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공포의 화요일, 목표는 에어포스 원!

다큐멘터리

  • 이흥환 < 미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5-01-04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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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바꿔야 할 판이다. 보잉 항공기가 무역센터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미국은 ‘화가 화를 부르는’ 사상 최악의 전쟁을 시작했다.
    공포의 화요일, 목표는 에어포스 원!
    9월11일 화요일 오전 7시58분. 아메리칸 항공 소속 보잉 767기 175편이 보스턴의 로간 공항 활주로를 달린다. 승객 56명과 9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다. 승객 중에는 어린 아이도 있다. 미 대륙을 횡단해 로스앤젤레스로 갈 비행기이다. 175편은 활주로를 떠나 이륙한다. 미국이 21세기 최초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2분 뒤인 8시. 이번에는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소속 보잉 767기 93편이 175편의 뒤를 바로 이어 역시 보스턴의 로간 공항을 이륙한다. 화요일의 뉴욕 대참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20여분 뒤인 8시21분. 워싱턴 근교 덜레스 공항에서는 또 한 대의 보잉 757기가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이륙했다. 이 비행기가 1시간 15분 뒤, 세계 최강의 군사국인 미국의 국방부 펜타곤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불과 몇 명뿐이었다. 미국 대통령도 모르고 있었다. 뉴욕도 워싱턴도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이었다.

    1861년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미국 영토 내에서, 미국의 항공기가 미국을 겨냥하는 무기가 되어, 이방인에 손에 미국 시민이 희생당하는 전쟁은 치러본 적이 없다.

    2001년 9월11일, 미국은 테러를 당했다. 미국의 상징이자 세계의 부와 번영,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징인 뉴욕과 워싱턴이 테러리스트들의 민간 여객기 자살 공격에 맥을 놓고 말았다.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주저앉고, 거의 같은 시간에 워싱턴의 펜타곤이 화염에 휩싸인 다음 날, ‘워싱턴포스트’의 사설 제목은 ‘20 01년 9월11일’이었다. 같은 날 ‘뉴욕타임즈’의 굵은 활자 1면 제목은 ‘미국, 당하다(U.S. Attacked)’였다.



    그날 미국은 말을 잃었다. 어지간한 테러에 정신을 못 차릴 미국이 아니다. 테러라면 이골이 날 만도 하고, 테러를 막겠다며 정보비로 해마다 300억 달러를 쏟아 붓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이번에는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 대통령은 ‘전쟁 행위(act of war)’라고 했다. 그러나 군 최고 통수권자이자 최고 정책결정자의 완곡한 표현이었을 뿐, 이미 미국은 ‘전쟁 행위’가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펜타곤 서쪽이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던 9시40분, 미 연방항공국(FAA)은 미국 상공에 떠 있던 모든 비행기를 활주로로 끌어내렸고 공항에 있던 항공기의 이륙을 금지시켰다. 미 대륙 상공에 떠 있는 모든 종류의 비행기를 파란 점으로 표시하던 연방항공국의 항공 운항 도표가 하얗게 변했다. 연방항공국 탄생 이후 처음으로 항공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1빌딩에 보잉 767기가 자살 공격을 한 시간은 8시48분. 무역센터 남쪽 2빌딩에 또 한 대의 보잉 767기가 날아와 폭발한 것은 15분 뒤인 9시3분이었다. 두 번째 테러 공격을 당한 남쪽 2빌딩이 56분 후 먼저 무너져 내렸고, 이어 30분 후에는 첫 번째 공격을 당한 북쪽 1빌딩마저 화염과 잿빛 기둥을 뿜어내며 주저앉았다.

