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책임전가의 명수, 비효율의 대명사”

기업인들이 보는 공무원 실력

  • 박성원 < 한경비즈니스 기자 > parker49@kbizweek.com

    입력2005-01-11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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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 경영인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설립된 이유는 단순하다. 정부와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특히 시대 흐름에 뒤진 정치인들에게 경제공부를 시키면서 기업들이 경제활동, 곧 이윤활동을 하는 데 걸림돌을 제거해 달라는 뜻에서 이와 같은 이익단체를 세웠다. 우리의 전경련은 일본의 경단련을 모방한 것이다. 한편 정부는 이런 단체를 휘어잡아 각 기업의 활동을 통제한다. 서로 밀고 당기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민간기업과 정부. 양자는 상생할 수 없는 관계일까. 현재로선 그렇다는 대답만 들린다. 민간기업은 정부의 간섭을 줄이는 ‘작은 정부’를 외치고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자율규제라는 가면을 쓰고 각종 규제로 기업활동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는 면밀히 따져봐야겠지만, 아직도 양자가 으르렁거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민간기업, 즉 ‘업자’들은 공무원의 경쟁력에 그리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업자들에게 공무원 조직은 비효율의 대명사, 책임 전가의 명수, 전시행정의 표본, 그리고 로비의 대상이다. 공무원들은 상대하기 싫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존재, 그래서 난처한 존재인 셈이다.

    감사 의식해 억지로 일 만들기

    국내 중견기업 실무자가 공무원들과 일하면서 겪은 경험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현장에서 들리는 얘기들을 한 조각씩 맞춰 보면 민간기업에서 느끼는 공무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전산장비를 개발하는 A기업 최진철(가명·36) 과장은 지난해 이맘때 정부 모 부처가 입찰에 부친 장비 공급권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지난해 초부터 IT 붐이 식으면서 민간기업을 상대로 하는 매출이 상당수 줄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선 매출이 줄어 울상을 지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전년도 수준은 유지해야 했다. 영업부에서 근무하는 최과장은 또박또박 현금으로 결제해주는 정부 물량을 찾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판매처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정부 모 부처에서 전산장비를 구매하는 수주를 입찰한다는 공고를 보고 입찰에 참가했다. 마지막까지 경쟁한 업체는 세 군데.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최과장은 최종 낙찰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문제의 정부 부처는 1주간 협상기간을 갖자고 요청했다. 우선협상 대상자로 지정되긴 했지만 최종 계약까지 1주일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타당한 요구일 수도 있겠다 싶어 최과장은 사장에게 그대로 보고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부처 실무자들은 최과장이 작성한 장비 공급 계획서를 꼼꼼하게 훑어봤다. 이미 입찰 경쟁에서 승리해 사실상 타당성이 증명된 것이었지만 공무원들은 ‘관행상’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1주일 동안 최과장이 동료 직원들과 함께 다시 작성한 계획서는 무려 책 한 권 분량이었다. 이 과정에 공급가의 3%가 깎였고, 부가 서비스도 대폭 늘었다. 그럴 때마다 공무원들은 “1주일 협상기간에 한 일이 있어야 감사에서 지적 받지 않는다”는 이유를 늘어놨다. 마치 의무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처럼 말하는 데서 기업의 적정이윤 논리는 먹혀들지 않았다.

    답답한 최과장이 공무원들을 많이 상대해온 친구들에게 이런 사정을 털어놓자, 이들은 “정부는 갑이다. 그리고 기업은 을이다. 갑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무원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말만 해주었다.

    게다가 공무원들은 은연중에 “당신들은 우선협상 대상자일 뿐이다. 다른 협상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측 요구대로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최과장에게 해주었다. 물론 강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지만, 영업을 책임지고 있는 최과장으로서는 무시하기 힘든 말이었다.

    협상기간 중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직원을 몇 명 상주시켜 시스템이 정상 가동되는지 체크해달라’는 요구였다.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것이 관례지만 직원까지 파견해 이를 봐달라는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회사에 일없는 직원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돈인 이들이 회사일을 제쳐두고 그 부서에 상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부서 실무자들은 막무가내였다. 이번에도 최과장이 졌다. 최과장이 3개월 동안 파견해 도와주기로 하고 1주일 동안 계속된 실무협상은 막을 내렸다. 그래도 계약은 성사된 것이다.

