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나는 한국인의 어리광이 정말 답답하다!”

일본 ‘역사교과서모임’ 대표가 한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

  • 니시오 칸지(西尾幹二) <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회장· 일본 전기통신대 교수 >

    입력2005-05-24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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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과서 문제는 일본인 자신의 자기회복 문제다. 국가가 전쟁에 패함으로써 입은 상처는 깊다. 전후 50년간, 일본인은 세계를 두 진영으로 나눈 두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서로 다른 역사관을 애매모호하게 공존시켜왔다. 곧 미국·영국 등의 민주주의 체제는 항상 옳고 세계사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며 다음 두 가지 가설을 적당히 융합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미 민주주의가 일·독 파시즘을 이긴 정의와 승리의 전쟁이었다는 가설-이것을 ‘동경재판사관(東京裁判史觀)’이라 한다. 한편,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 체제는 평화세력이며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은 전쟁세력이라는, 전후에 특히 지배적이 된 가설-이것을 사회주의 환상(幻想)사관이라 하자.

    역사를 잃은 戰後 일본

    지금도 일본인은 동경재판사관에는 승복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영·미의 민주주의가 반드시 세계사의 모델이라 할 정도로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동아시아의 역사에도 나름대로 고유한 민주주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은 독일과 같은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은 유럽의 전쟁과는 기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사회주의 환상사관은 1945년부터 1975년 사이 창궐(猖獗)했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80년대 들어 한꺼번에 퇴조하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가속화돼 소비에트연방은 최후를 맞았다.

    일본인은 전후에 동경재판사관과 사회주의 환상사관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판이한 역사관을 억지로 합체시켰다. 오로지 머리 속으로 관념적인 역사지도를 그리며,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 속여왔다. 신문이나 공영방송(NHK), 그리고 교과서가 그려온 역사상(歷史像)은 이 납득하기 어려운 두 가지 역사관의 절충체(折衷體)였다.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가?



    한반도는 독일과 함께 분단국가가 되었으므로 일본의 이 어리석은 자기은폐극(自己隱蔽劇)을 잘 모를 것이다. 일본은 분단되지 않은 대신, 일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38선이 그어졌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미·소의 대리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일본인은 내전의 유혈 참사를 회피하고 싶다는 소원을 거의 무의식적·본능적으로 끌어안게 되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전후(戰後) 세월을 보내왔다. 자민당과 사회당, 즉 보수와 좌익이 확고히 대치하며, 자민당에서는 단 한 사람의 탈당자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당에게도 최고 160석 이상의 의석 획득이 허용되지 않고 1955년부터 1993년까지 대립만 일삼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일본인은 미국의 역사관과 소련의 역사관이라는 양극단의 논리를 섞어 합한 후 둘로 나눠놓은 것과 같은 부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고, 이것으로 자기 나라 역사를 묘사함으로써 국내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번영의 길을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일본인의 ‘지혜’였다. 그러나 지혜이자 교묘한 삶의 방식이었던 까닭에, 일본인은 그 대신 ‘자기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린 것이다.

    1990년 미소 초강대국간의 냉전이 끝났다. 사회주의 환상사관은 효력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동경재판사관이 유일하게 효력을 지닌 역사관으로서 살아 남았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예컨대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의 원폭 투하를 예로 들어보자. 1990년까지 세계는 핵무기를 전제로 힘의 균형을 잡고 국제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원폭투하가 미국의 전쟁범죄라고는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었다.

    계급주의 사관을 거부한다

    그러나 지금은 원폭 투하를 미국의 전쟁범죄라고 공공연히 말하게 되었다. 히로시마의 원폭 돔은 나치스의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것은 미국이 뉘른베르크 재판의 피고석에 소환당해 세워진 것과 다름없다.

    ‘새로운 역사교과서’에는 1860년대 이후 미국이 태평양에서 획득한 영토, 즉 식민지를 표시하는 한 장의 지도가 게재돼 있다. 북쪽에서부터 알래스카, 알류산 열도(列島), 미드웨이 제도(諸島), 존스턴 섬, 하와이 제도(諸島), 바르미라 섬, 웨이크 섬, 미국령(領) 사모아, 괌 섬, 필리핀 등등이다.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세계사에 등장한 바로 그 시기 미국은 일본열도의 남쪽 해양을 봉쇄하는 형태로 포위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은 이미 일본에 무언의 위협을 주고 있었다.

