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현대사와 함께한 신동아 700호

‘조선민족 대경륜’ 제시한 86년

‘전람회, 토의장, 온양소’ 된 최장기 종합잡지

  • 입력2018-01-08 09: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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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년 11월에 창간된 ‘신동아’가 지령 700호를 맞았다. 2009년 9월에 600호 발행 이후 100호를 더한 새로운 기록이다. 86년의 연륜을 쌓으면서 국내 종합잡지 사상 최초로 이룩한 기록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로 1936년 8월 통권 59호 발간 후 폐간됐다가 1964년 9월에 복간돼 오늘에 이르는 동안 28년의 공백이 있었다. 중단 없이 발행됐다면 3년 전 1000호라는 초유의 대기록을 달성했을 터. 하지만 잡지 발행이 중단된 침묵의 기간에도 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현대사와 함께한 신동아 86년의 언론사적 의미를 되돌아봤다.
    신동아 700호 발행의 도정(道程)은 우리 잡지사를 포함하여 전체 한국 언론의 핵심적인 발자취를 함축한다. 동아일보 자매지로 창간된 신동아는 잡지계에 일대 선풍을 불러일으켰고, 잡지 저널리즘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안정된 경영기반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편집 면에서도 충실을 기할 수 있었고, 개인의 주장보다는 민족의 공기(公器)로서 역할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다른 신문사의 잡지 발행을 자극해 이른바 ‘신문잡지’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잡지문화를 선도하였다. (김근수, ‘한국잡지사’, 청록출판사, 1980)

    잡지 발행의 세 가지 어려움

    1931년 11월 창간호,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1931](왼쪽부터)

    1931년 11월 창간호,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1931](왼쪽부터)

    신동아 창간 무렵에 발간되던 대표적 잡지는 ‘혜성’(개벽사, 1931.3~1932.4) ‘동광’(흥사단; 수양동우회, 1926.1~1933.1, 통권 40호) ‘삼천리’(김동환, 1929.6~1942.1) ‘비판’(송봉우, 1930.1~1940)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여기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잡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대부분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형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잡지를 발행하려면 세 가지 난관[三難]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원고난, 경영난, 검열난이다. 다양한 주제의 수준 높은 원고를 쓸 수 있는 전문가가 많아야 좋은 잡지를 편집할 수 있는데, 필자가 극히 한정된 사회였다. 필자 한 사람이 같은 잡지에 필명을 달리하여 두 편 이상을 쓰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필자난을 극복하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경영의 어려움도 컸다. 독자는 제한돼 있었고, 광고를 낼 만한 업체도 드물었다. 구독료와 광고료가 미미하였으니 경영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총독부의 빈틈없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 발행이 불가능했다. 정기간행물의 생명인 발행 날짜를 지키지 못하거나 원고를 몰수당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잡지의 수명이 짧았다. 창간호가 종간호로 끝나는 잡지가 흔히 있었는데 이는 이 같은 3중의 장애물을 뛰어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신동아는 잡지 발행의 세 가지 어려움을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한창 사세가 신장되는 중이었고, 신동아는 독립 경영의 군소 잡지와는 달리 신문사에서 발행했으므로 재정적인 애로도 없었다. 따라서 편집에도 충실을 기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우수한 필진을 비롯하여 신문사의 영향력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동원할 수 있었으니 원고난 해소도 개인잡지보다는 훨씬 유리했다. 선전과 홍보의 조건도 유리했다. 동아일보 지면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잡지의 지명도를 높였고 전국에 보급망이 깔려 있어 판매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만 최대 난관인 검열만은 피해 갈 수 없는 장벽이었다. 

    신동아는 개인의 주장이 논조를 좌우하는 소규모 잡지와 달리 동아일보의 사시를 반영하는 제작 방침을 견지했다. 사장 송진우는 창간사에서 “조선 민족은 바야흐로 대각성, 대단결, 대활동의 효두(曉頭·먼동이 트기 전의 이른 새벽)에 섰다”고 말했다. 조선 민족이 크게 각성하고 단결하여 활동할 새로운 새벽을 맞았는데, “사상적 대온양(大醞釀·마음속에 어떠한 생각을 은근히 품고 있음)은 민족이 포함한 특색 있는 모든 사상가, 경륜의 의견을 민족 대중 앞에 제시하여 활발하게 비판하고 흡수케 함에 있다”고 잡지 발행의 의미를 규정했다. 



    “이러한 속에서 민족 다중이 공인하는 가장 유력한 민족적 경륜이 발생되는 것이니 월간 신동아의 사명은 정(正)히 이곳에 있는 것이다. 신동아는 조선 민족 전도의 대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의장이요, 온양소이다. 그러므로 신동아는 어느 일당 일파의 선전기관이 아니다. 하물며 어느 일개인 또는 수개인의 전유(專有) 기관이 아니다. 명실이 다 같은 조선 민족의 공기(公器)다.” 

    이 같은 선언이 그 후 편집에 그대로 지켜졌는지 여부는 논란이 있겠지만 조선민족의 공기가 되겠다는 잡지의 방향을 제시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망라주의 편집

    1932년 3월호(통권 5호)에 3편의 기사가 게재 금지당했다, 신동아는 1932년 11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 ‘독자작품모집’으로 문인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시작했다. [1932](왼쪽부터)

    1932년 3월호(통권 5호)에 3편의 기사가 게재 금지당했다, 신동아는 1932년 11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 ‘독자작품모집’으로 문인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시작했다. [1932](왼쪽부터)

    편집 방침은 ‘망라주의’였다. 당시 신동아 편집을 주관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설의식(필명 小梧)은 편집후기에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문예 등 각 방면을 망라하여 우리의 지식과 문견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 만한 것이면 모두 다 취하기로” 하는 것이 망라주의라고 밝혔다. 창간호는 사진 화보와 만화를 앞에 넣고 과학란, 연예란, 스포츠란, 문예란을 두었다. 권두논문 ‘농가부채 오억원, 조선농촌은 어디로 가나?(徐椿)’를 비롯해 ‘동서고금 사상가열전’ ‘해외문단 총관(總觀)’ 등을 시리즈로 연재하는 등 국내 문제와 함께 긴장감이 고조되는 국제 문제에 대한 글을 고루 다루었다. 