    “솔직히 공무원의 실상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오전은 회의로 끝내기 일쑤고, 저녁 6시면 어김없이 퇴근합니다. 회의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결재서류를 보면 결재 칸이 대 여섯 개는 되더군요. 저도 이곳에 파견돼 결재서류를 만들어 봤는데, 지적을 받아 수차례 다시 작성하곤 했습니다. 주로 내용보다는 형식을 문제삼더군요. 어느 공무원은 ‘결재라인이 많아야 책임이 작게 돌아온다’고 귀띔해주기도 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겁니다. 나와 함께 일했던 공무원이 휴대폰도 없고, 비상연락망도 가르쳐 주지 않아 답답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남들 다 갖고 있는 휴대폰을 구입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슬쩍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정부 부처는 사람이 일하는 곳이 아니다. 조직이 일하는 곳이다. 나에게 연락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다’고 하더군요.”

    최과장이 가장 불만스럽게 여긴 것은 공무원들이 아주 세세한 자료를 원한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내용까지 모두 적어야 했다. 그가 그 부서에서 한 달 동안 일하면서 만든 서류는 자그마치 백과사전 두께의 분량이었다. 진을 뺄 정도로 두껍게 서류를 작성하면, 이를 훑어본 공무원은 다시 요약본을 요구했다. 일을 위해 일을 하는 식이었다. 효율이나 일의 목표 등은 뒷전이었다.

    최과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공무원사회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고 한다. 그는 올초 정부 부처 파견근무를 마치고 해외영업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공무원들의 행동이 자신에게 전염될까봐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어쩌면 최과장은 순진한 축에 끼는지 모른다. 정부에는 나름의 행동방침이 있고, 기업에는 기업의 논리가 있는 것이다. 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둘 사이는 영원히 좁혀질 수 없다. 어떤 기업들은 공무원과 잘 지내면서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서울 삼성동에 있는 C기업이 대표적이다. 이 업체는 정부 물량을 잘 수주하는 것으로 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비결이 무엇일까.

    “공무원은 상대하기 나름이에요. 이들과 잘 지내려면 이들의 욕구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공무원의 생존원리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결국 기업 손해예요. 상대방 처지를 고려해 내 이익을 취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기본이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이 업체의 매출 중 70%는 정부 물량이다. 정부 물량 수주를 주로 하다보니 현금 유동성이 좋다. 민간업체는 대개의 경우 어음을 끊어주는 것이 관례지만 정부 부처는 현금으로 결제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아예 사내 영업팀 중 3분의 2를 공공사업 분야만 맡는 인력으로 구성, 정부 부처의 주문을 따내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러나 이 회사 심성철(가명·52) 사장은 정부 부처를 상대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익 부분은 협상하기 힘들다. 감사를 받는 정부 부처는 조금이라도 더 깎으려 하고 기업은 더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들을 오랫동안 상대해온 심사장은 공무원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입장이다. 이를 통해 얻는 것이 많아서다. 이런 그의 노력이 장기간 정부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원동력이 됐다.

    심사장의 지론은 공무원과 사업하려면 때론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상 계약을 맺으려고 하면 공무원은 상당 부분 현실과 동떨어진 예산 계획을 수립해 놓기 십상이다. 때로는 프로젝트의 핵심 부분에 대한 예산 계획이 엉망이어서 공급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예산이 애초 책정한 것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심사장은 손해를 감수하고 필요한 시스템을 무료로 공급해 준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부처에 알려질 경우 담당 공무원은 징계를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껏 사귀어 놓은 실무자가 징계를 받거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면 심사장은 다른 공무원과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심사장은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그 프로젝트를 마치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이 점점 알려지면서 심사장은 오히려 정부 부처 물량을 많이 수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무원들은 항상 예산과 감사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민감하게 채워줘야 합니다. 실무자가 피해를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지 않으면 정부를 상대로 일 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일단 공무원들이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만 만든다면 그 다음엔 일이 쉽습니다. 이들은 같은 편을 굉장히 따지거든요.”

