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역사를 바꾼 월드컵 70년 비화

  • 기영노·스포츠평론가 kisports@hanmail.net

    입력2004-11-12 11:0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969년 7월14일 엘살바도르 육군과 공군이 불시에 탱크와 전투기로 온두라스를 공격하자, 온두라스도 엘살바도르의 여러 도시를 폭격했다. 축구 때문에 양국 국민이 감정싸움을 벌이고, 외교관계를 단절하더니, 급기야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2001년 12월1일 부산 전시컨벤션센터에서 있었던 2002 한·일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은 포르투갈, 폴란드, 미국과 함께 D조에 배정됐다. 2001년 11월 현재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4위인 포르투갈은 미국(20위) 폴란드(33위) 한국(43위)보다 분명히 한 수 위다. 한국으로서는 예선 마지막 경기로 벌어질 포르투갈전 결과에 따라 월드컵 16강진출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포르투갈은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때 돌풍의 팀 북한에 3대0으로 밀리다가 5대3으로 역전승을 거둔 팀이다. 만약 북한이 포르투갈을 꺾었다면 북한은 ‘월드컵 4강’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길 뻔했다. 그런데 북한은 왜 3대0으로 리드하던 게임을 망치고 말았을까.

    북한은 당시 4조에서 소련, 칠레, 이탈리아와 만났다. 그러자 축구전문가들은 이탈리아와 소련이 8강에 오를 것이며 칠레가 복병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을 언급한 전문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북한 선수들은 전원이 100m를 11초대에 뛰는 준족이었으며, 2년여 동안 군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아 90분을 뛰고도 남을 만큼의 체력을 갖추고 있었다.

    북한은 첫 경기에서 소련의 말리페에프 선수를 막지 못해 0대3으로 무너졌다. 그러나 두번째 경기인 칠레전에서 후반 43분 박승진 선수가 남북한 선수로는 최초로 골을 터뜨려 1대1로 비겼다.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예선 마지막 경기인 이탈리아전에서 전반 41분 ‘동양의 진주’ 박두익 선수가 결승골을 터뜨린 데 힘입어 1대0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을 일으켰다. 거함 ‘이탈리아호’를 격침시킨 북한 선수들은 미들즈브러 스타디움에 모인 1만8000여 명의 관중 앞에서 ‘김일성 수령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고, 관중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축제를 벌였다. 그때가 1966년 7월19일이었다. 그런데!

    들뜬 분위기가 하루 이틀 지나자 ‘이제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지 않냐’는 자만감이 팽배해진 선수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영국의 뒷골목을 단체로 찾게 되었다. 이들은 다음날 브라질을 꺾은 포르투갈과 8강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밤늦도록 하얀 피부를 탐닉했다.

    북한과 포르투갈의 준준결승이 열린 리버풀 스타디움에는 5만1780명의 관중이 모여들었다. 예선이 벌어졌던 미들즈브러 구장의 1∼2만 관중과는 차원이 달랐다. 만원 관중을 본 북한 선수들은 없던 힘까지 솟는 듯했다. 스페인 주심 가르데아자발이 휘슬을 불기가 무섭게 23초 만에 박승진이 포르투갈 골문을 갈랐다. 선제골을 얻어맞은 포르투갈 선수들은 ‘어!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네’라며 반격했다. 그러나 기계처럼 돌아가는 북한의 조직력을 제압하지 못했다. 21분경 이동운이 추가골을 터뜨렸고, 1분 뒤 양성국이 세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전반전 중반이 지나지 않아 3대0 스코어라면 상대팀은 포기할 만한 구실을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북한 선수들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영국의 뒷골목만 가지 않았어도 90분이 아니라 120분 연장전까지 소화할 수 있었을텐데….

    북한이 지친 모습을 보이자 포르투갈 선수들은 ‘검은 표범’ 에우세비오를 내세워 총반격에 나섰다. 에우세비오는 전반 27분부터 후반 14분까지 32분 동안 무려 4골을 넣어 4대3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그리고 후반 33분 호세 아우구스토 선수의 다섯번째 골이 터지면서 북한은 추격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북한 돌풍이 사그라진 이유

    군인 출신 전두환 대통령이 스포츠계에 남긴 에피소드가 많다. 오죽하면 ‘스포츠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었을까? 전두환 대통령은 프로복싱 세계타이틀매치를 보다가 전화를 걸어 코치(선수)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텔레비전으로 스포츠중계를 시청하다가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느닷없이 경기현장으로 달려갔다.