    1904∼1905년 일로(日露)전쟁 때 미국은 일본의 협력자였다. 그러나 일로전쟁 직후 미국은 만주 진출의 기회를 노리며 16척의 전함으로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등,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는 행동을 나타냈다. 나는 일본과 미국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 선이고 어느 쪽이 악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두 힘의 물리적인 충돌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전후 일본인은 앞서 말한 동경재판사관-미국의 승리는 정의이고, 일본은 부정의(不正義)한 전쟁을 저질렀다는 논리-에 따라 일방적으로 죄의식을 세뇌받았으므로 자기 처지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역사교육이나 역사교과서의 세계에서는 사회주의 환상사관의 뿌리가 매우 깊어, 아직도 구(舊)공산주의 국가와 같은 사고방식에 깊이 주박(呪縛)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용되어온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1996년도 검정) 일곱 권 가운데 여섯 권이 한국전쟁을 북한의 침략이라고 명기하지 않고 있다.

    일곱 권 전부가 러시아 혁명을 높이 평가하며 공산주의의 미점(美點)을 예찬하고 있다. 그리고 스탈린의 범죄는 간신히 한두 줄 언급하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악이 아니라 스탈린의 개인 범죄로 취급하고 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범죄가 지닌 동질성을 직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모택동이나 폴 포트의 대량학살에 관해서나, 중국에 의한 티베트인의 대량 살육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환상사관은 특히 고대사에서 특히 현저하다. 고대사회에서는 중앙집권, 황제나 천황에게 어떻게 권력을 집중시키느냐가 ‘공(公:publicity)’이었다. 그것은 일반 호족(豪族)들에게 위탁한 토지나 인민을 왕권이 몰수하고 국가가 어떻게 공평하게 재분배할 것이냐는 의미다. 중국 당(唐)나라에서는 균전제(均田制), 고대 일본에서는 반전제(班田制)라 불리는 ‘공지공민(公地公民)’의 이념이 그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마르크스주의 사관과는 완전히 절연(絶緣)하였으므로 이 고대사에 관해 국민생활에서 ‘공정(公正)’의 전진(前進)을 의미하였다고 제대로 써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교과서들은 “오로지 농민들은 비참했다”, “그래도 농민들은 노예와 다름없었다”며 일면만 강조하고 있다. 이는 “권력은 언제나 ‘악’이며, 민중은 언제나 ‘선’이다”라며 계급투쟁사관이다. 이러한 사관은 이제 시대에 뒤졌으며, 역사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분들, 특히 사회주의 환상사관의 부정에서 출발한 한국분들이, 일본 교육계의 이상한 왜곡현상 때문에 고통을 겪어온 일본의 전통(정통) 보수계열 지식인들의 깊은 고뇌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도 역사 교사들의 세계를 좌우하는 것은 일본공산당과 그에 관련된 조직들이다.

    역사교과서의 집필자들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다. 집필자는 늘 무엇인가에 저항하고 또 적대시(敵對視)하고 있다. 저항과 적대시하기에 안성맞춤인 화제만 역사에서 채집해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저항과 적대시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고 일관성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경우 그 대상은 근세 일본의 중앙권력인 도쿠가와(德川) 막부고, 메이지(明治)정부이며 미국 제국주의인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이들에게는 작은 것은 ‘선’이고 큰 것은 ‘악’이다. 역대 일본 정부는 예외없이 언제나 ‘악’이다.

    우리는 이러한 단순한 역사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전진할 수 있었고 또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교과서는 일본국가가 이루어놓은 성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국가의 슬픔도,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도 기술해주지 않는다. 민중이 국가를 적대시하는 자세만 언급하고, 적대시당한 국가의 의견은 일절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교과서가 아니라 선동용 정치 팸플릿이다.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에 굴복한 동경재판사관과 소련의 경직된 유물론에 굴복한 사회주의 환상사관, 어떻게 해서든 이 두 가지를 극복하고 역사다운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일본은 정신적으로 주권국가로 되돌아갈 수 없다.

    이런 뜨거운 심정으로써 설립된 것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다. 회원은 1만여 명. 이 모임은 1인당 연간 6000엔씩 내는 회비와 인세(印稅) 수입으로 운영된다. 이사를 맡은 학자와 지식인들은 모두 무보수로 봉사한다. 한국의 일각에서는 우리를 향해, “이 모임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정치적인 흑막(배후 원조자)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우리는 모두 웃었다. 우리 회원은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부터 17세의 고등학교 학생에 이르기까지 두텁다.

    회원들은 이대로 둔다면, 일본은 망국(亡國)에 늪에 빠져들 것이라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벌떡 일어난 사람들이다. 물론 국가를 소중히 여기는 감정은 기본이지만, 옛날식 국가주의와는 별개다.

    ‘새로운 역사교과서’에 관해 교토(京都)대학의 나카니시 테루마사(中西輝政) 교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적했다.

