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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야구인 허구연

  •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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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대 법학과 합격한 ‘야구부원’
  • ● NC·KT 창단 산파 구실
  • ● “돈, 인사와 거리 두고 살아와”
  • ●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사람답게’ 못 살아도 내 천직은 해설”
MBC스포츠플러스 허구연(63) 해설위원은 야구 해설계에서 독보적 존재다. 수많은 해설위원이 뜨고 졌지만,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33년의 시간을 현장에서 보냈다. ‘허구라’ ‘허프라’(허구연+인프라) 등 그를 가리키는 별명도 모두 야구와 관련됐다. 야구에 그의 인생이 오롯이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구단, 10구단 창단에 앞장섰고, 일본식 용어로 도배됐던 야구용어를 한국에 맞는 용어로 정리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연수와 코치를 경험했고, 한국에선 프로팀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 중간에 지도자 생활을 하며 빈틈이 있었지만, 그는 오랜 시간 마이크 앞을 떠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경험과 노력 면에선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허 위원과의 인터뷰를 Q&A로 풀어본다.

Q 야구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다. 시작이 궁금하다.

고향이 경남 진주다. 진주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릴 때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때 살던 집이 대신동 구덕운동장 바로 뒤쪽이었다. 운동장 부근에 살다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 축구는 한 게임도 빼놓지 않고 구경하러 다녔다. 당시 백인천 감독이 야구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부산에서 부산시장배야구대회가 열렸다. 부산의 모든 초등학교가 참가한 큰 대회였다. 그렇다보니 야구부 선수들만이 아닌 일반 학생들 중에서도 운동 능력이 빼어난 학생을 뽑아 야구팀에 합류시켰다. 그때 평소 내 운동 실력을 유심히 지켜봤던 담임선생님이 야구부에 가서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권유하더라. 쪼르르 달려가서 테스트를 받는데 야구부 감독님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일반 학생의 야구 실력이 야구부 선수를 능가한다면서.

Q 그래서 야구부에 들어간 건가.

처음에는 부산시장배대회만 참가하기로 했는데, 일반 학생이 4번 타자로 출전해 안타와 홈런을 쳐내며 우승까지 거머쥐자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집에선 야구를 하지 말라고 반대하고, 학교에선 교장선생님까지 나서서 부모님을 설득하며 나를 정식 야구부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결국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야구를 하기로 했는데 중학교 진학해서도 학교에서 나를 가만두질 않았다.

부모님은 야구를 계속하려면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부산중과 경남중 가운데 공부하는 야구부로 알려진 경남중을 선택한 것이다. 경남중은 야구부원들이 모든 수업을 다 마친 후 훈련했다. 경남중이 전국대회에서 우승할 때 좋은 활약을 펼쳤고, 공부도 전교 10등 안팎을 놓치지 않았다. 경남중 입학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때 공부하지 않는 야구부에 입단했더라면 고려대 법학과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Q 학력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다. 석사 학위까지 받았더라. 대부분의 선수는 체육과를 희망하지 않나.

어머니는 내가 경기고, 서울 법대에 진학하길 바라셨다. 그러나 야구를 하다보니 어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릴 수 없었다. 그때 생각한 것이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한 후 야구를 하면서 사법고시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법학과 커트라인을 통과했을 때 고려대 법대가 발칵 뒤집혔다. 선수가 혹시 커닝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정도였다. 고시 합격 후 야구에 더 전념할 계획이었지만, 야구부 합숙이 잦았고, 대표팀에 뽑혀 국제대회에 출전하다보니 도저히 공부할 틈이 없었다. 야구와 공부를 병행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시험 때가 되면 훈련 마치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Q 대학 졸업 후 실업팀 한일은행과 계약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1976년 일본 올스타가 방한해 한국 올스타와 친선경기를 했다. 1차전, 2차전 연속 홈런을 치며 맹활약한 후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고자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3차전은 대전에서 열렸고, 신체검사를 받느라 일주일간 운동을 못한 상태에서 경기에 뛰려다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때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7월 한여름이었다. 타석에 서 있기조차 힘든 무더위 속에서 경기를 강행해야만 했다. 당시 한일은행은 김응용 감독님이 맡았는데, 내 몸 상태를 잘 아신 터라 올스타팀 감독을 찾아가 ‘허구연이 일주일 동안 훈련을 못했으니 가급적 많이 뛰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감독은 경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나를 쉽게 빼주지 못했다. 급기야 내가 중간에 교체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고, 감독은 한 타석만 더 들어간 다음에 빠지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수비에 나섰다가 그만 사고가 났다. 2루 커버 중 주자의 강한 슬라이딩에 부딪혀 쓰러지면서 ‘뻑’ 소리와 함께 정강이뼈가 두 동강이 났다. 다리가 덜렁덜렁했을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다. 곧장 서울로 이송돼 네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그 부상이 선수로서의 내 인생을 정리해준 계기가 됐다. 수술 후 힘든 재활을 거쳐 다시 야구장에 나섰지만, 얼마 안 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선수 허구연의 장점은 모두 사라졌고, 그저 그런 야구선수로 전락한 내 모습이 견딜 수 없었다. 김응용 감독이 만류했는데도 은퇴를 결심했다.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공부를 시작한 것이 고려대 법대 대학원 입학으로 이어졌다. 50명의 응시자 중 10명을 뽑는 시험에 합격했다. 석사를 딴 덕분에 졸업 후 경기대 강단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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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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