    ‘망라주의’ 편집은 동아일보의 조직과 편집진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그 이전의 잡지가 개인의 성격이나 취미에 따라 내용이 좌우되고 주관성이 강조된 데 비해 신동아 출현으로 잡지가 민족의 공기라는 성격을 나타내게 되고 민족의 대변지적인 구실을 담당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백순재, ‘잡지를 통해 본 일제시대의 근대화 운동’, 신동아, 1966.6) 

    재정에 어려움이 없었던 덕에 다른 잡지가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의 호화판으로 제작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전국에 판매할 수 있었다. 창간호는 발매 부수가 2만 부를 돌파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판매 실적을 올려 절판됐고, 제2호는 3판까지 발행해 1만5000부 내외, 제3호부터는 1만 부에서 9000부 선으로 고정됐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의 발행 부수는 많아야 2000~3000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의 발행 부수가 6만 부를 넘은 적이 없던 사정과 비교한다면 잡지 판매 부수만 보더라도 크게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난관인 검열에선 신동아도 다른 잡지와 같은 처지였다. 총독부 검열로 인한 게재금지를 피할 수 없었다. 1932년 3월호(통권 5호)에 3편의 기사가 게재금지를 당한 것을 비롯해 ‘사고(社告)’로 게재금지를 밝힌 경우가 여러 건 있었다. (1932년 3월·6월·11월·12월호, 1933년 1월·2월호 ‘사고’) 편집국장 이광수의 글을 비롯해 김동인·박계주·황순원의 시와 소설도 금지됐고, 국제 정세를 논한 글이 많이 삭제됐다. 

    신동아는 외형적으로는 독립된 형식을 취했는데 사장은 송진우, 판권란의 ‘저작 겸 발행인’은 양원모(梁源模)였다. 양원모는 동아일보 영업국장이었고 실지 제작 총괄은 편집국장 대리 설의식(薛義植)이었다. ‘신동아’라는 제호를 붙인 사람도 설의식이었다.(주요섭, ‘제호와 명명자’, ‘삼천리’, 1932년 2월호, p.49)

    학자, 언론인, 문인 편집진

    제2차 편집진이 구성된 신동아 창간 2주년 1933년 11월호. [1933]

    제2차 편집진이 구성된 신동아 창간 2주년 1933년 11월호. [1933]

    일제강점기 신동아 편집진은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차 진용은 설의식을 책임자로 하고 전담기자 몇 사람이 제작을 맡았던 1931년 9월부터 1932년 11월까지 약 1년이다. 9월 창간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2개월이 지연돼 11월에 창간했는데 설의식 주도 아래 창간호 준비가 거의 끝났을 무렵인 10월 1일 자로 주요섭이 잡지 전담기자로 입사했다. 이어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 김자혜(金慈惠)가 입사(1932.4.1)하고 이해 10월에는 시인 이은상이 입사했다. 

    1933년 1월 여성지 ‘신가정’(현재의 여성동아)을 새로 창간하자 신동아와 신가정 제작에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신동아 창간 2주년인 1933년 11월 두 잡지를 제작할 ‘잡지부’를 신설했다. 잡지부 독립과 함께 주요섭은 ‘잡지부장’에 임명되었다. 신문사 소속 최초의 잡지부장이다. 주요섭이 잡지부장으로 승진한 1933년 11월부터 제2차 편집진이 구성된다. 이때의 진용은 부장 주요섭, 기자로는 김자혜·이은상·고형곤(1933년 5월 입사)·최영수(6월 입사), 여기자 김원경(金元經, 1934년 1월 입사) 등이 있었다. 이은상과 두 여기자 김자혜, 김원경은 ‘신가정’ 편집 담당이었다. 

    제3차 진용은 1934년 8월, 주요섭이 물러나고 최승만이 부장으로 입사한 뒤부터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될 때까지다. 이 기간에는 부장 최승만을 비롯하여 기자로는 이은상·고형곤·최영수·김원경이 근무했고, 변영로(1933.9.12~1935.4.11일까지 잡지부에 근무하다 정치부로 옮김), 황신덕(1935.6.7 입사)이 있었다. 화가 청전 이상범, 작가 이무영, 박승호도 잡지 제작에 참여한다. 일제강점기 신동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후에 학자 또는 문인으로 대성했음을 보면 신동아 편집진이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 인물을 살펴보자. 


    최승만 부장 입사로 제3차 편집진이 구성됐다, [1934]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 [1936](왼쪽부터)

    최승만 부장 입사로 제3차 편집진이 구성됐다, [1934]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 [1936](왼쪽부터)

    설의식(小梧 薛義植·1900~1954) : 도쿄 동양대학 문화학과에 입학(1921.4)했다가 같은 해 8월 중퇴. 동아일보 입사(1922.5) 후 사회부, 지방부 근무. 사회부장(1924.12), 도쿄 특파원(1927.5), 편집국장 대리(1929.11), 신동아 편집 겸임(1932.11 창간부터 1933.11까지), 편집국장(1935.3). 국장 재임 중인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를 떠났다. 광복 후 1945년 12월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 주간 취임. 좌익에 대항하는 시론을 쓰고 1946년 2월부터 12월까지 ‘삼수록(三隨錄)’ 연재. 1947년 2월 퇴임 후 새한민보(순간)를 창간, 사장 취임.

