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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韓·中·日 축구감독의 경쟁력

수읽기의 귀재 히딩크 · 그라운드의 심리학자 밀루티노비치 · 관리축구의 달인 트루시에

  • 김한석 < 스포츠서울 기자 > hans@seoul.co.kr

韓·中·日 축구감독의 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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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동반 진출한 극동축구 3강의 사령탑은 공교롭게도 모두 이방인. 한·중·일 3국은 숱한 시행착오 끝에 각각 세번째 '용병카드'를 선택했다. 현재 스코어는 트루시에, 밀루티노비치, 히딩크 순. 그러나 진검승부는 월드컵 본선에서 펼쳐질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중·일 극동축구 삼국지가 펼쳐진다. 세계 32강이 참가하는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에서 극동 3강의 전사들을 이끌 지휘관은 모두 외국인.

자국인 감독을 내세워 단 한번도 월드컵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한 공동 개최국 한국과 일본은 각각 네덜란드의 거스 히딩크(55) 감독과 프랑스 출신의 필립 트루시에(46) 감독을 앞세워 본선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10월7일 중국을 월드컵 도전 44년 만에 최초로 본선에 올려놓은 유고 출신의 보라 밀루티노비치(57) 감독이 가세했다. 이에 따라 한·중·일 3개국 용병 사령탑의 자존심을 건 대리전은 벌써부터 15억 극동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이들은 98프랑스월드컵에 이어 4년 만에 이방인 감독으로서 재대결을 벌이게 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히딩크는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강에 올려놓았다. 당시 트루시에는 본선에 처녀 출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이끌었다. 비록 우승팀 프랑스와 같은 조에 속하는 바람에 16강진출에 실패했지만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건너왔다. 또 밀루티노비치는 월드컵에서 명성을 쌓은 명장. 1986년부터 4회연속 멕시코, 코스타리카, 미국, 나이지리아 등을 맡아 모두 16강에 올려놓아 ‘16강 제조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밀루티노비치는 중국까지 포함, 월드컵 사상 최다인 5회 연속 본선에 출전하는 명예까지 누리게 됐다.

월드컵 개막을 7개월여 앞두고 이방인 3인방의 경쟁력을 가늠해보는 것은 축구팬들에게 흥미로운 일이다. 지난해 10월 레바논서 벌어진 아시안컵에서의 성적은 일본 우승, 한국 3위, 중국 4위. 당시엔 히딩크가 한국팀을 지휘하지 않았다. 히딩크가 한국대표팀을 맡은 지는 불과 9개월. 따라서 극동 3개국 감독 중 후발주자인 히딩크의 능력을 트루시에나 밀루티노비치와 직접 비교하기에는 시기상조의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지도자 경력과 현재까지 드러난 훈련내용 및 실전결과 등을 통해 경쟁력을 따져보기로 한다.

아시아로 넘어온 명감독

1983년 한국을 필두로 1993년 일본 J리그, 1994년 중국 갑A조 등 프로리그가 극동에서 출범했다. ‘탈(脫)아시아’를 위해 노력해온 극동 3개국은 세계 강호들과의 대결에서 당당히 대응하기 위해 경쟁력있는 용병 사령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특기할 것은 이들 3명이 우연히도 한·중·일 3국의 역대 세번째 용병감독이라는 점이다.

선발주자는 트루시에. 단순히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던 경력 때문에 일본이 그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프랑스월드컵에서 오카다 다케시 감독을 내세워 선전하고도 3패를 당하자 일본축구를 잘 아는 명장을 골랐다.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준 프랑스 출신의 아센 웽거가 0순위. 그러나 웽거는 이미 잉글랜드의 명문클럽 아스날에 정착하고 있었다. 그는 집요한 러브콜에도 끝내 일본행을 고사했다. 대신 프랑스 감독 한 명을 추천했다. 9년 동안 축구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지도력을 키워온 트루시에다. 그런데 일종의 ‘실험카드’로 선택한 트루시에가 2년 만에 성공을 거둘 줄이야….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마리우스 한스 오프트(1992~93년), 브라질의 팔캉(1994년)에 이어 역대 세번째 용병 감독 트루시에가 진짜 ‘보물’이라는 사실을.

