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호

젊은 날의 골프는 골프라 부르지 말라

  • 남궁원 영화배우

    입력2006-03-06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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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날의 골프는 골프라 부르지 말라
    1960년대 후반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정일권 총리가 불러 가보았더니 선물을 하나 주었다. 혼마 골프채였다. 이제 겨우 30대의 젊은 나이, 언감생심 골프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제 골프채는 꽤나 호사스러운 물건이었다. 어쩌랴, ‘어른’이 주시는 물건, 고맙게 받아들고 왔더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절친하게 지내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꼬드겨 같이 연습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구력이 40년 가깝다.

    당시는 내가 아무리 나름대로 이름있는 배우였다지만 골프를 쉽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함께 배우던 곽규석이 나보다 실력이 나아 약이 오른 것도 한 이유였을까. 어느 날 문득 골프라는 운동이 시간낭비로 여겨졌다. 젊은 몸에는 너무 점잖은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골프를 접었고, ‘어른’께서 주신 골프채는 다락 한구석에 처박혔다.

    다시 골프장에 나간 것은 그로부터 족히 2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겠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골프 이야기만 하는 통에 ‘슬슬 다시 시작해볼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결국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골프가방의 먼지를 털어내 들고 나섰다.

    막상 필드에 나갔더니 캐디들이 허리를 젖혀가며 웃는다. 골프채 곳곳에 시뻘겋게 슨 녹 때문이었다. 관리도 안 한 채 20년을 보냈으니 제아무리 혼마라도 별수 있겠는가. “이만하면 골동품 반열에 드는 물건”이라며 박물관에 보내자는 친구도 있었다. 20년 세월에 녹슬기는 골프 실력도 마찬가지. “영화배우가 어쩜 그리 골프를 못 치느냐”며 캐디들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뒤로 이제까지 꾸준히 골프를 즐겼다. 나이가 드니 이보다 좋은 운동이 없다. 골프 친구가 여럿 있지만 누구보다 자주 함께하는 동반자는 아내다. 산 좋고 공기 좋은 골프장에 나가 따뜻한 볕을 받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봄날의 오후는 감동 그 자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 이렇게 큰 것을…’ 하고 연신 되뇌게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일본의 소도시마다. 앞으로는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고 뒤로는 숲이 울창한 골프장은 그야말로 천혜의 코스였다. 숲에서 뛰어나오는 원숭이와 너구리에게 바나나를 먹이는 것도 흔히 느낄 수 없는 재미였다. 서울 근교의 골프장들이 깔끔하고 깨끗하다고는 해도, 그렇듯 자연조건 자체가 다른 코스에 견주기는 어려운 법이다. 주상복합 아파트와 전원주택의 차이쯤 될까.

    그 아름다운 소도시마의 골프장에 처음 간 것이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다. 아무리 교회가 드문 일본이라고는 해도, 장로 직분을 맡은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골프장에 나섰으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간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찌어찌 막바지까지 따라가기는 했지만 내내 공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아내가 속한 여성팀이 앞 홀에서 경기를 정리할 무렵, 마침 내 차례가 돌아와 힘껏 드라이버를 휘둘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쭉쭉 뻗어 나간 공이 아스팔트 도로에 맞고 튀어 앞 팀의 누군가를 딱 때린 것이었다. 아차 싶어 달려가보니 다름아닌 내 아내였다. 오른손 등이 새빨갛게 부어오르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얼른 라운지로 돌아와 얼음찜질을 한다, 열찜질을 한다, 수선을 피웠지만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한가지였다. ‘아하, 주일을 지키지 않으니 이렇게 벌을 받는구나. 그것도 하필 남의 나라에서.’ 그 뒤론 일요일에 교회를 빼먹고 필드에 나간 적이 절대 없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감사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을 즐기려면 먼저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스코어가 많이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래 봐야 여전히 90대에 불과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골프가 왜 재미없었는지도 알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욕심이 많고, 많은 이가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했다. 게임에 나서면 항상 사람들이 ‘영화배우가 왔다’며 따라다녔고, 그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동안 경기는 언제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러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골프는 감사하는 마음에 어울리는 운동이다.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는 상대를 공격해야 점수를 얻는 방식이지만, 골프는 예외다. 안달복달 내기까지 걸어가며 승부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과의 경기다. 누가 자기를 더 잘 다스리는가에 승패가 갈린다.

    따사로운 오후, 한가한 마음으로 숲 속을 걷는 그 시간에 감사하며 필드를 나서는 것이야말로 골프에 가장 어울리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감히 말하노니, 젊은 시절의 골프를 골프라 부르지 말라. 나이가 들어 인생을 천천히 즐길 수 있을 때 치는 골프가 진짜 골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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