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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현지취재

아무도 찾지 않는 사형수의 죽음

마약사범 신옥두·정영조씨 체포에서 총살·옥사까지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z@donga.com

아무도 찾지 않는 사형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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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피가 튀며 꿇어 앉았던 죄수 15명이 앞뒤로 쓰러졌다. 피와 함께 뇌수가 터져 메마른 사형장에 흘러내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시체를 담을 비닐포대를 준비하고, 흘러내리는 핏덩이에 흙을 퍼부었다. 검시관이 다가와 죄수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확인 사살을 해야 한다. 근접거리에서 소총으로 머리를 관통당한 터라 뒤통수쪽 총알 구멍은 작았지만, 얼굴 앞쪽은 형태가 흩어진 죄수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15명 모두 완벽히 절명했다. 검시관의 확인이 끝나자 병사들이 시신을 비닐포대 쪽으로 질질 끌고 가서 담았다.
2001년 9월25일 화요일 오전 9시30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의 하얼빈시 교도소 정문.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고 기온은 영상 15℃ 정도로 쾌적했다. 교도소 철문이 열리고 15명의 죄수가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167cm정도 되는 키에 짙은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40대 남자가 있었다. 안경을 끼지 않은 맨눈, 스포츠형 머리에 살집이 약간 잡힌 이 남자는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가 15명의 죄수 가운데 유달리 눈길을 끈 것은 중국말을 못하는 한국인이라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남자와 법관, 통역 세사람이 마주섰다. 법관이 단호하게 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확인 결정에 따라 당신을 사형에 처합니다.”

통역이 이 말을 남자에게 전했다. 남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법관이 마지막 확인 절차를 거쳤다.

“이름이 뭡니까?”

“신옥두.”

“나이는?”

“41세.”

“직업이 무엇입니까?”

“전라북도에서 건축업을 했습니다.”

법관은 신원확인절차를 마치고 사형판결문과 신원확인서를 내밀었다. 남자는 이 서류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더할 얘기는 없는가?”

“없습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았다.

“부탁할 것 없는가?”

“없습니다.”

대화가 끝나자, 공안요원들이 남자의 수갑을 풀고 손을 뒤로 돌려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는 같이 나온 죄수들과 함께 호송버스에 태웠다. 무장군경을 태운 트럭이 호송버스 앞뒤로 섰다. 하얼빈시 교도소에서 쑹화강(松花江) 강변에 있는 하얼빈시 총살장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40분. 교도소를 빠져나온 호송버스는 시가지를 15분 정도 달리다가 울창한 미루나무가 터널을 이룬 왕복 2차선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다.

시가지에서는 사형수를 태운 호송버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라도 많았는데, 여기서부터는 아예 인적이 없었다. 이곳은 하얼빈시 외곽이라 일반 시민들이 올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주말도 아닌 화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더더욱 사람 꼴을 찾을 수 없었다.

미루나무 터널 길 바깥은 드넓은 벌판이다. 산 하나 볼 수 없이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 포승줄로 묶인 한국인 남자는, 중국을 드나들면서 많이 보았던 광경이지만 사형장으로 가면서 이런 벌판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9월이라 아직은 미루나무 가지가 푸르다.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이곳 하얼빈은, 이제 한달만 지나면 새파란 가지가 칙칙한 갈색으로 변할 것이다.

중국정부에서 붙여준 조선족 변호사가 있긴 했지만,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그는 재판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돈벌이가 안된다며, 아예 하얼빈을 떠나 행적조차 묘연하다. 감방 안에서 중국인 죄수들에게 두들겨 맞아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디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면회오는 사람도 없었다.

사형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형장으로 통하는 이 미루나무 길은 너무 아름답다. 차량 통행도 드물다. 붉은색 스포츠카라도 지나가야 제격인데, 모래를 잔뜩 실은 마차가 덜컹거리며 다가온다. 마차를 끄는 늙은 검정말이 힘겨워보인다. 잠시 후 벽돌을 가득 실은 마차도 접근한다. 이번에는 검정말이 아니라, 비루먹은 갈색 당나귀다. 당나귀는 덩치는 작지만 검정말보다는 힘이 세보인다.

