕분에 교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던 그는 은퇴 후 곧바로 교단에 섰다. 89년 진해종고에서 교편을 잡은 뒤 복싱팀을 신설, 전국체전에서 금메달 5개를 따내는 강팀으로 키웠다. 96년 7월엔 진해남중으로 옮겨 복싱팀을 창단, 제자 키우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박시헌은 88올림픽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 속에 영광의 기쁨보다는 뼈아픈 상처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박시헌은 결승에서 미국의 로이 존스와 맞붙었다. 당시 박시헌은 경기내용으로는 뒤지고서도 3-2 판정승을 거두었다. 경기 후 미국측에서 심판 매수설을 주장하며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정식으로 제소함으로써 논란이 확대됐다.

편파판정 시비는 10년이나 계속됐다. 97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가 로이 존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함으로써 박시헌은 오랫동안 가슴을 짓눌러왔던 무거운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시헌은 그 날 경기는 자신이 진 경기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차라리 은메달을 땄다면 더 떳떳했을 거예요. 금메달 따고 바보가 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요즘도 학생들이 그 때 일을 물어봐요. 솔직히 얘기하죠. 진 게임인데 심판이 내 손을 들어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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