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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개교 100년 경기고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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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고의 역사는 한국 중등교육의 역사다. 중학교에서 출발해 한성고·경성고보·제1고보·경기중을 거치며 100년을 채워온 경기는 평준화 이후 전혀 다른 환경을 접했다. 한때 경기는 경성제대 예과와 서울대 전체 입학생의 10% 이상을 차지했으나, 이제는 많고 많은 고등학교 중 하나일 뿐이다. 무한경쟁 시대를 헤쳐갈 인재를 필요로 하는 이 시대, 우리의 중등 교육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 경기인들은 하나 같이 수월성(秀越性)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아직도 우리 교육은 대중 교육과 엘리트 교육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 제1부 이 땅의 중등 교육을 위하여-광복 전의 京畿 ]

새 천년에 맞이한 개교 100년

국민학생 시절 기자는 친지들로부터 “이 다음에 너는 꼭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거라”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린 시절이지만 기자는 두 가지 느낌을 가졌다. ‘아, 주위 분들이 내게 큰 기대를 걸고 계시구나’하는 자부심이 하나였고, ‘이러다 경기고에 못 가면 망신당하겠구나’하는 부담감이 다른 하나였다.

행인지 불행인지 국민학교 6학년이 된 해에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졌다(사실 기자의 실력으로 경기고에 도전했다면 틀림없이 낙방했을 것이다). 기자는 이른바 ‘뺑뺑이’ 4회로 경기고와는 형제관계인 서울의 경복고에 배정되었다. 경복고에 입학하며 속으로 ‘뺑뺑이긴 하지만 그래도 경기에 버금가는 학교에 진학했구나’하는 안도감을 맛본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기자의 가슴 속에 ‘묵직하게’ 자리잡았던 경기고가 개천절인 오는 10월3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새 천년이 펼쳐진 시기에 한 세기에 걸친 학교 사(史)를 접고 새로운 세기를 열게 된 것이다. ‘경기고 100년’이 우리 사회에 던진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경기 100년 속에는 한국 중등교육의 전부가 들어 있다.

1885년의 배재학당, 1886년의 이화학당, 1897년 평양의 숭실학교 등이 개교, 이 땅에 교육기관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조선 땅에 들어온 서양인들이 그들의 언어를 조선말로 통역해줄 사람이 필요해 서당의 4촌쯤 되는 개념으로 학당을 만든 것이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사학(학당)들이 생겨나자 1886년 9월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인 헐버트 등을 교사로 초빙해 ‘육영공원’이라는 근대식 관학 기관을 만들었다. 육영공원은 정치·경제·수학·영어같은 근대학문을 가르쳤으나, 학생들은 구래의 전통과 특권에 집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자 실망한 외국 교사들은 자국으로 돌아갔고 육영공원은 개교 8년만인 1894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개화의 물결은 하루가 다르게 밀려들고 있었다. 1894년 조선보다 먼저 개방한 일본이 ‘중원의 패자’인 청나라와 전투를 벌여, 하루아침에 승리를 거머쥐었다(청일전쟁). 조선의 선각자를 자처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이고 세상이 바뀌었구나!” 그래서 그 해에 과거제를 폐지하고 갑오경장이라 불리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개화를 추진할 맨파워가 너무 달렸다. “근대화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소학교-중학교-대학교의 3체제로 학교를 세운다는 교육개혁안을 의결했다. 이듬해인 1895년 8월 지금의 국립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관립 소학교를 처음 열었는데, 이 소학교가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지금의 교동초등학교다. 이때 정부는 학교를 정부가 세우는 관립 학교, 관민(官民)이 공동으로 세우는 공립 학교, 그리고 사립 학교로 구분하였다.

