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대한항공 ‘국민의 정부’에 대반격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4-10-29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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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별대우, 더는 못참겠다!” KAL이 ‘칼’을 뽑아들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일거에 ‘무장해제’당했던 대한항공이 권토중래를 시도하고 있다. 인·허가 관청을 상대로 한 초유의 난타전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건 안다. 괘씸죄로 깨질 각오는 돼 있다. 우리에겐 더이상 잃을 것도 없다.”

    대한항공이 마침내 반격에 나섰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오너 경영인 퇴진과 고강도 세무조사, 잇딴 항공기 사고에 따른 운항제한조치 등 거센 칼바람에 숨죽여온 대한항공이 위축된 사세(社勢) 회복을 시도하며 정부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대한항공은 건설교통부가, 2월9일 영국 런던 등지로의 국제항공 노선운항권을 배분한 결과가 극히 편파적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런던 노선권을 아시아나항공에 준 구체적인 기준과 근거자료, 양 항공사의 노선권 신청내용을 비교·분석한 검토자료 등을 제시하라”며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불공정한 노선권 배분이 거듭될 때마다 건교부에 질의서를 보내 해명을 요구했으나 단 한번도 답변을 듣지 못했다. 참다 못해 이번에는 법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보공개를 청구했다”고 밝혔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한항공은 건교부를 상대로 이미 세 건의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1999년 12월 건교부는 대한항공이 중국 구이린(桂林), 우한(武漢), 쿤밍(昆明) 등 7개 노선권을 받은 뒤 1년 동안 취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 노선권을 몰수했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은 건교부의 처분이 위법하다며 행정소송을 제기, 1심에서 일부 승소한 후 2심을 기다리고 있다.

    2001년 4월에는 건교부가, 그해 1월 부산발 김포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김포공항 야간운행 통제시간을 어겼다는 이유로 4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는데, 대한항공은 “폭설 때문에 운항지연이 불가피했다”며 이에 불복, 과징금 부과처분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건교부 상대 소송 3건 제기


    또한 1999년 4월 중국 상하이공항 화물기 추락사고의 책임을 물어 2001년 6월 건교부가 대한항공의 상하이 화물노선면허를 취소하자 대한항공은 “이 사고가 노선면허 취소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일단 행정법원에 노선면허취소처분 집행정지를 신청해 받아들여졌으며, 현재 본안 소송이 진행중이다.

    대한항공과 건교부의 관계는 여느 민간기업과 인·허가 주무관청의 관계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건교부는 항공사의 사업면허는 물론 국제항공 노선운항권 면허도 관장한다. 항공산업은 기업이 독자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시장에서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다. 항공사는 건교부가 국가간 항공회담에서 확보해 나눠주는 노선권 면허에 따라 비행기를 띄우고 영업활동을 벌인다. 항공사의 매출과 수익규모는 노선권의 수와 질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비자의 선택’보다 ‘건교부의 선택’에 밥줄이 달려 있는 대한항공이 건교부에 대해 연거푸 강수(强手)를 둔 것은 항공업계의 상식을 뒤엎는 행태다.

    국내 항공업계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두 회사가 시장을 나눠 갖는다. 따라서 양사(兩社)는 노선권 확보를 놓고 치열한 제로섬 게임을 벌여야 한다. 한 회사가 특혜를 받으면 다른 회사에겐 곧바로 불이익이 돌아간다. ‘나의 불행은 곧 남의 행복’인 것이다. 대한항공이 건교부에 거센 공세를 취하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 비롯됐다. 건교부가 자신을 압박하면 할수록 아시아나의 입지가 강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현 정권이 호남 연고의 금호그룹 간판 계열사인 아시아나항공을 비호해 왔다고 본다. 대한항공의 모그룹인 한진그룹은 역대 정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왔지만 현 정권과는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 후보를 공공연하게 지지했을 뿐 아니라 1973년 DJ 납치사건이 터진 후에는 일본 정부가 이 사건을 외교문제화하지 않도록 일본 정치인들과 접촉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당시 한진그룹 최고경영진 중 한 인사는 이런 악연을 떠올린 듯 측근들에게 “앞으로 5년 동안은 죽었다고 생각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런 우려가 최초로 현실화한 것이 대통령 특별전세기의 ‘정권교체’였다. 1998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아시아나의 특별전세기를 이용한 것이다. 그때껏 역대 대통령들의 해외 방문 전세기는 국적항공사인 대한항공이 책임지고 준비하는 게 관례였으나, 정부는 두 항공사를 입찰에 부친 끝에 아시아나의 손을 들어줬다. 아시아나로선 1988년 회사창립 이후 11년 만에 숙원사업을 이룬 셈이었지만, 대한항공은 독점적 지위를 내주고 시련의 길로 접어드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에서는 안전 문제를 이유로 들어 대통령의 아시아나 전세기 이용에 반대했다고 한다. 대통령 전세기는 각종 통신·안전·의전장비 등을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 노련한 전담 승무원들이 대통령의 표정과 심기 변화까지 읽어가며 밀착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이런 노하우는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한항공은 전세계의 웬만한 도시에는 다 취항하므로 대통령 방문국의 대한항공 지사를 통해 충실한 현지 지원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두 항공사에 동등하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주장이 관철돼 아시아나가 낙점을 받았다.

