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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능동적 집단’으로 거듭나자

월드컵 열풍 그후

  • 이근후 < 신경정신과 전문의·이근후열린마음클리닉 원장 > ignoo@hanmail.net

이젠 ‘능동적 집단’으로 거듭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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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의 거리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월드컵 열기는 갈수록 용광로처럼 달아오른다. ‘대∼한민국!’ 함성은 높아만 간다. 이에 부응하듯, 한국축구대표팀도 ‘순항’중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봄직하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전례도 없는 이 희대의 열정과 일체감, 그 어떤 잣대로도 설명하기 난망한 집단몰입 현상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난 6월14일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16강전 진출이 확정됐다. 48년 만의 첫 경사였다. 2001년 12월1일 조추첨 직후만 해도 ‘죽음의 조’란 표현을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국팀의 객관적인 전력은 D조에서 최약체였다. 그런 팀이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친지 한 분이 전해준 얘기다. 자신의 친구가 한국팀 경기를 보았냐고 묻길래 보지 못했다고 답했단다. 축구가 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그날따라 공교롭게도 못볼 사정이 생겼단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대뜸 이런 반응을 보였단다.

“너, 알고보니 매국노구나.”

물론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개막 이전, 월드컵 열기를 높이기 위해 갖가지 궁여지책이 쏟아져나올 때였다. 필자도 홈스테이 조직을 위한 한 모임에서 사회자의 부탁으로 ‘한 말씀’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솔직히 16강에 진출하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우리가 목숨 걸고 성취해야만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16강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이를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한국대표팀에 성원을 보내고 외국 손님들을 반갑게 맞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전통문화와 생활습관을 올바로 알려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자….”

그런데 이런 필자의 말을 들은 다혈질의 사회자가 “틀렸다”는 지적을 하고 나왔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반드시 16강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보다 더 길게 발언한 그의 이야기인즉슨, 필자처럼 나약한 말을 해선 안된다는 거였다. 사실 필자는 축구 전적에만 집중되는 분위기를 좀 가볍게 해보려고 그런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국노’란 표현까진 안썼지만, 앉아 있기 무안할 정도로 필자를 나무랐다.

16강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필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바로 그 두가지 에피소드다.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이후 터져나온 월드컵 열기를 예견케 해준 작은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온종일 TV에서 흘러나오는 ‘대∼한민국’ 함성을 들으며 대(對) 포르투갈전에서 터진 절묘한 골을 보고 또 보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속이 시원하다는 건 재미있다는 경지, 기분좋다는 경지, 기쁘다는 경지를 넘어서는 그 무엇, 그러니까 카타르시스 메커니즘이다. 쌓인 속을 풀어주고 위무해주는 그 신명 앞에서 누구인들 기(氣)가 살지 않겠는가.

한국인의 기질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수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듯, 집단도 변수는 다르지만 집단 자체의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먼저 한가지 이해할 것은 성격(性格·personality)과 기질(氣質·temperament)은 용어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흔히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어서 일생동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곧잘 인용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질은 타고나지만 성격은 후천적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질은 개인 특유의 행동양식인 성격의 기초가 되는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성질이다. 반면 성격은 다분히 기질이 어떻게 학습되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후천적이다. 바꿀 수 없는 게 기질이라면 반대로 성격은 바꿀 수 있다.

고서들을 보면, 한국인을 지칭할 때 ‘가무를 좋아한다’는 말이 꼭 따라붙는다. 우리 역사서든 외국인이 쓴 책이든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는 사실은 기질과 성격 면에서 모두 가무를 즐기는 낙천적 민족임을 암시한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제쳐두고 하필 ‘가무를 숭상하는 종족’으로 묘사한 걸 보면 그 정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질적으론 다분히 가무를 즐기는 신명꾼들이지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 신명을 가로막는 사건들에 파묻혀 오래 살다보면, 성격 한 구석이 맺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문화를 한(恨)의 문화라고 하겠는가.

이를 더 실감케 하는 증거로 미국 정신의학자들이 활용하는 진단편람이 있다. 이 편람은 서양의학적 기준으론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질병이 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25개 정도를 드는데, 이중 한국이 2개를 차지한다. 하나는 화병(火病·Hwa-byung)이고 다른 하나는 신병(神病·Shin-byung)이다. 신병과 화병은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질병을 개념화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특징을 지닌다. 때문에 이 질병들을 문화증후군이란 새로운 용어로 진단편람에 넣고 있는 것이다.

화병.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앓아온 병이다. 우울증도 아니고 분노로 인한 자괴감도 아니며, 정신과 신체의 증상만으론 해석할 수 없는 병이다. 그래서 보통 이 세 가지 모두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설명한다. 그 원인은 한(恨)이다. 그 원인은 억압이다. 한이나 억압은 정서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고, 정서는 정이라고도 표현되는 감정적 양태가 주를 이룬다. 이런 기질적 정서는 맺히기도 잘하고 풀리기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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