    공무원에 대한 심사장의 세심한 배려는 상상을 넘는다. 공무원과의 회식자리에서 그의 노하우가 드러난다. 최근 심사장은 담당 공무원과 실무팀장을 데리고 서울 모처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고객들을 모시는 자리이니만큼 당연히 심사장이 저녁 식사 대접을 해야겠지만 그는 계산서를 슬쩍 부서 팀장에게 건넨다.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팀장은 어색하지 않게 그 계산서를 받고 계산한다. 그 뒤 맥주집으로 2차를 가고, 노래방으로 3차를 가도 모두 그 팀장이 계산한다.

    계산은 그 팀장이 하는 것이지만 실제 돈을 내는 쪽은 심사장이다. 계산대에서 심사장이 돈을 내지는 않지만 훗날 적당한 때에 돈을 건넨다. 이렇듯 쿠션을 이용해 우회적으로 계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무원이 ‘업자’에게 대접을 받는 것이 뇌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99년에 공무원직장협의회가 정부 각 부처에 설립되면서 이와 같은 ‘조심’은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민간기업의 노동조합 같은 이 협의회는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서로 단속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구속이다.

    “능력 있는 공무원도 많습니다. 고시에 패스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박사 출신의 공무원도 상당수예요. 그러나 공무원 조직의 풍토가 이들의 능력 발휘를 막는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부처에 들어온 공무원은 처음엔 자율적으로 일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분위기에 길들여지게 되죠. 그러면서 자율은 타율로 바뀝니다. 이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다 보면 창의적 발상이라는 말은 무색해지는 거죠.”

    심사장도 공무원의 경쟁력 부분에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공무원들의 처지와 사고방식을 오히려 역이용해 탄탄한 비즈니스를 꾸려간다. 공무원도 엄연한 고객이니 만큼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줘야 사업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지금은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김석중(40·가명)사장은 좀더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준다. 그가 1997년 D기업 부장을 맡고 있을 때다. 지금은 부도가 났지만 당시만 해도 막강한 재력을 과시한 중견 회사였다. IMF를 맞아 어려워진 이 회사는 나름대로 자산 매각 계획을 세워 빚을 갚으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던 중 이 회사 사장은 한 가지 꾀를 냈다. 땅값이 떨어져 처치가 곤란한 땅을 팔기 위해 지역 공무원과 결탁하기로 한 것이다. 사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그 지역 단체장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땅의 형질을 변경해주면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단체장은 기꺼이 이 ‘딜’에 동의했다. 그 뒤 둘은 지역 발전을 위한 대단위 사업을 벌인다고 떠들어댔고, 민간기업과 지방정부가 합작으로 법인을 세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기초 없는 사상누각이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 결국 그 프로젝트는 유명무실화됐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이 과정에 비록 그 회사는 부도를 맞았지만, 그 지역 단체장은 상당한 자금을 챙겼다는 것이 당시 이 일을 맡아 진행했던 김사장의 전언이다. 그는 이 일이 정치적으로 비화할까봐 폭로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 겪은 공무원 사회의 비리 등으로 “다시는 공무원과 일하기 싫다”고 말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샐러리맨이 회사 오너가 시키는 일을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도 후회하는 일입니다. 회사 사장이나 그 지역 단체장이나 모두 사적인 이익을 바라고 한 일이기 때문에 어쩌면 밑에서 일한 공무원들에게는 책임이 없을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그 일을 하면서 공무원 세계를 들여다 본 기억은 잊혀지지 않아요. 예산의 편성 목적이나 사업의 타당성 등은 뒷전인 채 그들은 무조건 다음해 예산을 타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올해 책정된 예산의 90% 이상을 사용해야 다음 예산도 무리 없이 전년 수준으로 타낼 수 있는 겁니다. 이들의 노하우는 예산의 95%를 넘기지 않고 대략 91∼94% 맞추는 거죠. 그래놓고 안 간 출장도 갔다고 보고하는 등 월급 외에 타 가는 돈이 적지 않았습니다. 숫자놀음에는 귀신입니다. 우리나라 공무원의 경쟁력이 이 수준이에요.”

