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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한국축구, 그 황홀함과 씁쓸함에 관하여·하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암울했던 80년대의 단상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축구냐 민주화 운동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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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라도나가 혜성처럼 나타난 82스페인월드컵이 열리던 해, ‘사커키드’는 대학입시에 낙방했다.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느라 축구에 대한 열정조차 품지 못하던 시절, 필자는 분데스리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독문학과에 입학해, 민주화 운동과 축구 사이에서 가슴앓이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나의 미래를 걸자’며 ‘사커키드’가 선택한 곳은 대한축구협회였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대학가에 학원자율화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나던 시절, 고등학교에서는 빡빡머리를 스포츠형으로 바꿔도 좋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내가 다니던 학교는 머리 단속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사회적 혼란(?)을 틈타 머리를 길렀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날 고3 형들이 점심시간에 우리 교실로 몰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대걸레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고, 1학년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바짝 얼어 있었다. 잠시 후 그중 힘깨나 쓸 법한 한 명이 몽둥이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이 새끼들이 조금 풀어줬더니 꼴리는 대로 막나가? 민주화, 민주화 하니까 이 새끼들이 보이는 게 없나? 누구 맘대로 머리를 길러? 한놈씩 앞으로 나와!” 주먹이 날아올 때마다 신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유없이 맞아야 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한국의 마라도나’ 정해원

1980년 당시 축구팬들에게 최고의 관심거리는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과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스타 정해원이었다. 특히 정해원이 수비수 6명을 제치고 터뜨린 골은 오랫동안 화제가 됐다. 정해원은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는데, 연세대는 그해 5월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충의(육군)와 맞붙었다.

정해원은 전반 중반 하프라인 부근에서부터 단독 드리블, 50여m를 질주하며 충의팀 수비수 6명과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성공시켰다. 나는 TV로 이 장면을 보았는데 86멕시코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아르헨티나의 ‘축구신동’ 마라도나가 터뜨린 두번째 골에 비길 만하다고 감히 자부한다. 정해원은 그 해 가을 아시안컵 북한전에서도 혼자 두 골을 넣어 2대1 역전승의 주역이 됐다. 온 국민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1980년이었지만, 이 시절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도 있었으니, 정해원 이주일 전두환이 그 주인공이다.

나라 꼴이야 어찌됐든 한창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 축구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었다. 특히 우리반은 축구광들이 많아 수업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공을 차며 놀았다. 고1 때 놀지 않으면 놀 시간이 없다는 게 우리의 대의명분이었다. 최고의 조직력을 갖춘 우리반은 다른 반들을 모조리 격파, 초봄에 이미 1학년 리그를 평정했다. 가을부터는 2학년 형들과 시합을 벌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을 받아냈다.

내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우리반에는 오른쪽을 잘 파고드는 녀석과, 키가 큰 안경잡이 공격수가 있었다. 나는 주로 어시스트를 하고 골은 두 녀석이 넣었다. 내가 오른쪽 윙에게 이어주는 패스는 조광래가 차범근에게 넣어주는 패스에 견줄 만했으며, 내가 최전방으로 찔러주는 공간패스는 영락없이 윤정환의 발끝에서 최용수로 이어지는 콤비플레이를 연상케 했다(이렇게 뻥튀기를 해도 되나?). 그야말로 우리 세 사람은 ‘황금의 삼각편대’였다.

축구시합은 주로 사이다 아니면 라면내기였다. 신나게 공을 찬 뒤 전리품으로 사이다를 마시며 운동장 나무그늘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일이야말로 고등학교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옆 학교 여학생 중에 누가 제일 예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어느 선생은 왕년에 뒷골목 건달이었다는 둥, 어느 반 아무개 녀석이 사창가에 가봤다는 둥.

공부는 뒤로 밀어두고 날마다 수업 끝나면 공을 차고, 시간만 나면 영화 보러 다니고, 팝송 듣느라 밤을 새고, 집에서는 공부한다고 책 펴놓고는 축구잡지나 뒤적거리고, 이러다보니 성적이 좋을 리 만무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5등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추락하기 시작해 급기야 고2 가을에는 반에서 40등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때 아버지는 내 성적표를 쫙 찢어버리고는 “당장 학교 그만두고 공장에 나가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머니도 “공부 안 하려면 밥도 먹지 말라”고 꾸중하셨다.

1982년 고3이 되자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학이야 어떻게든 들어가겠지만, 나의 목표는 고려대가 아니던가. 어릴 적부터 얼룩무늬 호랑이 유니폼을 입고 뛰는 고려대 축구선수들에 반했던 나는 무조건 고려대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3학년 때는 책상 위에 ‘목표 고려대’라고 크게 써붙여 놓고 공부했다. 성적도 차츰 올랐다.

그러나 5월이 되면서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그해 6월부터 열린 82스페인월드컵이 내 마음을 살살 유혹했던 것이다. 한달 전부터 TV에선 전 경기 중계방송을 예고하고 있었다. 게다가 월드컵을 보름 앞두고 우리집은 흑백시대를 마감하고 컬러TV를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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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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