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허진 전 대표팀 언론담당관이 지켜본 2006 월드컵

프랑크푸르트의 영광 라이프치히의 환희 하노버의 울분

  • 허 진 駐독일대사관 참사관, 2002 월드컵 대표팀 언론담당관

    입력2006-08-08 17: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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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에 관심 깊은 독자라면 ‘허진’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표팀의 언론담당관으로 활약했던 바로 그 외교관이다. 독일월드컵을 앞둔 지난해말 주(駐)독일대사관 사관으로 발령 받아 현지로 날아간 그는 이번 대회에서도 지원업무를 맡아 전 기간을 함께했다. 두 차례의 월드컵, 히딩크호와 아드보카트호, 그리고 그들의 코칭스태프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본 그에게 ‘현장에서 지켜본 월드컵 결산’을 청했다.
    허진 전 대표팀 언론담당관이 지켜본 2006 월드컵

    6월19일 새벽(한국시각) 라이프치히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G조 두 번째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은 박지성(왼쪽)이 환호하고 있다.

    2006 월드컵의 주인은 가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16강 탈락의 아픔이 씻기지 않고 남아 있다. 상대의 압도적인 실력 우위로 조 예선 통과가 좌절됐다면 깨끗이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추격의지를 박탈당한 경기가 마지막이었기에 그 실망감은 특별한 것이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대회에서 최초의 원정대회 승리(그것도 역전승으로!), 원정대회 최대 승점(4점) 확보 등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으로는 2002년에 비해 축구 외적인 면에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으며, 많은 전문가가 ‘우리는 아직 축구를 즐길 줄 모른다’는 자아비판을 내놓았을 정도로 월드컵에 대한 언론의 지나친 상징조작을 문제 삼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광화문 등지에서 벌어진 엄청난 규모의 장외응원에 대해서도 순수성과 상업성을 말하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필자는 월드컵을 둘러싼 온갖 논쟁과 화제를 일관된 논리로 비판, 옹호하거나 체계적으로 정리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다. 신문선이나 이용수 같은 축구인 출신의 해설가도 아니고, 장원재 같은 축구인류학자(?)는 더더욱 아니다. 더욱이 축구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축구와 관련된 웬만한 일탈은 다 용서해주고 싶은 심정인데다, 과거 대표팀 선수들과 1년 반 동안 같이 생활한 처지라 잘하건 못하건 그들을 나무라거나 문제점을 파헤치고 싶지가 않다.

    대표팀을 ‘우리 식구’라고 굳게 믿는 필자로부터 한국 축구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객관적 분석을 기대하는 독자가 혹시라도 있다면, 별로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므로 빨리 다른 페이지를 펼 것을 권한다. 다만 말해 두고 싶은 것은, 나는 월드컵 축구에서 느끼는 이 패배의 처절함과 좌절의 안타까움마저 깊이 사랑하는 맹목적인 축구 팬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독자 또한 그러하다면, 이 글은 충분히 읽을 만한 ‘공감 어린 경험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을 다시 만나다



    독일에서 대표팀을 처음 만난 것은 우연히도 길거리에서, 그것도 운전하던 중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숙소로 향하던 대표팀 버스 바로 앞에 우연히 끼어든 나는, 어두운 차창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홍명보와 고트비 코치를 보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며 고함을 쳤다. 하도 난리를 치니 버스에 타고 있던 선수들이 모두 일어나 도대체 누가 저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나를 잘 모르는 김두현과 박주영은 ‘웬 이상한 놈이 괴성을 지르는가’ 살펴보려 했고, 이운재와 이영표는 ‘여기서 만날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맨 뒤에 타고 있던 안정환과 최진철은 그제서야 나인 줄 알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번 대회 기간 나는 베를린대사관에서 출장 나와 한국팀 경기가 열리는 도시로 자리를 바꿔가며 대표팀이나 축구협회, 기타 공·사적인 방문자와 응원단 전체에 대한 관리와 지원 업무를 맡았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선수들을 만나 사적인 추억을 나눌 만한 여유는 없었다. 여유가 있다 해도 컨디션 조절에 민감한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언론담당관으로 재직할 때 온갖 매체의 선수 인터뷰 요청을 칼같이 가로막은 장본인인 내가 사적인 관심을 채우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과거 히딩크의 통역을 담당한 축구협회 전한진 팀장이나 입장권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신만길 과장과 업무상 협의할 일이 있어 숙소를 찾았다. 마침 진행되던 이탈리아와 가나의 예선 경기 중계방송을 잠시 보고 떠날 요량으로 로비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웬 사내가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고트비 코치가 아닌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얼싸안았다.