    무역센터 빌딩이 불길에 휩싸여 있던 9시35분까지만 해도 모든 시선은 뉴욕에 가 있었다. 110층짜리 고층 빌딩의 87층부터 103층 사이, 불길을 피해 창가에 매달린 채 구조를 요청하던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리는 거짓말 같은 참상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고,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다. 워싱턴은 눈 밖이었다. 관심 돌릴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뉴욕 무역센터 폭발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총 인원 5만 명이 근무하는 초대형 고층 건물이었다. 대형 민간 항공기가 타워를 들이받는 순간, 대륙 횡단에 필요한 양인 수천 갤런의 제트 연료가 폭발하면서 만들어낸 불길의 온도는 무려 화씨 2천도를 넘어선다. 강철 기둥을 녹이기에 충분한 열이고 철제 기둥은 열에 녹아 흩어지고 만다. 불길을 잡는 스프링쿨러가 작동할 리 없다. 불길에 휩싸인 층의 잔해가 겹겹이 쌓여 압력이 가중되면서 110층 건물은 한 층 한 층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북쪽 1빌딩의 폭발음을 들었다. 처음엔 화재려니 생각했다. 91층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로 몰렸다. 78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다른 엘리베이터로 갈아 타고 44층까지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로 몰렸고 더 이상 엘리베이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비상 계단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40여 분 걸려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비행기가 건물로 돌진해 폭발했다.”(남쪽 2빌딩 91층 설계사무소 직원 캐써린 일라친스키)

    “비행기가 빌딩을 들이박았다.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았다. 같이 근무하던 51층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비상 계단을 통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계단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모두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으나 침착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51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데 50여 분이 걸렸다. 빌딩에서 빠져 나와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옆 빌딩인 센터 2빌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조건 뛰기 시작한 것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북쪽 1빌딩 51층 트레이드웹 회사 직원 빌 헌트)

    “6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4층까지 내려왔을 때 메가폰을 든 사람이 다시 올라가라고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60층으로 올라와 내 책상에 앉았다. 두 번째 비행기가 건물에 부닥쳐 폭발했을 때 다시 비상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메가폰으로 다시 올라가라고 한 사람을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북쪽 2빌딩 60층 몰건 스탠리 직원 아르투로 도밍고)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건물 전체가 요동치면서 흔들거렸다. 내려오는 데 1시간이 걸렸다. 모두 질서 정연했고, 몇몇 사람만이 공포에 떨었다.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본 순간 모두가 뛰기 시작했다.”(북쪽 1빌딩 48층 아이이치 간요 은행 직원 탐 올젠스키)

    생존자들의 말이다. 숫자로 헤아리기조차 힘든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뒤였다.

    뉴욕 대참사는 순식간에 뉴욕 시 전체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평소 재난훈련을 받아온 숙련된 긴급 구조반원과 테러 대처 전문인원 수백 명이 참사현장에 투입되었으나, 무역센터의 참사 규모는 이들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우선 무너져 내린 무역센터의 건물 규모 자체가 엄청났다.

    건축에 들어간 강철 양만 해도 20만 톤, 콘크리트는 42만5천 큐빅 야드, 유리창 총 면적이 60만 스퀘어 피트였다. 센터 내에서 운영하던 엘리베이터 숫자만도 2백39개.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쇠덩어리와 콘크리트가 쌓여 산더미를 이루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구조 통제본부 구실을 할, 2년 전에 새로 구성된 뉴욕시 비상지휘센터(ECC)가 무역센터건물 안에 입주해 있었다. 모든 재난구조 지휘는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의 손에 맡겨졌다. 그는 무역센터가 위치한 맨해튼 남부를 봉쇄했고 모든 주민들을 집에 머물도록 비상조치를 취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대한 첫 번째 테러 이후 비상대책이 새롭게 마련되어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사상 초유의 참변을 예상한 대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화선과 무선통신 서비스는 과부하가 걸렸다. 무역센터 자체가 뉴욕시 무선 통신 서비스의 주요한 연계지였지만 이미 모든 기능이 정지된 뒤였다. 뉴욕시의 중요한 교통수단인 지하철 운행이 전면 금지되었고, 줄리아니 시장을 비롯한 시 관리들은 건물 잔해물과 겹겹이 쌓인 먼지더미를 뚫고 사고현장까지 2마일을 걸어가 현장 주변에 임시 지휘통제소를 설치했다.

    4만명의 경찰관과 1만1000명의 소방관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생존자 구조를 위한 비상대책 요원도 이미 2000명이 동원됐다. 사건 직후, 이미 뉴저지 항구 건너편 리버티 파크 공원에 실려온 부상자만도 2000명을 웃돌았다. 뉴욕시 의료원은 수천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망자를 수용하기 위해 임시 시체안치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허드슨 강 주변의 부두 대부분이 임시 시체안치소로 변했다.

