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붉은악마’ 5년! 뺨맞고 욕먹으며 우뚝선 7만 대군

  • 전용준 < 스포츠투데이 기자 > toto@sportstoday.co.kr

    입력2004-11-02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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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여 명으로 시작한 아마추어 응원조직이 4억원의 종자돈과 회원수 6만7000명을 보유한 자생적인 거대조직으로 발전했다. 응원하다 뺨 맞고 장삿속에 휘둘리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않고 국가대표급 응원단으로 발전한 붉은악마. ‘해체를 목표’로 전국민이 붉은악마가 되는 날을 꿈구는 축구 마니아들의 세계.
    겨울이 녹아들면서 2002년 월드컵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TV로만 보아오던 세계 축구 스타들이 한국과 일본에 넘쳐나고 액션 드라마 뺨치는 짜릿한 명승부가 펼쳐질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PC통신 동호회로 출발


    킥오프 시간이 다가올수록 선수들의 가슴은 술렁이지만 이들보다 더욱더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 축구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 이젠 이들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마치 생활의 한 부분인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붉은악마의 광고를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으며, 축구경기 하면 동시에 붉은악마를 떠올리게 됐다.

    이처럼 생활화한 붉은악마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붉은악마의 초창기 모습은 통신동호회에서 출발한다. 1995년 하이텔 통신축구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축구를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응원단이 조직됐다. 이들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자극을 받아 한국축구의 전환적인 발전과 응원문화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프로축구를 단체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처음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국 프로축구의 응원 수준은 거의 원시적이었다. 각 구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치어리더를 동원, 막대기 풍선을 흔들며 야구식의 관중몰이 응원을 펼쳤다. 스피커에선 끊임없이 ‘남행열차’와 ‘건배’ 등 취기가 오르면 술상에서 금세 튀어나올 노래로 흥을 돋웠다.

    하이텔동호회 초기 모임부터 붉은악마의 태동을 목격했던 이은호(현 스포탈아시아 기자)씨는 “경기에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하지 않은 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산만한 응원이 계속되었다”며 “선수들이 다쳐 넘어져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스피커를 통해선 관중들의 호응이 없는 ‘남행열차’ 음악이 장내를 한바탕 소란하게 울리고 지나가는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고 밝혔다.

    동호회 회원들은 맨처음 동대문운동장을 거점으로 유럽식의 응원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다른 응원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뿔피리와 꽃가루를 준비하는 등 TV를 통해 본 여러가지 응원방식을 모방하는 것으로 첫 판을 장식했다. 당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주로 경기를 했던 부천축구팀이 집중적인 응원의 대상이 됐다.

    1995년말 창단된 수원팀으로 응원단이 분산되면서 동호회 응원단이 확산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당시 수원팀은 창단 이전에 이들 서포터스와 접촉, ‘치어리더를 고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좀더 발전된 형태의 응원단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호회 회원들은 수원팀의 진지한 태도에 만족을 표시하고 절반 정도가 수원의 서포터스로 옮겨갔고 이후 각 팀들의 서포터스가 조직,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96년과 1997년을 거치면서 점점 서포터스의 형태가 갖춰져 일정 정도의 세를 형성하게 됐다. 급기야 이들은 국민적인 관심이 가장 높은 국가대표급 단위에서도 조직적인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대표팀 경기에 처음으로 단체응원 성격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7년 6월 잠실에서 열린 코리아컵 유고전.

    ‘GREAT HANKOOK NATIONAL TEAM SUPPORTER’S CLUB(위대한 한국 대표팀 서포터스 클럽)’이란 어정쩡한 현수막을 내걸고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지만 이들에겐 조직화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조직적인 응원을 위해선 자신들을 하나로 묶을 구심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한달간 하이텔 통신상엔 국가대표팀 응원단의 공식 명칭을 짓기 위한 토론방이 만들어졌다. 당시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태극 워리어(WARRIOR)’ 등 기발한 이름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딱 꼬집어 이렇다할 이름을 찾지 못했다. 갈팡질팡하던 명칭 문제는 당시 수원 서포터스 회장이었던 이민제씨가 멕시코 4강의 업적을 기려 ‘붉은 악마(RED DEVIL)’로 하자는 제안을 끝으로 완전히 평정됐다.

    1997년 8월10일 잠실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전부터 트레이드 마크인 붉은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 시작한 이들은 8월30일 한중전에서 ‘붉은악마’란 공식 명칭을 현수막에 당당하게 달고 나와 드디어 완전히 수면 위로 부상했다.

    1대 회장은 붉은악마의 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신인철씨가 맡게 됐다. 이들의 첫 원정응원은 1997년 9월28일 도쿄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예선 일본전. 이민성의 극적인 역전골로 2-1 역전승을 거둬 ‘도쿄 대첩’이라 명명된 이 대회에서 붉은악마의 응원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도쿄 9·28 대첩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지만 붉은악마들에게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일본전을 계기로 붉은악마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당시엔 숨기고 싶은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다. 붉은악마 신인철 회장이 구타를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붉은악마와는 별도로 응원차 도쿄에 들른 한 연예인 응원단장과 합동응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중 문제가 생겼다.

