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코스 공략의 전우, 캐디

-나바타니(Navatanee) 라운딩 2

  • 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입력2008-03-05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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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바타니에서 이븐파를 치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2008년을 살아가면서 새겨둬야 할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나바타니의 온갖 것을 섭렵하면서 뭔가를 느껴보고자 이곳을 찾은 만큼 굳이 캐디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나바타니는 우리 골프장과 마찬가지로 캐디의 보조를 받는 것이 의무였다.
    2007년 12월28일 오전 8시. 나바타니의 라커룸에 가방을 풀어놓고 1번홀 티잉그라운드로 가기 위해 클럽하우스를 나섰다.

    파란색 바지에 태국 왕실을 상징하는 노란 재킷 형태의 상의를 입고 차양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캐디는 한국과 일본 골프장 캐디 대부분이 그렇듯 여성이었다. 캐디는 카트에 캐디백을 실어놓고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 골프장이 대개 4인 1조의 공용 1카트를 운용하는 데 비해 나바타니의 카트는 1인 1카트로 원캐디 원백제였다. 인건비가 낮다는 증거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1988년 분당 신도시 개발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국내 인건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덩달아 골프장에서도 원캐디 투백제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골프를 시작할 무렵인 1984년경에는 골프 연습장에도 캐디가 있었다. 연습 볼을 티업해주는 여성들이었다. 그 여성들은 1988년 이전에 서울지역 골프 연습장에선 거의 없어졌다. 인건비 상승 탓이었다.

    파도 부서지는 바닷가 피날레

    필자가 맨 처음 플레이 해본 해외 골프장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근처의 자그마한 도시 오션사이드에 있는 ‘엘 카미노’라는 골프장이었다. 최고의 명성을 가진 골프장 중에선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Pebble Beach Golf Links)가 처음이었다. 흔히 페블비치 골프장이라고 일컫는 곳이다.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가 위치한 캘리포니아 주 몬트레이 반도 남단의 캐멀 베이(Camel Bay) 연안에는 다섯 개의 골프코스가 있다. 페블비치 링크스를 비롯해 사이프레스포인트(Cypress Point Club), 스파이글래스힐(Spyglass Hill GC), 포피힐(Poppy Hills GC), 스패니시베이(The Links at Spanish Bay) 등이 그것이다. 페블비치는 잭 네빌, 사이프레스포인트는 앨리스터 매킨지, 스파이글래스힐은 로버트 트렌트 존스 시니어, 나머지 두 골프장은 로버트 트렌트 존스 주니어가 각각 설계했다.

    다섯 골프장 가운데 페블비치, 스파이글래스힐, 포피힐 세 골프장에서는 매년 2월 첫째 주가 되면 PGA 투어 AT·T 페블비치 내셔널 프로암 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의 전신은 유명한 가수이자 골프광이던 빙 크로스비에 의해 1937년 창립된 ‘빙 크로스비 프로암(The Bing Crosby Pro-Am)’이다. 물론 그 대회가 출범할 당시에는 대회장으로 포피힐 대신 사이프레스포인트가 사용됐다. 페블비치 링크스가 이름과 달리 인랜드(in-land)형임에 반해 스페니시베이는 다섯 골프장 중 유일한 링크스 코스다.

    5개 중 가장 먼저 생긴 골프장은 페블비치다. 골프장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새뮤얼 모스는 1918년 잭 네빌에게 코스 설계를 의뢰했다. 훌륭한 아마추어 선수였지만 미 서부 해안에서 코스 설계를 해본 경험이 없던 네빌은 3주 동안 그곳을 직접 걸어다녀본 뒤에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를 설계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찬사가 페블비치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고 본다.

