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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마니아들의 18홀 편력기

땅, 바람, 물의 이치 따르는 가장 동양적인 서양운동

  • 민용태 고려대 교수·시인

땅, 바람, 물의 이치 따르는 가장 동양적인 서양운동

땅, 바람, 물의 이치 따르는 가장 동양적인 서양운동
골프라는 운동을 처음 구경한 것은 30여 년 전 스페인에 있을 때다. 세계골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달려간 참이었다. 그 짧은 채로 그 작은 공을, 그토록 멀리 날려버리는 운동. 태어나 처음 본 골프 경기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스포츠였다.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학 강의에 고등학교 영어선생, 태권도 사범까지 겸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언감생심 골프채를 잡아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골프를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7년 전이다. 아내의 계속되는 권유에다 스페인에서의 상큼한 기억이 겹쳐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웬걸 겉보기와 달리 이 운동은 나의 높기만 한 자존심에 연일 상처를 안겨주는 가혹한 스포츠였다. 평생 자타가 공인하는 ‘스포츠맨’으로 살아오면서 힘에는 자신이 있었건만 골프공만 만나면 씻을 수 없는 치욕이 이어졌다.

우선 드라이브 거리가, 몸매가 가냘픈 친구들보다 30~40야드 적게 나왔다. 컴패니언들이 자기 공을 향해 앞서나가는 중간에 씨익 웃으며 “교수님 공은 여기 있네요” 하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말하는 사람이야 웃으라고 하는 농담이겠지만 듣는 사람은 순식간에 오장이 뒤집힌다. 한번은 골프장에 나갔더니 어떤 친구가 인사를 건넸다. 아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인사를 받았더니 대뜸 사무치는 농담이 날아온다.

“어떠세요, 요즘에는 교수님 드라이브가 제 피칭 거리만큼은 나가나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얼굴색에 변화가 없다면 그야말로 성인군자다.

점검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내게는 공을 칠 때 고개를 앞으로 숙이는 습관이 있다. 그런 까닭에 자꾸 공을 찍거나, 제대로 맞는다 해도 낮게 떠서 날아가는 것이다. 비거리가 잘 나올 턱이 없지 않은가.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못된 버릇이지만 고치는 게 쉽지 않다. 이제는 아예 ‘민용태 골프’의 한 특징이려니 생각하게 되어 그냥 찍어 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공이 항상 이렇듯 낮게 날아가니 위험한 일도 왕왕 발생한다. 어느 겨울의 일이다. 바로 앞에는 물이 있고 그 너머로 바위가 죽 서 있는 코스. 가볍게 넘기겠다는 생각으로 드라이브 샷을 날렸는데, 하늘로 날아올라야 할 공이 직사포 포탄처럼 바위를 향해 꽂히는 것이었다. 해저드 뒤의 단단한 바위에 정통으로 맞은 공은 딱 소리를 내며 티박스 쪽으로 곧장 되돌아왔다. 하마터면 함께 경기하던 동료들 모두 그 ‘총알’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낮게 날아가는 내 공이 고맙게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공이 해저드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내 공은 다른 사람의 공과는 달리 물살을 가르며 가볍게 뛰쳐나오게 마련이니까….

세상에는 온갖 운동경기가 있지만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의 상당 부분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나는 그 많은 서양 스포츠 중에서 골프가 가장 동양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땅과 바람과 물을 보고 그 순리에 따라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관(地官)이 자연의 흐름과 변화를 읽고 이를 이용하는 것처럼, 흡사 풍류객이 물 따라 바람 따라 방방곡곡을 떠도는 것처럼, 골프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자연을 섬기고 따르는 미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고 강파른 도시에서 직장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도대체 봄이 오는지 여름이 가는지 느끼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갈 때에야 비로소 계절의 변화와 만물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필드에 서면 파릇파릇 잔디가 솟아오름을 읽고 먼 그린을 향하여 그리움 담긴 사연을 공에 실어 날린다. 비록 모든 그리움이 연애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듯 모든 공이 그린에 도착하지는 않지만….

이렇듯 마음을 비우고 라운드에 나서니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모험가 기질이 꾸물꾸물 피어오르는 듯한 유쾌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한때는 ‘트러블 샷의 명수’라고 자화자찬한 적도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공일수록 일단 저질러보는 샷이 더 성공률이 높은 것이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이 그린을 넘어 수풀까지 지나치는 ‘장외홈런’을 쳤다. 오비가 아니니 거기서 다시 쳐도 좋다는 것이 캐디의 ‘유권해석’. 나는 그린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 수풀 너머 산중에서(?) 조용히 골프채를 빼들고 하늘 높이 그리움의 샷을 날렸다. 정말 마음속에는 일말의 기대나 욕심도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돌아나와 보니 내 공은 얌전하게 그린의 한가운데에 적중해 있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이후 오랫동안 그날의 그 경험,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다시 시도해보니 100번 치면 99개가 실패였다. 골프의 무위자연을 믿는 사람, 그렇듯 마음을 비운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경험이었으리라. 물론 마음을 비운 까닭에 골프 핸디는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전혀 줄지 않지만 말이다. 하하….

신동아 2005년 6월 호

민용태 고려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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