아직 반상(班常)의 차별이 남아 있던 때인지라 교육에서도 차별화가 이루어졌다. 즉 공립과 사립 학교에는 ‘심상(尋常)과’만 두고, 관립 학교에는 심상과와 더불어 ‘고등과’를 둔다고 한 것이다. 심상(尋常)은 ‘대수롭지 않다’ ‘보통이다’는 뜻이니, 심상과는 요즘 말로 하면 ‘보통과’가 된다. 소학교의 심상과는 3년 과정으로 학업을 마쳐도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다. 반면 고등과는 5년 과정으로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할 자격을 주었다. 그러니까 공사립 소학교를 나온 학생은 중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고, 관립 소학교에서도 고등과를 나온 학생만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예정된 학제를 다 채우지 못하던 때였는지 관립 소학교 고등과는 1897년 7월부터 졸업생(14명)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대한제국 정부는 중학교를 출범하기는커녕 중학교는 어떠해야 한다는 관제조차 제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관립 소학교는 갈 곳 없는 고등과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고등과 운영을 일시 중단하였다.

5년 후인 1900년이 되자 이러한 관립 소학교는 10개로 늘어났는데, 이중 8개교가 한성에 있었다. 그래서 19세기의 마지막 연도인 1899년 4월4일 대한제국 정부는 중학교 관제를 규정한 칙령 11호를 처음 공포하였다. 이때도 역시 공사립 중학교에는 심상과만 두고 관립 중학교에는 심상과와 고등과를 둔다고 했다. 심상과에 입교한 학생은 4년을 마치고 중학교를 졸업하나, 관립중학교 고등과에 들어온 학생은 심상과 4년에 이어 고등과 3년을 마쳐야 졸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사립 중학교는 순수한 ‘중학교’이고, 관립 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학교인 것이다.

이때 관제는 고등과를 마친 학생은 초급 관리인 ‘판임관’에 임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판임관은 지금으로 치면 5급 공무원인 ‘사무관’쯤에 해당하겠다).

물론 이때도 중학교에 갈 나이의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여타의 학교가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특수목적고에 해당하는데, 외국어를 통역할 역관(譯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일어학교(1891년 개교) 영어학교(1894년) 법어학교(프랑스어학교·1895년) 아어학교(러시아어학교·1896년) 한어학교(중국어학교·1897년) 덕어학교(독일어학교·1898년)가 차례로 생겨났다. 지금이나 그때나 외국인을 만나고 외국에도 갈 수 있는 외국어 학교는 인기가 ‘캡’이었던 것이다.

또 대한제국 정부는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1895년 칙령 79호로 한성사범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사범학교의 인기도 보통이 아니었다. 1899년에는 ‘의(醫)학교’와 ‘상공(商工)학교’가 생겼는데 이 학교도 인기였다. 흔히 한국인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따지기 때문에 실용 및 기술 분야가 쇠락했다고 하지만, 청일전쟁을 통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대한제국인들이 ‘특수목적고’로 대거 몰렸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인문사회과학에 해당하는 ‘보통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칙령 11호를 공포해 중학교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보통학을 가르칠 학교를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00년 9월3일 대한제국 정부는 학부령 제12호를 통해 ‘중학교 규칙’을 공포했다. 이로써 학과목이 정해지고, 입학 연령은 ‘17세에서 25세’로 하는 등 제반 규칙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때 공사립 중학교는 하나도 개교하지 못하고, 관립중학교 단 하나만 한성에 개교했다. 이때 이 학교의 이름이 ‘관립중학교’, 줄여서 그냥 ‘중학교’였다. 최초의 신문이 ‘더 타임스’이듯, 최초의 중학교인 경기고등학교는 그냥 ‘중학교’로 출범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그러니까 학교 역사가 이미 한 세기가 넘은 배재-경신 등의 명문 사립고는, 당시 보통학을 가르치는 중학교가 아니고 그후 중학교로 변신한 것이다).

