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이들에게 시련은 친구이자 라이벌

  • 최원창│일간스포츠 축구팀 기자 gerrard11@joongang.co.kr│

    입력2010-06-03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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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월드컵이 열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상공에 수많은 별이 몰려든다.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웨인 루니(잉글랜드) 등이 세계 축구 판도를 바꿀 새로운 빅 피시(Big Fish·거물)로 떠오른다. 이들은 화려하다.
    • 하지만 화려함만으론 이들을 설명할 수 없다. 밤하늘의 별빛이 빛나려면 더 짙은 어둠이 필요하듯, 최고 스타들의 화려함 이면엔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스토리가 숨어 있다. 루니-메시-호날두를 비롯한 남아공월드컵에 나설 스타 10인의 역경 극복 스토리를 소개한다.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1 리오넬 메시

    - 아르헨티나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리오넬 메시 / 아르헨티나<br>1987년 6월24일생<br>FC 바르셀로나 소속<br>A매치 43경기 13골

    가난이 싫었다. 성장 호르몬 분비가 부족해 키가 크지 못했다. 축구를 죽도록 하고 싶었지만 아르헨티나의 구단들은 그를 문전박대했다. 사람들은 왜소한 메시를 ‘벼룩’이라고 부르면서 놀렸다. 가족들은 지긋지긋한 아르헨티나의 경제난에서 벗어나고자 바르셀로나로 이주했다. 그곳 유소년팀에서 공을 차던 그에게 FC 바르셀로나 구단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성장 호르몬 주사를 꾸준히 맞을 수 있게끔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현신, 아니 그 이상이라고 평가받는 리오넬 메시(23·FC 바르셀로나)는 이렇게 탄생했다.

    16세 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데뷔했고, 2005년 5월 17세10개월7일의 나이로 알바세전에서 골을 뽑으며 바르셀로나의 주력군에 올랐다. 그는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연소 득점자로 기록돼 있다. 바르셀로나에 적응하지 못한 가족들은 다시 아르헨티나 산타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형 로드리고와 바르셀로나에 남았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준 바르셀로나를 위해 잠재해 있던 천재성을 맘껏 발휘했다. 그는 골을 터뜨릴 때마다 바르셀로나 유니폼 왼쪽에 달린 구단 엠블럼에 키스를 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외로울 때마다 웹 카메라를 통해 어머니 셀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내성적인 청년 메시는 2008-09시즌부터 자신의 기량을 활짝 꽃피우기 시작했다.

    38골 18어시스트(51경기)라는 경이적 공격 포인트를 올리며 바르셀로나를 트레블(리그·FA컵·UEFA챔피언스리그 3관왕)의 권좌에 올려놓는다. 올 시즌 그의 기세는 더욱 무서웠다. 44골 10어시스트(5월5일 현재)의 맹폭을 퍼부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23세의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을 아르헨티나에 안겼듯, 23세의 메시가 통산 3번째 월드컵 우승컵을 조국에 안길지 지켜보고 있다.



    2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포르투갈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포르투갈<br>1985년 2월5일생 <br>레알 마드리드 소속<br>A매치 69경기 22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5·레알 마드리드). 꽃미남 같은 외모와 조각 같은 몸매. 환상적인 발재간에다 총알 같은 스피드와 승리를 부르는 킬러본능을 지닌 그는 화려하다. 하지만 호날두가 위대한 까닭은 힘겨운 가정사를 견뎌내고 우뚝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1985년 포르투갈 본토에서 서남쪽으로 800㎞ 떨어진 마데이라 섬에서 정원사로 일하던 호세 디니스 아베이루와 어머니 마리아 돌로레스 두스 산투스 아베이루 사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디니스는 술 중독자였고 형 휴고는 마약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 돌로레스가 청소부 일을 하며 한 달에 400파운드(약 74만원)를 받아 근근이 생활했지만, 수입의 상당 부분을 아버지 치료비로 써야 했다.

