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쫓기던 쥐, 고양이를 물어뜯다

대우차 매각협상 1000일 秘史

  • 강의영 < 연합뉴스 산업부 기자 > keykey@yonhapnews.co.kr

    입력2004-09-15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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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12월14일 GM이 대우차 일괄인수를 제안한 지 꼬박 1000일 만에 GM과의 매각협상이 마무리됐다. 협상파트너가 GM-포드-GM으로 뒤바뀌고, 자고 일어나면 수조원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회유와 협박, 꼼수와 말 뒤집기가 횡행한, 곡절 많은 협상 1000일 뒷이야기.


    대우자동차가 마침내 팔렸다. 1999년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간 지 2년8개월 만인 지난 4월30일 미국 제너럴모터스(GM)로 넘어가는 본계약이 체결된 것. 대우차는 세계 1위 업체인 GM의 패밀리에 편입돼 어려움을 딛고 비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 과정에는 갖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4월10일 정건용 한국산업은행 총재는 대우차 매각협상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다다랐다고 설명하면서 “GM이 칼자루를 쥐고 우리가 칼날을 쥔 협상이었다”고 토로했다. 대우차와 채권단이 협상에서 그만큼 철저하게 약자의 처지에 있었다는 얘기다. 대우차의 고위 관계자도 “우리에겐 협상 카드가 없었다”고 했고, 대우차 노조측은 “처음부터 굴욕적인 협상이었다”고 평가했다.

    세계 유수의 업체들이 대우차를 갖겠다고 나서고 포드를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을 때만 해도 우리가 느긋하게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포드가 느닷없이 대우차 인수 포기 선언을 하면서 칼자루를 스스로 GM에 ‘상납’한 뒤 지금껏 칼날을 붙잡고 버텨왔던 것.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었던 GM은 급할 게 없다는 판단 아래 우보(牛步) 작전으로 일관하며 우리의 속을 태운 반면, 우리 당국자들은 “GM이 곧 온다” “○월까지는 끝내겠다”는 등 작전을 그대로 노출하며 조급성을 드러냈다.



    칼날 잡고 ‘벼랑 끝 전술’

    이번 협상결과는 채권단의 처지에선 헐값매각 시비를 낳을 수 있겠지만,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나마 선전(善戰)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초반부터 제기됐던 대우차의 하청기지화 우려가 어느 정도 해소된 점에서도 그렇고, GM측이 채권단과 공동출자해 설립할 신설법인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거나 떠날 수 없도록 본계약에 구속력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협상에 참여한 한 인사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GM이 대우차를 꼭 가져갈 것이라는 확신이었다”며 “우리가 얻어낸 많은 부분은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떼를 써서 받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GM이 막판에 협상결렬을 알리는 성명자료까지 준비하고 시한을 통보했으나, 우리는 그들이 그것을 발표하지도, 집에 가려고 비행기도 타지 않을 것임을 자신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벼랑 끝 전술’이었던 것.

    따라서 협상 초기에는 대우차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우리의 조급함 때문에 양해각서(MOU)나 최종 인수제안서에서 GM이 우리로선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도록 허점을 드러냈다면, 협상 막바지 과정에서는 “그런 조건이라면 차라리 다른 길을 찾겠다”는 대우차와 채권단의 일관되고 강경한 의지가 많은 부분에서 양보를 얻어내게 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대우차와 채권단은 협상이 지지부진할 때 ‘독자생존’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고, 협상이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2∼3월에는 해외의 다른 업체들에 대우차 인수의사를 타진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GM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2년 신진자동차와 50대 50 지분합작으로 GM코리아를 설립하면서부터. 그후 신진자동차 지분은 산업은행을 거쳐 1978년 대우그룹으로 넘어갔고, 합작회사의 이름도 GM코리아에서 새한자동차로, 1983년에는 대우차로 바뀌는 등 사연이 많았지만, GM은 1992년 말 대우차에 지분을 넘기고 결별할 때까지 20년간 50%의 지분을 꼭 틀어쥐고 있었다.

    이번 협상의 GM측 실무책임자인 앨런 페리튼 아태지역 신규사업본부장은 새한자동차 부품담당 매니저 등을 맡으면서 한국 자동차산업과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새한 근무시절 그의 업무 파트너는 김태구 전 대우차 사장(당시 이사)으로 당시 두 사람은 각별한 친분을 맺었다.

    제대로 진전되는 듯하던 제휴협상은 GM의 파업, 기아차 국제입찰, 삼성차 빅딜 등 국내외적 요인으로 사실상 중단됐고, GM으로부터 대규모 외자를 유치해 그룹 구조조정을 단번에 해결하려던 대우의 계획도 벽에 부딪혔다.