    그후 아시아나는 김대통령의 러시아·몽골 순방을 비롯해 몇 차례 더 전세기를 운항했고, 이 때문에 특혜시비가 일자 정부는 양 항공사에 순번제로 전세기 운항을 맡겼다. 2000년 6월13일 김대통령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 때도 아시아나의 전세기가 이용됐다.

    1999년 4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대한항공 경영진의 인적청산 필요성을 직접 언급해 대한항공을 긴장시켰다. 대한항공이 잇달아 사고를 내자 4월20일 김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전문경영인이 나서서 인명을 중시하는 경영체제로 바꿔야 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대한항공은 즉각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틀 후인 4월22일 조중훈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이 “국제업무만 챙기겠다”며 회장에 취임했다. 조양호 회장이 내놓은 사장 자리에는 심이택 부사장을 앉혔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대한항공 회장직에서만 퇴진했을 뿐 한진그룹의 주요 계열사 회장직을 그대로 유지했고, 조양호 회장은 문책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승진을 한 셈이어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샀다. 조회장 일가의 족벌경영 의지를 재확인한 정부는 마침내 극약처방을 내리기에 이른다.



    6월29일, 김포의 대한항공 본사와 서울 서소문 한진그룹 사옥 등 5개 계열사에 국세청 조사요원들이 급습했다. 이들이 사무실 곳곳을 뒤지며 회계장부를 챙기는 동안 한진 직원들은 부동자세로 대기해야 했다. 석 달 이상 계속된 세무조사 결과 한진그룹은 5416억원의 세금을 추징당했다. 탈루소득액은 1조895억원에 달했다. 탈루소득액과 추징세액 모두 사상 최대 규모로, 탈루소득액은 종전 최고액수의 20배, 추징세액은 8배나 됐다.



    대한항공이 현 정권 들어 이렇듯 궁지에 몰리게 된 일차적 원인은 반복된 사고였다. 대한항공은 22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1997년 8월6일 괌사고에 이어 1998년과 1999년에도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사고를 냈다. 1999년 3월15일엔 포항공항에서 착륙하던 비행기의 동체가 동강났고, 꼭 한 달 뒤인 4월15일엔 중국 상하이 홍차오공항을 이륙한 화물기가 추락해 승무원과 현지 주민 등 9명이 사망했다. 12월23일엔 영국 런던 북쪽의 스텐스테드공항 부근에서 화물기가 추락해 승무원 4명이 모두 숨졌다. 이 때문에 국제적으로 ‘사고 항공사’라는 오명이 따라붙고 정부로부터 일부 노선의 운항감축 처분을 받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타격은 정부가 사고제재 차원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국제선 노선권 배분을 제한한 조치였다. 잇단 사고로 대한항공을 징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건교부는 사고 항공사에 대해 면허취소, 사업정지, 과징금 처분 등을 내릴 수 있는 항공법과는 별도로 1999년 11월 ‘사고 항공사에 대한 노선배분 및 면허 등 제한방침’을 마련해 시행했다. 이 방침은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명 이상일 경우에는 1년, 10명 미만일 경우에는 6개월간 사고 항공사를 노선권 배분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명시했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괌 사고에 대한 제재로 1999년 11월부터 1년간 노선권 배분기회를 박탈당했다. 뿐만 아니라 한 달 뒤에 일어난 스텐스테드공항 사고로 6개월의 제재기간이 추가되는 바람에 1999년 11월부터 2001년 4월까지 1년6개월 동안 노선권을 받지 못했다. 이 기간 중 건교부가 확보한 노선권은 모두 아시아나항공에 돌아갔다.

    대한항공은 “엄밀히 따지면 정부가 괌 사고에 대한 제재로 노선권 배분을 제한한 것은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스텐스테드공항 사고는 1999년 11월 노선권 제한방침이 수립된 후에 발생했으므로 제재가 불가피했을 지 몰라도 이를 2년 전인 1997년의 괌 사고에 소급 적용한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당시 대한항공은 괌 사고의 인명피해가 워낙 컸던데다 계속된 사고로 수세에 몰린 처지였기 때문에 자숙하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가 못됐다고 한다.