    축구공이 없어 양말을 돌돌 말아서 공으로 쓰거나, 빈 깡통을 차면서 기술을 익히던 호날두는 어릴 적부터 소년 가장이 돼야 했다. 발군의 기량을 보인 덕분에 열 살 때 포르투갈 명문구단 스포르팅 리스본의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15세 때 리스본과 정식 계약을 앞두고 청천병력 같은 얘기를 듣는다. 메디컬 테스트 중 호날두의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박동하는 것이 발견되자 구단에서 조심스럽게 축구를 그만둘 것을 제안했다.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호날두는 선수 생명을 걸고 수술대에 올랐다. 어머니 돌로레스는 “호날두가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됐고, 훈련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2005년 9월 그는 독일월드컵 예선 러시아와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가 술을 끊지 못하고 요절한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을 때다. 러시아전에 나선 그는 “분명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고통이 지나갈 것을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계속해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잉글랜드와 맞붙은 독일월드컵 16강전에서 승리를 확정짓는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한 후 그는 하늘을 향해 키스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는 골 세리머니를 펼친 것이다.

    그의 스피드와 기술은 화려하다. 마데이라 섬 사람들은 그의 기술을 마데이라 전통춤 이름을 따 ‘오 바일리뇨 마데이레인세(O Bailinho Madeireinse)’라고 부른다. 윙어와 스트라이커의 구분을 파괴하며 ‘멀티 킬러의 시대를 연 주인공 호날두는 최대 시속 33.6㎞의 스피드와 마법사처럼 상대를 속이는 기술, 무회전 프리킥을 무기로 포르투갈의 월드컵 첫 우승을 준비한다. 그의 왼쪽 어깨엔 주장 완장이 둘러져 있다.

    3 박지성

    - 대한민국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박지성/ 대한민국<br>1981년 2월25일생<br>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br> A매치 85경기 11골

    축구 신동도 아니었고, 타고난 체격을 갖춘 준비된 선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평발이었다. 왜소한 체격 탓에 대학과 프로팀에서 번번이 물을 먹었다.

    최고를 꿈꿨지만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외면받던 그저 그런 선수이던 박지성은 어떻게 대한민국 축구의 아이콘이 됐을까. 재능으로 똘똘 뭉친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이유는 뭘까.

    그는 최근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에서 “천재라 불리는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만의 돌파구를 찾았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따라 하기보다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유일함’에서 해답을 얻었다. 남보다 한 발 더 뛰며, 동료를 위해 빈 공간을 찾아내고, 동료를 위해 헌신적인 플레이를 펼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시련은 장마처럼 주기적으로 그를 괴롭혔다. 네덜란드에서는 홈팬들이 야유를 쏟아냈고, 잉글랜드 땅을 밟았을 때는 티셔츠를 팔러왔다고 수군거렸다. 오른쪽 무릎 인대를 다쳐 수술을 받고 270일간 재활치료를 받기도 했다.

    부상을 딛고 다시 올라섰지만 2008년 5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엔트리에서 빠졌다.박지성은 그날 결심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할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달려왔다면 이제부터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겠다”고. 그는 저서에서 “나는 축구인생 후반 20분을 뛰고 있다”며 “남은 25분에 승부수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주장으로 나서는 남아공월드컵에서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것이 첫 승부수다. 그는 ‘균열 없는 하나의 팀 정신’을 강조하며 “우리 스스로 100%가 된다면 메시도, 브라질도 두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4 미로슬라프 클로제

    - 독일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미로슬라프 클로제 / 독일<br> 1978년 6월9일생<br>바이에른 뮌헨 소속<br>A매치 94경기 48골