이 중학교는 누대에 걸쳐 조선조의 명문거족들이 몰려 살던 ‘홍현’(紅峴·지금의 서울 종로구 화동) 에서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학교 터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김옥균(金玉均)의 집터였다. 김옥균의 집터가 왜 경기고 자리가 됐는지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김옥균이 역적으로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니, 대한제국 정부는 주인 없는 그의 집터를 징발해 학교 터로 삼은 것 아니겠는가’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개화된 세상을 꾸려나갈 인재를 육성할 경기고가 개화를 주장하다 죽은 김옥균의 집터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김옥균 집터에 들어선 경기고

그후 중학교는 개화파 거두로 당시는 외국에 쫓겨가 있던 ‘역적’ 서재필(徐載弼)의 집터도 교사 터로 흡수했다. 김옥균은 후손이 없지만 서재필은 있다. 1970년대 서재필 후손은 경기고 터 중에서 2000여 평은 서재필이 역적으로 몰렸을 때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며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에서 정부는 패소했는데, 이로 인해 경기고는 당시 ‘영동’으로 불리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지금의 경기고 자리로 옮기게 됐다.

당시 정부로서는 2000여 평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거나 대토(代土)를 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막 시작된 직후인지라 박정희 정부는 경기고 동문들의 결사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고 이전을 강행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은 경기고 동문인 민관식(閔寬植·33회)씨였는데, 그는 봉은사로부터 지금의 경기고 터를 사들여 학교를 옮기게 했다.

화동 교사는 좁았으나 삼성동 교사는 대학 캠퍼스 못지 않을 정도로 널찍하다(3만여 평). 또 수목이 울창해, 화동 교사에 비하면 교육 환경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좋았다. 더구나 경기고 이전을 전후해, 삼성동 일대는 새로운 도심이 되고 부촌을 형성했다. 이렇게 되자 대부분의 경기고 동문들은 ‘이전하기를 잘했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화동 출신 졸업생과 삼성동 출신 졸업생이 따로 동문회를 열던 일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고 한다.

이처럼 ‘중학교’는 당시로는 아주 특별한 학교로 출범했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관보에 학생 모집 공고를 내주었다. 당시는 입학원서를 ‘품청장(稟請狀)’이라고 했다. 최초의 응시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품청장을 낸 학생 중에서 85명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경기 1회 졸업생인 이능우(李能雨)씨는 생전에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과정을 회고담에 이렇게 남겨 놓았다 한다.

고등과는 개설하지 못해

‘나는 관립소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상급학교 진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립소학교 고등과 선배인 팽종헌 이용태 등은 중학교가 없어서 3년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동 부근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중학교 선생님에게 붙잡혀 머리를 깎이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 선배들도 그때 같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교사를 ‘교관’으로 불렀고, 교장은 정3품(지금으로 따지면 4급 서기관쯤 되겠다) 대우를 받았다. 대한제국 정부는 중학교 초대 교장으로는 김각현(金珏鉉)을 임명했으나 김각현은 개교를 보지 못하고 물러나고, 2대 교장 이필균(李弼均)이 개교 교장이 되었다. 1900년 10월3일 중학교는 이필균 교장과 일곱 명의 교관, 그리고 85명의 학생과 함께 개교하였다.

하지만 중학교는 심상과만 운영하고 끝내 고등과를 설치하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고등과를 설치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 심상과를 다니던 학생들의 수업 열의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으로 봐서는, ‘고등과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고등과를 설치하지 못하지 않았나’라고 추정해볼 뿐이다. 중학교 제1기 입학생들은 4년 후인 1904년 7월 심상과 졸업장을 받게 되는데, 이때 졸업생은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65명의 학생이 자퇴해버렸던 것이다.

높은 자퇴율은 그후로도 계속된다. 1902년도에는 35명이 입학했으나 4년 후 졸업자는 6명에 불과했다. 1903년 입교생은 39명이었으나 3년 만에 1명을 남기고 모두 자퇴했다. 당황한 중학교 당국은 이 한 명마저 자퇴해버릴까봐 3년 만에 학업을 마치게 하고 1905년 2회 졸업생들과 함께 졸업시켜주었다(그로 인해 1906년에는 단 한 명의 졸업자도 나오지 못했다). 자퇴 현상은 1909년까지 계속되었다.