    뉴욕 주지사 조지 파타키는 폭발사건이 터졌을 때 한 소녀를 병문안하기 위해 워싱턴 하이츠의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사건 보고를 받고 그는 차를 주지사 사무실로 돌렸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주지사의 뉴욕시 사무실은 세계무역센터 2빌딩 57층에 입주해 있었다.

    파타키 주지사는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주 방위군 동원 명령을 내렸다. 저녁 무렵 750명의 주 방위군이 투입됐다. 뉴욕시 상공을 방위하기 위해 백악관에 즉각 군용기 파견을 요청했고, 오전 11시쯤부터 제트 전투기가 뉴욕시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경에는 해군 함정이 뉴욕항에 들어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버지니아주의 서북쪽 하늘에 나타난 붉은 색의 대형 민간항공기 한 대가 워싱턴의 포토맥 강을 향해 빠른 속도로 급강하는 게 목격된 시간은 9시33분. 포토맥 강변에 있는 레이건 내셔널 공항에 착륙할 비행기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하강 속도가 너무 빨랐고, 고도도 지나치게 낮았다. 추락 사고가 분명했다. 그때까지도 이 항공기가 펜타곤을 타격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2분 후, 이 보잉 757은 조준 사격을 하듯 정확하게 펜타곤의 서쪽을 가격했다. 펜타곤이 화염에 휩싸여 20여분이 지났을 때까지도 미 언론에서는 펜타곤 공격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펜타곤이 공격당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비로소 뉴욕과 워싱턴을 겨냥한 ‘동시’ ‘다발’의 ‘테러’ 공격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펜타곤이 비행기 자살테러 공격을 당해 불길에 휩싸였고, 뉴욕의 무역센터 역시 항공기 자살테러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미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셈이었다.

    플로리다 주의 산라소타에 내려가 있던 부시 대통령이 뉴욕 무역센터 폭발 사실을 보고 받은 시간은 9시. 남쪽 2빌딩이 두 번째 비행기 공격을 받기 불과 3분 전이었다. 9시15분, 부시 대통령은 테러공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성명발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전해진 직후인 9시35분, 이번에는 펜타곤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이 사이에 뉴욕의 맨해튼으로 이어지는 모든 다리와 지하 터널이 차단되었으며, 미 연방항공국은 전 항공기의 이륙을 금지한다.

    워싱턴에서는 다음 공격 목표물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 백악관, 의회, 국무부 등이 거론됐다. 워싱턴 시내 남동쪽 의회 부근에서 연이어 두 번의 폭발음이 들리면서 의회 건물이 폭발됐다는 말도 들렸다. 미국의 심장부 두 곳이 거의 동시에 속수무책으로 하늘의 날벼락 같은 비행기 테러를 당한 마당에 언제 어디에 불벼락이 떨어질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어느 물건 꾸러미에서 폭탄이 터질지, 어디에서 폭탄 탑재 차량이 자살 돌진을 시도할지, 또 다른 비행기가 하늘에서 언제 어디로 곤두박질 칠지 누구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시간 워싱턴에서는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해스터트 하원 의장 등 국가 요인들이 속속 워싱턴 시내의 안가로 대피하거나 워싱턴 시내를 빠져나가 비밀 대피소를 향하고 있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루이지애나로 가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이 루이지애나의 박스데일 공군 기지에 도착해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1시4분이었다. 이때부터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비난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국가와 행정부의 상징인 대통령이 한시라도 빨리 워싱턴으로 돌아와 정부가 기능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탄 에어포스 원은 루이지애나 공군기지를 떠나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오푸트 공군기지로 향했고, 플로리다 - 루이지애나 - 네브라스카 등 미 대륙을 지그재그로 오가다가 백악관으로 돌아온 것은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난 오후 7시였다.

    “국가 지도자가 뉴욕과 워싱턴이 공격을 받고 누구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던 국가 위기의 순간에 제대로 대처를 했는가?”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를 봐라. 참사의 현장을 지키고 훌륭히 시장으로서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더구나 뉴욕과 워싱턴이 핵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시 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곧바로 워싱턴으로 돌아왔어야 하며, 백악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안전시설에서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국민 앞에 모습을 나타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백악관을 비운 상태에서 체니 부통령은 백악관 상황실(Situation Room)로 들어가 부시 대통령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9월12일, 아리 플레이셔 백악관 대변인은 백악관과 에어포스 원이 테러 목표였다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사건 당일 오전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백악관 귀환을 주장했으나, 체니 부통령과 대통령 경호팀들의 만류로 워싱턴 귀환이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펜타곤에 떨어진 보잉 757기의 당초 목표물이 백악관이었다는 것이다.