    대한항공이 또 하나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대한항공의 발이 묶여 있던 1년6개월 동안 공교롭게도 항공회담이 집중적으로 열려 이때 대량 확보된 노선권을 아시아나가 독식했다는 점이다. 이 기간에 아시아나가 받은 노선권은 주간(週間) 운항횟수 기준으로 약 100회에 달해 당시 아시아나가 보유한 총 운항횟수(286회)의 3분의 1이 넘었다는 것. 더욱이 그 대부분이 대표적 흑자 노선인 중국과 일본 노선이었다고 한다.

    또한 대한항공은 노선배분 제한기간에도 항공기 장기운용계획에 따라 5∼10년 전에 발주한 항공기를 계속 들여오느라 경영효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주문한 항공기를 인수하지 않으면 고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 뿐 아니라 이미 지급한 선수금도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놀리더라도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객기 1대당 월 평균 가동시간이 아시아나의 경우 약 300시간인데 비해 대한항공은 260시간 안팎에 머물고 있다는 설명이다.

    노선권 제한방침을 괌 사고에 소급적용한 것은 무리라는 대한항공의 주장에 대해 건교부 관계자는 “그렇게 큰 사고를 내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국가 이미지가 실추됐는데도 이제 좀 잊혀졌다 싶으니까 억지논리를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고 다발 항공사에 계속 새 노선을 주고 비행기를 띄우게 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는 얘기다. 그나마 우리나라에 항공사가 둘밖에 없어 그 정도의 제재에 그쳤지, 복수 항공사 체제인 미국에서 그런 대형 사고를 냈으면 아예 항공사의 사업면허가 취소돼 업계에서 퇴출됐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대한항공 제재기간에 항공회담을 자주 열어 아시아나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도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항공회담은 우리가 요구한다고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쪽이 요구하면 상대방이 60일내에 수락여부를 결정해 통보하는데,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회담이 성사될 수 없다고 한다.

    1999년 4월에 일어난 상하이공항 화물기 추락사고 조사결과를 중국 당국으로부터 넘겨받은 건교부는 2001년 6월, 이를 근거로 대한항공의 상하이 화물노선 면허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항공법 129조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하거나 항공종사자의 선임·감독에 관하여 상당한 주의의무를 게을리함으로써 항공기 사고가 발생한 때’에는 면허를 취소하거나 6개월 이내의 기간 동안 그 사업의 전부 또는 일부의 정지를 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건교부가 2001년 11월 면허취소 방침을 확정하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법원은 일단 대한항공의 노선면허취소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수용한 후 현재 본안 소송을 진행중이다.

    대한항공이 건교부 처분과 관련해 문제 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사고가 ‘중대한 과실’이나 ‘주의의무를 게을리함으로써’ 발생했다는 확증이 없다는 점이다. 사고원인을 밝혀내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인 비행기록장치(FDR, Flight Data Recorder)가 완전히 파손된 데다, 조종실의 음성기록장치(CVR, Cockpit Voice Recorder)에 녹음된 내용도 일부만 복원돼 정확한 원인규명이 어려웠다는 것. 그래서 중국 당국도 사고조사 결과발표를 미뤄왔는데, 우리 정부가 중국측에 사고관련 자료를 넘겨달라고 요구, 부실한 자료에 근거해 서둘러 조사결과를 공표했다는 게 대한항공의 주장이다.

    대한항공은 “설령 이 사고의 원인이 과실이나 주의의무 태만이라고 해도 사고 당시의 법률로는 노선면허를 취소할 수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상하이 사고 직전인 1999년 2월에 마련된 항공법 129조 1항은 면허취소처분 요건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2항에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처분의 기준과 절차, 기타 필요한 사항은 건설교통부령으로 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체적 처분기준에 관한 항공법 시행규칙이 건설교통부령으로 제정된 것은 1999년 12월이었다. 따라서 4월 상하이 사고 당시에는 구체적인 행정처분 기준이 없었다는 것.

    1999년 12월 신설된 시행규칙에는 사망자가 5인 이상, 10인 미만인 경우 120일 사업정지 처분을 하게 되어 있다. 때문에 9명이 사망한 상하이 사고는 면허취소가 아닌 120일 사업정지 처분대상이라는 게 대한항공의 해석이다. 이 시행규칙은 2000년 9월에 개정됐는데, 이에 따르면 사망자가 10인 미만인 때는 30일 사업정지, 10인 이상 50인 미만인 때는 60일 사업정지로 제재수준이 완화됐다. 단, 중상자 1인을 사망자 0.5인으로 본다는 규정이 신설되어 상하이 사고의 경우 60일 사업정지 대상이 된다는 게 대한항공의 주장이다.