    잡지부장 주요섭 최승만

    1964년 9월 복간된 신동아. [1964]

    1964년 9월 복간된 신동아. [1964]

    주요섭(朱耀燮·1902~1972) : 시인이자 언론인. 주요한의 동생이다. 중국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을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도 공부했다. 형 주요한도 후장대학 출신으로 동아일보에 근무했다. 주요섭은 1934년 8월 동아일보에서 퇴사하고 베이징 보인대학(輔仁大學) 교수, 광복 후 상호출판사 주간(1947~1950)을 거쳐 코리아타임스 논설위원(1950.11~1951.10),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1955~1960), 코리언 리퍼블릭(현 코리아헤럴드) 사장(1960~1961). 번역가협회 회장, 한·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고형곤(高亨坤·1906~2004) : 1933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졸업, 1969년 철학박사(서울대학교). 연희전문 철학과 교수(1938∼1944),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1947∼1959), 학술원 회원(1951∼1981), 1959년 전북대학교 총장, 한국철학회 회장. 서울시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고건의 아버지. 

    이은상(李殷相·1903~1982) : 시조시인.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수학,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1931), 신동아 기자(1932.10~1935.4), 조선일보 고문 겸 출판국 주간(1935),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1942~1945), 호남신문 사장(1945), 대구 청구대학교·서울대학교·영남대학교 교수(1950~1973), 전남대학교 재단 이사장(1953), 예술원 회원(1954).

    최영수(崔永秀) : 다양한 재능을 지닌 만화가이자 유머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1933년 6월 동아일보 입사 후 신동아에 만화를 그리고 만문(漫文)을 썼다. 신동아 1934년 5월호에 실린 ‘조선 신문만화의 과거 현재 급 장래’는 신문만화를 최초로 정리한 글이다.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거쳐 6·25전쟁이 일어나던 때에는 출판국장으로 재직 중 납북. 방송을 통하여 유머 소설가로도 활약하고 시나리오도 집필해서 ‘죄 없는 죄인’ ‘여명’ 등 역작을 내놓음. 

    최승만(崔承萬·1897~1984) : 일본 동경사립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 졸업, 1929~1930년 미국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대학 General Security과 졸업. 동경 유학 때인 1919년 주요한·김동인 등과 순수문예 동인지 ‘창조’ 동인. 1934년 8월 동아일보 입사, 주요섭의 후임 잡지부장으로 신동아-신가정 편집.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퇴사. 최승만은 함께 구속된 이길용(운동부), 현진건(사회부장), 신낙균(사진과장), 서영호(사진부)와 앞으로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으며, 만일 또다시 다른 사건에 연루된다면 이번 사건의 책임에 가중하여 엄벌을 각오한다는 각서를 쓰고 40일 만에 풀려나왔다. 신동아와 신가정도 이때 정간 처분을 당했다. 미군정청 문교부교화국장(1945~1948), 연희대학교 교수(1948~1951), 제주도지사(1951~1953), 제주대학장(1952~1953),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1954~1956), 인하공과대학장(1956~1961). 

    박승호(朴承浩·1897~1950년 납북) : 1934년 8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8월 동아일보 강제 폐간 때까지 근무. 6·25전쟁 때 납북. 납북 당시에는 창덕여중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음. 잡지부장 최승만의 부인. 

    변영로(卞榮魯·1898~1961)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새너제이대학교 2년 미국문학 연구. YMCA 영어교사(1920), 중앙고보 영어교사(1923), 이화여전 영문학 및 한국문학 전임강사(1927). 이은상 후임으로 동아일보 입사, 잡지부에서 신동아 편집(1933.9), 정치부(1935.4~1938.1). 성균관대학교 교수(1947), 해군사관학교 교수(1950), 서울신문 취체역(1953.5~1956.8),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Korean Republic’ 발행인(1954), 한국펜클럽 초대 회장(1955). 

    황신덕(黃信德·1898~1983) : 일본 지요다(千代田)고등여학교(1920),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 졸업(1926). 1926년 시대일보 여기자로 출발해 동아일보 기자 임봉순(任鳳淳)과 결혼한 뒤 동아일보에 입사(1935.6)해 부부 기자로 신동아-신가정 편집. 동아일보 폐간 직전인 1940년 7월까지 근무했으므로 중간에 빠진 기간은 있지만 일제시대 여기자로는 가장 오랫동안 언론계에 종사함. 근우회(槿友會) 창립 집행위원(1927), 대한애국부인회 정치부장(1945),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1946),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교장(1945~1961), 추계학원 설립(1950) 동 이사장(1961), 여성문제연구회 창립 회장(1952~1960), 가정법률상담소 설립 이사장(1956), 3·1 여성동지회 부회장(1970) 역임. 

    이상범(靑田 李象範·1897~1972) : 1918년 서화(書畵)미술회 동양화과 졸업. 조선미술전람회 연 10회 특선. 시대일보, 조선일보를 거쳐 1927년 10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조사부, 미술담당 기자로 재직.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우승패를 받는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언론계에 복직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남. 광복 후 동아일보에 복직, 홍익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강사(1949~1961), 동아일보 미술고문, 예술원 회원, 서울시문화위원 등 역임. 

    이무영(李無影, 본명 李龍九·1908~1960) : 휘문고등보통학교 중퇴, 일본 세이조오중학교(成城中學校)(1925)에 다녔음.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1935.5~1939.7), 신동아 편집. ‘조선문학’ 주재(1936), 해군 정훈감(1951), 문총 최고위원 역임, 농촌 소설 다수 발표.