밀루티노비치는 한국에 올 뻔했다. 1999년 말 한국으로부터 기술자문을 제의받고 2000년 북중미골드컵 때부터 허정무 전임감독을 돕기로 구두합의까지 했다. 그러나 중국이 잉글랜드 출신의 로버트 후튼 감독을 앞세워 2000시드니올림픽 본선진출에 실패하자 다른 외국인 명장을 찾아나섰다. 개혁이 필요했던 중국은 ‘월드컵 16강 제조기’로 알려진 밀루티노비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중국축구계와 돈독한 우의가 있는 대한축구협회가 이를 양해해 지난해 1월 밀루티노비치는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중국은 94미국월드컵 때 최초의 용병감독인 독일 출신 클라우스 쉬라프너를 영입했지만 최종예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또한 2002월드컵을 겨냥해 지휘봉을 맡긴 후튼 감독마저도 올림픽 본선진출에 실패하자 “어차피 대세는 용병감독”이라며 밀루티노비치를 선택했다. 밀루티노비치는 미국월드컵이 끝난 뒤 한때 한국의 대우 프로팀 감독을 희망했을 정도로 한국에 애착이 강했다. 1999년에도 월드컵에 자동출전하는 주최국 한국을 맡기 위해 집념을 보였으나 중국의 집요한 스카우트 공세로 진로를 바꿨다는 후문이다.

한국축구는 지난해 성인대표는 물론 올림픽팀 청소년팀마저 줄줄이 국제무대에서 추락했다. 벼랑 끝에서 대한축구협회는 세계적인 명장이 아니고서는 한국축구를 구할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10여 명의 후보까지 정해놓았다. 대표팀 강화의 전권을 쥔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서유럽 감독을 선호했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에서 최초로 총감독을 맡은 크라머에 이어 1994년 대표팀 전임감독으로 임명한 우크라이나 출신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비쇼베츠의 사회주의식 지도방식이 한국선수들에게 절실한 창의적인 축구를 향상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판단이다.

지도자로 명성 얻은 ‘닮은꼴’

서유럽 감독이 한국축구의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이위원장의 의지가 공감을 얻었고, 기술위원회는 프랑스월드컵 우승을 이끈 에메 자케 감독을 영입 일순위로 결정했다. 축구협회의 가삼현 국제부장이 특명을 받고 지난해 11월 유럽으로 건너가 자케를 만났지만 그는 “그 나라의 선수는 그 나라 감독이 가장 잘 안다. 외국인 감독이 맡는 것은 내 축구철학과 맞지 않는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두번째 카드가 히딩크. 처음엔 한국축구는커녕 한국을 모른다는 이유로 고사했지만, 가부장은 삼고초려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세 사람 모두 선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게 공통점이다. 선수와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제패한 자갈로(브라질) 베켄바워(독일) 등 스타 출신 명장도 많지만 오히려 월드컵무대에서는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한을 지도력으로 풀어낸 감독이 더 많다.

세 사람 중 선수로서 제대로 명성을 얻은 쪽은 히딩크다. 그는 1967년 네덜란드 2부클럽 그라프샤프에서 21세의 나이로 뒤늦게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68~69시즌 22골, 69~70시즌 14골을 넣어 2시즌 연속 팀내 최다득점을 올렸다. 데뷔할 때 18위였던 팀이 68~69시즌에 팀 창단 이후 첫 리그우승을 일궈낸 데는 미드필더 히딩크의 공헌이 컸다.

일화 한 토막. 1970년 PSV아인트호벤으로 스카우트된 뒤 71~72시즌 전반기를 최하로 마친 그라프샤프의 서포터스는 “히딩크가 돌아와야 한다”며 10길더 모금운동을 펼쳤다. 3만길더(1650만원)라는 당시로선 거금을 마련해 1972년 히딩크를 데려오는데 성공했고, 히딩크는 동생 르네와 함께 뛸 수 있었다. 막내 동생도 1980년대 이 팀에서 형들의 명예를 지켰다. 77~78년 NEC에서 한 시즌을 보낸 히딩크는 1980년 펠레, 베켄바워 등이 개척한 미국프로축구 무대에 뛰어들었다. 영어도 이때 배웠다. 히딩크는 1981년부터 1982년까지 NEC와 그라프샤프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은퇴했다.