    건설업계와 전자업계에서 들려주는 두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자. 국내 중견 건설업체인 A사 경리부 김성욱 과장(38)은 법인세와 지방세를 낼 때만 되면 골치가 아프다. 언제 세무공무원이 들이닥칠지 몰라서다. ‘세금을 낼 만큼 준비하는 경리직원이 유능하다’는 말처럼 경리부 직원들은 회사가 부담할 수 있는 세금액수를 항상 머리 속에 넣어 둔다.

    사실 회사 경리파트와 세무공무원 사이에 ‘쇼부 친다’는 말은 더 이상 숨길 일도 아니다. 특히 건설업계의 경우 관련 법령이 워낙 방대하고 건설자재 등 회계감사에서 숨길 수 있는 부분이 많아 적정 세금을 매기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세무공무원이 건설회사를 조사할 때는 아예 매출의 몇 %를 세금으로 거둬들이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시작한다. 이런 관행 때문에 세무공무원과 경리부 직원과는 말없는 신경전을 벌인다는 것이 김과장의 말이다.

    이렇듯 ‘구린 구석’이 있기 때문에 세무공무원과 회사 직원간에 유착관계가 생긴다. 심지어는 회사 법인카드를 관련 세무공무원에게 건네기도 한다. 공무원들은 또 여름 휴가 갈 때나 출장 갈 때 회사로 전화해 돈을 뜯어간다. 부서 야유회라도 있으면 보조금으로 수백만원을 건네 받는다.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B기업 최유선(39) 총무부장은 최근 고용보험 문제로 공무원과 승강이를 벌인 일이 불쾌하기만 하다. 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회사에 정부가 이런 서비스도 해주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게 최부장의 생각이다. 고용보험은 회사와 직원이 분담하는 보험이다. 대략 회사가 직원 분담금의 3배 정도를 낸다. 이를 통해 직원들이 직무와 관련된 교육을 받으면 정부는 일정 금액을 교육비 보조 명목으로 회사에 건넨다. 이런 기능을 하는 것이 고용보험이다.

    그러나 규정이 까다로워 교육비를 환급 받을 수 있는 교육이 한정돼 있고, 또 지역마다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다. 회사에서 직원들을 위해 교육과정을 만들어 시행한 뒤, 이를 환급 받으려고 해도 규정에 없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최과장도 그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 담당 공무원들은 “명문화된 규정이 없기 때문에 환급을 받으려면 유사한 사례를 갖고 오든지 아니면 해당 규정을 찾아 오라”는 말만 하고 끝내 교육비를 돌려주지 않았다.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해결될 일인데도 자신이 편하기 위해 무조건 발을 빼는 것이다.

    공무원이 이처럼 우울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알든 모르든 공무원의 도움을 받고 살고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과 유기적인 협조관계가 없다면 자원과 기술력이 선진국과 비교해 취약한 국내 산업은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발전의 과도기에 국내 대기업이 자리를 잡은 데는 정부의 도움이 컸다.

    한국 공무원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이 있다. 일본에서 정보통신 관련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K씨는 한국의 발전된 IT기술에 놀라워하면서 “정보통신부 공무원을 일본으로 수입하고 싶다”는 말까지 한다. 오랫동안 한국 정부와 사업을 벌여온 K씨는 “한국의 정보통신부 관리들이 IT 산업을 이만큼 발전시켜 놓았다”고 칭찬했다. 일본은 아직도 전자정부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으며, 낙후된 금융 시스템은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보려고 그는 최근 일본 정부 관리들과 함께 국내 IT기업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사실 K씨가 칭찬한 대로 국내 정보통신부와 산업자원부 등 정부 부처에는 뛰어난 실력을 갖춘 공무원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고시 출신도 많고, 외부에서 영입된 민간 출신 공무원도 다수 있다. 이들은 국내 정보통신 정책의 뼈대를 세우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다. 그들 중 몇몇은 대기업으로 스카웃돼 뛰어난 능력을 펼치기도 한다.