    제1차 신문잡지 시대 선도

    신동아는 신문사의 풍부한 인력, 취재망, 광고 선전력을 활용해 잡지계의 판도를 신문사 중심으로 바꾸어놓았다. 신동아가 성공하자 동아일보는 1933년 1월에 여성잡지 ‘신가정’을 창간해 다른 민간 신문사들의 잡지 발행을 자극하고 새로운 잡지 문화를 선도했다. 이때 나온 잡지를 ‘신문잡지’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잡지 발행을 처음 시도한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1927년 2월 10일에 ‘신조선’이라는 제호로 조선일보 부록 형태의 잡지를 창간했지만 제2호는 언제 발행됐는지 확인할 수 없고, 제3호(1932.9.1), 제4호(1932.10.25)까지 명맥을 잇다가 사라졌다. 3, 4호의 발간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동아에 자극받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조선일보는 이때 잡지 발행을 계속할 여유가 없었다. 경영난과 내분을 겪다가 1933년 1월 18일에 방응모를 주식회사 창립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한 이후에 사세를 급속히 확장하면서 동아일보와 경쟁을 벌이면서 잡지 발행에 뛰어들었다. 

    신동아 이후 일간 신문들은 잡지 발행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먼저 1933년 2월 여운형이 사장에 취임한 조선중앙일보가 그해 11월 월간 잡지 ‘중앙’을 창간했고, 이어서 ‘소년중앙’(1935.1)을 발행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34년 2월 ‘월간매신’을 창간했다. 하지만 일반에 인기를 끌 수는 없었으므로 1년 발행 후인 1935년 2월 매일신보 본지를 조·석간 10면으로 증면하면서 중단했다. 이 역시 신문사 발행 잡지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일보의 잡지 발행은 1935년 11월 종합잡지 ‘조광’을 창간하면서 본격화됐다. 신문잡지 가운데는 제일 늦은 출발이다. 신동아에 비해 판형이 좀 작았지만, 창간호부터 4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으로 이보다 판형이 큰 4.6배판 230여 쪽이었던 신동아를 꺾겠다는 기세였다. 뒤이어 ‘여성’(1936.4)을 창간하여 동아일보의 신가정과 경쟁을 벌이는 한편 어린이 잡지 ‘소년’(1937.4), ‘유년’(1937.9)까지 네 개의 잡지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사가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이후에 잡지 문화가 한 단계 발전했다. 잡지의 내용과 경영 면에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질적으로도 향상되었고 이전까지는 결간 또는 합병호가 많았던 잡지가 때맞추어 정기적으로 발행되었다. 

    신동아는 문학작품 모집에도 나서 문인 배출의 등용문 역할도 했다. 1932년 11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으로 현상금 총액 500원을 내건 ‘독자작품모집’이 대표적인 행사였다. 현상모집 분야는 4개 부문에 모두 30여 종목에 이르렀는데 독자의 참여도를 높이고 새로운 필진을 발굴하려는 의도였다. 현상모집 제2회에 장편소설 ‘1년’을 투고해 당선된 사람이 후에 소설가로 활약하는 박영준이었다. 당선작은 1934년 3월부터 12월까지 연재됐다. 농촌을 소재로 한 소설로 1930년대 문학의 한 특징을 반영한 작품이었다. 

    현상모집은 아니었지만, 독자 투고란에는 이화여전을 졸업한 모윤숙과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노천명의 시가 1932년 6월호에 게재됐고, 평양 숭실학교 3학년 황순원도 같은 호에 ‘봄 노래’라는 동시가 게재된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시가 실렸다. 신동아는 학술강연회(1933.11.11), 하계대학강좌(1935.6.17~23), 조선사 강좌(1935.11.11~20)도 개최했다. 

    일제 치하에서 만 4년 2개월 동안 통권 59호를 발행한 신동아는 1936년 8월 26일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할 때에 함께 정간당한 뒤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당시의 민간 3대지 가운데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동시에 무기정간을 당하고, 이와 함께 신동아, 신가정,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하던 ‘중앙’ 등 두 신문사가 발행하던 잡지들까지 무더기로 정간당한 끝에 동아일보는 이듬해 6월 1일에야 정간이 해제돼 이튿날부터 복간했으나 신동아와 신가정은 일제 치하에서는 다시 발행되지 못했다.

    신동아 복간과 언론윤리위법 파동

    1964년 9월 신동아는 다시 살아났다. 정치적 파동으로 시국이 뒤숭숭하던 무렵이었다. 그 전해인 1963년 12월 17일에 제5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해 제3공화국이 출범했고 이듬해인 1964년 6월 3일에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6·3사태) 전국의 대학이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대통령 박정희는 6·3사태의 원인을 “일부 정치인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 있었다고 보고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언론규제 입법을 강행했다. 7월 28일 비상계엄은 해제됐지만 8월 2일 심야 국회에서 야당인 민정당 의원이 총퇴장한 가운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키자 언론계의 거센 반발로 언론 파동이 시작됐다. 

    5·16 이후 언론과 정권이 정면에서 맞닥뜨린 이 파동은 우여곡절 끝에 9월 8일 언론계 대표가 유성에 머무르고 있던 대통령 박정희를 만나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보류를 요청하고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언론탄압의 소지를 남겨둔 채 38일 만에 일단 수습되었다. 