    백악관이 그렇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체니 부통령은 왜 백악관에 남아 있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플레이셔 대변인은 “백악관에는 그런 위험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있다”고 궁색하게 대답했다.

    ‘뉴욕 타임즈’의 컬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는 사건 이튿날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이 늦어진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적 비행기가 백악관을 향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고 맹반격을 해댔다. 윌리엄 새파이어는 이에 대해 다음날 컬럼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 전화를 받았음을 고백한다면서, 그렇다면 체니 부통령은 왜 대통령 대신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느냐고 재반격했다.

    ‘체니 부통령이 부시 대통령 대신 모습을 보이지 않은 공식적인 이유는 바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체니 부통령은 자신이 주제넘게 나서는 것으로 비쳐질까 봐 그렇게 대처한 것 같다.’

    대통령이 없는 워싱턴을 지킨 사람은 체니 부통령이다.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을 만류한 것도 체니 부통령이다. 사건 직후부터 플로리다의 부시 대통령과 가장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 또한 체니 부통령이다.

    사건 당일 9시3분. 체니 부통령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두 번째의 납치 여객기가 뉴욕 쌍둥이 빌딩에 부딪히며 폭발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통령 특별경호팀이 그를 잡아끌다시피 백악관 지하 상황실로 대피시킨 것은 그 직후였다.

    백악관 상황실은 일명 PEOC로 불린다. 대통령 비상 작전센터(President’s Emergency Operations Center)이다. 핵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든 원형 관 구조의 이 지하 시설로 가면서 체니 부통령은 폭탄을 탑재한 비행기(또는 헬리콥터)가 백악관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체니 부통령은 즉각 플로리다의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때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돌아오기 위해 막 에어포스 원에 탔을 때였다. 체니 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막았다. 지금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종용했다.

    대통령 비상 작전센터에 국가안보보좌관인 콘돌리자 라이스와 교통부 장관 노만 미네타 등 정부 주요인사들이 모였다. 지하 작전센터에 모인 이들은 모두 6대의 항공기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이 항공기 모두 미사일 같은 역할, 즉 자살테러 공중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중 한 대는 켄터키에, 다른 한 대는 펜실베니아에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윌리엄 새파이어는 이 보고 가운데 켄터키에 추락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펜실베니아에 떨어진 비행기도 단순 추락이 아니라 승객과 승무원들이 납치범들을 제지한 결과 이 비행기의 백악관 행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백악관의 한 고위 관리는 덜레스 공항을 이륙한 아메리칸 에어라인 소속 77편 여객기가 ‘360도 돌았다’는 말을 했다. 즉 예상 항공 노선에서 방향을 바꿔 백악관을 향했었다는 것이다. 9시35분 펜타곤을 공격한 비행기가 바로 이 아메리칸 에어라인 77편이었다.

    같은 시각, 4대의 국제 항공노선 비행기가 역시 워싱턴을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백악관의 대통령 비상 작전센터에 들어왔다. 한 대는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으며, 또 한 대는 한국의 서울을 출발한 비행기였다. 그러나 이 두 대의 비행기가 공격용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으며, 이때 워싱턴 주변 상공에는 미군 전투기가 출격하고 조기 경보기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비밀 경호팀은 자신들이 입수한 위협 메시지 한 건을 부시 대통령을 수행중인 경호 요원들에게 전달했다. ‘다음 목표, 에어포스 원’이라는 메시지였다. 한 고위 관리는 테러리스트들의 이 메시지가 미국 코드명을 사용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에어포스 원이 테러리스트들의 목표였다는 것이 근거 없는 위협은 아니라고 말했다.

    대통령 선임 자문역인 카알 로우브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백악관 귀환을 주장했던 부시 대통령은 ‘허풍쟁이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내가 워싱턴 바깥에 나와 있을 수는 없다’면서 곧바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호팀은 메시지에 담긴 내용으로 볼 때 테터리스트들이 대통령의 움직임과 다음 행선지까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서 워싱턴 행을 극구 반대했다. 전투기로 에어포스 원을 밀착 경호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때이다.