    대한항공측 변호인은 “제재처분의 합리적 기준을 정할 때는 처분 당시(2001년 11월)의 시행규칙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하며, 적용가능한 기준이 다수일 경우 미리 구체적 기준을 정하지 못한 행정청으로서는 사후 제정된 행정처분 중 완화된 기준에 따라야 국민의 권익이 침해받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더욱이 최근의 항공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제재적 행정처분의 정도는 약화하면서 과징금 액수는 증액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 노선면허를 취소하면 사업자가 막대한 손해를 입는 것은 물론, 이용자도 큰 불편을 겪게 되므로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과징금 제도로 행정제재를 가하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건교부는 건교부대로 법 논리를 내세우며 면허취소처분이 합당했다고 반박한다. 1999년 12월 신설된 시행규칙의 부칙에는 행정처분기준에 관한 경과조치로 ‘이 규칙 시행 전의 위반행위에 대한 행정처분은 개정 규정에도 불구하고 종전의 규정에 의한다’고 규정돼 있다는 것. 따라서 신설된 시행규칙을 상하이 사고에 소급적용할 수는 없으며, 법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부 법령이 미비된 상황에도 모법을 근거로 처분할 수 있다는 논리다.

    노선권 배분 제한조치는 2001년 5월1일자로 해제됐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제재기간 후에도 노선배분이 편파적으로 이뤄져 알짜노선은 대부분 아시아나가 독차지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제재가 끝난 뒤에는 2001년 8월과 2002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주요 노선들이 배분됐는데, 건교부가 두 번 다 아시아나에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건교부가 2001년 8월 노선배분 당시 서울-도쿄 노선 주 21회(B767 기종 기준)를 모두 아시아나에 몰아준 것을 그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일본 노선, 그 중에서도 도쿄 노선은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노선과 함께 두 항공사가 취항하는 국제선 노선 가운데 가장 짭짤한 노선이다. 여객수요도 많고 항공료도 상대적으로 고가이기 때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장거리 노선은 대부분 적자다. 장거리 노선은 원가가 높은데도 외국 항공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므로 항공료를 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 가령 미국 항공사들은 미국 국내선 영업이 주요 수익기반이라 장거리 노선에선 저가정책을 쓰고 있다. 유럽 항공사들도 유럽권역 안을 오가는 노선에선 비싼 항공료를 받지만 장거리 노선에선 덤핑도 불사한다.

    이에 비해 도쿄 노선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사실상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 두 회사의 가격 결정력이 높다. 도쿄 노선의 왕복항공료는 55만원 안팎. 하지만 도쿄보다 운항시간은 5배, 운항거리는 8배나 되고, 승무원들의 현지 체재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유럽 노선은 왕복항공료가 도쿄의 3배에도 못미치는 140만원 정도다. 항공사로선 유럽이나 미주 노선에서 발생한 적자를 도쿄 등의 단거리 노선에서 번 돈으로 메우는 실정이다.

    더구나 도쿄 노선은 나리타공항이 포화상태가 되면서 1991년 이후 증편이 전혀 허용되지 않다가 올해 4월 제2 활주로 개장을 앞두고 10년만에 증편이 이뤄졌다. 그러니 이 황금노선을 단 1회도 차지하지 못한 대한항공으로선 분통이 터질 법도 하다.

    도쿄 증편노선이 아시아나에 배분되기 전까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서울-도쿄 노선 운항횟수는 각각 주 28회와 주 5회로 6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러나 아시아나는 주 21회 증편노선을 받은데다, 건교부가 대한항공으로부터 몰수해 나눠준 미사용 노선권 주 2회를 보유하고 있어 전체 운항횟수가 대한항공과 같은 주 28회로 뛰어올랐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도쿄 노선을 35년간 운항한 대한항공과 12년간 운항한 아시아나의 운항횟수를 일거에 1:1이 되도록 만든 것은 누가 봐도 특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건교부는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2001년 8월)배분한 총내역은 대한항공이 14개 노선 주 51회, 아시아나가 2개 노선 주 22회”라고 밝혔다. 서울-도쿄 주 21회를 아시아나에 줬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보다 2.3배 더 많은 노선권을 받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단순히 숫자만으로 비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당시 대한항공이 받은 노선 중에는 서울-선양(瀋陽) 주 5회, 서울-칭다오(靑島) 주 7회, 서울-톈진(天津) 주 4회, 부산-상하이 주4회, 청주-선양 주 3회 등 주 23회의 중국 노선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중 청주-선양 이외의 노선은 이미 대한항공이 취항하고 있는데, 중국 항공당국은 베이징을 제외한 모든 도시에 ‘1도시 1항공사 취항’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노선에는 아시아나가 취항할 수 없으므로 어차피 대한항공에 노선권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노선권이 ‘배분’의 대상이 아닌 만큼 아시아나는 노선권 배분신청을 하지도 않았다. 서울-상하이, 서울-광저우(廣州), 서울-창춘(長春) 등 아시아나가 운항하고 있는 노선에 대한항공이 취항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당시 대한항공에 나눠준 일본 노선(서울-니가타, 서울-오카야마, 서울-아키다)도 서울-도쿄 주 21회에 비하면 노선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