    “일본이 그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잃지 않고 유난한 자세로, 바깥 세계로부터 문명을 섭취하는 자세를 기본으로 삼은 나라임을, 전편(全篇)에 걸쳐서 일관된 형태로 명료히 서술하고 있다. 이 일관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산케이신문’, 2001년 4월4일자)

    일본 열도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대(大)문명권에 접하며 거기로부터 양분을 얻어 스스로 양육해 독자적인 문화권을 만들었다. 일본 열도가 양분을 얻은 두 문명권은 고대 중국문명과 근대 서양문명이다. 일본 열도는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들과는 다른, 문명 섭취방식과 자기 육성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분들은 일본이 공격적인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전혀 옳지 못하다. 일본 문명은 죠오몽(繩文)시대 이래 수동적이었다. 바깥세계에서 갖가지 생활문화를 받아들였으나, 바깥으로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저수지와도 같은 문명이다. 세계의 여러 문명을 실어다주는 바람 길의 종착점이며, 그 영양소들이 겹겹이 축적된 옥토가 일본이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그러한 일본의 국가 이미지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

    일본은 외압에 의해 국가의지(의사)를 결집해온 나라이기도 하다. 7세기 당 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한 ‘백촌강의 패배’(백마강 전투의 패배)를 겪고 난 후 비로소 ‘일본’이라는 국호가 탄생했고 ‘천황’호가 성립하였다. 수동적인 나라다운 행동 패턴이다.

    몽고와 고려에 의한 ‘원구(元寇)’의 습격을 받아 이 섬나라는 다시금 통일 의지를 보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담한 지구 분할을 눈치채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기독교도들을 배제하고 중국문화권으로부터 이탈을 시도한다(조선출병에는 그러한 의미도 있었다).

    한반도 침략은 피할 수 없는 선택

    기독교를 거부하고 북경정부와 교류 하기를 거부한 두 가지 외교정책은 그대로 270년간 도쿠가와(德川)막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아시아로 진출하고 북방에서는 러시아가 남하하고, 이어 남방에서터 미국이 북상하는 위협을 이 열도는 온몸으로 대결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동적이기 때문에 주체성을 지키려고 투쟁을 한 나라, 그것이 일본이다.

    이 점에 관한 한 한국분들은 무언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 도대체 일본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처럼 지구의 저편까지 가서 그곳을 겁탈하였는가? 영국·프랑스·러시아·네덜란드처럼 지구 저편까지 돌아가서 한 나라라도 식민지로 만든 예가 있었던가? 미국처럼 넓디넓은 바다에 띄엄띄엄 자리한 섬들을 모조리 습격하고 내 영토로 만들려고 어금니를 간 적이 있었는까?

    일본의 행동은 모두 수동적이며, 따라서 볼품없고 치졸한 면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반도를 연좌시켜 피해를 입힌 것은 지금 시점으로부터 생각하면 폭거(暴擧)이고 유감스럽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피할 길이 없는 선택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분들이 일본의 이러한 수동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대 이래 일본의 행동 가운데 항상 ‘악마적인 것, 범죄적인 것’만을 확인하고자 하는 역사 시각에 대해 일본인들은,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 당혹감을 느끼고 오싹오싹한 느낌을 받고 있다.

    한국분들에게 내가 호소하고 싶은 것은 이 한 가지뿐이다. 물론 긍지 높은 한국인이 타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던 사실을 고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만으로 일본의 이미지를 결정하려는 습성은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분들이 역사의 오랜 기간에 걸쳐서 중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사실에 관해 고집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인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의아해하고 있으며 불가사의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국내 문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솔직히 말해 한국분들에게 말하기 시작하면 나는 둑을 터뜨린 것같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막을 방법이 없어 두렵다. 역사교과서문제에 관해서는 이것이 동경재판사관과 사회주의 환상사관 두 가지를 극복하려는, 일본인의 주권회복 열정에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국내 문제다. 일본인 영혼의 문제다.

    이번에 한국에서 제시한 집요한 수정 요구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분들은 일본과 한국 사이에 ‘국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의 역사가 있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의 역사가 있듯이 말이다. 우리 일본인이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한국의 교과서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한 적이 있었는가? 각각 서로가 독립국이고 주권국인 이상, 내정간섭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간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최소한의 조건이자 예의다. 한국의 대일(對日) 요구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여,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옆으로 휘젓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쓰인 배경에는 전후 50년간 미·소 사이에서 자신의 역사를 잃고 살아온 일본인의 오랜 고통이 깔려 있다. 적어도 그 점에 유의하면서 상대방 입장에서 조금은 생각해보는 마음의 여유를 한국분들에게 바라는 것이 과연 무례한 것인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 같잖은 요구가 되는 것인가?

    한국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상대방에게만 이해심 있는 마음을 요구해놓고 자신은 일체 이해심 있는 마음을 안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일종의 어리광에 대해 일본인이 가질 수 있는 답답함과 저항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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