    정보통신부 정책과에서 근무하는 S씨도 실력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미국·일본·유럽에 있는 정보통신업계의 흐름을 꿰고 있을 뿐 아니라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다. 박사 출신인 그는 원래 고시파는 아니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케이스. 비록 외부에서 영입됐지만 공무원으로서 일한 지난 3년간은 민간기업이 싫어질 정도였다.

    지난해 그는 국내 굴지의 전자통신업체들이 동기식과 비동기식 통신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벌인 행동 때문에 골치를 썩었다. 자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내용을 번복하는 것이 민간업체들의 특성이다. 그는 겉으로는 정부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이익을 높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이들 대기업의 행태를 보면서 “믿을 놈 없다”는 말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자사가 손해를 입더라도 경쟁업체에 타격을 가하는 전략이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수행하는 회사의 실무자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처럼 기업의 이익 추구는 흔히 경계선을 넘나든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다반사다.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기업의 속성을 감시해야 하는 공무원의 의식은 어찌 보면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산업자원부 장수철 공무원직장협의회장은 고충처리위원회에 2년간 파견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는 기업이 공무원에 대해 어떤 불만을 갖고 있는지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정부의 권위적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고 그는 믿는다. 물론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는 기업들이 공무원의 바뀐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 점이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특히 인가나 허가를 내줄 때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제출한 서류에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말해도 기업인들은 “혹시 뭘 바라고 퇴짜를 놓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공무원이 변화하려고 해도 이런 시각이 고쳐지지 않는 한 변화의 속도는 느려질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그도 정부에서 10여 년간 일하면서 기업들이 산자부 등 정부 부처 공무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이윤창출을 위해 때때로 기업윤리를 외면한다. 때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 분야까지 넘나들며 이익을 챙긴다. 기업의 생리와 속성은 이런 측면에서 공무원들의 시각과 어긋난다. 장회장은 “기업인들은 국내 공무원들이 기업의 생리를 모르는 보수파라고 생각하지만 외국의 경우는 우리보다 더하다”고 말한다.

    “최근 캐나다의 공무원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와 우리 경제를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지만 이들의 생각은 우리 공무원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캐나다 정부가 수입원을 확대하기 위해 지역 카지노 사업자들의 사업권을 취소시킵니다. 그리고 정부가 카지노사업을 독점 운영합니다. 수익사업을 확대해 세원을 확보하면 국민들은 세금을 적게 내고, 정부도 국민의 이해를 충족시키면서 수익원을 다양화하는 등 양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죠. 대중교통사업도 정부가 주도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한다면 난리가 나겠죠.”

    아무튼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공무원 사회도 변화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직장협의회가 설립되면서 이와 같은 흐름이 가속화됐다고 그는 말한다.

    “요즘은 공무원들도 자기계발에 많이 투자합니다. 대기업 수준의 해외출장이나 연수제도가 있어 현실은 괜찮은 편입니다. 다만 행시 출신을 중심으로 이런 혜택이 주어지고, 혜택을 받은 공무원들 일부가 이를 외유(外遊)처럼 이용하는 게 문제죠. 이들이 외국에서 보고들은 좋은 점들을 정부의 경쟁력 강화에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외국 유학이 승진과 관계가 없을 뿐더러 이들의 경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분위기가 없어서입니다.”

    그는 다시 말을 잇는다.

    “더러워진 우물에 아무리 새 물을 집어넣어 보세요. 그때뿐입니다. 더러워진 우물은 자체적으로 새 물을 생산할 수 있어야 깨끗해집니다. 공직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외부의 압력 때문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의 핵심에는 행시 출신과 비행시 출신 공무원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고시 출신이 기득권을 일부 희생하지 않는다면 우물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일본과 미국을 넘나들며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 P씨는 언젠가 기자에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젠 기업인들이 정부 서비스를 선택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한국의 법인세는 유럽이나 미국의 법인세보다 적습니다. 그런데도 사업하기엔 외국이 낫다고 합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외국에선 세금은 많이 내도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많고, 기업 환경이 좋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기업들, 본사를 외국으로 옮긴다고 하잖아요.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지만 저는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정부를 선택하고 지역을 선택하는 노력이라고 봅니다. 정부 서비스도 이젠 선택을 받는 시대가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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