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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지하경제의 브레인 금융부티크

M&A·주가관리·외자유치… ‘돈 불리기’ 귀재들

  • 이나리·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주가관리·외자유치… ‘돈 불리기’ 귀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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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몰아치는 난세의 중원. 정파가 흔들리니 사파가 세를 얻는다. 강호 협객, 무사들의 사활을 건 세력 다툼. 절대 고수의 천년 비급(秘)은 누구를 새 주인으로 맞을 것인가….’

홍콩 무협영화를 통해 익숙한 싸움 구도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 ‘제도권’은 힘을 잃게 마련. ‘한몫’ 잡으려는 고수들은 ‘필드’로 쏟아져 나와, 합법과 위법 사이 좁은 담장을 곡예하듯 넘나든다.

우리 금융권도 마찬가지. IMF 구제금융 사태 후 급변하는 시장 상황 속에서 수많은 전문인력이 대형 금융사를 빠져나갔다. 이들이 찾은 새 일터 중엔 비제도권이랄 수 있는 사설금융사, 이른바 금융 부티크(boutique)가 적지 않다. 돈 장사꾼, 혹은 돈 불리기의 귀재로 통하는 최고전문가집단. ‘큰 딜’ 뒤에는 어김없이 그들이 있다.

2억 원과 40억 원

부티크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고급 숙녀복 매장이다. 프랑스어로 상점, 가게라는 뜻. ‘부티크형 벤처’라는 조어도 있는데, 기술력은 높지 않지만 부가가치가 큰 소형 기업을 말한다.

부티크 로펌, 리서치 부티크라는 용어도 간혹 쓰인다. 각각 대평 로펌이 놓친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문 로펌과, 경제·금융 관련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리서치 전문 업체다. 부티크란 한마디로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엘리트 집단’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계에도 부티크가 있다. 에이원창투 조효승 사장은 “빅 뱅크의 빅 비즈니스 중 일부를 특정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KTB자산운용 장인환 사장은 “증권사 기능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내 수행하는 전문가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부티크만의 고유 업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왜 많은 엘리트가 기존 대형 금융사를 뒤로 한 채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개인사업체’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일까.

핵심은 ‘버는 돈’의 차이다. 1998년 말부터 주식 투자 대행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는 민종석(가명) 씨. 투신사 영업 간부 시절, 민씨의 연봉은 2억 원 수준이었다. 부티크 설립 후 거둔 총수익은 40억 원 플러스 알파. 비교도 되지 않는 액수다. “회사 다닐 때는 아무리 높은 이윤을 거둬도 일정 금액 이상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 일 저 일 뭉뚱그려서가 아니라 건건(件件)이 대가를 받는다. 처음부터 고객과 ‘번 돈의 몇 퍼센트’ 하는 식으로 약속을 해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많이 벌수록 내 몫도 쑥쑥 늘어난다.”

세금 차이도 크다. 월급쟁이 시절에는 번 돈의 40% 가량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절세할 길도, 탈세할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법인 이름으로 사업을 하는 지금은 얘기가 전혀 다르다. 법인세 자체가 개인에게 적용되는 세율보다 훨씬 낮은데다 각종 절세법을 찾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 거래 성격상 아예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혹은 세금을 피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양한 ‘기법’을 총동원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제도권에선 지켜야 할 법규나 규칙이 너무 많다. 몸이 무거워 급변하는 금융 환경에 신속히 대응하기도 어렵다. 금융의 꽃은 파생상품. 잘되면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지만 위험부담도 크다. 수많은 고객의 돈을 무작위로 관리하는 입장에선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크게 한 번 걸어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부티크는 어떤가. 제도 밖의 조직이니 만큼 눈치 볼 일이 많지 않다. 정공법이 아닌 암수(暗數)도 들키지 않을 자신만 있으면 얼마든지 활용 가능하다. 고객과 목표가 분명한 까닭에 과감한 배팅도 어렵지 않다.

정권의 논리, 시장의 논리

우리 나라 금융 부티크의 ‘효시’는 중앙종합금융 김석기 사장(43)과 ‘파이스트 인베스트먼트(Far East Investment)’박동현 사장(52)으로 알려져 있다.