버스는 미루나무 길을 벗어나자, 우회전하여 울퉁불퉁한 비포장길로 접어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포장이 된 길인데, 관리를 하지 않아 맨흙이 반쯤 드러난 길이다. 길 왼쪽에 20여m 정도 경사지 아래로 쑹화강이 보인다. 오른쪽은 과수원인 듯하다.

버스가 몸을 주체하기 힘들 만큼 심하게 요동친다. 여기서부터는 쓰레기 매립장 같은 분위기다. 길 옆에는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폐비닐이 바람에 이리저리 갈지(之)자로 날렸다.

사형장으로 쓰이는 이곳 부근은 하얼빈시에서 골재와 모래를 채취하는 곳이다. 오른쪽 공터에는 흙이 깎여져 나간 언덕이 흉물스레 펼쳐진다. 쓰레기장 구역같은 곳을 출렁거리며 달리던 버스가 멈추었다.

총살 현장

인민해방군 철모에 소총을 어깨에 메고 흰장갑을 낀 공안요원 3명이 한조를 이루어 사형수들을 버스에서 끌어내렸다.

두 명이 양팔을 잡고 한 명은 뒤에서 따라간다. 총살장 철문이 열렸다. 운동장 같이 넓은 공터가 안에 있다. 공안요원들이 사형수 15명을 일렬횡대로 세워 절개지 안쪽으로 끌고 간다. 그 거리가 100m. 죽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죄수가 있지만 소용없다. 두 명이 단단히 옆에서 끼고 있기 때문에 아예 질질 끌려간다. 윤이 날 정도로 검은 까마귀 두 마리가 총살장 상공을 유유히 비행한다.

절개지가 10여m 남았다. 팔을 잡고 이끌던 공안요원이 멈춰섰다. 여기서 죽는다. 공안요원들은 사형수 15명을 2m 간격으로 나란히 꿇어앉혔다. 총살을 집행하는 공안요원들이 3인 1조로 죄수의 1m 뒤에서 총을 뽑아들고 뒤통수를 겨누었다. 뒤통수 하나에 총구가 셋이지만 죄수의 머리를 관통하는 탄두는 하나뿐이다. 나머지 두 총구는 탄피만 튈 뿐 탄두가 없는 일종의 공포탄이다. 총을 쏘는 사수는 누구 총에 탄두가 실려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수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 주기 위한 방편이다.

“어깨 총!”

사수들이 일제히 사형수들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었다.

“조준.”

“발사!”

45개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피가 튀며 꿇어앉았던 죄수 15명이 앞뒤로 쓰러졌다. 피와 함께 뇌수가 터져 메마른 사형장에 흘러내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시체를 담을 비닐포대를 준비하고 흘러내리는 핏덩이에 흙을 퍼부었다. 검시관이 다가와 죄수들의 사망 여부를 확인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확인사살을 해야 한다. 근접거리에서 소총으로 머리를 관통당한 터라 뒤통수쪽 총알 구멍은 작았지만, 얼굴 앞쪽은 형태가 흩어진 죄수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15명 모두 완벽히 절명했다.

검시관의 확인이 끝나자 병사들이 시신을 비닐 포대쪽으로 질질 끌고 가서 담았다. 끌려가다가 한 죄수의 신발이 벗겨졌다. 망자(亡者)의 유품이건만 아무도 이를 챙기지 않는다. 총살장 정문에는 호송버스와는 다른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트럭이다.