    “최초 3홀은 내륙을 향해 이어져 있다. 하나같이 공정한 엄격함을 느끼게 한다. 다음 7홀은 5번 홀을 제외하곤 모두 해안절벽을 따라 장관을 이룬다. 11번 홀부터 16번 홀까지는 내륙을 향해 가다가 점진적으로 바다로 향해 가는데, 플레이어로 하여금 심오한 분위기에 빠지게 한다. 17번과 18번 홀은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에 붙어 최고의 피날레를 맞게 한다. 페블비치를 찾아올 때마다 네빌의 대단한 연출에 늘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골프의 시스틴 성당’

    5개 골프장 가운데 많은 골프 애호가가 플레이 해보기를 희망하는 으뜸 골프장은 사이프레스포인트라고 한다. 미국골프협회장을 역임한 샌디 테이텀이 “골프의 시스틴 성당”이라고 표현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사이프레스포인트는 명장(明匠) 앨리스터 매킨지가 세계 곳곳에 설계한 수많은 골프장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구성(球聖)’ 보비 존스는 어느 해인가 페블비치 링크스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다가 예선탈락한 뒤 시름을 달래기 위해 사이프레스포인트에서 난생 처음 라운드 했다. 그 후 1930년 대망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 은퇴를 선언하고 오거스타에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을 만들었다. 오거스타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메이저 중의 메이저 대회로 일컬어지는 마스터스 대회 개최지로 유명하다. 보비 존스는 오거스타 골프장 부지를 매입한 뒤 사이프레스포인트에서의 감동을 잊을 수 없어 앨리스터 매킨지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의 설계자로 초빙했다.

    페블비치의 5개 골프장 가운데 유일하게 프라이빗 골프장인 사이프레스포인트는 미국에서 가장 폐쇄적인 골프장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아무나 라운드 할 수 없음은 물론, 아예 발을 들여놓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골프 관련 책을 읽던 중 스코틀랜드의 로열 도노크(Royal Dornoch)나 아일랜드의 포트마녹(Portmarnock) 등에서 플레이를 해보지 않고서는 골프에 대해 아는 체하지 말라는 대목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필자가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골프장은 그곳이 아니다. 그곳은 바로 필라델피아 근처에 있는 파인밸리(Pine Valley)와 페블비치에 있는 사이프레스포인트다.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에서 4번 라운드를 해본 뒤에 그런 마음이 생겼다.

    필자가 페블비치 골프장에서 플레이한 것은 1991년 12월27일이다. 스코어는 아웃 39, 인 40으로 토털 79. 필자는 그날 스코어카드를 지금도 갖고 있다. 다만 필자가 플레이하던 날은 4번 홀이 수리 중이었기에 정상인 상태는 아니었다. 파5 18번 홀에 이르렀을 때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아내는 골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라운드 하기 위해 숙소를 나설 때 아내는 아이와 둘이서 숙소에 남아 있었다. 필자가 세 번째 샷을 해놓고 퍼팅그린 위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퍼팅그린 주변에 나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유이(唯二)한 갤러리였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자는 버디를 했다.

    이븐파의 꿈

    필자가 페블비치에서 라운드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그 무렵 ‘골프매거진’에서 ‘52 Things Every Real Golfer Should Do’라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 기사에 따르면 진정한 골퍼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아놀드 파머와 악수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1993년 1월경 베이힐 골프장에서 플레이하다가 아놀드 파머와 악수를 한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에서 플레이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페블비치에서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그 기사를 읽는 순간 필자는 52가지를 모두 해보리라 다짐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페블비치 링크스 플레이였다.

    필자가 세계적 명성의 골프장을 찾아 플레이하면서 가장 소망하는 것은 이븐파로 경기를 마치는 것이었다. 페블비치에서도 그랬고,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 카누스티, 나인브리지에서도 그랬다. 물론 나인브리지말고는 단 한 번도 그 꿈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븐파로 경기를 마치기 위한 첫 단계는 코스를 숙지하고 있는 캐디를 만나는 일이다. 페블비치 링크스에서 플레이할 때에도 그린피 이외에 추가로 캐디피를 지급하면서 스타터에게 캐디를 구해달라고 했고, 게임이 끝난 뒤에는 팁을 따로 지급했다.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에서처럼 미국이나 영국의 대부분 골프장에서는 캐디의 도움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플레이어의 선택에 맡겨둔다. 골프 경기에서 캐디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골프의 발상지라 일컬어지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이 여성 캐디를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만큼 생소한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캐디가 골프장 사업자와 고용관계에 있다는 주장은 얼마나 우스운가. 필자는 캐디가 골프장 사업장의 근로자인지에 관한 논란을 접할 때마다 ‘캐디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다음과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에드워드 마틴이 쓴 ‘역사의 신빙성(The Authenticity of the History)’이란 책에 나와 있다.

