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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 특집 | 비바! 한국축구

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한국축구, 기적의 현장을 가다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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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사직동 주변 식당과 호프집에서는 중국 대 코스타리카전, 일본 대 벨기에전을 시청하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삼성전자 대리점 앞에는 대형 멀티비전 두 대가 일본전을 생중계하고 있었는데, 교복 차림의 청소년들이 성별로 나뉘어 응원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벨기에가 골을 터뜨릴 때마다 남학생들이 박수를 치는가 하면, 일본이 득점한 순간에는 여학생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2대2. 일본과 벨기에는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일찌감치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입장한 관중들은 일본이 비겼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다. 사우디와 중국이 패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이겨야만 아시아 축구의 체면이 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재미있는 건 어느 누구도 한국이 폴란드에 질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이 FIFA랭킹에서 한참 뒤지는 데도 한국 축구팬들은 낙승을 점치고 있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해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만4000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조그만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사방이 붉게 물든 가운데, ‘붉은 악마’가 주도하는 응원에 관중들이 뜨겁게 호응했다. 본부석 건너편 오른쪽에 자리잡은 폴란드 응원석에서는 이따금씩 국기만 휘날릴 뿐, 운동장 분위기에 짓눌린 모습이 역력했다.

드디어 선수단이 입장하고 양국 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붉은 악마’가 ‘Win 3:0’이라는 카드섹션을 연출했다. 곧이어 중계방송 카메라가 귀빈석을 비추자 양국 정상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빨간 모자에 응원용 머플러를 목에 걸고 박수를 친 반면, 알렉산더 크바시니에브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자국의 국가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응원을 시작한 붉은 악마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붉은 악마’가 기선 제압에 나섰다. 5만여 명이 동시에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연호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폴란드는 그라운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세차게 몰아붙였다. 폴란드의 원터치 롱패스에 한국 수비진이 잇따라 뚫렸다. 관중들은 폴란드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우’ 하고 함성을 질렀지만, 폴란드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20분이 흘러갔다.



다소 수세적이었던 경기의 흐름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반전됐다. 최후방에 처져 있던 홍명보가 센터 서클을 넘어 폴란드 문전으로 치고 들어가 회심의 중거리슛을 날린 것이다. 비록 볼은 폴란드 수비수의 몸을 맞고 골문 뒤편으로 날아갔지만, 이 한방을 기점으로 한국 선수들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홍명보가 나가면 분위기가 바뀐다’는 모 방송사 아나운서의 말처럼, 한국 선수들은 잠시 후 한반도 전역을 뒤흔드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전반 25분 이을용이 왼쪽에서 낮은 센터링을 올렸다. 폴란드 수비를 통과한 볼은 자로 잰 것처럼 황선홍의 발끝에 달라붙었다. 황선홍이 각도를 90도나 틀어 왼발로 강하게 발리슛을 때렸는데, 그것이 폴란드 두데크 골키퍼를 뚫었다. 골이었다.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황선홍은 포효하는 사자처럼 한국팀 벤치로 뛰어나가며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1대0. 황선홍 개인으로서는 A매치 50번째 골이었고, 한국이 월드컵에 도전한 이래 두번째로 뽑아낸 선취골이었다.

5만여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메인 카메라는 눈물을 글썽이는 붉은 악마와 두 주먹을 불끈 쥔 황선홍의 모습을 계속해서 클로즈업했다. 히딩크 감독이 특유의 주먹 지르기 포즈를 취하는 장면도 수차례 컬러 전광판을 장식했다. 또다시 그라운드를 뜨겁게 달구는 ‘대~한민국’…. 풀죽은 모습으로 킥오프 하는 폴란드 선수들…. 승부의 축은 일찌감치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무엇보다 황선홍이 득점한 점이 기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건국대 시절 연습경기에서 펄펄 날다가도 실전에서는 몸싸움이 약해 고전했다.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수돗가에서 물을 가득 퍼마시고 시합에 나섰다는 황선홍, 그렇게 들이킨 수돗물이 몸속에서 일으키는 리듬을 따라 슛을 때렸다는 황선홍…. 그렇게 출렁거리며 골을 터뜨려 별명도 ‘황새’였던가.