중국 하얼빈에서 체포된 한국인 마약사범 신옥두(41)씨는 이렇게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곧바로 화장장으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유품도 없었고, 유골을 찾는 이도, 슬퍼하는 이도, 종교 의식을 치러주는 이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묘사는 하얼빈 현지 취재를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총살 당일인 9월25일 날씨는 하얼빈시 공산당 기관지인 ‘하얼빈일보’를 참고했고, 법관과 신씨의 마지막 대화와 상황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과 중국 법원의 수칙을 따른 것이며, 감옥에서 총살장까지의 주변 풍경과 총살 현장은 현장답사 및 중국 당국의 총살 수칙을 참고해서 재구성했다.

감옥에서 사망한 또다른 마약사범 정영조씨는 사망할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증언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기술하지 않았다. 신씨와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정씨는 신씨처럼 사형을 기다리다 옥사했다. 중국 사법당국은 그가 간질환으로 사망했다고만 밝히고 있다. 사망 당시 정씨는 68세였는데, 병이 있었다면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중국 감옥의 인권상황은 아직까지 외국에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범죄사실 요지

기자가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11월8일. 신씨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정확히 44일째 되던 날이다.

한국 국가기관이 신씨와 정씨 사건을 얼마나 조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장 먼저 할 일은 이들의 범죄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이 남긴 하얼빈 내 행적을 되밟아보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신모씨 사건’이라고만 알려진 이 사건은 조선족과 국내의 마약업자들이 국제적으로 연결된 복잡한 사건이었다. 사망한 두 한국인은 이 히로뽕 커넥션의 핵심인물이다. 정영조는 1인자로 기술책임자였고, 신옥두는 2인자로 제조·운송·판매 총괄책이었다.

사건은 1996년 마산에서 시작된다. ‘총장급’ 히로뽕 기술자인 한국인 정영조와 박정열(71)은 1996년 3월, 마산에서 중국에 들어가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최초로 모의했다(히로뽕 제조기술은 고난도의 기술이라 최고기술자를 총장급, 그 다음을 학장급, 그 다음을 교수급이라고 부른다).

같은해 8월, 정영조는 동생 정익무에게 한화 1000만원을 주면서 중국에 가 조선족 장세추를 찾아 히로뽕 제조원료를 구입하도록 지시한다. 정익무는 곧 다롄(大連)으로 가서 조선족 백재만을 찾아 통역을 삼고, 하얼빈에 있는 장세추와 관계를 맺었다. 이후 같은 해 10월까지 정익무, 백재만, 장세추는 하얼빈과 다롄에 있는 백재만의 집에서 여러 차례 만났으며 정영조는 인민폐 8만5000위안(한화 1360만원 가량)을 두 번에 나누어 장씨에게 주어 히로뽕 원료를 구입하도록 했다.

이 기간에 정영조는 대구시에 살고 있던 신옥두를 찾아가 가짜 여권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신옥두는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에 잠입하여 조선족 박대림을 찾아가 여권 위조를 부탁했고, 박대림은 또 김해일을 찾았다. 1996년 10월 신옥두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와 양희철이란 이름의 위조여권과 여기에 붙일 정영조 사진과 인민폐 1만5000위안(한화 240만원)을 박대림에게 넘겨주었고 박대림은 이를 김해일에게 주었다. 박대림은 두 차례에 걸쳐 인민폐 1만4000위안을 김해일에게 주고, 자기는 1000위안만 챙겼다. 그 해 12월, 신옥두는 완성된 위조여권을 정영조에게 주었다.

1997년 1월8일 정영조는 위조한 여권으로 중국 다롄시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신옥두와 만나 다음날인 1월9일 웨이하이(威海)시에 있던 박정열(최초로 마산에서 정영조와 모의한 자)을 다롄의 집으로 불렀다. 정영조가 히로뽕 제조건을 꺼내자 박정열은 제조에 가담하지는 않겠지만 히로뽕을 살 수는 있다고 대답하고 되돌아갔다.