    응원단을 이끌고 온 연예인 A씨는 응원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붉은악마의 튀는 행동에 대해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급기야 A씨와 함께 온 일행 중 한 명이 신인철 회장의 뺨을 때리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A씨는 옷 색상과 응원단장으로 누가 앞에 나가 진두지휘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붉은악마들은 한국 대표팀의 고유 색깔인 붉은 색깔을 고집한 반면 A씨측은 흰 면티를 입고 경기장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결국 합동응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완전히 ‘따로 국밥’이 되고 말았다.

    신인철 회장은 “붉은악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의 벤처투자 정신”이라며 “첫 투자가 당시 9월28일 한일전이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미약한 조직이었던 붉은악마는 자금력이 모자라 잘해야 한일전에 10명 안팎의 사람들만을 파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정회장이 전폭적으로 지원, 60명에 달하는 붉은악마들이 원정응원을 갈 수 있었다.

    붉은악마는 숫적으로는 열세에 있었지만 조직적이고 힘찬 응원으로 짜릿한 역전승과 함께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4년간 약 1500만원의 보조금을 축구협회로부터 협찬받아 해외원정과 지방 응원단 보조금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붉은악마는 월드컵을 맞아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 각 기업체마다 붉은악마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이미 SK텔레콤, 외환카드, 현대자동차 등으로부터 상당 수준의 협찬을 받고 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100여 명의 아마추어 응원조직이 현재 4억원이 넘는 종자돈을 바탕으로 회원수 6만7000명이 넘는 자생적인 거대조직으로 자랐으니 성공적인 벤처기업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인철 회장은 “어려웠을 때 요긴한 지원을 해줘 축구협회와의 관계는 상당히 좋다”며 “하지만 일방적 지원을 원한 것은 아니고 단체 할인권과 같은 수준의 협조를 받은 것이다. 공짜를 바란다면 사업의 연속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단체 응원석도 가장 관중이 들지 않아 축구협회가 항상 골머리를 앓는 골대 뒤를 자청,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수준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거리 두기’를 통해 붉은악마는 협회의 산하조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 직언을 할 수 있는 비판그룹으로 남고자 한다. 실제로 붉은악마들은 3월 중순 광주와 전주에서 열린 한일청소년 대회가 졸속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비판을 가했다.

    또한 재정적으로도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거꾸로 조금이나마 축구협회를 지원하겠다는 발상도 갖고 있어 완전히 상황이 역전된 느낌도 든다. 그들에게 이처럼 건강성을 안겨준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소중한 체험이 한몫을 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시련의 계절인 동시에 내적인 성숙을 기할 수 있는 좋은 문화적 체험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1997년 한반도를 강타한 IMF는 1998년 붉은 전사들을 응원하기 위해 프랑스 현지로 향한 붉은악마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환율이 엄청나게 급등, 1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파리까지 직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대신 4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24시간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비몽사몽간에 도착한 파리에서 얄팍한 붉은악마들의 주머니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즉석식품과 라면, 바게트를 박스에 넣고 다니며 거의 ‘홈리스’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들을 더욱 절망에 빠지게 한 것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다. 0-5로 대패한 스코어도 그렇지만 네덜란드인들의 응원문화에 자괴감을 갖게 된 것이다. 미화원 복장 같은 비닐옷을 입은 청년에서부터 오렌지색 윗도리를 입은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경기장에 온 모든 사람들이 이미 대표팀과 하나가 된 상태였다.

    유럽 원정이란 불리한 상황에서 분위기마저 압도당하니 선수와 붉은악마 모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은호씨는 “응원하는 사람의 머리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응원문화가 문제란 것을 절실히 느꼈다”며 “한국 축구문화의 깊이가 얼마나 미천한가를 뼈저리게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붉은악마들이 추구하는 것도 이런 응원문화의 깊이 있는 대중화다. 붉은악마가 추구하는 모토와 철학은 그들이 벌이고 있는 캠페인 ‘붉은악마가 되자(Be The Reds)’에서 잘 알 수 있다. 붉은 옷을 입고 같이 응원할 수 있다면 어떤 응원단도 배척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붉은악마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붉은악마의 해체다. 모든 관중들이 붉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와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붉은악마란 단체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 이들은 붉은악마 앞에 ‘한국 대표팀 공식 응원단’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을 싫어한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수식어라고 고쳐줄 것을 공공연히 요구한다.