    대한항공은 서울-도쿄 노선과 관련해 또 하나의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다. 1998년 8월 도쿄발 서울행 대한항공 임시편 여객기가 악천후를 무릅쓰고 착륙하다 김포공항 활주로를 이탈하는 사고를 냈다. 1999년 1월 건교부는 이 사고의 책임을 물어 ‘노선권 일부 몰수’ 처분을 내렸다. 대한항공의 서울-도쿄 노선권 주 2회를 몰수해 이를 아시아나에 재배분한 것.

    하지만 이는 일본의 항공정책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일본은 국가간 항공회담에서 주당 운항횟수가 아닌 기종계수(機種計數)를 기준으로 노선권을 내준다. 대형 항공기인 B747과 B777 기종을 2.0, 중형기종인 B767을 1.3, 소형기인 B737과 A321을 1.0 등으로 환산해 노선권을 배분한다. 가령 기종계수 10.0을 확보했다면 B747을 다섯 번 띄우든, B737을 10번 띄우든 운항횟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건교부는 뒤늦게 ‘노선권 주 2회’가 아닌 ‘기종계수 4.0’을 몰수하겠다고 처분내용을 바꿨다. 그렇지만 대한항공에서 회수한 기종계수를 아시아나에 준다고 해서 아시아나가 이 노선에 취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쿄 나리타공항은 취항하는 항공사들에게 일정 시간 동안 활주로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인 ‘타임 슬롯(time slot)’을 부여한다. 이는 나리타공항의 고유 권한으로 한국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아시아나는 기종계수 4.0은 확보했지만 나리타공항으로부터 타임 슬롯을 받지 못해 지금껏 노선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나리타공항 제2 활주로가 개장되는 오는 4월에야 사용이 가능할 전망이다. 그간 대한항공은 운항횟수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줄어든 기종계수만큼 비행기 크기를 줄여 운항해야 했다. 결국 3년 넘게 노선이 사장(死藏)되면서 좌석난이 가중되고 국내 승객을 외국 항공사에 뺏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한항공은 건교부가 ‘노선권 일부 몰수’라는 처분을 한 의도에도 의혹을 품고 있다. 대한항공 한 간부의 말.

    “항공기 사고에 대한 제재는 항공법에 근거해야 한다. 항공법에는 노선면허취소, 사업정지, 과징금 부과 등이 규정되어 있지만, 노선권 일부 몰수 조항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처분한 것은 아시아나에 수익노선을 주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노선권 일부를 몰수하려면 4회, 혹은 6회를 몰수할 수도 있을 텐데 왜 하필 2회를 가져갔겠는가. 당시 아시아나는 도쿄에 주 5회 운항하고 있었는데, 대한항공에서 주 2회를 가져다 줌으로써 주 7회, 즉 매일 운항을 가능케 하려던 게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에 대해 건교부 관계자는 “노선 일부를 몰수한 것은 사업개선명령에 따른 적법한 ‘일부 감축운항’ 조치였다”며 대한항공의 ‘음모론’은 근거없는 억측이라고 일축했다.

    대한항공의 정보공개청구 사태를 촉발한 2002년 2월 노선권 배분의 포인트는 아시아나에 돌아간 영국 런던 노선 운항권 주 3회. 대한항공은 현재 런던에 주 5회 운항하고 있고, 아시아나는 이번이 첫 취항이다. 대한항공은 런던 추가노선 주 3회 중 최소한 2회를 얻어내 주 7회 매일 운항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런던 같은 장거리 노선의 경우 사무실 유지비, 공항 임대료 등 고정비와 승무원 체재비 등 운영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먼저 취항한 항공사가 주 7회의 안정적인 운영체제를 확보한 후 복수취항을 허용해야 한다는 게 대한항공의 논리다. 유럽 각국도 1개 항공사만 한국에 취항하고 있는 마당에 이들보다 경쟁력이 낮은 국내 항공사들이 같은 수요를 놓고 주 5회, 주 3회씩 나눠 유럽에 취항할 경우 시장은 시장대로 뺏기고 제살 깎아먹기식 가격경쟁 끝에 공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이같은 우려의 근거로 프랑크푸르트 노선을 예로 든다.