    한국 사정에 빗대면 조기축구회를 전전하다 월드컵 득점왕까지 오른 격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엄혹한 시절을 이겨내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나이. 독일 국가대표팀 부동의 스트라이커 미로슬라프 클로제(32·바이에른 뮌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폴란드 오펠른 출신이다. 독일 혈통의 아버지는 옥세르(프랑스)에서 축구선수를 했고, 어머니는 폴란드 핸드볼 국가대표로 82회 A매치에 출전한 엘리트 선수였다. 부모의 타고난 운동 신경을 물려받았지만 이주민 신분인 그가 독일 축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까지는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다가 1987년 독일의 쿠젤로 이주한 후 축구를 시작했다. SG블라우바흐·디델코프·FC 08 홈부르크 등 7부리그팀을 전전해야 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나름대로 실력을 갖춘 조기축구회 수준의 팀들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변변치 않았던 그에게 구세주가 나타난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카이저슬라우테른 2군 코치였다. 그는 이 코치의 도움으로 1999년 카이저슬라우테른 아마추어팀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1군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을 틈타 2000-01시즌과 2001-02시즌 62경기에 출전해 25골을 뽑아내며 2002년 한일월드컵 독일대표로 깜짝 발탁된다. 그는 이 대회에서 5골을 뽑으며 득점 2위를 차지했고, 2004년 베르더 브레멘으로 이적한 후 첫 시즌에서 15골을 뽑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에서 또다시 5골을 뽑아냈고, 이번에는 득점 1위에 오른다. 그리고 독일 최고의 팀인 바이에른 뮌헨에 둥지를 튼다.

    세 번째 맞이한 월드컵에서도 5골을 더 뽑는다면 역대 월드컵 최다골을 기록 중인 호나우두(브라질)와 동률을 이루게 된다. 지역 7부리그를 전전하던 미운 오리가 남아공에서 또다시 백조가 되어 날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5 스티븐 제라드

    - 잉글랜드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스티븐 제라드 / 잉글랜드<br> 1980년 5월30일생<br>리버풀 소속<br>A매치 78경기 16골

    잉글랜드 대표팀 부주장 스티븐 제라드(30·리버풀)는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 ‘더선’을 읽지 않는다. 아니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만지지도 않는다.

    이유는 세계 축구사에서 잊을 수 없는 슬픈 날과 연관이 있다. 1989년 4월15일 영국 셰필드의 힐즈브러 경기장에서 축구팬 96명이 압사한 ‘힐즈브러 참사’가 그것이다.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 더선은 “일부 리버풀 팬이 희생자의 지갑을 훔쳤다! 일부 팬들은 경찰에게 오줌을 누었다”는 미확인 사실을 보도했다. 분노한 리버풀 시민들은 더선의 구독을 취소했고, 지금도 타 지역에 비해 리버풀에서는 더선 구독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리버풀 출신이자 리버풀 FC를 숭배했던 제라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제라드는 힐즈브러 참사 때 자신과 리버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던 사촌형 존-폴 질루니를 잃었다. 아홉 살의 나이로 막 리버풀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한 제라드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는 끝내 충격을 이기고 사촌이 그토록 사랑했던 리버풀의 주장이자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지금도 리버풀 홈구장 정문에 마련된 ‘힐즈브러 메모리얼’을 지날 때마다 사촌을 떠올린다는 제라드는 “사촌에 대한 기억과 약속이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회고했다.

    그는 생애 두 번째 월드컵 출전을 기다리고 있다. 사타구니 부상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에 나서지 못한 그는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처진 스트라이커로 활약했지만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패하고 만다. 특히 승부차기 실축으로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쓴 그로서는 남아공월드컵에 대한 각오가 남다르다. 이탈리아 출신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그는 왼쪽 측면을 맡고 있다. 잉글랜드 팬들은 제라드가 잉글랜드의 고질적인 아킬레스건인 왼쪽에서 제 구실을 해준다면 자국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세계 챔피언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6 파비오 칸나바로

    - 이탈리아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파비오 칸나바로 / 이탈리아<br> 1973년 9월13일생<br> 유벤투스 소속<br>A매치 132경기 2골

    나폴리 태생인 그는 그 시절 또래 아이들처럼 ‘나폴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를 동경했다.