    동아일보는 한 해 전인 1963년 7월 28일 ‘국민투표는 결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로 부사장 겸 주필이었던 고재욱과 논설위원인 서울대 법대 교수 황산덕이 구속당하는 큰 필화사건을 겪었고, 1964년으로 넘어와서는 계엄령 선포 직후 군인들의 편집국 침입사건(6월 5일)이 있었다. 동아방송(DBS)의 ‘앵무새’ 프로 설화사건(舌禍事件)으로 관련자 6명이 구속돼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이 밖에 신동아 재창간 직후인 1964년 11월 월간 ‘세대’ 필화 사건, 조선일보 필화사건 등으로 언론인들이 구속돼 재판에 회부되는 일이 잦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동아의 출현은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신문사들이 월간지를 다투어 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동아 복간과 나란히 1964년 9월 27일 한국일보는 ‘주간한국’을 창간했는데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의 월간지와 주간지 창간은 다른 일간신문의 월간지 및 주간지 발행을 자극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주간지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신동아 복간 이전의 대표적 종합잡지는 ‘사상계’였다. 사상계는 장준하가 1953년 4월에 창간했는데 1950년대 중반 이후 저널리즘의 위력을 과시한 잡지였다. 4·19, 5·16 그리고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어지는 기간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쟁점과 6·3사태를 몰고 온 한일회담 반대 투쟁 등에서 사상계는 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학생층과 지식인 사이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사상계는 1965년 무렵부터 경영난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1966년 6월, 7월호는 발행하지 못했고 발행인 장준하가 구속되는 사태까지 이르러 1950년대의 위력은 쇠퇴하고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신동아 복간 무렵에 발행되던 또 하나의 종합잡지로는 월간 ‘세대’가 있었다. 5·16 주체세력 이락선(李洛善)이 실질적 사주였는데, 신동아 복간보다 한 해 앞서 1963년 6월에 창간돼 친여(親與)적인 편집 경향을 띠고 있었다.

    심층보도와 논픽션 발굴

    신동아 필화사건의 계기가 된 1968년 12월호. [1968]

    신동아 필화사건의 계기가 된 1968년 12월호. [1968]

    일제 치하의 신동아 폐간이 제11회 베를린 올림픽과 관계가 있었는데, 복간되던 1964년에도 도쿄에서 개최될 제18회 올림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복간 첫 호는 권두 화보로 ‘올림픽 출전 오분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남북한 혼성팀이다, 단일팀이다 하여 이 조그만 한반도에서 사실상 두 개의 팀이 동경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캡션과 함께 각 종목의 연습 장면을 소개했다. 폐간 당시 손기정 선수의 우승으로 전 민족이 감격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라톤 제패는 의심스러운 형편이었다. 

    동아일보 사장 이희승(李熙昇)의 복간사 ‘민주주의의 기로에 서서’는 “최근에는 신문, 잡지, 방송 등 언론기관이 국민에게 알려서는 안 될 것을 알려서인지, 알려야 할 것을 알리지 않아서인지, 그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 유례가 없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지난 일요일(8월 2일) 심야에 통과시켰다”면서 “국민의 대다수의 복리를 도모하려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라면, 그것은 반드시 왕도정치가 되어야 할 것이요, 행여나 패도(覇道)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경계했다. 

    특집은 ‘계엄은 해제되었으나’로 꾸몄고, ‘정치자금’(이웅희, 김진현), ‘육사 8기생’(강인섭) 등 원고지 200매가 넘는 심층보도 기사를 비롯해 읽을거리와 연재물로 ‘나의 외교관 생활 비화’(이수영), 류주현의 ‘소설 조선총독부’ 등 460여 쪽 분량에 다양하게 꾸민 편집이다. 특히 신상초(申相楚)의 자서전적 수기 ‘일군(日軍) 탈출기’(250매) 등 민족 수난기에 지식인들이 겪은 이런 종류의 수기는 매호 계속되어 신동아의 한 특색을 이루었다. 긴 글을 실을 수 있는 충분한 지면, 그것을 지루하지 않게 엮어낼 수 있는 필자, 그리고 수준 높은 독자 등 사회적 여건을 잘 활용한 편집이었다. 

    복간 당시 신동아 주간이었던 천관우(千寬宇)는 후에 복간 당시의 편집 방침에 대해 논설 스타일의 정론잡지가 아니라 주장과 의견을 담으면서도 부드럽게 만들어 독자들이 친근감을 갖도록 하려 했다고 말했다. 천관우는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신동아는 그 정신에 있어 동아일보의 연장. 애초의 창간사에도 ‘민족적 경륜’을 위한 잡지라 했다. 그리고도 ‘읽히는’ 잡지가 되고자 한다. 지고(志高)의 잡지, 친근한 잡지―양립이 쉽지 않을 이 두 목표를 기어코 양립시켜 보려는 편집 동인들의 ‘야심’은, 오직 독자 제위의 편달에서만 이루어질 것.’ 

    ‘종합지로서의 중후한 맛, 그러면서도 누구나 쉽사리 가까이할 수 있는 부드러운 체재’(복간 제2호 1964년 10월호 ‘편집후기’)를 지향한 편집 의도가 적중했는지 복간 첫 호는 초판이 이틀 만에 매진됐고 재판을 찍었으나 또 3일 만에 매진되는 성공을 거뒀다. 1930년대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잡지 자체로서도 독자의 호응을 받을만했지만, 동아일보의 위력에 힘입은 바도 컸을 것이다. 

    1950년대에 사상계가 종합지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의 전문가와 교수들의 논문과 글을 중심으로 편집해 권위를 높인 데 비해 신동아는 본지 기자들의 심층취재 기사가 독자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잡지 편집의 방향도 거기에 중점을 두게 됐다. 신문사의 기동력과 우수한 취재진, 전국에 걸친 판매망과 강력한 선전의 이점, 동아일보의 이미지가 주는 신뢰도 등 여러 가지 유리한 입장에서 신동아는 단숨에 많은 독자를 끌 수 있었다. 

    신동아는 심층보도 기사와 논픽션에 비중을 두고 현실 문제를 분석적으로 파고들었다. 기자 한 사람이 쓰는 기사도 있었지만 2인 공동 집필, 또는 정치·경제·체육부 등의 명의로 집필하는 방식도 새로운 시도로서 잡지가 팀워크를 통한 심층취재의 방법을 구사해 신문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깊이 있게 파헤칠 수 있도록 했다. 신동아가 시도한 이러한 잡지 저널리즘의 독특한 보도와 해설 기능의 확대로 인해 일어난 권력과의 마찰이 1968년의 신동아 필화사건이었다.