    붉은악마를 포함한 어떤 응원단도 공식 응원단은 없다는 것이다. 단지 대표팀을 위한다면 같은 색깔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응원을 해야 한다는 당위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붉은악마는 프랑스 월드컵을 겪으면서 조직화되었지만 진통을 꽤 겪은 것이 사실이다. 1대 회장인 신인철씨(현재 4대 붉은악마 회장)가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후 사임, 전 부산 서포터스 회장 반우용씨가 임시 회장을 맡아 1999년 5월까지 과도적으로 붉은악마를 이끌었다.



    2대 회장인 김태호씨(현재 인터넷 한겨례 재직)가 당선된 것은 1999년 6월. 소수파인 김태호씨가 당선되면서 붉은악마의 세력은 조금씩 약화됐다. 졸속으로 시행된 가입비 징수와 무리한 회원증 발급, 금전사고(회계책임을 맡고 있던 총무가 운영자금과 관련자료를 갖고 증발) 등으로 조직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3대 회장인 한홍구씨(현재 의료공단 공무원)가 2001년 1월 붉은악마 지휘부를 인수받을 당시 2대 집행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1200만원의 빚과 10개월치가 밀린 월세 독촉장이었다. 이때부터 상업적인 변신이 이루어진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통해 붉은악마들은 실체는 있으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혼돈을 느꼈다. 광고 등 상업적인 도구로 마구 휘둘리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싹튼 것이다. 광고에 출연하고 스폰서를 받는 등 적극적인 권리 행사를 통해 외부 세력이 멋대로 붉은악마를 왜곡하고 변형하는 행동에 대해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1대 신인철 회장이 붉은악마의 순수성을 강조, 절대로 스폰서를 받지 않았던 것과 상당히 배치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붉은악마는 8강이나 16강에 대한 언급, 프랑스를 5-0으로 격파하겠다는 등의 허구적인 광고엔 절대 출연하지 않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문제는 활동비로 쓸 만큼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게 됐지만 잔뜩 일을 벌여놓은 상태에서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행정적인 누수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더욱이 2, 3대에 들어와선 2002년 월드컵 이후 비대해진 붉은악마 조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관한 청사진이나 장기 플랜이 없어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이런 위기의식은 급기야 1대 회장 신인철씨를 붉은악마 4대 회장으로 재영입하는 조치로 발전하게 된다. 2002년 1월부터 붉은악마를 다시 맡은 신인철씨는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고 붉은악마의 장기 플랜을 제시하기 위해 운동화끈을 다부지게 고쳐 맸다.

    신회장은 여러분야에서 중장기 플랜을 설계, 붉은악마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가장 임박한 현안은 2002년 월드컵을 대비해 3월말쯤 발매하는 붉은악마 앨범이다. 1억5000만원을 들여 제작하는 앨범엔 신해철 윤도현 노브레인 크라잉넛 등 저항의식을 가진 언더그라운드의 가수들이 다수 참여한다. 이들은 붉은악마의 테마곡과 함께 응원곡 ‘대한민국’ 등 응원가를 좀더 흥겹게 편집해 부르게 된다.

    이 음반은 비매품으로 만들 예정이지만 기업에겐 철저하게 프로모션 차원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월드컵을 겨냥해 많은 이벤트를 준비중이지만 아직은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이후를 겨냥해 붉은악마의 운영비도 차곡차곡 적립해나가고 있다. 4억원짜리 적금을 들어 벌써부터 2006년 독일 월드컵 해외원정 계획까지 그 틀을 짜놓고 있다.

    신인철 회장은 “현 대표팀 전력을 생각하면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확률은 50% 미만이라고 본다”며 “그렇다면 8년후에나 해외원정 응원을 갈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장기적인 플랜이 필요한 것이다”고 밝힌다.

    투명 경영을 위해 조만간 변호사를 선임하고 회계법인을 동원해 자체 세무조사도 해볼 작정이다. 하지만 붉은악마의 가장 발전된 모습은 역시 인터넷에 존재한다. PC 통신 동호회 태생답게 붉은악마는 인터넷을 통한 민주적인 토론과 참여로 발전을 꾀하고 있다.

    현재의 붉은악마 인터넷 사이트를 강력한 포털사이트로 구축, 좀더 많은 사람들이 좀더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토론하며 한국축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같은 사이트가 벤치마킹의 대상이며 수익모델도 상당 부분 개발해놓은 상태다. 그 한 가지 예로 4월부터 웹진을 발간, 흩어졌던 축구 커뮤니티를 다시 빠르게 복원할 작정이다. 이 작업은 포항공대 출신으로 현재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붉은악마 부회장 서동렬(33)씨가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맞아 다기한 산업사회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조직으로 허물벗기를 시도하고 있는 붉은악마. 그들은 단순히 운동장에 나가 소리를 지르는 광인도, 폭력을 일삼는 훌리건도 아니다. 그들은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축구와 거기에서 파생된 응원이란 문화를 잘 요리하고 소화해 타자들에게 보여주는 이 시대의 스타일리스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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