    부시 대통령이 루이지애나주의 공군기지에 내려 방송용 화면을 촬영할 때도 그는 자신이 워싱턴에 가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이날 움직임과 체니 부통령의 역할 등 미 최고 지도자 2명의 위기 대처 상황을 주시해온 ‘뉴욕 타임즈’의 윌리엄 새파이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백악관 지하 작전센터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인 내 취재원의 말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체니 부통령에게 워싱턴으로 즉각 돌아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경호팀이 안전의 이유를 들어 완강히 반대했다. 국방장관을 지낸 바 있는 체니 부통령은 에어포스 원이 네브라스카의 오푸트 공군기지로 갈 것을 제안했다. 네브라스카의 공군기지는 전략공군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대통령이 국가안전위원회(NSC)를 소집해 회의를 주재할 수 있는 통신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결국 부시 대통령은 루이지애나를 떠나 네브라스카로 향했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국가 지도자들은 화요일의 대참사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주요 정책결정자 가운데 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자살테러 공격에서 가장 위급한 순간을 맞이했던 인물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다. 펜타곤을 겨냥한 자살 보잉기가 펜타곤 건물 서쪽에 내려꽂혔을 때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장관 및 합장의장 집무실이 있는 펜타곤 건물 동쪽에 있었으며, 사건 당일 내내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워싱턴을 떠나지 않고 펜타곤을 지켰다.

    펜타곤은 올해 초 대대적인 건물 수리를 마친 뒤였다. 단일 건물로는 전체 면적이 세계 최대 규모인 5층 구조물로 펜타곤 내의 근무자 수만 해도 3만명에 가깝고, 하루 출입인원 수가 6만명을 넘는, 건물이라기보다는 작은 콘크리트 도시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내부와 외부 수리 공사 때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폭발사고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 외벽을 특수 자재로 처리해 놓았다.

    모든 외부 벽에는 각 창문마다 수직 강철 빔을 박아넣었고, 외장재는 방탄용 특수물질을 사용해 강철 빔에 연결시킴으로써 폭탄이 터지더라도 폭발 잔해물을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 바깥쪽을 향해 나 있는 모든 유리창은 4cm 두께의 특수 압축유리로 교체했다. 창문 틀을 포함한 창문 하나의 무게는 무려 1600파운드에 달한다.

    공중에서 급강하해 충돌하는 대형 항공기의 테러공격을 받았음에도 충돌 부분의 건물 피해 범위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은 이 같은 특수 방어벽 구조 때문이며, 충격을 받은 부분이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은 덕분에 화재 지역의 인원들이 대피하면서 인명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뉴욕 대참사와 펜타곤 피격의 여파는 미국 전역을 뒤덮었다. 동서부 해안은 물론 남과 북의 국경선이 모두 봉쇄되었고, 주 방위군을 비롯한 미 전역의 군 기지에 비상대기 명령이 내려졌다. 미국 내 최대 규모로 4만2000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파이예트빌에 있는 브래그 기지(Fort Bragg)도 마찬가지였다. 브래그 기지 내의 병력 1000명이 24시간 근무제로 돌입한 것은 지휘관이 병사들의 생활리듬을 24시간 전투형으로 바꿨다는 것을 의미하며, 언제든 전투현장에 투입할 태세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브래그 기지는 미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해 새로운 군사 작전을 개시할 때 첫 병력이 동원되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브래그 기지 내의 제 82 공수사단은 그레나다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첫 병력을 파견했던 정예 사단이다. 제 82 공수사단은 전세계 어느 곳이든 18시간 내에 투입되며, 최소 3000명 이상으로 구성된 1개 여단 병력이 상시 동원 태세를 갖추고 있다.

    화요일의 대참사가 일어난 직후 브래그 기지의 15개 출입문에는 보안조치가 강화되었고, 모든 병력이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군 기지에만 비상이 걸린 것이 아니다. 무역센터 참변이 일어난 직후 1시간 내에 전국 주요 건물과 대형 건물들에 대한 소개 명령이 내려졌고, 주요 산업물 및 시설도 작동을 중단했다.