“폴란드가 얼었어”

전반전이 끝났다. 기자는 옆에 앉아 있는 명지대 김희태 감독에게 관전평을 부탁했다. 김감독은 한마디로 경기내용을 정리했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

“폴란드가 얼었어.”

김감독은 골을 넣은 황선홍보다 뒤에서 열심히 커버플레이를 한 박지성 김남일 유상철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박지성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삼 두 사람이 사제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성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갈 실력이 안됐잖아. 그런데 저 놈을 데리고 호주 전지훈련 가서 프로팀과 맞붙였거든. 그리고 나서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과 평가전을 벌이면서 눈에 띈 거야. 허감독이 지성이를 뽑으니까 얼마나 말들이 많았다고. 나하고 친해서 뽑았다나 어쨌다나. 내가 볼 때는 한국대표팀에서 지성이가 최고야.”

박지성은 명지대 시절부터 “발에 모터를 달고 다니는 선수”로 불렸다. 90분 내내 쉴새 없이 뛰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부지런한 움직임에 비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박지성에게 김감독은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너도 틈이 나면 드리블을 하고, 슛도 날려라. 그래야 스타가 될 수 있다” 김감독은 박지성이 잉글랜드전과 프랑스전에서 연속 골을 터뜨리자, 자신의 주문이 통한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후반전이 시작됐다. 경기의 주도권은 완전히 한국으로 넘어왔다. 황선홍 대신 들어온 안정환이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폴란드 선수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팀이 어떻게 유럽예선에서 노르웨이와 우크라이나를 물리쳤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후반 8분 페널티에어리어 중앙을 치고 들어가던 유상철의 오른발이 번쩍들리는가싶더니 폴란드 골문에 걸린 육각형 그물이 세차게 흔들렸다. 유상철은 ‘붉은 악마’가 위치한 스탠드를 향해 손바닥을 아래에서 위로 긁어 올리는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5만여 관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98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 이어 두 경기 연속골을 터뜨린 유상철을 연호했다.

94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한국축구의 기대주로 떠올랐고, 일본 J리그에서는 골게터로 활약한 유상철. 그도 건국대를 나왔다. 고등학교에서 잘한다는 선수는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에 몰리던 시절, 그는 고정운 황선홍과 더불어 건국대가 배출한 슈퍼스타다. 축구전문가들은 말한다. 유상철의 플레이는 거칠지만, 그의 ‘한방’은 가공할 만하다고. 유상철은 공격과 미드필드, 수비능력을 두루 갖춘 멀리플레이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의 남다른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후반 16분 유상철이 부상으로 빠지고 이천수가 들어왔다. 히딩크 감독은 이천수를 사이드로 돌리고 박지성을 중앙에 배치했다. 두 골 차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골을 터뜨리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안정환 박지성 차두리는 결정적인 찬스를 번갈아가며 무산시켰다. 한국축구의 월드컵 징크스 중 하나인 ‘두 골의 벽’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후반 43분. ‘붉은 악마’는 “이겼다”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패스는 번번이 끊겼고, 위치선정과 방향전환도 유럽예선 때와 달라 보였다. 2002년 3월28일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두 골을 실점하고 허둥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내 주심이 경기종료를 알렸다. 히딩크 감독은 코칭스태프와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월드컵 도전 48년만의 첫승을 자축했다. 한국 선수들이 골대 뒤편 광고판을 뛰어넘어 ‘붉은 악마’ 응원석으로 달려가자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또 한번 광란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한 히딩크,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어던진 차두리와 이천수, MVP로 선정돼 카메라에 둘러싸인 유상철…. 한국축구 100년 역사를 바꾼 축제는 그렇게 달아올랐다.

한국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퇴장하자 이번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운동장으로 내려왔다. 정회장은 붉은 악마 응원석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정회장은 응원단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운동장 트랙을 한바퀴 돌았다. ‘월드컵이 끝난 뒤 큰 꿈을 꾸겠다’며 대권도전의 뜻을 밝혀온 그였기에, 폴란드전 승리의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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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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