    하위권 나폴리에 스쿠데토(이탈리아 세리에A 우승)를 안긴 마라도나를 더 가까이 보고자 나폴리 구단 볼보이를 자청했다.

    칸나바로가 14세가 되던 해였다. 나폴리 유소년팀 코치는 칸나바로에게 “자네는 키가 작고 특기가 없어 보이네. 수비수로는 힘들 거야”라고 말했다. 코치는 구단에 “칸나바로는 키가 작고, 등은 굽어 운동선수의 육체가 아니다. 신체가 얼마나 발달할지 의문이 제기되며 축구에 대한 특기가 없다”고 보고했다. 칸나바로의 또래들은 모두 유소년팀에 입단했지만 그만은 연습생팀에서 뛰어야 했다. 세계 최고의 중앙수비수 칸나바로의 시작은 이처럼 초라했다.

    단신이라는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자기만의 강점을 찾아야 했다. 누구보다 빨리 상대 공격을 막아야 했고, 영리하게 거칠어야 했다. 남보다 빠르게 상대 공격루트를 예측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비록 단신이지만 점프력이 좋아 장신 공격수도 맥을 못 췄다. 그는 나폴리 1군에 올라 1993년 3월 유벤투스전에서 꿈에 그리던 세리에A에 데뷔했다. 그리고 1997년 1월 북아일랜드전에서 마침내 이탈리아 대표로 신고식을 치른다. 이후 그는 알레산드로 네스타(34·AC 밀란)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아주리 군단의 수비를 굳건히 지켰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1990년 월드컵 준결승전. 공교롭게도 마라도나가 뛰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가 맞붙었다. 그는 조국과 우상 중 누굴 응원했을까? 마라도나를 사랑했지만 이탈리아를 응원했다. 그는 마라도나의 종횡무진에 무릎을 꿇은 이탈리아를 목격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월드컵에 나가 우승컵을 차지하겠다고.

    2006년 독일월드컵. 그는 전 경기를 소화하면서 옐로카드 한 장 받지 않는 농익은 수비를 펼쳤다. 이탈리아는 통산 네 번째로 우승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볼보이를 하고 있을 때 독일이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열린 대회에서 이탈리아가 우승컵을 안았다. 수비수들도 스트라이커와 마찬가지로 경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작은 키와 싸웠던 기백으로 생애 마지막인 남아공월드컵에서 나이와 싸워 이기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는 자신의 발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도 했다.

    “공은 바로 여기서 멈춘다.”

    7 은완코 카누

    - 나이지리아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은완코 카누 / 나이지리아 <br>1976년 8월1일생<br>포츠머스 소속<br>A매치 82경기 13골

    1995년 야약스(네덜란드)에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선사한 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나이지리아에 금메달을 안길 때만 해도 은완코 카누(34·포츠머스)의 앞길에는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아프리카 대륙에 첫 메이저대회 우승을 선사한 그의 당시 나이는 스무 살. 거액인 350만파운드의 이적료로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인 인터 밀란에 이적했지만 메디컬 테스트에서 대동맥 심장 판막 질환 진단을 받는다.

    이그보족의 언어로 ‘장날에 태어난 사내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카누의 축구인생은 그렇게 마감되는 줄 알았다. 미국에서 대동맥 판막 수술을 받고 11개월을 쉬다 인터 밀란에 복귀했지만 이미 그를 대신해 브라질 특급 킬러 호나우두가 뛰고 있었다. 떠밀리듯 잉글랜드 아스널로 이적했지만 그가 제대로 된 기량을 선보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스널에서 맞은 첫 시즌 7골을 넣더니 1999-2000시즌에는 16골을 터뜨리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림픽 금메달과 더불어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UEFA컵 우승·프리미어리그 우승·FA컵 우승 등 아프리카 축구 선수 중 가장 많은 우승 경력을 자랑한다. 아스널에서 5년간 44골을 넣으며 프리미어리그에 안착한 후 웨스트 브롬위치를 거쳐 현재 포츠머스에서 간판 공격수로 뛰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출전했지만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탈락한 그는 남아공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노라고 다짐한다. 2006년부터 올 초까지 나이지리아 대표팀 주장을 맡았지만 오비 미켈(첼시)에게 완장을 물려줬다.