    그 어느 곳보다 고층 빌딩이 한곳에 밀집해 있는 뉴욕시가 최우선 보안점검 지역이었다. 뉴욕시에서 세 번째로 높은 102층짜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관망대를 비롯한 모든 시설이 9시30분에 문을 닫았다. 크라이슬러 빌딩과 록커펠러 센터 역시 시 경찰의 명령에 따라 가장 먼저 봉쇄된 건물들이다. 링컨 센터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도 숨을 멈췄다.

    맨해튼 북쪽 30마일 인디안 포인트에 있는 두 곳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었고, 제너럴모터스의 뉴욕 및 워싱턴 지역 생산공장도 문을 내리고 가동을 일시 중단했다. 허드슨 강을 끼고 있는 웨스트 포인트 군사학교는 모든 차량에 대해 폭탄 탑재 점검을 실시하면서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유엔 빌딩 역시 출입이 봉쇄되었다. 월스트리트 40번가의 72층짜리 빌딩을 포함해 맨해튼 지역에 20여 개의 고층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회장을 비롯한 맨해튼의 빌딩 소유주들은 건물 안전도 점검을 실시했으나, 공중 공격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묘책을 찾기는 힘들었다. 뉴욕시 경찰의 반 테러 전문가인 마빈 카츠는 이렇게 말했다. “날아다니는 대형 폭탄을 어떻게 피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뉴욕과 워싱턴에 불기둥을 솟게 한 테러공격의 이면에서는 정보전이 숨가쁘게 펼쳐졌다. 우선 비행기 납치범들의 기습공격과 정교한 공격법에 세계 최강의 미 정보계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미국 내에서 민간항공기를 공중납치해, 1시간 내에 뉴욕과 워싱턴 두 곳을 같은 시간대에 자살공격해 최대의 인명피해를 준다는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을 미 정보계는 과연 모르고 있었는가? 모르고 있었다면 화요일의 대참사 못지 않은 미 정보계의 대참패이다.

    아니면,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으나 미 정보계가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는가? 그랬다 해도 역시 참패이다. 어떤 경우든 고스란히 눈뜨고 앉아서 당한 꼴이다. 손쓸 겨를도 없었고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펜실베니아 주에 떨어진 항공기는 워싱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백악관이 목표물이었다는 정보가 있었다. 이 항공기는 자체 추락한 것이 아니라 백악관 행을 사전 탐지한 미 전투기에 의해 피격당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미 정보계는 무역센터와 펜타곤은 뚫렸으나 백악관은 구했다는 것을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는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의 상징성과 피해가 너무 크며, 미 정보계의 성패를 거론하기 전에 항공기 자살테러를 감행한 테러리스트들의 수법이 일반 테러와는 그 양상이 전혀 딴판이었다.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공격한 수법을 보면 테러리스트들이 과거의 실패사례를 세밀하게 연구해 공격법을 철저하게 보완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신들의 움직임이 사전에 조기 탐지될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했고, 가능하면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도록 공격효과를 극대화했다.

    1993년 세계무역센터 지하에서 발생해 6명의 희생자가 났던 차량폭탄 사건은, 이 테러의 주모자였던 람지 아메드 유세프가 미 정보요원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테러작전은 유엔본부 건물을 포함, 조지 워싱턴 다리와 링컨 터널, FBI 사무실이 있는 뉴욕빌딩 등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세프에 대한 1997년 재판의 증인이었던 정보요원 브리안 파아에 따르면 “유세프는 ‘세계무역센터와 유엔본부 등의 건물이 무너지는 희생의 맛을 보게 되면 미국이 비로소 전쟁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세프의 재판에서 쏟아져 나온 증언들은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제 2의 공격이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1993년 1차 테러에서 테러리스트들은 밴 1대를 이용한 공격의 폭발력으로는 세계무역센터를 붕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이 있고 난 후 나흘 뒤, 자신들을 해방군 제5대대(Liberation Army Fifth Battalion)라고 밝힌 한 단체는 미 민간인과 군인을 목표로 한 2차 공격이 있을 것임을 경고한 바 있다.