    프랑크푸르트 노선은 대한항공이 주 5회, 아시아나가 주 3회, 독일의 루프트한자항공이 주 7회를 운항하고 있다. 서울-프랑크푸르트 노선의 항공료는 성수기 기준으로 편도가 110만원, 왕복이 140만원선이다. 승객으로선 왕복항공권을 구입하는 게 당연히 유리한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는 매일 운항하지 않으므로 원하는 출·귀국 날짜에 항공편이 없을 수도 있다. 여행 스케줄이 맞지 않는데도 굳이 두 항공사를 이용하겠다면 비싼 편도항공권을 사야 한다. 따라서 여행 일정에 여유가 없거나 스케줄이 유동적인 승객은, 매일 운항하기 때문에 원하는 날 언제든지 출·귀국이 가능한 루프트한자의 왕복항공권을 구입하게 된다는 것. 서울-런던 노선의 경우 영국측 항공사인 BA(British Airways)가 IMF사태로 탑승률이 떨어진 1998년에 운항을 중단했지만, 루프트한자처럼 매일 운항 스케줄을 들고 복귀한다면 국내 항공사들이 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건교부는 “대한항공 런던 노선의 경우 지난해 9·11테러 직후에는 탑승률이 60%대로 떨어졌지만, 지난 3년간 평균 탑승률이 80%를 상회하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환경을 조성하고 이용자의 편익을 증진하기 위해 복수취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대한항공에 매일 운항체계를 갖춰주기 위해 주 7회를 주고 아시아나에 주 1회를 줄 경우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므로 최소한 주 3회로는 취항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나로서도 런던 노선을 확보해야 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아시아나는 유럽지역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한 곳만 취항하고 있는데 이 노선은 수요에 한계가 있다. 예컨대 서울에서 아시아나 항공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간 여행객들이 아시아나 편으로 귀국하려면 유럽 여행을 마친 후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프랑크푸르트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간 여행객들은 여러 나라를 둘러본 후 파리나 런던, 로마 등지를 통해 귀국하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이들 도시를 다 취항하는 대한항공의 왕복항공권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아시아나는 런던에 취항할 경우 이런 수요를 끌어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의 견해는 다르다. 유럽 노선의 경우 원가가 워낙 높기 때문에 탑승률이 높아도 적자를 내고 있다는 것. 대한항공 런던 노선은 2000년에 14억원, 2001년에는 73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또한 유럽 노선은 수요가 급상승하지 않는 데다, 서울로 오는 승객 중 유럽 현지인, 비즈니스맨, 유학생, 연수자 등을 뺀 순수 관광객은 20% 정도에 불과해 아시아나가 기대하는 만큼의 수요 창출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건교부 관계자는 “지난 2월 배분에서 런던 노선을 아시아나에 줬지만, 대한항공에겐 서울-선양 주 7회를 비롯해 중국 신규 노선인 서울-지난(濟南) 주 3회, 서울-샤먼(廈門) 주 3회 등이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서울-도쿄 기종계수 4.0이 추가되어 전체 일본 노선권 기종계수는 218.3대 159.8로 여전히 아시아나를 훨씬 앞서고 있는데, 이런 것은 왜 얘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이같은 지적에 설득력이 없다고 맞받았다. 도쿄 노선에 기종계수 4.0이 추가된 것은 대한항공이 이 노선에 투입해온 A300-600(주 1회당 기종계수 1.3) 대신 기종 현대화 계획에 따라 새로 도입되는 A330(기종계수 1.5)을 투입하면서 생기는 기종계수 차이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며, 그나마 오는 4월부터 내년 3월까지만 사용 가능한 임시 노선권이라는 것. 그런데도 건교부는 이를 신규 노선권 배분에 포함시켜 대한항공 배분노선 수를 부풀렸다는 지적이다.

    또한 일본 노선 전체 기종계수에서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1960년대부터 일본 노선을 개척해온 대한항공과 회사 창립 이듬해인 1989년 일본에 첫 취항한 아시아나를 수평비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아시아나 창립 이후 양사에 배분된 일본 노선은 87.7대 161.8로 아시아나가 1.8배나 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중국 노선의 경우에도 실속을 얻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선양은 원래 주 7회 운항하면서 여름 성수기 석 달 동안은 7회를 더 뜰 수 있었는데, 이번에 성수기 단서조항을 없애 연중 주 14회를 운항할 수 있도록 했을 뿐이고, 새로 받은 지난·샤먼·싼야(三亞) 노선 등은 아직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운 신흥 시장이라는 것.