    부랑소년들, 캐디가 되다

    …서기 1750년경, 스코틀랜드 수도인 에든버러에는 부랑소년들이 떼지어 살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기상이변으로 각 농가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경제불안이 부랑소년들을 생겨나게 했는데, 그들은 처마 밑이나 공원에서 잠을 잤다. 그들은, 16세기에 메리 여왕이 데리고 귀국한 귀족 자제(주로 사관후보생)들의 호칭인 ‘Cadet’이란 단어가 스코틀랜드어화한 ‘Cawdie’로 불렸다.

    소년들은 먹고살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 화물운반이나 화차 뒷밀이, 심부름, 정원 청소, 물품구입 대행, 길안내, 때로는 아이 보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맡았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부랑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맡은 일에 근면했고, 현금을 맡기더라도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일을 맡겨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시민들 처지에서 보자면 집 앞에 심부름꾼을 대기시켜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들은 야경꾼도 겸해 당시 에든버러에는 도둑이나 빈집털이범도 없었다. 한때 카우디의 무리가 50~70명에 이르렀지만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데에는 그들의 리더인 피이치의 뛰어난 수완이 있었다. 피이치는 사람들이 붐비는 크로스 광장 근처 교회 뒤편에 있는 연료상을 근거지로 온종일 에든버러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날마다 골프채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골퍼들이 그들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마침내 카우디들은 단순한 클럽 운반에서 더 나아가 코스 내에서 게임에 밀착해 골퍼들을 돕기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캐디가 탄생한 셈이다. 피이치를 보스로 받들던 그들은 갑자기 바빠졌다. 그들은 골퍼들에게 충실한 데다 편리했고 비용도 쌌다. 당시엔 7홀에서 12홀까지의 매치플레이가 성행하던 터라 5홀까지의 캐디피는 4펜스, 그 이상은 6펜스가 시세였다. 그들 중엔 1744년 창립된 오너러블 컴퍼니 오브 에든버러를 위시하여, 프란츠필드, 멀리는 세인트앤드루스까지 불려가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다. 피이치는 책임 때문에 에든버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처의 리이스에서 본격적으로 캐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두뇌가 명석한 그는 게임의 본질을 즉시 파악하고 교묘한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플레이어가 이길 수 있도록 기여했다. 평판을 얻게 되자 그에게는 주문이 쇄도했다. 소년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이븐파 욕심은 버렸지만…

    1775년에는 골프 규칙에 ‘Caddie’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로써 골프 경기에서 캐디들의 권리가 확보됐다. 즉 “만일 상대방 또는 상대방의 캐디에게 볼이 맞아서 경기에 방해를 받은 경우 그 홀은 상대방이 패한 것으로 한다. 만일 자신이 친 볼이 자신의 캐디에게 맞은 때에는 그 홀에서 패한 것으로 한다”라는 규정이 생겨 캐디를 경기의 파트너로 공식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유명 골프장에서 플레이하면서 비싼 캐디피를 지급하고 캐디를 쓰는 까닭은 그들이 훌륭한 전략가라는 생각에서다. 그들은 필자가 처음 방문하는 골프장의 안내자이자 코스 공략의 전우(戰友)와도 같다.

    하지만 나바타니에서는 이븐파를 치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올 한 해를 살아가면서 꼭 명심해두고자 하는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을 찾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나바타니의 온갖 것을 다 섭렵하면서 뭔가를 느껴보고자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랬기에 굳이 캐디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나바타니는 한국 골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캐디를 동반하는 것이 의무였다. 물론 캐디를 선발할 권한도 플레이어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기왕이면 골프를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캐디를 만나 함께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골프를 즐기지 못하는 일은 없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할 따름이다.

    나바타니의 1번홀 티잉그라운드로 가기 위해 캐디백이 실린 카트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이렇게 기도했다.

    “오늘도 캐디와 더불어 나바타니의 세세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이해하면서 골프를 더욱 즐길 수 있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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