    잠시 후 로비로 내려온 핌 베어벡 코치(현 감독)와 홍명보 코치도 ‘재회 수다’ 자리에 합류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의 동정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그만이었고, 오로지 이 중차대한 시기에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웃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분할 만한 것이었다. “여기에 히딩크 감독만 있으면 다 모이는 건데” 하고 누군가가 2002년을 회상했다.

    한바탕 수다를 끝내고 숙소를 떠나려는 순간 2층 발코니에 서 있던 이천수와 설기현을 보았다. 나는 “내일이 경기하는 날인데 빨리 안 자고 뭐 하냐”며 마치 2002년 그때처럼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로비로 내려오려는 그들을 말리며 서둘러 숙소를 빠져 나왔다. 마음은 이미 2층으로 뛰어올라가 회포를 풀고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내일이 토고전 아닌가.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토고전이 시작될 때 경기장 분위기는 마치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프랑크푸르트에 옮겨놓은 듯했다. 그러나 경기 초반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플레이하던 대표팀은 뜻밖에 선제골을 먹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중을 기하는 것도 좋지만 비교적 약한 상대는 사전에 거세게 제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기(氣) 싸움에서 나약한 자세를 취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후반 적절한 시기에 동점골과 역전골이 터져 경기 흐름을 반전시켰지만, 후반에 경기 종료 시간을 15분 이상 남겨놓은 상태에서 볼을 돌리며 지연시킨 행위는 두고두고 비난의 도마에 오름직했다. 어렵게 얻은 승점 3점을 고이 간수하자는 생각에, 무리한 전진배치로 토고의 역습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지극히 수세적인 전략이라고 본다. 결과론이지만 그때 한 골이라도 더 격차를 벌려놓았더라면 스위스전을 좀더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리라.

    토고는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일정 수준에 올라 있지만 공수와 미드필드 간격을 단 한 번도 맞추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팀이었다. 경기 종반, 토고가 결국 3패할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혹시 우리가 2승을 하고도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프랑스전의 분위기는 묘했다. 관중 모두가 그간의 언론 평가를 액면 그대로 믿는 탓인지 ‘레 블뢰(Les Bleus·푸른색) 군단’을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노쇠한 팀으로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휘슬이 울리자 프랑스팀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2002년 치욕의 예선 탈락, 졸전 끝에 2006년 대회 지역예선을 겨우 통과한 그 너덜너덜한 프랑스가 아니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신검합일(身劍合一)’된 11명의 무사가 우리 진영을 마음대로 유린하는가 싶더니, 세계 최고 포워드인 앙리에게 완벽한 골을 허용하는 비참한 서막을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 순간 프랑스는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 그 한 골로 승부가 날 것이라고 착각한 점이다. 어차피 ‘검기(劍氣)’ 싸움에서 진 한국은 비에라와 마클렐레, 튀랑과 갈라스가 버티고 있는 정면을 돌파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후반전부터는 양 옆구리를 쑤시기 시작했다.

    우리가 보기엔 노도와 같은 공격이었으나 프랑스엔 측면을 간질이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 막바지에 여러 차례의 크로스를 어렵게 받아내던 조재진이 정확히 박지성 앞에 볼을 떨어뜨려주었고, 그 공은 별 희한한 곡선을 그리면서 골망으로 빨려 들어갔다. 셰브첸코나 크레스포의 슛처럼 호화찬란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골은 골이었다. 승점 4점. 원정대회 최고 승점이자 지난 대회 미국전 직후와 같은 기록이었다. 아아 대한민국.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나.

    라이프치히 경기장의 다수 관중은 프랑스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90분 내내 미친 듯이 울부짖는 붉은악마의 응원에 주눅들어 응원다운 응원 한번 해보지 못했다. 나는 흐뭇했다.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리 선수들이 기특했고, 경기 내내 대표팀을 응원하는 우리 관중의 끈기에 혀를 내둘렀다. 경기가 끝난 후 한 프랑스 관중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한국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불굴의 정신력과 대표팀에 대한 한없는 애정, 이런 건 프랑스에 없다는 의미였다. 자고로 외교관은 이런 맛에 산다. 오오 대한민국.

