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공격형 골프’를 꿈꾸는 이유

  • 서봉수 프로바둑기사· 9단

    입력2006-08-10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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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형 골프’를 꿈꾸는 이유

    2003년 5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프로바둑기사 골프대회.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무릇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골프도 싸움일 따름이다. 싸움판의 형세와 기질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공격형 싸움꾼과 수비형 싸움꾼이 가장 눈에 쉽게 들어오는 구분법일 것이다. 있는 대로 몰아붙여 단판에 승부를 결정내버리는 바둑이 호쾌하고 흥미진진한 것처럼, 골프도 최악의 조건에서조차 모험과 도박을 서슴지 않는 공격형 플레이가 훨씬 시원하고 상쾌한 법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치는 사람 마음대로 되든가.

    골프를 배운 지는 4년 반가량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연습장에 잠시 나가봤지만 사람들이 왜 골프를 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 하고는 그만두었다. 덕분에 한 달치로 끊어둔 연습비만 날렸고. 골프를 다시 시작한 것은 5년 전의 한 바둑대회가 계기였다. 시간이 남은 조치훈 9단이 필드에 나간다길래 별생각 없이 따라나선 걸음이었다. 그러고는 그 푸름에 그냥 반해버렸다. 나이가 들어 ‘자연’이 눈에 들어오니 비로소 골프의 의미를 알게 된 셈이었다.

    이후로 한 2년 반쯤 골프장에 열심히 드나들었지만, 실력은 그저 그렇다. 해마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일 프로기사 골프대회’처럼 뭔가 ‘타이틀’이 걸려야 눈에 불이 좀 켜지는 스타일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쪽 기사들이 일본 기사들에 비해 골프실력이 밀리는지라, 이 대회는 항상 일본측 기사들이 승리를 거뒀다. 아마도 골프라는 운동 자체가 일본에서 더 많이 대중화한 까닭일 것이다.

    언제인가 정규전에서는 승부가 나지 않고 주장전까지 간 적이 있다. 우리측 주장은 권갑용 7단, 일본측 주장은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이었다. 평소 골프를 바둑 못지않게 좋아하는 권 7단인지라 우리는 ‘최초의 승리’를 꿈꾸며 숨죽였다. 그러나 웬걸, 승리는 다케미야 9단의 차지였고, 한국 기사들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기약은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 보면 항상 부러운 것이 유시훈 9단 같은 스타일이다. 젊은 나이답게 호쾌하고 강한 모습을 과시하며 골프를 친다. 싸움이 붙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으며, 아무리 어려운 장애물이라도 피해 가지 않는다. 나 같은 이들이 한 타 두 타 마음 졸이며 게임을 이어갈 때, 유 9단은 이글이나 버디를 위해 과감히 승부수를 던진다. 짜릿하고 깔끔하다.



    유 9단은 유학파인지라 일본측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는데, 한번은 나와 1:1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분명 실력은 나보다 낫고 게임 경험도 월등하지만 근래 연습이 부족했던지 그날 따라 실수가 잦았다. 게임 내내 안정 지향적인 플레이만 하던 내가 우연찮게 이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마음에 독기를 품었는지, 유 9단은 다음 대회에서 나를 압도적으로 이겨버렸다. 예의 그 호쾌하고 시원한 공격형 골프였다. 져도 그렇게 지면 두말할 여지가 없다.

    공격적인 바둑을 두는 이들 대부분이 골프도 공격적으로 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최근에는 수비 위주의 바둑이라는 걸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공격 지향적인 포석에 매혹되어 있는 듯하다. 상상할 수 없는 수로 상대의 허를 찌르고, 단 한 번의 총공격으로 승부를 결정지어버리는 판을 좋아한다. ‘냉정’ ‘침착’이라는 말은 사라진 듯 다들 죽기살기로 덤벼든다. 역시나 짜릿하다.

    사실 보는 이의 처지에서 생각하자면 모든 승부, 모든 싸움에서 수비 위주의 전략보다는 공격 중심의 전략이 흥미진진하다. 빙글빙글 링 주위를 돌기만 하는 아웃복싱보다는 격한 버팅으로 눈가가 찢어지는 인파이팅이 관객의 환호를 부른다. 모든 선수가 자기 진영에만 몰려 있는 수비형 축구보다는 어쨌든 미드필드에서 치고받으며 승부를 내는 싸움 축구가 훨씬 더 월드컵다워 보이는 것이다.

    특히 바둑에서는 분명히 완급을 조절했어야 하는 타이밍이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결국 밀어붙이는 때가 있다. ‘내가 누군데 감히…. 용서 못한다, 박살내주마!’ 하는 울분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앞서간대도 몸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는 실력이다. 필드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 같은 하수는, 아무리 가슴속에서 늑대가 울어댄다 한들, 별수 없이 한 타 한 타에 마음 졸이며 ‘안전제일’ 정신으로 게임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어쩌다가 평소 부러워하던 공격형 골퍼가 실수로 큰 OB라도 만들라치면 ‘거봐라, 저렇게 앞뒤 안 재고 무모하게 밀어붙이면 큰코다치는 날이 있는 법이니라’ 혼자 위안해가면서 말이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 필드에 나가본 늦깎이 중년 골퍼인 나에게 공격형 골프란 언감생심이다. ‘오른발을 축으로, 왼팔이 턱 밑으로’를 되뇌며 드라이버를 때리지만 어느새 뻑뻑해진 허리가 앙앙 울어댄다. 아무리 있는 힘껏 때린대도 이글은 꿈일 뿐 거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이가 ‘웬수’다. 패기 넘치는 젊은 공격형 골퍼들이 한없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그 부러움을 지렛대 삼아 오늘도 연습장에 나간다. 모험심을 키워야 한다는, 공격력을 키워보겠다는 심산이다. 공격적인 승부도 연습이 있어야 하는 법. 과감하게 쳐서 제대로 맞는 경우가 몸에 익어야 실전에서도 될 테니까 말이다. ‘모험의 경험’이라고나 할까. 밤늦은 시각 연습장에 홀로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글 찬스, 이번에만 제대로 맞으면….’

    그렇듯, 꿈을 꾸는 자는 행복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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