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蔣介石 연금한 西安사변 주역 張學良장군 회고담

  • 정리·홍순도

    입력2004-11-09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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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을 기독교적 역사관으로 말하겠다. 너희들의 큰어머니(장장군의 부인 자오이디·趙一荻 여사를 지칭)는 내 인생관에 중국의 민간신앙인 삼교구류(三敎九流)의 요소가 많다고 비난하나 어쨌든 기독교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할 참이다.

    먼저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얘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국과 대만은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는데 일찍이 대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1966년 일어난 문화대혁명 직전이 아마 그때가 아니었던가 싶다. 당시 중국은 1958년부터 2년 동안에 실시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2선으로 물러나고 류사오치(劉少奇)와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마오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정국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반면 대만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진짜 형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무려 10년을 이어간 문화대혁명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10년은 대만이 숨을 돌릴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하늘이 대만을 버리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미국과의 관계도 개선의 조짐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대만 대신 중국을 선택하려는 내부적 결단을 구체화하려는 움직임을 시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곧 이어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주자파로 매도해, 이런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때 만약 그런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단언컨대 현재의 대만은 없다고 해도 좋다. 하늘은 대만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문화대혁명을 발동시켜 중국 대륙을 그토록 혼란으로 몰아넣었을까? 또 왜 류사오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저우언라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을까? 답은 이미 나왔으나, 더욱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이에 대한 과오를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앞으로 30년, 40년 후에도 중국이 이처럼 노력을 기울인다면 대륙의 미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대만을 수복하는 길은 현재처럼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때 나는 마음이 아주 심란했다. (50년 동안 연금상태인) 나의 처지에 대한 신세가 한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대만의 정국이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든 것이다.

    어떤 국면이었는지 얘기해 보겠다. 당시 장제스 총통은 여전히 건재해 있었으나 연로했던 만큼 두 명의 가능성 높은 후계자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2인자인 천청(陳誠) 부총통과 첫째 아들인 장징궈(蔣經國) 행정원(내각에 해당) 부원장이었다. 이중 천부총통은 야심이 정말 대단했다. 언제나 자신이 장총통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겠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마음이 초조해지면 장총통에게 빨리 자리를 물려달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총통께서 이미 연로하셨으니 이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그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그런 상황이 자주 있다보니 장징궈는 나에게 비밀을 지켜달라면서 “만약 어느날 부친이 돌아가시면 나는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천부총통의 야심으로 미뤄볼 때 아마 부친이 갑자기 사망할 경우 자신에게 자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같았다.

    陳誠 부총통의 죽음

    아,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사람의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도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때(1965년) 묘하게도 천부총통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만약 천청 부총통이 건재한 상황에서 장총통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그가 후계자가 됐을 가능성이 높고 대만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국민당은 즉각 옌자간(嚴家) 행정원장을 후임으로 선출했다. 옌자간은 인간성이 호방하고 온건해 천부총통처럼 야심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당연히 후임 행정원장의 자리는 부원장인 장징궈의 몫이 됐다.

    천부총통이 사망한 후 장제스 총통도 몇 년 동안 노환으로 앓아 누웠다. 그가 수년 동안 앓아 누웠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행정원장으로 경험을 쌓은 아들 장징궈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지에 대한 교육을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장징궈는 이 동안 당·정·군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확실히 배웠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 동안 국가를 관리하고 실력을 연마할 기회를 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장총통과 천부총통의 죽음이 순서가 바뀌었다면 이런 국면은 그리 쉽사리 오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심 아들 장징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그에게 국방부장(국방부장관)과 경제위원회 주임 등의 직책을 맡기고 교육시킨 장총통의 의중은 결국 성공했다.

    이후 십수년 동안 장징궈 총통은 선친과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 나름대로의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선친의 단점을 모두 다 간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고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대만을 통치하는 데 적합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자기 혼자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자신이 상당한 권력을 위임한 능력 있는 참모들이 많았다. 예컨대 쑨윈쉬안(孫雲璇) 행정원장 같은 인물이 그랬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 대만 총통이 되고자 했던 천청 부총통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계략을 가지고 자신의 비원을 실현시키고자 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이런 유사한 예는 대륙에도 있다. 장칭(江靑)이 대표적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전략과 지략으로 대륙을 휘둘렀는가. 그러나 결국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나.

    이제 내 얘기로 좀 돌아가보자. 나는 1901년생으로 마차에서 태어났다. 기이한 일이나 아마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이상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자마자 젖이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모유를 먹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가난했음에도 우리집에서는 유모 한 분을 고용했다. 무려 40세가 넘으신 분이었다. 생각해보라! 이런 분의 젖이 오죽했겠는가. 이러니 어릴 때부터 몸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어느 의사가 나에게 몸이 아주 안 좋다고 했는데 나는 당연하다고 대답해줬다.

    나의 부친 장쭤린(張作霖) 장군은 이때 사람을 죽이고 조선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부친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가서 청나라의 군인이 됐다. 부친이 군문에 들어선 계기가 아닌가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애국적인 인물이었다. 아마 16세 때쯤인가 싶다. 대총통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과 치욕적인 21개조 조약을 맺었다.