    신동아 필화사건

    부수 10만을 돌파한 1984년 7월호 신동아, 1984년 9월호. 
복간 20주년과 지령 300호를 맞은 신동아. [1984](왼쪽부터)

    부수 10만을 돌파한 1984년 7월호 신동아, 1984년 9월호. 복간 20주년과 지령 300호를 맞은 신동아. [1984](왼쪽부터)

    1963년 월간 ‘세대’ 창간에 이어 1964년에 신동아가 복간된 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정치 상황과 관련되는 몇 건의 중요한 필화사건이 잡지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일간지가 여론 형성에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맡고 있던 1960년대 중반 이전과는 달리 사회의 몇 개 압력집단을 대변하는 잡지가 이 시기부터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시대 정치권을 둘러싼 반대 세력의 분포가 재야·지식인·종교·근로자 등으로 다원화됐고, 그 세력을 대변하는 잡지들이 신문사와는 별개의 여론 형성 기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었다. 

    1968년에 일어난 신동아 필화는 신동아가 우리나라 대표적 종합지였다는 점 외에도 동아일보의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들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던 후유증으로 인해 큰 충격을 줬다. 문제 된 기사는 동아일보 김진배(정치부), 박창래(경제부) 두 기자가 공동 집필해 신동아 12월호에 게재한 ‘차관(借款)’ 제하의 심층 기사. 원고지 250장 분량의 긴 기사였다. 기사와 함께 ‘차관,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제목으로 김영선, 백두진, 부완혁, 송인상, 조동필, 주요한, 최호진 등의 의견으로 외자도입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기사와 관련해 중앙정보부는 필자인 김진배, 박창래 두 기자를 비롯해 신동아 부장 손세일, 기자 심재호, 이정윤 등을 차례로 연행 또는 자진출두 형식으로 소환해 심문하고 그 가운데 몇 사람에게 반공법 위반혐의를 적용하려 했다. 이에 야당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정부의 언론탄압을 규탄했고, 편집인협회와 기자협회는 당국의 처사에 항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언론계와 정계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었으나 살아 있는 권력을 언론이 이길 힘은 없었다. 

    동아일보는 권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관련 간부진을 전면적으로 퇴진시키는 인사개편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홍승면(신동아 주간 겸 논설위원), 손세일(신동아 부장) 3명에 대한 해임조치였다. 이는 언론이 권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행한 사례로 기록됐다.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전체 언론이 새로운 시련기에 접어들었다는 엄중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신동아가 언론자유 신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1987년 6·29선언 직후 ‘이후락 증언’ 기사가 실린 1987년 10월호. [1987] 창간 이래 고수해오던 세로쓰기 체재를 전면 가로쓰기로 바꾼 1988년 1월호. [1988](왼쪽부터)

    신동아가 언론자유 신장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1987년 6·29선언 직후 ‘이후락 증언’ 기사가 실린 1987년 10월호. [1987] 창간 이래 고수해오던 세로쓰기 체재를 전면 가로쓰기로 바꾼 1988년 1월호. [1988](왼쪽부터)

    1968년의 신동아 필화사건 이후에도 1974년 말에서 1975년 초에 걸치는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때에 신동아도 광고 해약을 겪었으나 신동아는 굴하지 않고 권력의 탄압을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많은 시민, 교수, 필자들이 격려 광고를 게재해 잡지의 권위를 드높였다. 이 와중에 오히려 신동아의 구독자는 늘어났다. 신동아 복간 20주년과 지령 300호가 겹치는 1984년 9월호를 맞아 신동아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는 격변의 시대를 걸어온 신동아의 발자취를 되새기면서 ‘대토론 1988년’을 마련했다.

    잡지 저널리즘 확산, 발행부수 증가

    창간 65주년인 1996년 1월부터는 판권에 편집진의 이름을 기재하기 시작했다. [1996] 2007년 11월호 창간 75주년 기념호 부록 ‘내 손 안의 영어를 위한 명문장 명표현’을 발행하는 등 실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7](왼쪽부터)

    창간 65주년인 1996년 1월부터는 판권에 편집진의 이름을 기재하기 시작했다. [1996] 2007년 11월호 창간 75주년 기념호 부록 ‘내 손 안의 영어를 위한 명문장 명표현’을 발행하는 등 실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7](왼쪽부터)

    신동아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두 번째로 ‘신문잡지시대’를 열었다. 복간 3년 뒤인 1967년 11월 동아일보는 일제 때의 ‘신가정’을 중간하는 형식으로 ‘여성동아’를 창간했다. 이로부터 중앙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등 일간지가 다투어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는 1968년 4월 ‘월간중앙’을 창간한 뒤 종합지에서 전문지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잡지들을 창간했다. 1980년 4월에는 조선일보사가 ‘월간조선’을 창간하여 이때부터 신동아-월간조선 시대가 시작됐다. 

    1980년대는 월간지의 독자가 다수 대중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이전까지는 소수의 지식층이 주요 독자였지만 고도성장의 물결을 타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잡지 구독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일반 대중이 사회의 중심축으로 등장했고, 교육의 확산으로 고학력자가 늘어난 결과였다. 이전까지 장막 속에 감춰져 있던 정치적 대사건에 국민의 관심이 높아진 것도 다른 이유였다. 숨은 역사적 사실을 알고자 하는 국민의 욕구를 잡지 매체가 충족해준 것이다. 독자의 호기심을 끌 수 있는 글을 쓸 능력을 지닌 새로운 필자들의 등장도 잡지 저널리즘의 저변 확산을 도와준 요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월간지는 5공화국 시절 한때 폭발적인 부수 증가를 기록했고, 신문과는 다른 독특한 잡지 저널리즘의 위력을 과시했다. 