    이와 대조적으로 아시아나는 서울-베이징 주 3회, 서울-상하이 주 3회, 서울-항저우(杭州) 주 3회 등 ‘알짜노선’을 챙겼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전체 중국 노선권 운항횟수에서 아시아나에 79 대 95로 밀렸을 뿐 아니라 베이징(11:20), 상하이(11:26), 광저우(0:7) 등 3대 고수익 노선에서는 격차가 더 크게 벌어졌다고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대한항공 주변에선 1996년부터 2년간 금호생명 고문을 지낸 바 있는 임인택 건교부 장관이 노골적으로 아시아나를 봐주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 만큼 분위기가 흉흉하다.

    대한항공은 당시 배분된 중국 노선 중에서 특히 서울-항저우 노선을 탐냈다. 항저우는 중국 최대 항공시장인 상하이와 지척에 있기 때문. 항저우는 부자들이 많이 살기로 소문난 도시로, 서울-상하이 노선을 이용하는 중국인의 절반 가까이가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또한 주변에 관광지가 많아 한국 관광객을 유치할 만한 여건도 좋다. 중국의 ‘1도시 1항공사’ 원칙에 따라 아시아나가 선점한 서울-상하이 노선을 배분받을 수 없는 대한항공은 항저우 노선을 확보해 이처럼 풍부한 여객수요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 그러나 항저우 노선마저 아시아나에 넘어가고 말았다.

    대한항공이 단독 취항하는 중국 노선 중 비교적 재미가 짭짤한 것으로는 선양과 칭다오 노선이 꼽힌다. 하지만 선양과 가까운 하얼빈(哈爾濱)과 창춘, 칭다오와 가까운 옌타이(煙臺)에 아시아나가 취항하면서 수익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아시아나측은 “중국 노선의 수는 우리가 좀 많지만, 공급 좌석 수에서는 53 대 47의 비율로 대한항공이 9만8000여석이나 더 많다”고 해명한다. 대한항공은 이에 대해 “중국 당국은 좌석 수가 아니라 운항횟수를 기준으로 노선권을 관리한다”며 “아시아나는 노선권을 많이 받아놓고도 항공기 사정이 열악해 좌석 공급을 못 늘리고 있다”고 받아쳤다.

    건교부는 1998년 1월 중국 신규 노선권을 배분했다. 당시 대한항공은 광저우 창춘 하얼빈 옌타이 등을 선순위로 신청했다. 그러나 이들 노선은 모두 아시아나에 돌아가고 대한항공에겐 후순위로 신청한 구이린 우한 쿤밍 우르무치 등이 배분됐다.

    이 무렵은 IMF사태 직후라 항공시장이 급격히 침체됐고, 대한항공이 받은 신규 노선들은 수요가 극히 적었다. 더욱이 국가간 항공회담에서 노선권이 확보됐다 해도 취항을 하려면 양국 항공사가 상무협정을 맺어야 하는데, 대한항공의 중국측 카운터파트인 남방항공이 줄곧 소극적인 자세를 보여 노선권을 받은 지 1년을 넘기도록 취항하지 못했다. 그러자 1999년 12월 건교부는 내부지침인 ‘국제항공 정책방향’이 노선배분 후 1년 이상 취항하지 않을 경우 노선권을 회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구이린 우한 쿤밍 등 7개 노선권을 몰수했다. 그 중 구이린 노선은 아시아나에 재배분했다.

    대한항공은 건교부의 처분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7월 행정법원은 “(대한항공이) 7개 노선을 받고도 취항하지 않은 것은 대한항공의 귀책사유로 돌릴 수 없고, 노선배정 뒤 1년내에 취항하지 않으면 노선권을 반려해야 한다는 규정도 사무처리준칙에 불과, 효력이 없다”며 대한항공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구이린 노선의 경우 아시아나가 이미 취항하고 있고 제소기간이 경과했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판결문에서는 이 노선의 몰수도 위법한 것이었음을 명시했다.

    이 소송은 현재 서울고법에서 2심을 기다리고 있지만, 건교부는 1심 패소로 항공정책의 공정성, 객관성이 도마에 오르며 체면을 구겼다.

    항공정책 전문가들은 이 소송의 단초를 제공한 ‘국제항공 정책방향’(이하 ‘정책방향’)이 끊임없는 노선권 배분 잡음을 낳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1999년 7월 건교부 항공정책 내부지침으로 만들어진 ‘정책방향’의 핵심은 항공노선 배분기준.