    이는 정말이지 망국조약이었다. 우리 집안의 근거지인 동북3성 역시 끝장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울분이 치밀었다. 이런 울분에다 몸까지 좋지 않았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급기야 피를 토하고 드러눕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영국인 의무대장을 불러 치료를 맡겼다. 그는 나의 증세를 잘 아는 듯 고민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편히 지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나에게 표를 한 장 주면서 강연을 듣고 오라고 했다. 톈진(天津)에 있는 난카이(南開)대학 장보링(張伯笭) 총장의 강연이었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요지의 강연이었다. 나는 그의 강연에 신선한 감명을 받았다. 그와 교류하면서 점점 내 인생의 지향점이 드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본래 나는 의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게 애국광이자 사람에 대한 사랑이 유난했던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수차례 번민 끝에 나는 미국으로 가서 의학을 배우기로 했다. 지금의 선양(瀋陽)인 당시의 펑톈(奉天)에는 기독교청년회라는 것이 있었다. 장총장의 강연도 그곳에서 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프라이드라는 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내 계획에 흔쾌히 찬성을 표시하면서 3등 배표를 살 수 있는 70달러를 건네줬다.

    “나는 지모가 대단했다”

    나는 부친이 반대할 것 같아 몰래 도망가려 했다. 이때 독일 유학생 출신이자 나의 영어선생인 천잉(陳英)이라는 분이 아이디어를 줬다. “부친에게 군사학을 배우러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게. 부친은 자네가 군인이 되기를 원하니 보내주실 걸세”라면서.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즉시 부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웬걸, 부친은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천선생이 다시 나에게 다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 펑톈에 설립된 강무당(講武堂·오늘날의 사관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라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틀림없이 미국유학을 보내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강무당 입학을 요청했다. 그러자 부친은 “좋다. 우리 부대의 대대장을 맡으면서 다녀라. 졸업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겨우 20세의 나이에 아버지 부대(동북군 군벌)의 대대장이 됐다. 이후 미국 유학은 진짜 물 건너갔다.

    군대에서 나는 한마디로 승승장구했다. 20세 중반에 27사단장이 됐고 군벌간의 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아버지가 일본군의 손에 의해 돌아가신 후인 29세에 동북군 사령관으로 승진한 것은 너희들도 잘 아는 일이니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겠다.

    자랑 같지만 나는 지모가 대단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게 했다. 너희들은 내가 지금 웃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나에게 무슨 특출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장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의 권유로 믿게 된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일이다.

    올해 나는 86세다. 정말 많은 일을 봐왔고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것들이 다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무솔리니의 권위는 대단했다. 나중에 전범으로 잡혀 총살형을 당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다시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보자. 나는 28~29세에 이미 천하의 전권을 장악했다. 사람들이 만약 내 역사를 쓴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동북군 사령관 겸 전국 육해공군 부총사령관이자 70만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산둥(山東)·허베이(河北)·산시(山西)성을 총지휘한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겨우 29세의 나이에 슈퍼맨이 되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도 아니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던가? 마찬가지로 아니다. 이 말은 내가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지금까지 살게 될지는 정말 꿈도 꾸지 못했다. 때문에 노는 것과 식도락을 즐기는 쪽으로 유달리 신경을 많이 쓴 편이었다. 중국의 3분의 1을 내 손안에서 주무르기도 했다.

    내가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이 나를 없애려고 그토록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의 회유

    일본인들은 왜 ‘9·18사변(1931년 일본 관동군이 장쉐량의 근거지인 펑톈을 점령한 사건)’을 일으켰는가. 바로 나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조국을 침략하기 위해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전략은 다른 게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에 대해서는 별로 욕을 하지 않고 나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모욕하고 온갖 유언비어를 다 만들어냈다. 심지어 가짜 사진까지 조작해내 나의 권위에 상처를 입히려고 했다. 당시 내가 동북지방의 중심세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려 했고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일본의 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내가 동북지방의 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장제스 총통의 난징(南京) 국민당 정부와 합작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아마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폭사당한 후였을 것이다. 그들은 히야시라는 인물을 파견해 조문을 했다. 그는 주중 일본공사로 나중에 일본에서 승승장구해 대신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아무튼 나는 무척 슬펐으나 웃으면서 그를 맞았다. 히야시는 나와의 대화에서 나를 자신들의 괴뢰로 만들겠다는 흉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연히 그것은 말도 안되는 제의였다. 그러나 나는 히야시에 대해서는 정말로 경외의 마음을 가졌다. 몸을 던져 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유능하고 설득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나는 결코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각종의 준비 끝에 나는 난징정부와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당황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나를 여전히 30세 이전의 아이로 생각하고 나를 속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이같은 전략은 1936년 12월12일 시안에서 장총통을 체포, 항일전쟁을 요구했을 때도 발휘됐다. 장총통은 나를 믿었으나 나는 그의 예상을 깨버리는 일대 용단을 내리고 구국전선에 내 몸을 던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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