    대우차에 단순히 돈을 대주는 것이 아니라 대우차를 갖고 싶어했던 GM은 1999년 8월 대우차가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발빠르게 이사회 동의를 거쳐 그해 12월14일 정부와 채권단에 대우차 일괄인수를 공식 제안했다. GM은 대우차 인수를 위한 배타적 협상을 요청했고, 정부와 채권단도 제한적 경쟁입찰 방식으로 방침을 정해 GM에 우선협상 자격이 부여되는 듯했다.

    그러나 GM뿐 아니라 포드, 현대자동차 등도 대우차 인수에 관심을 보이며 반발하자 정부와 채권단은 국제 경쟁입찰로 방침을 바꾸고 2000년 2월 제안서를 접수, 그해 6월 가장 큰 액수를 써낸 포드만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다. GM은 대우차 인수의 문턱에서 또 한번 좌절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때가 GM에 대우차를 가장 좋은 조건에 팔 수 있는 기회였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당시 포드는 쌍용차를 포함한 일괄인수 가격으로 7조7000억원을, 현대차-다임러크라이슬러 컨소시엄은 5조∼6조원을, GM-피아트 컨소시엄은 4조∼5조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포드는 9월 중순 돌연 대우차 인수를 포기, 우리측을 당황케 했다. 포드는 비공개 원칙 때문에 그 구체적인 배경은 설명하지 않았으나, 실사과정에서 드러난 대우의 엄청난 부실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다. 반면 우리측은 “포드가 파이어스톤 타이어 리콜 문제로 제 코가 석자였던 터라 이사회에서 대우차 인수 문제를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포드가 써낸 금액도 실사를 거치지 않아 근거가 약한 것으로, 이를 얼마든지 깎아내릴 수 있는 조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며, 그나마 우리측 당국자가 협상의 기본 룰을 어기고 이를 공개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포드의 갑작스런 인수포기 선언으로 여론은 포드 때리기와 책임자 인책론으로 콩을 볶는 듯했고, 정부에서도 포드의 입찰가격을 공개한 것과 우선협상 대상자를 한 곳만 지정한 게 ‘2대 패착요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두번째로 높은 가격을 제시한 현대차-다임러크라이슬러 컨소시엄까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다가 현대차에 낙찰될 경우 독과점 논란이 일 것을 우려했다는 설과, 정부가 정권 초기부터 추진해온 외자유치에 급급한 나머지 현대차를 배제했다는 설도 제기됐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정부와 채권단은 현대차와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이 대우차 인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GM측에 “다시 와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우리측에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걸 알게 된 GM은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반면 여러 업체에서 인수 의사를 보이고 포드가 기대 이상의 금액을 써내자 느긋하게 칼자루를 만지며 공치사에 급급했던 정부와 채권단은 거꾸로 칼날을 잡게 됐다.

    GM의 CEO 릭 왜고너는 2000년 9월 프랑스 파리모터쇼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선별인수도 고려중”이라며 기존 방침에서 한발 물러나는 한편, 10월7일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하고서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우리쪽은 다급해졌다. 일단 대우차라는 ‘상품’을 GM의 입맛에 맞게 바꿔놓아야 했다. GM이 이를 노골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GM과의 이심전심으로 강도 높은 자구계획이 진행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조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당시의 숨가쁜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0년 10월17일 : 대우차 이종대 회장·이영국 사장, 대우차판매 이동호 사장 등 새 경영진 취임 ▲10월31일 : 대우차 3500명 감원 등 9000억원 규모의 자구안 제출, 노사협의회 1차 합의 실패 ▲11월4일 : 엄낙용 당시 산업은행 총재, “노조동의서 없으면 부도처리 불가피하다”고 경고 ▲11월6일 : 1차부도 ▲11월7일 : 3차 노사협의회 합의 실패 ▲11월8일 : 최종부도 ▲11월10일 : 대우차 법정관리 신청 ▲11월30일 : 대우차 법정관리 결정, 법정관리인에 이종대 회장 선임 ▲12월15일 : 채권단 자금지원 재개 ▲12월29일 : 생산직 5494명 등 6884명 감축안 통보 ▲2001년 1월15일 : 생산직 2794명 정리해고 계획서 노동부 제출 ▲2월12일 : 1785명 정리해고 방침 통보, 부평 승용1공장 가동 잠정 중단 ▲2월15일 : 부평 승용2공장 가동 잠정 중단 ▲2월16일 : 1750명 정리해고, 총파업 돌입 ▲2월18일 : 노조간부 30명 체포영장 발부 ▲2월19일 : 공권력 투입

    당시 노조가 견지한 노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으나 아쉬움을 나타내는 시각이 많다. 채권단은 부도를 면하게 해주려고 대우차의 자구계획에 노조가 동의할 것을 요구했고, 노조는 “경영실패를 노조에 떠넘기고 있다”며 “노사와 채권단, 정부가 참여하는 ‘회사 정상화를 위한 4자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완강하게 버텼다.