    1984년 7월호부터 신동아의 발행 부수가 급격히 불어나서 10만 부를 돌파했다. 월간지 10만 부 돌파는 그때까지 신동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잡지 사상 드문 일이었다. 이후 급격한 신장세는 계속됐다. 1985년 3월에 20만 부, 7월에 30만 부를 돌파했다. 잡지의 30만 부 돌파는 이때가 최초였다. 신동아의 발행 부수가 최고를 기록한 것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 증언을 실은 1987년 10월호로 40만 부를 돌파했다. 5공화국 이전까지의 정치 권력 핵심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심층보도는 잡지 저널리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필진과 보도 영역을 개척하면서 잡지 저널리즘도 일간지에 못지않은 대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월간지가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화제와 문제점을 던져주기도 했다. 이후락 증언이 그러한 예였다. 월간잡지에 필요한 심층보도 다큐멘터리 기사들은 대개 원고지 200장 또는 이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지금까지 원고지 10장에서 길어야 60~70장 정도의 해설기사 또는 르포기사밖에 소화할 수 없었던 일간지 체재의 언론인들에게는 향상된 능력을 발휘해 긴 글을 쓸 새로운 분야를 제공했고, 잡지 입장에선 이러한 분량을 다룰 수 있는 필진이 필요하게 됐다. 

    1980년대 초반에 신동아의 지면을 장식한 새로운 필자들은 언론 현역에 있는 사람들과 전직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하나의 테마로 400장 또는 500장에 이르는 긴 글을 흥미 있게 엮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잡지 저널리스트들의 탄생이었다. 

    제3공화국 비화를 다룬 기사는 판매 부수를 대폭 신장시켰지만, 한편으로 잡지가 ‘폭로 저널리즘’의 무대로 변질했다는 비판의 원인이 됐다. 표피적인 사실의 나열과 과장, 정확성 없는 추측들의 조합, 지적 고뇌 없는 감정적인 글로 독자의 호기심만을 자극한다는 주장이었다. 폭로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과 ‘비화’ 위주의 편집에 독자들이 염증을 느끼면서 한때 인기를 끌었던 전문적 잡지 저널리스트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폭로 저널리즘의 부작용으로 일어난 사건은 2008년 12월호와 2009년 2월호에 실린 이른바 ‘미네르바 오보(誤報)’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의 관련자를 해임하는 한편, 1면에 사과문을 실으면서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노력을 강화할 것을 다짐”했다. 신동아로서는 뼈아픈 사건이었다.

    가로쓰기 원고에 분량은 줄어

    1987년 9월 21일에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일동이 ‘신동아 제작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1987년 9월 21일에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일동이 ‘신동아 제작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신동아가 매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 발행한 자료집도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는 기획이었다. 별책부록에서 신동아는 근세사와 관련되는 자료를 비롯해 철학, 사상, 예술 등의 문제를 독자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부록 가운데 여러 종은 동아일보 출판부가 단행본으로 출판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신년호에 부록을 싣는 전통을 바꾸어 창간 기념호, 또는 12월호에 부록을 발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도 역사적인 문헌 중심에서 실용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창간 75주년 기념호(2007년 11월호) 부록 ‘내 손 안의 영어를 위한 명문장 명표현’(238쪽), 같은 해 12월호 특별부록 ‘한국의 핵 주권’(240쪽), 2008년 12월호 부록 ‘CEO 꿈꾸는 당신이 읽어야 할 경영서 49’(305쪽)가 그런 예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신동아의 외형적인 체재와 편집 내용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시적인 변화는 1988년 1월부터 단행한 가로쓰기 편집이었다. 창간 이래 고수해오던 세로쓰기 체재를 전면 가로쓰기로 바꾼 것이다. 동아일보는 10년 뒤인 1998년 1월 1일부터 가로쓰기를 실행했다. 출판계가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으로 전환한 시기는 대개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일간지는 아직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을 과감하게 도입할 수 없었으나 잡지와 일반 출판물을 비롯한 광고 분야는 민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한글 사용이 늘어나고 있었다. 

    1996년 1월부터 판권에 편집진의 이름을 기재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운 변화였다. 이전까지는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의 이름만 밝혀왔는데 이때부터는 발행, 편집, 인쇄인 외에 편집의 최고 책임자인 출판국장을 필두로 신동아부 부장에서 기자, 출판사진부, 출판미술부, 출판영업국을 포함한 모든 직원의 이름을 기재했다. 업무에 따르는 책임과 자부심을 지닐 수 있도록 배려하는 동시에 잡지사와 출판사의 추세를 반영한 조치이기도 했다. 창간 65주년에 실시된 변화였다. 

    원고 한 건당 분량은 줄어드는 추세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980년대에는 원고지 200장, 300장 또는 그 이상의 긴 글을 과감하게 실으면서 이를 자랑스럽게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자리 잡으면서 잡지 기사는 짧은 쪽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긴 기사를 읽지 않는 독자가 많을 뿐 아니라 자료 성격을 지닌 무거운 글은 데이터베이스나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일 터이다. 정확히 시기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100장 넘는 기사도 싣지 않는 듯이 보인다. 길어야 70장 정도이고, 1980년대에 500장 이상 긴 글을 과감하게 싣던 편집은 보기 어려워졌다. 