    드디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스위스전. 나는 스위스가 토고전에서 보여준 아마추어적인 실수, 엉성한 공격력, 최근 메이저 대회 참가 경험 부족 등으로 미뤄보아 우리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계산했다. 승점차, FIFA 회장의 조국팀에 대한 심판의 봐주기 판정, 응원단 규모의 차이 같은 객관적 조건은 분명 불리했지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간 국내외 언론이 최근의 경기 결과만을 근거로 프랑스를 얕잡아보고 스위스를 과대포장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우려는 만일 이번에도 우리가 선제골을 먹는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다던가. 선제골은 센데로스의 헤딩에서 나왔다. 이후 벌어진 심판의 편파 판정, 오프사이드 불인정 해프닝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경기가 종료되기 직전, 나는 문득 ‘신이 2002년에 우리에게 너무나 감격적인 승리를 선사했기에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번에는 이런 결과를 안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하노버 경기장을 가득 메운 스위스 관중의 환호성, 그 위를 교차하는 원통함이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리라.

    게다가 문득 그라운드를 바라보니 이천수가 통곡하고 있지 않은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천수야!” 하고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그에게 들릴 리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 옛날 가장 버릇없고 천방지축이던 천수가 가장 훌륭한 매너를 보이며 일생일대의 신들린 플레이를 보여준 경기였으니까…. 그를 잘 아는 나로서는 이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플레이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어버리는 천수를 보니, 내 눈에서도 눈물이 솟아 구겨진 태극기로 닦을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을 빠져 나오려는데, 홍명보 코치의 부인이 쓰레기통 옆에 서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지고 있는 경기를 볼 수가 없어 마지막 20분 정도를 남겨두고는 나와 있었던 모양이다. 홍 코치의 아들은 벽 쪽으로 돌아서서 아무 말이 없었다. 속으로 흐느끼고 있는 모자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가갔다. 홍명보 코치는 자기 일을 훌륭히 완수했다고, 반드시 남아프리카에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4년 후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다짐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그것이 이번 월드컵 대표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 나의 마지막 날이었다.

    경기 초반을 지배하지 못한 것

    경기가 끝나고 나니 한 가지 화두만이 남았다. 왜 우리는 잘 싸우고도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일까. 언론에서는 다양한 분석과 대안을 쏟아냈지만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다. 과연 어떻게 하면 우리 팀의 결함을 보완해 더 나은 팀으로 만들 수 있을지, 모든 축구 팬이 그러했듯 내 머릿속에서도 고민이 이어졌다.

    세 경기에서 한국팀은 선제골을 먹고 난 뒤 후반에야 이를 만회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혹자는 ‘선수비 후공격’이라는 상투적인 전략이었을 거라는 나이브한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무조건 실력이 달린다는 막무가내식 폄하도 나온다.

    필자는 우리 대표팀이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난 뒤 무려 30~35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그 시점에 가서야 겨우 패스가 이뤄지고 약속된 플레이가 살아났다. 한데 상대가 우리 골문을 뚫은 것은 모두 경기 시작 후 10~20분 사이다. 우리가 전열을 갖추기 전에 여지없이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었고, 정확히 골을 따냈다는 이야기다. 조 예선 탈락의 최대 문제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렇다면 경기 초반에 왜 그토록 신중한 탐색전으로 일관했을까. 이는 전술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심리적 압박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회 직전 서구 언론들은 ‘한국이 적지(敵地)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올릴지에 따라 4년 전 4강 진출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로 우리를 피곤하게 했다. 유럽의 축구강호들을 차례로 제치고 독일마저 벼랑 끝으로 몰고 갔던 황색돌풍을 인정하기 싫다는 속내가 반영된 것일 게다. 이번에 한국의 16강 진출이 좌절되어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2002년의 신화(바꿔 말하면 유럽의 대참패)를 희석해 주기를 바라는 잠재의식도 스며 있을 것이다.