    월드컵 무대에서도 군인 출신의 극성(?)은 유별났다. 1974년 서독월드컵 2조에는 자이레, 브라질, 스코틀랜드, 유고가 속해 있었다. 당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모부투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자이레는 예선 첫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에 0대2로 패했다. 이제 유고와의 2차전에서도 패하면 탈락이 확정적이었다. 최종 3차전 상대는 브라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자이레는 유고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이레 감독이 유고 출신의 비디치였다. 모부투 장군은 혹시 비디치가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몇 날을 고심하던 모부투는 대표팀에 “비디치를 해고하라”는 긴급전문을 내려보냈다. 대신 현지에 가있던 체육부장관한테 감독직을 맡으라고 지시했다. 그야말로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체육부장관이 졸지에 월드컵대표팀 사령탑에 앉게 된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자이레는 유고에 0대9로 대패했다. 모부투는 브라질전을 앞두고 또다시 전문을 보냈다. ‘체육부 장관으로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다시 감독을 바꾼 자이레는 브라질에도 0대3으로 패해 3경기에서 14골을 허용하며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예선 탈락했다.

    한국도 98프랑스월드컵 때 멕시코에 1대3, 네덜란드에 0대5로 잇따라 패하자 차범근 감독을 중도 해임한 바 있다. 아마 전두환 대통령이 그때까지 집권하고 있었더라면, 차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벨기에 전에서는 자신감을 잃은 김병지 골키퍼를 빼고 서동명 골키퍼를 넣고, 홍명보를 미드필드에 배치하라”는 ‘특명’을 내리지 않았을까.

    최근 외신은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200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카를로스 메넴(71) 전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라도나는 정치(부통령)를 하고 싶은 것이다. 마라도나는 자신의 영원한 라이벌 펠레가 브라질에서 체육부장관을 지냈으니 자신은 그보다 높은 벼슬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마라도나 하면 ‘신의 손’을 빼놓을 수 없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이 열릴 무렵 마라도나의 축구실력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마라도나는 A조 예선에서 한국의 허정무 등 찰거머리 같은 수비수들에게 차이고 넘어지면서도 자기실력을 십분 발휘했다.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문제의 8강전. 상대팀 잉글랜드도 아르헨티나 공격의 핵 마라도나를 철저히 마크했다. 후반 6분경까지 0대0이었다.

    그 무렵 아르헨티나의 발다노가 잉글랜드 수비의 한 축을 무너뜨리더니 골문 앞으로 길게 센터링했다. 잉글랜드 골키퍼 쉴턴은 높이 뜬 공을 향해 치솟았고, 그 앞에서 알짱거리던 마라도나도 함께 점프했다. 방향이 바뀐 공이 잉글랜드 문전으로 빨려 들어가자 마라도나가 두 손을 들어 환호했다.

    신의 손, 신의 발

    쉴턴 골키퍼의 신장은 181cm이고 마라도나는 쉴턴보다 16cm나 작은 165cm였다. 게다가 골키퍼는 점프하면서 손을 사용할 수 있으니 마라도나보다는 적어도 50cm 이상 유리하다. 그런데 땅딸보 마라도나에게 당했으니 쉴턴은 어처구니 없었다. 아즈테카경기장에 모인 12만 명에 가까운 관중들도 마라도나의 묘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주심 튀니지의 알리 베세나우르는 즉시 아르헨티나의 득점을 선언했다. 그러나 뒤늦게 마라도나의 핸들링을 알아차린 쉴턴이 주심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마라도나의 머리를 맞고 들어간 게 아니라 손으로 처넣었다.”

    잉글랜드의 강력한 항의에도 주심은 한번 내린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경기 후 사진과 TV화면을 분석한 결과 마라도나가 왼손으로 처넣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자 마라도나는 묘한 말로 반칙을 인정했다.

    “내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골을 넣은 것이다.”