    더 구체적인 경고가 담긴 편지도 당시 미 정보계의 손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수사관들이 테러리스트들의 한 컴퓨터에서 찾아낸 편지에는 세계무역센터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글이 들어 있었다. 그 편지에는 ‘다음에는 아주 정교하게 공격할 것이고, WTC(세계무역센터)는 여전히 미국내의 하나의 목표가 되리라는 것을 약속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공학 및 항공학 전문가들 역시 이번 비행기 테러공격 양상을 볼 때 테러리스트들이 아주 훈련을 잘 받았으며,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행기는 물론 건축공학, 비행기 연료, 비행의 성격 등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으리라는 것이다. 즉, 제트 비행기가 폭발해 폭탄으로 작용할 때의 충격효과는 물론, 이 비행기 폭탄이 터지게 될 건축물의 구조, 충돌방향 등을 면밀히 고려했다는 것이다.

    우선 테러리스트들은 공격에 사용할 비행기 기종을 보잉 767기로 선택했다. 세계무역센터 건축에 관련했던 건축공학가 레슬리 로버트슨은 유세프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와 “무역센터 건물은 연료를 가득 채운 보잉 707기가 건물이 부닥친다 해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설계됐다”고 말한 바 있다.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다시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증언을 놓쳤을 리 없다.

    이번 공격에 사용된 비행기는 보잉 707보다 덩치가 절반 이상 큰 대형 보잉 767이었다. 보잉 767기는 최대 40만 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제트 여객기로 비행기 동체가 넓어 건물에 부딪혔을 때의 충격이 어느 항공기보다 크다.

    이 보잉 767기들이 공중 납치된 시점은 막 미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비행기 연료가 꽉 차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정도의 연료면 충격 폭발시 세계무역센터의 강철 기둥을 녹이기에 충분한 양이며, 실제 충돌에 이은 폭발 화재시의 충격이 어느 정도가 될지는 전문가조차도 상상하기 힘들다.

    무역센터 건물을 들이받는 비행기의 진입 각도 역시 전문가들은 고도로 계산된 것이었으리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센터 1건물을 들이박은 비행기는 완만한 횡경사의 각도를 유지했고, 펜타곤을 공격한 비행기의 경우, 대형 여객기를 지상 가까이에서 비행 각도를 유지해 정확하게 목표물에 충돌시킨 것은 훈련된 비행기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번 테러리스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설픈 훈련을 받고 투입된 일본의 가미카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9월11일 화요일 뉴욕의 아침은 눈이 부실 만큼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제트 비행기를 조종해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해 가는 테러리스트들은 허드슨 강을 찾아내 남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다. 공격시간으로는 이만한 조건이 없다.

    또한 이번 테러에 사용된 보잉 767기 두 대는 무역센터에 충격을 최대한으로 줄 수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치고 들어갔다. 오전 8시48분 세계무역센터 1건물을 공격한 보잉 767은 센터의 96층과 103층인 상단부에, 15분 후인 오전 9시3분 세계무역센터 2건물을 공격한 같은 기종의 비행기는 건물의 87층에서 93층 사이를 들이박았다. 건물에 최대의 충격을 가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들이박아 희생자 수를 극대화한 것이다

    별개의 동떨어진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를 거의 동시에 공중납치한 것과, 보안검색 장치를 쉽게 통과할 수 있는 칼을 무기로 반입한 것 역시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 검색장치 통과에는 공항 직원이 관련됐을 가능성도 있다.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그렸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은 자살테러 항공기 공격을 받은 지 100분만에 사라졌다. 센터 건물 기념 우편엽서가 이제는 진귀품이 될지도 모른다.

    경고도 조짐도 예비조치도 없이 한순간에 화염에 휩싸인 펜타곤은 헐리우드의 상상력조차 미처 따라잡기 어려운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스크린이 아닌 현장에서 생생하게 연출되었다.

    처음 벌어진 일이다. 미국의 국가 안보에 대한 개념도, 테러에 대한 개념도, 이슬람권에 대한 개념도, 재난구조와 비상대처에 대한 개념도, 항공 안전에 대한 개념도 바뀔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바뀔 것은 미국이 선언한 테러와의 전쟁 형태이다. 이름도 없이 전세계 각국에 흩어져 숨어 다니는 적, 특정 지역을 점령해 가둬둘 수도 없는 무형의 적, 게다가 뿌리채 뽑을 수 없는 적이다. 미국은 이제 화가 화를 부르는 전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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