    우리 또한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압박은 토고전에서부터 눈에 보였다. 상대의 허점을 찾아 스스로 돌파구를 열기보다는, 한 명 한 명의 선수가 자신의 실수로 팀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플레이로 일관했다. 덕분에 상대팀 선수들은 ‘그 정도냐, 그럼 우리가 먼저 나서마’ 하는 듯 우리 진영에 쇄도하기 시작했고, 계속 불안정하던 수비라인을 무너뜨리면서 어김없이 골을 기록했다.

    다음으로는 홍명보 세대 이후 수비라인을 책임질 인재 확보에 실패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히딩크 감독 시대에도 최대 고민거리였다. 때문에 히딩크는 2002년 봄 결국 홍명보를 다시 불렀고, 아드보카트는 히딩크가 발굴한 최진철을 다시 기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축구는 공격을 통해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지만 확고한 수비라인이 없으면 미드필더들을 전진배치할 수 없는 건축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2006년 한국 대표팀은 2002년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상대 진영에서 수적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니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횟수도 지극히 적었다. 결과적으로는 미드필드 장악에 실패하면서 조재진에게 한 번에 내지르는, 롱패스에 의존하는 행태를 반복해야 했다.

    후반에 반격을 개시하다 보니 시간이 모자랐다. 초조함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세밀한 미드필드 플레이를 전개할 수도 없었다. 즉 히딩크가 교시(?)했던 ‘압박과 지배’의 원칙이 실종되면서 득점을 요행에 맡기는 과거의 상황으로 회귀하는 듯한 느낌마저 줬다. 물론 경기 후반부(토고전 제외)에는 2002년 당시의 플레이가 되살아나는 ‘파이팅 스피릿’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 45분만으로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역전시키기에는 공수의 안정성이 여전히 문제였다.

    가운데에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 명 포진하는 방식은 취약한 최종 수비라인을 보강하기 위한 조직적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격수들과 미드필더들을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는 만들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견고한 중앙수비를 자랑하는 프랑스나 스위스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 소모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양 윙포워드를 통한 측면돌파는 당연한 계산이다. 하지만 상대팀 골키퍼와 최종 수비라인 사이를 파고드는 전술적 템포가 부족했고, 측면에서 올리는 크로스의 질은 본선 참가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에 불과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기본전술이나 상황변화에 따른 임기응변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선수들의 역량이 부족했다고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축구는 결국 필드에서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아드보카트의 용병술

    감독마다 선수에 대해 호불호의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1974년 서독의 헬무트 셴 감독은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 귄터 네처를 벤치에 앉혔고, 베베토를 숭배하는 자갈로는 34세의 베베토를 199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기용했으며, 히딩크는 윤정환에게 단 1분의 시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드보카트에게도 그러한 경향이 존재했음을 숨길 수는 없다. 이는 그가 어떤 선수를 러시아로 데려가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과 9개월의 시간, 그것도 기존 리그경기를 다 치르고 난 나머지 시간에 선수들을 소집할 수밖에 없었던 아드보카트는 자기 마음에 맞는 선수 선발에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선수 선발에서는 많은 부분을 베어벡과 홍명보 코치가 거들었을 듯하다. 적어도 초기단계에서는 그러했다.

    이렇게 볼 때 아드보카트는 비교적 충분한 시간을 갖고 새로운 인물들을 키워낸 히딩크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아드보카트가 온 이후 발탁된 인물은 조원희와 이호 정도다. 정경호와 백지훈은 누구라도 대표팀에 넣고 싶었을 테니 논외로 하고, 아드보카트가 한 번도 진지하게 테스트한 적 없는 부상당한 송종국을 엔트리에 넣은 것은 베어벡의 권유에 따른 것일 게다. 토고전에서 송종국이 선발로 나온 것 또한 월드컵 본선을 뛰어본 선수에게 수비를 맡기겠다는 ‘안전제일주의’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송종국이 후반에 펼친 굳건한 플레이가 역전승의 발판이 됐으니 여하튼 합리화는 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아드보카트는 과거경력 위주로 선수들을 뽑지 않을 수 없었고, 히딩크 시절 “4년 후 빛을 볼 것”이라고 했던 차두리, 최태욱, 정조국, 최성국, 조병국은 대표팀에 탑승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4년간의 세대교체 시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히딩크는 조병국이 홍명보 세대를 대체해줄 것으로 내심 기대한 바 있다. 그 기대는 그의 잇따른 자책골 소동으로 조기에 사그러들었다. 사실상 대표팀 수비진은 4년 동안 표류한 셈이었다.