중학교 자퇴율이 이렇게 높았던 것은 보통학을 써먹을 분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학교 출신이 취직할 수 있는 최고 자리는 중학교 교관이었다. 그러나 교관 자리가 거의 없어, 교관 중에서 결원이 생길 때를 기다리는 중학교 졸업자들이 즐비했다. 판임관 임명은 고등과가 개설되지 못한 관계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중학교를 자퇴하고 취직이 잘되는 ‘특수목적고’로 옮겨가려고 했다. 중학교가 최고 명문 경기고가 되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엄청난 자퇴율

관립 소학교 고등과 졸업자만 중학교에 응시하게 한 것도, 중학교를 비인기 학교로 만들게 한 요인이었다. 관립 소학교 고등과 졸업자는 극소수여서 1901년에 15명, 1902년에 16명이었다. 당시 중학교는 50명 정도의 신입생을 뽑았으므로, 지원자격자가 너무 모자랐다. 그래서 규칙을 고쳐, ‘외국어학교 졸업자와 재기가 뛰어난 학생도 특별히 입학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삽입했다. 세월이 흐르자 중학교는 관립 소학교 고등과 출신보다 단서 조항에 따라 입교하는 학생(일반 지원자)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되자 중학교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우열반 편성쯤에 해당하는 반 편성에 들어갔다. 즉 고등과 출신은 ‘서반’(西班), 일반 지원자는 ‘동반’(東班)으로 편성해, 학습 수준을 달리 한 것이다. 서반-동반 구분은 조선조 항교에서 양반 자제는 동재(東齋), 서얼(서자)과 중인의 자제는 서재(西齋)에 머물게 한 전통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향교에서는 정통을 동재로 모았으나, 중학교에서는 서반으로 모았다. 중학교는 열반에 해당하는 동반을 1904년까지 유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 우물안 개구리처럼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중학교에 변화가 생겼다. 중학교 앞에 ‘한성’이라는 지명이 붙고, ‘고등학교’로 개칭된 것이다. 한성이라는 지명을 붙이게 된 것은 일제 통감부의 통제를 받던 대한제국 정부가 한성에 관립 고등여학교를, 그리고 평양에 두 번째 관립 고등학교를 개설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가 한성고등학교로 개칭됐다고 해서 4년제이던 수업 연한이 늘어난 것도, 고등과가 개설된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중학교 심상과에 해당하는 학문을 가르치며 이름만 고등학교로 바꾼 것이다. 1908년 대한제국 정부는 지금으로 따지면 ‘여중’에 해당하는 ‘관립한성고등여학교’를 개교했는데, 이 학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여학교를 거쳐 최고명문 여고인 경기여고가 된다(경기고 학생이 경기여고생과 ‘남달리’ 오순도순한 관계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09년 평양에는 ‘관립평양고등학교’(그후 평양고보→평양2중이 됐다가 6·25전쟁 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가 개교했다. 그런데 평양고는 같은 관립인데도 4년제가 아니라 3년제 학교로 출범하였다. 1916년 대구에서는 ‘관립대구고등학교’(경북고의 전신)가 개교하였다. 여기서 잠시 ‘경기고’와 ‘평양고’ 대구의 ‘경북고’ 그리고 경기고가 제1고보로 불릴 때 제2고보로 출범한 서울의 ‘경복고’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자. 일본에서는 관립 고등학교를 만들 때부터 설립 순서대로 1고·2고·3고로 이름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관립 고등학교를 한성-평양-대구 등의 지명으로 구분하다가, 나중에 1고보(경기고)와 2고보(경복고)를 붙이는 바람에 혼선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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