밀루티노비치는 1956년부터 유고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4차례나 우승을 이끌었다. 대표 2진에 몇 차례 발탁됐으나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1969년 해외진출의 꿈을 이뤄 AS모나코, 니스, 루앙 등 프랑스의 3개 클럽과 운터투르(스위스)에서 1972년까지 활동했다. 1972년 멕시코로 진출, 1977년까지 UNAM 푸마스에서 뛰다 은퇴했다.

트루시에는 76~77년 앙그렝, 77~78년 레드스타 등 프랑스 2부클럽에서 수비수로 활약한 뒤 1부리그로 진출해 78~81년 로리앙, 81~83년 랑스에서 활동했다. 지난 6월 일본에서 벌어진 컨페더레이션스컵서 대결해 1대0으로 패한 프랑스대표팀의 르메르가 1978년 레드스타에서 감독으로 모셨던 은사.

4연속 16강진출 신화

히딩크를 빼면 두 감독은 다른 대륙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집념이 돋보인다. 그중 밀루티노비치의 이력서가 가장 화려하다. 1977년 멕시코 UNAM에서 지도자생활을 시작해 우승 1회, 준우승 2회의 성과를 일궈내 능력을 인정받았다. 1982년까지 96승67무55패로 승률 59.4%를 기록. 1983년 10월 멕시코 대표팀 감독에 올라 월드컵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벨기에, 이라크를 꺾고 조1위로 16강에 올라 불가리아를 2 대 0으로 완파했으나 8강에서 서독과 0 대 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1 대 4로 패했다. 그러나 월드컵 도전사상 멕시코에 가장 좋은 성적표(6위)를 바쳤다.

이미 멕시코로 귀화한 그이기에 제2의 조국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970일간 멕시코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거둔 성적은 25승14무7패. 당시 그의 형 미오드라그도 유고대표팀 감독을 맡아 화제였다. 유럽예선 4조에서 유고가 4위로 탈락하지 않고 본선에 올랐더라면 형제 감독이 나란히 출전하는 진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1987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산 로센소와 이탈리아의 우디네클럽에서 월드스타들을 지도하던 그는 월드컵에 처음 진출한 코스타리카를 대회 개막 석달을 앞두고 맡아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을 꺾고 16강에 진출해 코스타리카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밀루티노비치는 1991년 5월, 94미국월드컵을 앞두고 미국대표팀 감독으로 말을 갈아타 콜롬비아를 꺾고 조3위팀들에 주어지는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올랐다. 불행히도 16강전 상대는 브라질. 한 명씩 퇴장당하는 혈전 끝에 0 대 1로 분패했지만 미국에 축구열풍을 지핀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다.

밀루티노비치는 1995년 6월 멕시코로 돌아왔다. 23승12무14패의 성적과 예선통과의 실적에도 그는 미국과의 홈경기에서 처음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임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98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건너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본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스카우트됐음에도 나이지리아는 본선 1라운드에서 스페인, 불가리아를 꺾고 16강에 올랐다.

히딩크는 대표팀보다는 유럽클럽 무대에서 명성을 쌓은 게 다르다. 82~84년 친정팀 그라프샤프의 유소년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4년 PSV 아인트호벤 코치로 옮겨 1986년 감독으로 승격됐다. 그의 능력은 여기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86,87,88년 네덜란드 리그 3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1988년엔 FA(축구협회)컵 우승에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라 영광의 ‘트레블(3관왕)’ 신화를 창조했다. 1990년 터키의 페네르바체에 스카우트된 뒤 이듬해 스페인의 발렌시아 감독으로 자리를 옮겨 4년 동안 명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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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석 < 스포츠서울 기자 > han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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