    ▲신규 노선의 경우 장거리 노선은 대한항공에, 단거리 노선은 아시아나에 우선 배려하며, 중거리 노선은 노선별 특성을 고려해 적정 배분 ▲기존 노선 증편의 경우 양 항공사간 운항횟수 격차가 매우 큰 경우 공정 경쟁 여건 조성을 위해 증편분을 후(後)취항 항공사에 우선 배분 ▲복수취항의 경우 시장 규모가 성숙되어 아국 항공사의 시장점유율 확대, 경쟁촉진의 필요성이 있을 때 허용하며 ‘허용시에는 후취항 항공사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주 4회까지 우선 배분 후 적정 배분 등이 골자다.

    문제는 항공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는 노선권 배분기준이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 ‘적정 배분’ ‘격차가 매우 큰 경우’ ‘시장 규모가 성숙’ ‘경쟁촉진의 필요성이 있을 때’ 등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나열돼 있어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주간 운항횟수가 몇회라야 시장 규모가 성숙하다고 보는지, 노선 격차가 어느 정도일 때 어떤 비율로 배분을 하는지 등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보니 노선을 배분할 때마다 건교부,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이 제각각으로 문구를 해석해서 갈등을 빚는 것이다.

    ‘정책방향’에는 ‘아국 항공사간 운항규모 비율이 최소한 6 대 4 정도가 될 수 있는 공정경쟁 환경을 조속히 조성한다’는 문구도 있다. 하지만 ‘운항규모’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적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공사들은 이를 운항횟수, 매출, 영업이익, 공급좌석수 등으로 제각기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다. 이 조항은 자유경쟁시장에서 정부가 기업의 규모를 일정한 비율까지 정해놓고서 한 기업은 키우고 다른 기업은 인위적으로 성장을 제한하겠다는 상식 밖의 발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신규 노선을 배분할 때 장거리 노선은 대한항공, 단거리 노선은 아시아나를 우선 배려한다는 기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장거리 노선은 적자 노선이고 단거리 노선은 흑자 노선이기 때문에 이 기준대로 노선을 배분할 경우 아시아나가 수익 노선을 몰아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우리가 적자를 감수하고도 장거리 노선에 취항하는 것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장거리 노선과 단거리 노선의 연계 네트워크를 통해 노선 경쟁력을 높이고 수익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다. 장거리 노선밖에 취항할 수 없다면 이런 전략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아시아나항공 출범 후 건교부(당시 교통부)는 양 항공사에 대한 노선권 배분기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1990년 10월 ‘정기항공운송사업자 지도·육성지침’(이하 ‘육성지침’)을 수립, 시행했다. 이 지침은 1994년 8월 일부 내용이 개정되면서 명칭이 ‘국적항공사 경쟁력 강화지침’(이하 ‘강화지침’)으로 바뀌었다. 건교부는 이들 지침을 만들면서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 항공정책에 대한 연구를 의뢰하고 학계 전문가와 양 항공사 관계자들을 불러 공청회를 여는 등 나름대로 신중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지침이 최종 확정되기까지 1년6개월이 넘게 걸렸을 정도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침에는 노선권 배분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어 새로 확보된 노선권이 어느 항공사로 갈 것인지 사전에 예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령 복수취항 허용기준으로 ‘육성지침’은 ‘취항중인 항공사의 주당 평균 운항횟수가 7회 이상이고 좌석이용률이 70% 이상인 경우’, ‘강화지침’은 ‘연간 여객수송 수요가 장거리 노선은 21만명 이상, 중·단거리 노선은 18만명 이상인 경우’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강화지침’은 1998년 7월,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행정규제를 정비하라는 국무총리실 지침에 따라 폐지됐다. 그러나 아무 기준도 없이 노선권을 배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건교부는 고민 끝에 1년 후 ‘정책방향’을 만들어 시행하기에 이른다.

    구체적이고 예측가능한 노선배분기준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일치된 요구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건교부가 애매모호한 ‘정책방향’을 고수하는 것은 전횡의 여지를 남겨 계속 칼자루를 쥐고 흔들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아시아나 관계자도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항공사들도 건교부만 바라보지 않고 소비자에게 눈을 돌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건교부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과거처럼 기계적인 기준을 만들어 적용할 경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국제 항공시장 환경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노선권은 상대국의 항공정책과 상대국 항공사 사정, 국내 항공사의 시장개척 상황, 수익성 등의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배분해야 된다는 것.

    ‘6 대 4’ 원칙도 노선권을 기계적으로 이 비율에 따라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대략 그 정도 비율이면 바람직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단거리·장거리’ 원칙 또한 불변의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성향’이 그렇다는 의미로, 대한항공은 장거리 노선을 위주로 하되 네트워크 노선개발이 가능하도록 일부 단거리 노선을 갖추고, 아시아나는 그 반대로 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건교부·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의 ‘제각각 해석’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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