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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마니아들의 18홀 편력기

눈 덮인 그린에서 즐기는 겨울골프의 맛

  • 글: 최태지 정동극장장

눈 덮인 그린에서 즐기는 겨울골프의 맛

눈 덮인 그린에서 즐기는 겨울골프의 맛
초등학교 3학년 무렵, 그러니까 1960년대 말에 처음 골프클럽을 잡았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골프를 40년 가까이 치신 셈이네요. 그럼 지금은 얼마나 치세요?” 그러나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곳곳에 흩어진 공 주우러 다니는 재미에 쫓아다닌 어린 시절 이후 한동안 골프를 거의 잊고 살아온 까닭이다.

굳이 잘 치려고 애쓰거나 스코어를 올리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공기 좋고 물 좋은 필드에서 산보 삼아 치는 골프이다 보니 스코어도 90~100에서 요지부동이다. “어려서 발레연습에 스트레스를 하도 많이 받아 골프라도 쉽게 치려고 한다”는 것이 내가 둘러대는 핑계 아닌 핑계다.

일본에서 한창 발레에만 몰두하던 젊은 시절에는 보지도 못했던 골프채를 다시 잡은 것은 국립발레단 단장을 맡은 90년대 후반이다. 골프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수단이 된 까닭이었다. 최소한 남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아침마다 연습장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다시 시작했다고는 해도 공연일정이 바쁜 시즌에는 필드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재미를 붙인 것이 눈 덮인 겨울 골프장에서의 라운딩이다. 사람들이 밖에 나가기도 꺼리는 연말연시의 추위 속에서 필드의 찬공기를 마시면 바짝 정신이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1년 연말에 친구들과 나갔던 게임. 팽팽한 긴장 속에 ‘호두까기 인형’의 크리스마스 공연을 마친 뒤 무작정 그린에 나가고 싶었다. 눈이 꽤 많이 온 후여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골프장에 전화를 걸었더니 흔쾌히 나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우선 스키복을 차려 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목도리를 친친 감고 장갑도 찾아 끼고. 미쳤냐고 되묻는 친구들을 닦달해 골프장으로 불러냈다.

골프장에 나갔더니 트레일러로 겨우 사람이 걸어다닐 정도만 길을 열어주었다.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쭉 뻗은 그린 - 더 이상 그린이 아니라 ‘화이트’였지만 - 위에 쌓인 눈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마다 쌓인 눈이 그림처럼 흩날렸다.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예쁜 풍경이었다. ‘그래, 오길 잘했어.’

그러나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가 라운딩을 하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였다. 일부러 눈에 잘 띄라고 주황색 공을 가지고 나갔지만 눈 속에 푹 파묻히면 여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한겨울 추운 날씨다 보니 곱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헛스윙하기 일쑤였고 그나마 어떻게든 때린 공은 영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날아갔다.

라운딩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마음먹고 티샷을 쳐보기로 했다. 한번만 제대로 치면 몸도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눈 위에 꽂혀 있는 공을 노려보다가 힘껏 팔을 뒤로 돌려 스윙을 했다. 클럽이 공에 맞았다고 느끼는 순간 팔과 오른쪽 뒷목에 전기처럼 찌릿한 충격이 왔다. 뒤땅을 제대로 때린 것이었다.

충격이 어찌나 세던지 손목과 팔꿈치, 어깨와 목이 저릿저릿해 라운딩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만류하는 친구들을 잡아끌며 고생고생 끝에 마친 설원에서의 18홀! 갖은 악조건을 무릅쓰고 마지막 홀을 끝냈을 때는 어려운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박수갈채를 받을 때보다 더한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대가는 컸다. 부상으로 늘어난 오른쪽 무릎 인대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오른쪽 팔꿈치와 뒷목은 지금도 정상이 아니다. 평소에도 어딘지 동작이 부자연스럽다. 골프 샷을 할 때도 예전처럼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는다. “젊을 때 발레를 너무 열심히 한 후유증 아니냐”고 묻는 분들께는 속으로 죄책감이 들 정도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것은 그날의 라운딩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평생 단 한번 경험해볼까말까 한 멋진 광경에 흠뻑 취하는 기쁨을 즐긴 날이었다.

요즘도 일상의 권태에 빠지거나 피로에 지친 후배들에게 눈 덮인 겨울 골프장에서의 라운딩을 권한다. 그곳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는 까닭이다. 아, 물론 부상에 대한 철저한 대비는 필수겠지만.

신동아 2004년 10월 호

글: 최태지 정동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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