김석기 사장은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월가 출신의 국제금융 전문가. 1990년 홍콩에 종합금융 부티크 ‘킴바코’를 설립했다. 그는 국내와 해외 금융시장 간 주식이나 채권 가격의 차이를 이용한 아비트리지(차익거래) 기법으로 큰 돈을 모았다. 다년간 쌓은 해외 인맥이 큰 힘이 되었다. 국내 유수 기업의 자산 운용, 해외자금 유치에 관여하거나 투자 자문가로도 활동해왔다. 서울대 경영학 석사이자 삼성가 손녀인 제일제당 이미경 이사의 전 남편이기도 해 국내 인맥 또한 만만찮다. 하버드 유학생 출신의 각 분야 전문가들과도 교분이 두텁다. 1995년에는 일부 언론으로부터 ‘전직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의 관리자로 지목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박동현 사장 또한 탄탄한 해외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에서 경제학을, 뉴욕대 경영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 졸업 후 뉴욕주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했다. 미 회계법인 PMM사와 메릴린치증권에서 각각 회계사, M·A뱅커로 근무했으며 1989년 한국으로 돌아와 1990년 M·A전문 부티크 파 이스트 인베스트먼트를 설립했다.

1996년경에는 M·A 부티크가 붐을 이뤘다. 파 이스트 인베스트먼트 외에도 한국M·A(대표 권성문), 프론티어M·A(대표 성보경), 아시아M·A(대표 조효승 채운섭), 코미트M·A(대표 윤현수), 프라임매니지먼트(대표 정현준) 등이 활약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부티크 설립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주류를 이루던 M·A 부티크 중 상당수가 문을 닫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상황은 역전됐다. 부티크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IMF 구제금융 사태 후 달라진 금융 환경을 언급하는 이가 많다.

“금융시장의 프리미엄은 통제 때문에 생긴다. 예를 들어 모든 증권 거래는 증권사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진입장벽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제금융 사태 후 각종 통제가 약화하면서 기존 체제에 구멍이 생겼다.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제도권 대금융사의 프리미엄도 분산되기 시작했다.” KTB자산운용 장인환 사장의 말이다.

과거 제도권이란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을, 비제도권이란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했다. 구분이 명확한만큼 각자의 몫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그 구분이 무너져가고 있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던 은행들이 문을 닫고, 음지로만 돌던 사채나 ‘큰손’들이 속속 제도권으로 진입중이다. 정권의 논리가 아닌 시장의 논리가 금융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부는 혼란기에 탄생한다”

또한 이전에는 제도권 금융이 자본, 우수인력을 독점했다. 외환 위기는 ‘집중의 위험성’을 부각시켰다. 위기 관리를 위해서는 분산 전략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확산된 성과급·연봉제를 통해 종자돈을 마련한 금융사 직원들은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프리미엄이 낮아졌으니 애써 제도권에 머물 필요도 없어졌다. 금융 구조조정으로 자리를 잃은 10만여 명의 전직금융업 경력자들의 창업 열기도 한몫했다.

마침 시장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문병길 파트너는 “외환 위기와 극적 회생, 금융 시장 개방 등 엄청난 변화가 단시일에 이루어지면서 돈 벌 길이 많아졌다. 거부는 혼란기에 탄생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때마침 일어난 벤처 붐으로 시장에는 ‘사상 최대’의 돈이 풀렸다. 금융권에 있으면서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 리 없다. 여기에 ‘돈이면 다’라는 식의 도덕적 해이가 맞물려 부티크가 양산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에이원창투 조효승 사장은 “수수료(fee) 비즈니스가 자리잡은 것이 주요인”이라고 진단했다. “부티크 업무의 상당 부분은 컨설팅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컨설팅에 돈을 지불한다는 개념 자체가 서 있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비로소 수수료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져 갔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는 매킨지 등 해외 유명 컨설팅사에 수십억 원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고객들도 ‘최고 엘리트들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주는’ 부티크를 선호하게 됐다. 큰 은행이라는 것만 믿고 돈 맡기던 시대는 지났다. 제도권 금융은 신뢰성 면에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한편 펀딩에 성공한 벤처나 주식시장에서 큰돈을 번 투자자들에겐 누군가 자금을 관리하고 운용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내부에 금융 전문가를 두지 못한 중소기업들에 부티크는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부티크에 뛰어들까.

우선 증권사, 투자신탁, 은행, 종금사 출신이 있다. 국제금융 담당자, 펀드매니저, 채권운용가, M·A전문가, 파이낸셜 컨설턴트, 영업종사자, 선물전문가, 외환딜러…. 변호사와 회계사도 빠지지 않는다. 부티크에 따라서는 세무사가 함께 일하는 경우도 있다. 벤처 관련 업무가 증가한 이후엔 변리사도 합류했다.

이들의 자산은 고부가가치의 전문 지식이다.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여기에 풍부한 인맥과 실전 경험이 보태져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객 확보다. 수수료를 지불해줄 고객, 즉 전주가 없다면 순조로운 창업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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