    아닌 밤중에 ‘신의 손’이라니. 정말 기막힌 표현이다. 하긴 골키퍼 쉴턴이 손을 뻗으면 2m가 넘을 것이다. 그러나 키 작고 팔도 짧은 마라도나는 아무리 손을 뻗는다 해도 180cm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주심도 가리지 못할 만큼 빠르고 재치있게 손으로 쳐 넣었으니 확실히 ‘신의 힘’을 빌렸는지도 모른다. ‘신의 손’이 아니라 ‘신의 힘을 빌린 장난’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3분 후 마라도나는 ‘신의 발’로 잉글랜드 수비진을 유린했다. 월드컵 사상 가장 ‘화려한 골’을 터뜨린 것이다. 하프라인에서 공을 잡은 마라도나는 40여m를 혼자 드리블해가며 무려 5명을 제치고 골을 성공시켰다.

    얼떨결에 두 골을 허용한 잉글랜드는 전열을 가다듬어 맹반격을 폈으나 후반 36분 리네커가 한 골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가 마라도나 한 명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이후 마라도나는 벨기에와의 준결승전에서 혼자 2골을 터뜨려 아르헨티나를 결승전에 올려놓았고, 서독과의 결승전에서는 서독 수비진영의 혼을 뺀 절묘한 전진패스로 브라운, 발다노, 부르차가의 득점을 도왔다. 3대2. 아르헨티나가 두번째로 월드컵을 제패한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는 역대 축구공 가운데 가장 탄력이 뛰어나고 스피드가 좋아 벌써부터 골키퍼 수난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월드컵에서는 1970년 멕시코대회부터 공인구를 사용해왔다. 이전까지는 개최국이 제공하는 공을 쓰는 것이 관례였다.

    1930년 우루과이월드컵에서는 전반과 후반에 각각 다른 공인구를 사용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결승전에 오른 아르헨티나가 자기네 공을 사용하자고 제의하자, 개최국으로 결승까지 진출한 우루과이가 반발한 것이다. 결국 토스를 통해 아르헨티나측이 이겨 전반전은 아르헨티나 공으로, 후반전은 우루과이 공으로 경기를 벌였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아르헨티나 공으로 경기를 한 전반전은 아르헨티나가 앞섰고(2대1), 우루과이 공을 사용한 후반전에서는 우루과이가 일방적으로 우세했다(3대0).

    1930년 우루과이대회는 첫 월드컵이라 그런지 해프닝이 많았다.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의 센터포드 페레이라가 학기말 시험을 치르기 위해 귀국했고, 페레이라 대신 출전한 18살 고교생 스타빌레가 데뷔전인 멕시코전에서 월드컵 사상 최초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는가 하면, 득점왕(8골)까지 차지했다.

    1970년대 경미한 소아마비를 앓은 브라질의 자갈로 선수가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1930년 우루과이대회에서는 우승팀 우루과이에 한쪽 팔이 없는 카스트로 선수가 있었다. 오른팔이 없는 카스트로는 팔의 힘이 다리에 몰렸는지 대포알 같은 오른발 슈팅으로 페루전에서 결승골,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 쐐기골을 터뜨렸다.

    또한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1조 예선에서는 후반 36분 아르헨티나의 몬티 선수가 한 골을 넣어 4대2가 된 뒤 프랑스의 맹렬한 반격이 이어졌다. 드디어 39분경 프랑스의 란제예르 선수가 질풍같이 아르헨티나 진영으로 들어갔다. 골키퍼와 1대1 상황. 그런데 란제예르가 슛을 날리는 순간 브라질의 길베르토 레고 주심이 휘슬을 불어버렸다. 시간이 6분이나 남았을 뿐만 아니라 설사 시간이 다 됐더라도 슈팅까지는 허용하는 게 관례인데 그야말로 월권행위를 한 셈이다. 프랑스 선수들과 벤치에 있던 프랑스 코칭스태프까지 가세해 주심에게 항의하자 주심은 선심과 상의한 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6분간 경기를 연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선수들은 이미 리듬이 깨진 데다 땀까지 식어 승부를 뒤집지 못했다.