    신동아가 언론자유 신장의 기폭제 역할을 한 사건은 1987년 6·29선언 직후에 일어난 ‘이후락 증언’ 기사였다. 월간조선도 같은 기사를 썼다. 1987년 10월호에 실린 ‘이후락 증언-최초로 밝힌 김대중 납치 내막’에 대해 당국이 제작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문제 된 기사는 이종각 신동아 기자가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을 만나 취재한 기사였다. ‘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을 사전에 전혀 몰랐으며 모두 자신이 했다. ② 김대중을 납치한 배가 일본을 출발한 후 대통령에게 알리니까 대통령이 대단히 노했다. ③ 처음부터 김씨를 한국에 연행할 작정이었지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요지의 기사를 100장 분량으로 집필했다. 월간조선의 오효진(吳効鎭) 기자도 같은 글을 썼다. 

    그런데 이 두 잡지의 기사에 대해 제작 마감을 며칠 앞둔 9월 12일부터 정부의 삭제 요청이 있었다. 이날 이후 신동아 제작팀은 정부 당국과 팽팽한 대립을 벌이면서 기사 삭제를 거부하다가 9월 21일에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일동이 ‘신동아 제작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신동아 기자들은 농성 과정에서 1984년 이래 당국에 의해 제작이 탄압받은 사례도 밝혔다. 신동아가 때로는 기사를 싣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쟁취한 경우도 있음을 밝힌 사례들이었다. 

    정부 측은 이후락 증언 기사가 국가기밀누설, 외교사의 문제 등 국익 침해의 개연성이 높다는 이유로 게재금지를 요청했으나 신동아 편집진이 응하지 않자 인쇄소를 점거해 제작을 방해했다. 그러나 신동아 기자를 비롯한 동아일보사의 모든 기자와 간부진이 정부의 압력이 노골화된 9월 21일부터 철야농성에 돌입하고 공권력의 횡포를 집중적으로 공박해 정부 조치를 철회토록 했다. 이 사태는 결국 신동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신동아는 이때의 용기 있는 투쟁으로 관훈클럽이 수여하는 관훈언론상을 수상했다.

    옛 기사 데이터베이스화 서둘러야

    신동아 지령 700호를 맞아 동아일보에 꼭 당부하고 싶은 일이 있다. 지난 700호의 신동아 지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 작업이다. 700호의 지면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자료가 담긴 노천광맥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을 망라한 자료가 담겨 있다. 필자들의 글, 인터뷰 기사들은 인물 연구의 귀중한 자료다. 하지만 700호에 담긴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기는 어렵다. 도서관이나 대학 등 소장처를 이용하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학자들이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고 이용의 편의를 돕기 위해 목차 정리 작업을 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신동아 목록은 서지학자 백순재와 김근수가 만든 자료가 있다. 백순재의 ‘동광·신동아 총목차’(대한민국국회도서관, 1969, 13~38쪽에 신동아 창간호부터 1936년 8월호까지 목차 정리), 김근수의 ‘한국잡지 개관 및 호별 목차집’(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1973, 594~649쪽에 신동아 창간호부터 1936년 8월호까지 목차 정리)이 그것이다. 

    1964년 9월 복간 후에는 신동아의 자체 권말부록으로 5년 단위로 정리한 총목차가 있었다. 

    신동아 복간 직후 5년 치의 총 목차(1964년 9월~1969년 8월호)는 1969년 9월호(456~523쪽)에, 1969년 9월~1974년 8월호의 총 목차는 1974년 9월호(418~482쪽)에, 1974년 9월~1979년 8월호의 총 목차는 1979년 9월호(470~524쪽)에 실려 있다. 

    일제강점기 발행된 호수의 목차는 서지학자들이 정리했고, 복간 이후에는 신동아 편집부에서 자체적으로 목차를 정리한 의도는 분명하다. 이 잡지는 한번 보고 버리는 오락 잡지나 대중잡지가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자신들이 만드는 잡지의 자료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행 당시의 시대상을 담고,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역사 자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후일에도 참고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의 목차를 자체적으로 정리한 것조차 찾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목차 정리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왔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다. 전체 지면을 스캔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신문지면의 상세한 기사색인을 1960년대에 맨 먼저 작성했다. 1920년대 지면의 축쇄판도 만들었다. 지금은 모든 지면을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연구자들 편의를 제공한다. 이제는 신동아도 옛 지면을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 읽을 수 있도록 서비스해야 할 시점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총 59호는 이미 스캔을 받아 pdf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광복 이후 오늘까지 발행된 641호도 간편하게 검색해서 볼 수 있도록 할 것을 독자의 한 사람, 연구자의 입장에서 기대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컴퓨터 조판으로 제작된 지면은 pdf 파일이 확보돼 있을 터이니 이를 활용하는 등으로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할 것을 제안한다. 

    신동아는 발행 시점에 독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잡지가 아니다. 역사의 기록자이자 민족의 정신문화를 선도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여러 문제를 심도 있게 진단하고 처방하는 역할을 수행해오는 동안 많은 난관을 헤쳐왔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기록을 언제든지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시대 흐름 반영 고민할 때

    신동아는 지금도 잡지계를 대표하는 언론매체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종합잡지의 수명이 80년을 넘는 경우는 처음이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사회의 전문화 분업화 현상이 잡지계에도 나타난다. 과학·기술 분야 잡지를 비롯해 전문 분야 잡지가 착실하게 뿌리를 내렸다. 취미 생활의 확대로 골프 잡지를 비롯해 등산, 테니스, 태권도, 축구, 낚시, 레코드, 분재, 수석, 바둑, 우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취미 활동과 관련된 잡지들도 나왔다. 

    이로써 일제강점기 신동아의 ‘망라주의’와 1964년의 신문기자들의 심층취재, ‘주장과 의견을 담으면서도 부드럽게 만들어 독자들이 친근감을 갖도록 하겠다는 편집방침’도 독자의 기호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정론(正論)을 펴는 종합잡지 신동아도 이제 장차 어떤 모습으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선도해야 할지 고민할 시점에 이르렀다.



    정진석
    ●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신문학),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 박사(언론학)
    ●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원장
    ● 現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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