    대우차 노사 양측에 ‘노조동의서를 받아내기 위한 압박용일 뿐 설마 부도를 내기야 하겠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우차 노조는 최종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후에도 한치의 양보 없이 강경한 태도로 맞서다 결국 1750명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정리해고를 당해 거리로 내몰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우차 노사가 합의해서 자구안을 진행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협상팀 관계자는 “그랬다면 부도를 막고 회사 가치가 더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협상을 빨리 끝낼 수도 있었겠지만, 부도 때문에 엄청난 자구노력이 불가피했고 따라서 이를 통해 수익성을 높였다는 측면도 있어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대우차 이종대 회장은 본계약을 체결한 뒤 기자간담회에서 부평공장 추가인수 조건의 하나인 ‘노조 파업일수가 전세계 GM 사업장의 평균 이하여야 한다’는 조항에 대해 “노조는 굴욕적인 조항이라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지만, 채권단도 GM에게서 받은 돈으로 빚잔치를 해야 하고 협력업체도 상거래 채권 상당부분을 못받게 된 처지에서 GM에 편입되려면 그 동네 수준에 맞추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며 그동안의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어쨌거나 노사의 팽팽한 줄다리기와 공권력과의 충돌, 화염병의 등장, 그리고 과거 부평공장에서의 파업경험 등은 강성 노조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GM으로 하여금 섣불리 ‘작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인수대상에서 부평공장을 일단 제외한 것도 이 때문이었고, 그후에도 협상에 걸림돌만 생기면 노사관계를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물론 GM은 노조가 해외매각과 인력감축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마당에 인수의사를 공식 표명해서 제 손에 스스로 피를 묻히거나 노조로부터 ‘GM의 사주(使嗾)’라는 오해를 살 까닭도 없었다. 아울러 지연작전을 통해 최대한 인수가격을 낮추려는 의도도 있었고, 세계 자동차산업의 전반적 침체로 자체 구조조정에 나선 상황에 대우차 인수가 월스트리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GM은 2000년 10월7일 LOI를 제출한 뒤로는 지난해 4월 대우차가 영업이익을 낼 때까지 화두만 던졌을 뿐 사실상 움직이지 않았다는 게 매각협상팀의 설명이다.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자 우리측은 하염없이 GM쪽만 쳐다봤다. 정부 당국자들은 너도나도 나서서 “GM이 다음달 초 이사회를 열어 인수의사를 결정한 뒤 제안서를 낼 것”이라는 말만 수없이 반복했고 그 전망은 어김없이 매달 어긋났다.

    GM의 잭 스미스 회장이나 릭 왜고너 CEO 등은 모터쇼 등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면 “여전히 대우차 인수에 관심이 있다”고만 되풀이했을 뿐 그 시기 등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속이 탄 정부는 GM을 압박하기 위해 슬며시 ‘독자생존론’이나 현대차를 통한 ‘위탁경영론’까지 흘리기도 했으나, 한마디로 ‘어설펐다’는 평가를 받았다.

    GM이 대우차 인수를 위해 마침내 ‘입질’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 대우차가 2년10개월 만에 처음으로 67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뒤부터. 영업이익이 난 것은 판매가 늘어서라기보다 강력한 구조조정의 결과였다. 대우차 관계자는 “GM이 5월 중순께 이같은 보도내용을 접한 뒤 ‘정말로 이익을 냈느냐’고 놀라움을 표시하며 상세한 자료를 요구했다”며 “신속한 구조조정에도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GM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치밀한 물밑작업을 벌여왔다는 사실도 곧 드러났다.