    엘살바도르는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온두라스와 전쟁까지 치른 나라다. 엘살바도르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고 본선에 진출했으나 홈팀 멕시코에 골을 도둑 맞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엘살바도르는 1조에서 멕시코, 소련, 벨기에와 한 조를 이뤘다. 엘살바도르는 첫 경기에서 벨기에에 0대3으로 패한 뒤, 2차전 상대인 멕시코전을 별렀다. 그러나 멕시코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두 팀은 전반 종료 직전까지 0대0 무승부를 이루고 있었다.

    종료 휘슬이 울릴 무렵 멕시코가 자기 진영에서 파울을 범했다. 이집트 주심은 엘살바도르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절호의 기회를 맞은 엘살바도르 선수들이 프리킥을 어떻게 찰 것인가 숙의하는 사이에 멕시코의 페레스가 그 공을 재빨리 동료선수에게 연결해주는 게 아닌가.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주심이 휘슬을 불어 페레스에게 경고를 주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서있었다. 한편 페레스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발디비아는 밑져야 본전인 셈치고 그 공을 엘살바도르 골문에 차 넣었고, 엘살바도르 골키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집트 주심 칸딜은 당연하다는 듯이 골을 선언했다. 어리둥절한 것은 엘살바도르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골을 성공시킨 멕시코 선수들도 좋아하기는커녕 어안이 벙벙했다. 아즈테카 스타디움에 모인 10만3000여 관중들의 반응은 웃음, 함성, 야유로 갈라졌다.

    월드컵 초유의 도둑 골

    엘살바도르 선수들은 곧바로 주심에게 달려가 항의했다. 그러나 주심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온두라스와의 축구전쟁은 물론 실제 전쟁에서도 이긴 엘살바도르 관중들은 살기가 등등했다. 곧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주심에게 야유를 보낸 멕시코 관중을 향해 멕시코의 ‘애국자’가 권총을 쏜 것이다. 이 한 발의 총성 때문에 엘살바도르 관중들의 함성이 잦아들었다.

    지금도 축구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이기기는 어렵다. 물론 과거에는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1950년 브라질월드컵에서 미국은 잉글랜드를 꺾었다. 이것은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누른 것과 함께 ‘월드컵 2대 이변’으로 불리고 있다.

    당시 2조에는 미국, 잉글랜드, 스페인, 칠레가 속해 있었다. 잉글랜드는 비록 월드컵 무대에 첫선을 보였지만 축구 종주국이었고, 올림픽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강팀이었다. 더구나 첫 경기에서 미국은 잉글랜드보다 한 수 아래인 스페인에 0대1로 졌고, 잉글랜드는 칠레에 2대0으로 이겼다.

    경기가 열리는 인디펜덴시아 스타디움에는 뻔한 승부 탓인지 1만5000명의 관중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휘슬이 울리면서 잉글랜드가 수십 차례의 찬스를 맞았지만 미국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잉글랜드는 초조해졌고, 미국 선수들은 사기가 올랐다. 드디어 운명의 전반 37분. 미국의 레디 게티엔스가 잉글랜드의 골문을 갈랐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반전을 0대1로 마친 잉글랜드 선수들은 후반전에 들어가자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미국 보르기 골키퍼의 신들린 듯한 방어벽을 뚫지 못했다. 다른 경기장에서 미국의 경기결과를 기다리던 기자들은 미국이 잉글랜드를 1대0으로 이겼다는 소식에 당황했다. 당시 ‘잘못 들었겠지’라고 지레 짐작하고 잉글랜드가 미국을 1대0으로 이겼다는 기사를 송고한 기자들도 많았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는 개최국 한국, 폴란드, 포르투갈과 함께 D조에 속해 있는데 과연 1950년 브라질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격파했던 것처럼 D조 최강 포르투갈을 꺾는 이변을 일으킬 수 있을까.

    축구는 어느 정도의 몸싸움이 허용되고 또 발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심이 경기운영을 잘못하거나 양팀 선수의 감정이 극에 달하면 사고가 생기게 마련이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맞붙은 헝가리와 브라질은 양팀 선수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지금도 ‘베른의 난투극’이라 불리고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수 푸스카스를 보유한 헝가리는 무적이었다. 그리고 브라질은 홈에서 열린 지난 대회에서 우루과이에 덜미를 잡혀 이번에는 반드시 우승을 차지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헝가리와 브라질의 준준결승전은 3만 명을 수용하는 베른의 반크 도르프 경기장에서 열렸다.