    나이지리아 언론은 노쇠했다는 이유로 그를 국가대표팀에서 빼야 한다고 비판한다. 2000년 자신처럼 심장이 아픈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카누 심장 재단’을 설립한 ‘슈퍼 이글스’(나이지리아 국가대표팀 애칭)의 맏형 카누. 197㎝의 장신임에도 유연함과 개인기를 자랑하는 그가 특유의 드리블을 남아공에서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8 다비드 비야

    - 스페인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다비드 비야 / 스페인<br>1981년 12월3일생<br>발렌시아 소속<br>A매치 55경기 36골

    유로 2008에서 보여준 다비드 비야(29·발렌시아)의 왼발 놀림은 경이적이었다. 그는 무려 6골을 뽑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메이저 대회 우승과는 거리가 멀던 그의 조국 스페인이 유럽 챔피언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며 환호했고, 어김없이 골문에 박히는 왼발 슛에 감탄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왼발잡이는 아니었다.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역 유소년팀 UP랑그레오에서 뛸 때만해도 오른발밖에 쓰지 못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대퇴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축구는 물론, 평생 오른발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의사는 “다시 축구를 했다가는 영영 다리를 못 쓸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든든히 지원하던 그의 아버지는 “너무 상심하지 마라. 네게는 아직 건강한 왼발이 있다”는 말로 그를 위로했다. 비야는 그때부터 익숙지 않던 왼발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후유증 없이 정상 생활이 가능해졌고, 어느 때부턴가 왼발을 자유자재로 쓰게 됐지만 그는 항상 벤치 신세였다. 팀의 감독은 아버지를 불러 “체격도 왜소하고 재능도 없어 보인다.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라”고 충고했다. 지역 팀 레알 오비에도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은 그는 라이벌 팀인 스포르팅 히혼에 가까스로 입단했다. 2000년 B팀에서 13골을 뽑아낸 그는 1군에 올랐지만 한 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록 2부리그(세군다리가)였지만 2001-02시즌 18골, 2002-03시즌 20골을 넘어섰다. 그는 프리메라리가로 승격한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한 후 레알 마드리드와의 개막전에서 골을 뽑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시즌에서 그는 17골을 뽑았고, 코파델레이(스페인 국왕배)에서 4골을 뽑으며 사라고사를 우승까지 이끌었다. 스페인 대표팀도 구애의 손짓을 보냈다. 2005년 2월9일 그는 산마리노와 맞붙은 2006년 독일월드컵 예선전을 시작으로 스페인 대표선수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발렌시아로 이적한 그는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한다.

    그는 월드컵 전문 베팅사이트인 ‘베트온 월드컵 2010’이 밝힌 득점왕 후보 톱5의 배당률에서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를 제치고 득점왕 후보 1순위에 올랐다. 바르셀로나·첼시·맨유 등 호시탐탐 남아공월드컵 이후 그를 노리는 구단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스페인의 메이저 대회 징크스에 대해 그는 “과거는 단지 기록일 뿐이다.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 시절 우리가 잃기만 했을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닌 지금이고, 우리는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9 카카

    - 브라질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카카 / 브라질<br>1982년 4월22일생<br>레알 마드리드 소속<br>A매치 73경기 26골

    본명인 히카르두 이젝손 산토스 레이테보다 예명 카카(28·레알 마드리드)로 더 잘 알려진 귀티가 흐르는 이 청년은 일반적인 브라질의 축구 선수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브라질 선수들은 대부분 흑인 혼혈이지만 그는 백인인데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찌든 빈민가에서 벗어나고자 축구를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토목기사로 일하던 아버지 보스코 이젝슨 페레이라 레이테와 어머니 시모네 크리스티나 산토스 레이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산층 가정에서 살아온 탓에 축구와 교육을 병행할 수 있었고, 테니스를 비롯한 각종 스포츠를 즐기던 아이였다. 또래에 비해 발육이 2년이나 늦어 작은 체구를 가진데다 흰 피부 탓에 ‘바비 인형’이라고 놀림 받은 적도 있다.