    이러한 불안을 안고 출발한 대표팀은, 과거처럼 중원을 장악하기 위한 전술공간의 수적 우위를 점유하지 못했으며, 최종 공격수와 최종 수비라인 사이의 거리가 자꾸만 멀어지는 경향을 노출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결국 예전의 김재한을 연상케 하는 조재진의 포스트 플레이였다. 물론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 축구의 관건은 누가 미드필드를 지배하느냐에 달려 있다. 2006년 한국의 대표팀은 이 요구를 충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점점 ‘재미없어지는’ 축구

    흔히 축구가 날이 갈수록 변모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전문가들, 예컨대 왕년의 대표선수나 감독들에게 물어보면 과거보다 선수들 움직임이 빨라지고 신체접촉이 과해졌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곤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스피드’다. 워낙 빠른 템포를 강조하다 보니 과격한 보디체크나 태클이 난무하는 것이지, 빠른 스피드와 신체접촉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도 분명 템포는 축구의 주요 요소였다. 그러나 그때는 정확한 패스가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현재는 반발력이 높은 공의 성질이나 날로 깊어지는 수비전술의 공고화와 다양화로 인해 스피드 없이는 어떠한 전술이나 테크닉도 통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번 대회에 등장한 공인구(公認球)는 유로2000이나 2002월드컵에 비해 더 정확한 킥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것이라 이번 대회에서는 예전에 비해 똑바른(회전이 없는) 중거리 슛에 의한 골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골의 절대량은 극히 적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게임당 3골 미만이었으며, 한 경기에 2골만 넣으면 승리, 3골이면 대파(大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였다.

    특히 16강 이후부터 갈수록 골이 안 나오거나 경기 운영 자체가 극단의 압박수비에 의존하는 경우가 턱없이 많아졌다. 가장 우아하다고 생각했던 브라질이 비틀거리고 가장 빠른 템포의 기술축구를 한 아르헨티나가 8강전에서 좌절하고 나자, 이번 대회의 플레이 스타일은 1990년을 연상케 하는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벌칙구역을 가운데로 돌파하는 세련된 테크닉은 없으면서도 그저 사이드로 치고 빠지는 스피디한 윙플레이만 눈에 두드러진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이래저래 골이 잘 터지지 않는다면 일반 팬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전반 10분 내, 그것도 5~6분에 첫 골이 나는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도 이번 대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선제골을 넣은 쪽이 대부분 승리를 쟁취했다. 역전승은 한국 대 토고전을 포함해 셀 수 있을 정도다. 이는 축구가 날이 갈수록 ‘실수에 좌우되는 경기’로 변질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경기 전체를 지배하거나 볼 점유율이 월등히 높은데도 어이없는 실수나 한순간의 긴장이완으로 골을 내주어 패배하는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한국과의 대결에서 비긴 것을 억울해할 것이고, 한국은 후반전에서 완벽하게 압도하고도 추가골을 내준 스위스전을 억울해한다. 선제골을 넣는 팀은 경기를 주도적으로 풀어가는 이니셔티브를 쥐게 되고, 동점골이 빠른 시간 내에 터지지 않으면 결국 상대의 추가골에 의해 승부가 굳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패턴이 된 셈이다. 스위스전에서 벌어진 오프사이드 논란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경기의 전체 흐름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남미와 기타 비유럽 국가가 모두 8강전에서 나가떨어지고 유럽 국가들만이 4강 잔치에 참여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월드컵에서 4강이 유럽팀으로만 구성된 것은 1982년 스페인월드컵 이래 처음이다. 2002년 순수 유럽국가로는 겨우 독일만이 4강에 참여한 데 비하면 이번 월드컵은 유럽의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하는 동시에 지난 4년 동안 흐트러져 있던 세계 축구의 현상유지(status quo)를 재확보했다는 데 그들만의 의미가 있다.