1월13일 정영조는 백재만을 내세워 당시 상하이(上海)에 있던 장세추를 다롄으로 불러, 하얼빈에서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튿날 정영조, 신옥두, 백재만과 장효경(한국인, 도주중), 장세추는 함께 비행기로 하얼빈에 도착했다. 장세추는 곧 랴오닝(遼寧)에 있던 사촌동생 이홍철을 하얼빈으로 불러왔다. 장세추는 한화 3500만원을 출자해서 하얼빈시 인근지역(道外區 松浦鎭 沙子村) 동쪽 2km 지점에 3층집 한 채를 빌려 생산기지로 삼았다.

1월 하순 정영조가 기술지도를 전체적으로 책임지고, 신옥두가 제1제조공정, 백재만이 제2제조공정, 장효경이 마무리, 이홍철이 잡무, 장세추가 음식 및 원료를 책임지기로 하고 히로뽕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정영조는 웨이하이시의 박정열을 찾아 그를 통해 히로뽕제조원료인 염화바륨을 두 병 사왔다. 2월6일 정영조 등은 히로뽕 3500g을 제조해냈다.

1997년 2월7일 정영조는 히로뽕을 3봉지로 갈라 포장하고 신옥두, 백재만이 이를 휴대해 다롄의 정영조 셋집으로 운반했다. 2월11일 정영조는 박정열을 불러다 히로뽕을 한국으로 내보내달라며 성사후 인민폐 15만위안(한화 2400만원)을 주기로 했다.

박정열은 신옥두와 함께 히로뽕을 웨이하이시로 옮기고, 동거하고 있는 박옥화를 시켜 한국으로 내보내도록 시키고, 성사후에 kg당 인민폐 5만위안(한화 800만원)을 주기로 했다.

2월28일 박옥화는 영지술병에 마약을 담아 당일로 출항하는 한국선원에게 연락쪽지와 함께 넘겼다. 일주일 뒤 신옥두와 양동규(도주중)는 한국 인천시 부두에서 히로뽕을 넘겨받았다. 그후 그 히로뽕을 팔아 한화 1억2000만원을 챙겼다. 정영조가 1억원을 가지고, 신옥두가 2000만원을 챙겼다. 백재만은 인민폐 3000위안(한화 48만원)을 챙겼다.

히로뽕 제조·운송·판매에서 단맛을 본 신옥두는 1997년 3월 양동규와 함께 다롄으로 가서 백재만을 찾았다. 세 사람은 합의를 본 후 하얼빈으로 가서 장세추를 다시 찾았다. 이들은 원래 지점에서 다시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하고, 이홍철에게 히로뽕 배합제가 들어 있는 행장을 갖고 하얼빈으로 오라고 통지했다. 이들은 역시 샤퉈쯔춘(沙子村)에서 히로뽕을 제조하기 시작했으나 4월 중순까지 기술자가 없는 관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기술자인 정영조 없이 만들어 보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후 신옥두 등은 앞뒤로 하얼빈을 떠났다.

1997년 7월 상순, 정영조는 태국을 거쳐 다시 중국에 들어와 웨이하이에 있던 신옥두를 만났다. 정영조는 자신이 인민폐 20만5400위안(한화 3286만원)을 투자해서 또다시 하얼빈에 들어가 히로뽕을 제조하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7월 중순, 하얼빈의 장세추를 찾아서 원료구입금(인민폐 19만5400위안)을 주고 장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고는 하얼빈을 떠났다. 신옥두는 옌지에 가서 박대림을 찾아 통역을 부탁하고는 팩시밀리기 장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하얼빈에 데리고 왔다.

신옥두, 박대림, 정영조는 장세추가 찾아준 하얼빈-후란공로 9.5km 지점의 단층집에서 또 히로뽕을 만들기 시작했다. 9월5일까지 정영조 등은 히로뽕 완제품 1만466.9g과 히로뽕 반제품 4만7000g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 김해일은 1997년 옌지의 셋집에 있는 이봉덕에게 가짜주민등록증을 만들어주고 대가로 인민폐 2500위안(한화 40만원)을 받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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