    그런 그에게도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 18세 때 할머니집 수영장 바닥에 머리를 박아 척추 골절상을 당했다. 선수로서 재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였다. 전신마비가 우려됐으며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는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1년여간 피나는 재활 노력 끝에 다시 축구화를 신을 수 있었다. 그는 당시를 “매순간 굳은 결심이 필요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몸이 회복하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가 세운 10가지 목표에는 소박한 것들도 있었고, ‘상파울루 주전자리를 지킨다’ ‘브라질 대표가 된다’‘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명문 클럽으로 이적한다’등 거창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스물세 살이 되기 전에 이 모든 걸 이룬다.

    2002년 6월13일 수원월드컵경기장. 브라질과 코스타리카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5-2로 크게 앞선 후반 27분 히바우두와 교체 투입되며 그는 월드컵에 데뷔한다. 이후 2003년 850만유로의 이적료로 상파울루(브라질)에서 AC 밀란(이탈리아)으로 이적한 후 인터 밀란과의 ‘밀란 더비’에서 골을 뽑아내며 화려하게 세리에A에 데뷔했다. 6시즌 동안 270경기에 나서 95골을 뿜으며 세리에A 우승(2004년)·UEFA챔피언스리그 우승(2007년)·FIFA클럽월드컵 우승(2007년) 등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5600만파운드의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에 새 둥지를 틀었다. 브라질의 둥가 감독은 카카를 꼭짓점으로 세워 전인미답의 6번째 월드컵 우승에 도전한다.

    10 매튜 부스

    - 남아공 -

    남아공월드컵 Big Fish(거물) 10人 역경 극복기

    매튜 부스 / 남아공<br>1977년 3월14일생<br> 마멜로디 선다운스 소속<br>A매치 24경기 1골

    11년간 국가대표로 뛰어왔지만 홈팬들에게 야유를 받는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자신과는 피부색이 전혀 다른 동료들 사이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그들을 대표하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아공 대표팀 주장 매튜 부스(33·마멜로디 선다운스)의 이야기다. 그는 남아공 축구대표팀의 유일한 백인이자 주장이다.

    지난해 남아공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그는 자랑스럽게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섰지만 대다수 흑인 팬은 야유를 쏟아냈다. 남아공은 여전히 인종 간 대립이 첨예하다. 백인들의 극단적인 흑인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는 1994년 폐지됐지만 빈부의 격차 등 차별의 잔재 탓이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탓에 1964년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영구 추방됐다가 1992년이 돼서야 재가입할 수 있었다.

    부스는 인종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한 골, 그리고 하나의 국가’라는 슬로건에 안성맞춤이다. 1999년 남아공 대표로 발탁된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나섰다. 흑인들의 역차별이 두려워 FC로스토프·크릴랴 소베토프 등 동유럽 팀에서 주로 활약했지만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준비하고자 지난해부터 남아공 클럽 마멜로디 선다운스에서 뛰고 있다.

    그는 2006년 미스 남아공 출신 모델인 흑인 소냐 보네빈티아와 결혼한 후 2명의 아들을 뒀다. 남아공 흑백 통합의 매개 구실을 할 적임자인 것이다. 199㎝의 장신 수비수로 공중전에 능하다. 모코에나와 함께 남아공 수비를 책임지는 그는 남아공월드컵 성공적 개최의 최전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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