    2002년 한국과 터키의 반란, 유로2004에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의 예선탈락,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4강 진입 실패에 이은 그리스의 최초 우승 등, 지난 월드컵 이후 유럽과 세계 축구는 반항아들의 도전으로 기득권이 흔들리는 과도기를 경험했다. 하지만 8년 만에 유럽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서 전통의 강호들은 유럽의 텃세를 유지했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퇴출시켰다. 2002년 사상 최대의 수모를 당한 유럽은 챔피언스리그의 경기 횟수를 줄여가면서까지 유럽 출신 선수들에게 피로회복과 적응기간을 배려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고, 이번 대회는 그러한 유럽의 의도가 철저히 반영된 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나타난 세계 축구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는 글로벌화하면서 더 많은 팬을 확보해가고 있지만, 분명 점점 재미없어지고 있다. 축구전술의 과학화가 극단의 경지에 오르고 완벽해질수록, 선수의 개인 기량보다 감독의 키보드 조정과 팀의 기계구조적 역할이 강조될수록, 축구라는 스포츠의 인간적인 묘미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세계는 펠레를 능가하는 선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타난 추세대로라면 앞으로도 영원히 펠레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절충주의적 선택’

    그렇다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 대표팀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2010년 대회는 과연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조 예선이 끝나자마자 아드보카트는 떠나고 베어벡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베어벡이 2010년까지 감독직을 유지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베어벡 체제는 결국 히딩크-아드보카트 시대 후기를 조절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트비와 홍명보는 이미 히딩크 시절부터 함께해온 스태프이니, 우리는 아직도 히딩크라는 과외선생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감독을 바꾸어본들 히딩크만한 사람은 없을 테고, 그렇다면 대안 없는 단절보다는 2002년에 배웠던 지침과 교시를 잘 계승하자는 ‘절충주의적 선택’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물론 다음 월드컵을 준비하는 궁극의 해결책은 국내 리그와 아시아 리그의 수준을 끌어올려 클럽축구와 국가 대항 축구를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사이 한두 번의 월드컵을 치러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과제다. 유소년, 청소년 축구 육성이니 제도적 교육시스템에 대한 투자니 하는 장기목표도 마찬가지다. 대표팀의 정예화는 이와는 별도로 단기간에 달성해야 할 지상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유럽의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는 선수층이 두꺼워져야 할 텐데, 이는 해당 시기 월드컵에서의 성적이나 평가에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16강에서 탈락한 우리로서는 쉽게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이다. 기존의 유럽 메이저 리그 진출 선수들 이외에도 네덜란드나 벨기에, 포르투갈 정도의 중급 리그에 진출하는 선수가 많아지기를 기대해볼 수밖에 없다. 대표팀 멤버 중 5~6명이 메이저 리그에서 자리잡은 선수로 충원된다면 남아프리카 대회에선 좀더 나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선 유럽의 텃세가 상대적으로 덜 작동하는 곳이니만큼 1998년의 비극이나 2006년의 분루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폭력과 평화의 중간에서

    축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왜 4년마다 하는 월드컵에 이렇듯 열광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일각에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더 심각한 문제들을 놔두고 왜 월드컵에 빠져 있느냐고 소리치는 이들도 있다. 굳이 이 지면을 통해 그들을 멋없는 인간으로 묘사하거나 애써 축구의 위대함을 강변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축구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고, 축구만큼 유일무이한 글로벌 스포츠로서 위치를 확고히 한 문화적 장르는 없기 때문이다.

    허진 전 대표팀 언론담당관이 지켜본 2006 월드컵
    허 진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 신문학과 졸업, 행정대학원 석사(정책학),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정치학부 연수

    1987년 외무부 입부

    미국(시애틀), 예멘, 네덜란드 공관 근무

    2002월드컵 대표팀 언론담당관

    현 주독일대사관 참사관


    마찬가지로 단지 축구를 숭배한다고 해서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비이성적 행동과 폭력을 덮어줄 이유도 없다. 축구는 분명 폭력과 평화의 중간에 서 있다. 축구 이외의 것들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다 완벽한 정의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오프사이드 판정 하나에 웃고 울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면 그뿐이다.

    4년 후 우리는 다시 월드컵을 맞이한다. 어쨌거나 우리의 인생에 이러한 축제가 있다는 것이 즐겁지 않은가. 히틀러와 스탈린이 아니라 호나우지뉴와 메시, 지단과 드록바와 동시대인이라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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