    백중세로 예상했지만 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3분 만에 헝가리의 히데구치 선수가 첫 골을 터뜨렸다. 그런데 히데구치 선수가 슛을 하려는 순간 브라질 수비수가 히데구치의 팬티를 잡아챘다. 공은 이미 골문을 갈랐으나 히데구치는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우스운 꼴이 됐다. 축구에서 경기 도중에 유니폼을 살짝 잡아당기거나 손가락으로 허리를 쿡 찌를 경우는 종종 있으나 아예 옷을 벗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히데구치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헝가리 선수들은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한 골을 먼저 빼앗긴 브라질 선수들은 그들대로 화가 나 양팀 선수들은 난투극을 벌였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고 했던가. 선수들 싸움에 관중들까지 가세해 서로 치고받는 난장판이 되었다. 경비경찰이 호루라기를 불어 겨우 진정시켰지만, 이미 경기는 축구가 아니라 축구를 가장한 격투기였다. 그래도 골은 계속 터져 전반전은 2대1로 헝가리가 앞섰다. 후반전 들어 헝가리의 란토스 선수가 다시 한 골을 추가해 3대1이 되자 브라질이 이성을 찾기 시작했다.

    후반 20분경 브라질의 디디가 헝가리 문전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잡아 슛을 하려는 순간 180cm가 넘는 장신 수비수 브잔스즈키가 디디를 온몸으로 덮쳤다. 디디는 슛은 고사하고 브잔스즈키의 육중한 몸에 깔려 부상을 당했다. 이를 본 브라질 선수들이 브잔스즈키에게 달려들었고 헝가리 선수들도 이에 맞섰다.

    한바탕 난투극은 먼저 주먹질을 한 브라질의 토지 선수가 퇴장당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경기는 다시 속행되었으나 이건 차라리 싸움박질이었다. 한번 패스할 때마다 주먹질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어쩌다 심판이 반칙을 선언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몰려가 심판을 성토했다. 심판은 또다시 브라질의 산토스와 헝가리의 콕시스를 퇴장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는 헝가리의 4대2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에 취해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하고 있는 헝가리 선수들을 향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브라질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샤워장과 라커룸으로 난투극이 이어진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줄리메 컵

    2002 한·일월드컵에서 우승하면 FIFA 컵을 받는다. 그러나 1970년 멕시코대회까지는 줄리메컵을 수여했다. 줄리메컵은 월드컵을 만드는 데 산파역을 했던 프랑스인 줄리메 씨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받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1966년 월드컵 개최국인 잉글랜드는 대회 개막 3개월을 앞두고 이 컵을 전 대회 우승국인 브라질에서 잉글랜드로 옮겨와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그런데 줄리메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전시실에 곱게 모셔둔 줄리메컵이 없어진 것은 1966년 7월3일, 대회 개막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였다. 런던 경시청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 대회 조직위원회도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 대회 당일 런던으로 원정 가서 줄리메컵을 훔치겠다고 큰소리 치던 브라질 출신 소매치기 반더 산토스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브라질은 브라질대로 어수선했다.

    도난 소식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영국정부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급기야 경찰이 총동원되었다.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호소하고 현상금까지 내걸었으나 사라진 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회조직위원회는 우승컵 없이 대회를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 만들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전 영국인, 아니 전세계가 애타게 찾던 황금의 줄리메컵을 엉뚱하게도 개가 입에 물고 나타난 것이다. 런던 근교 노우두 산 속에 사는 코베트라는 농부의 개인 ‘피클스’가 뒷산에서 발견하고 물고 나온 것이다. 아마 어떤 도둑이 큰돈이 될 줄 알고 컵을 훔쳤다가 세상이 너무 시끄럽자 아무데나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 줄리메컵은 30만파운드(한화 약 27억원)의 보험에 들었다.

    그후 줄리메컵은 브라질이 가장 먼저 3번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영구 소유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브라질 축구협회의 실수로 또다시 도난을 당했다. 지금 브라질이 보유하고 있는 줄리메컵은 모조품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