    GM은 지난해 5월30일 공식적으로 인수제안서를 제출하기 전날 설명회를 갖겠다며 서울 강남터미널 근처의 메리어트 호텔로 대우차 입찰사무국 및 산업은행 협상팀을 불렀다.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우리측 관계자들은 제안서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칼날을 잡고 스스로 피를 묻히며 대우차라는 상품을 갈고 닦은 우리측 기대와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대우차 구조조정에 대한 아더 앤더슨 보고서에서 어느 정도 예견됐듯, 정리해고까지 단행한 부평공장은 아예 인수대상에서 빠졌을 뿐 아니라 제시한 인수가격도 경쟁입찰 때의 4분의 1 수준인 10억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

    협상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GM이 내놓은 인수제안서 내용이 “우리는 집 전체를 팔 생각인데 저쪽에서는 방 몇 개, 세간 몇 개만 사가겠다는 것과 같았다”고 했다. 아무 말 없이 호텔을 빠져나온 대우차와 채권단은 처음에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인수제안서 접수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갑론을박 끝에 일단 협상에는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같은 인수제안서 내용이 알려지면 여론이 들끓고 부평공장이 발칵 뒤집힐 게 뻔했기에 우리측은 다음날 협상에 돌입한다고 밝히면서도 2년 전 포드를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할 때와는 달리 GM측이 제시한 내용과 관련해서는 ‘협상원칙’을 내세우며 철저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양측은 6월4일부터 홍콩과 국내를 오가며 인수제안서를 토대로 협상을 시작했다. 양측의 견해가 천양지차였던 만큼 MOU 체결에 2주 정도가 걸릴 것이라는 당초 예견은 빗나가 6월과 7월, 8월까지 성과없이 지나갔다.

    “이달 말까지 끝내겠다”는 우리측 당국자들의 허언은 여전히 계속된 반면, 왜고너 CEO는 MOU 체결을 불과 일주일 정도 앞둔 9월1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겠지만 정확한 날짜는 예측할 수 없다”고 잡아뗐다.

    양측은 협상과정에서 부평공장 포함 여부를 둘러싸고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8월 중순께 또 한 차례 고비를 맞았다. GM이 부평공장을 인수할 경우 부채를 상당부분 더 탕감하거나 채권단에 신규 지원을 해달라고 요구,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것.

    결국 9월21일, GM이 현금으로 4억달러(지분 67%)를 출자, 신설법인을 설립하고 이 법인이 해외법인 차입금 3억2400만달러와 퇴직금, 협력업체 채무 등 영업부채 5억1000만달러를 인수하며, 채권단은 신설법인의 장기우선주 12억달러를 평균 3.5% 이자율로 받는다는 내용의 MOU를 체결했다.

    인수대상은 군산(승용)·창원공장 및 22개 해외 판매법인과 이집트·베트남 등 2개 생산법인으로 한정됐고, 협상의 최대 난제였던 부평공장에 대해서는 ‘장기 공급계약을 맺어 완성차와 엔진 등을 납품받고 6년 이내에 일정 조건을 갖출 경우 인수 여부를 추후 결정한다’는, 해석하기에 따라 어정쩡한 결론을 내렸다.

    대우차 경영진은 “GM이 때가 되면 부평공장을 가져간다”고 강변했지만, 노조 등은 “부평공장이 우려대로 제외됐다”며 반발했다.

    양측은 본계약까지의 배타적 협상기간을 120일(2002년 1월20일)로 지정, 연말까지 본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GM은 대우차와 오랜 기간 한살림을 차렸기에 공장 구내식당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있을 정도인데도 다시 한번 강도 높은 정밀실사에 들어갔다. 또한 11월27일 대우차 인수팀장에 닉 라일리 GM그룹 부사장 겸 GM 유럽 판매·마케팅·AS 총괄책임자를 2002년 1월1일자로 임명하면서 협상이 순풍에 돛달았다는 해석을 낳게 하기도 했다.

    GM은 “라일리 팀장은 한국에 정착, 루디 슐레이스 아태담당 사장을 도와 인수업무를 추진하고, 최종계약이 체결되면 새 법인의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임명될 것”이라며 그간의 관례를 깨고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라일리 팀장은 1998년 GM 영국 현지법인인 복스홀 회장을 맡아 경비절감 등 구조조정을 지휘하면서 근로자 봉급체계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1년간 기본급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협상은 곧바로 또다른 위기를 맞았다. GM이 12월 중순 컨설팅사가 제기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외 판매법인 우발채무 가능성 문제를 들고 나와 “연말까지 본계약이 어렵겠다”고 통고해온 것. GM은 총 매각대금이 20억달러에 불과할진대 16억달러(2조원)의 우발채무 가능성을 제시, 인수대상과 인수가격을 조정하고 ‘발생 가능한’ 우발채무에 대한 전면적인 사후보증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측이 우발채무가 있을 법한 판매법인과 해법을 찾아 허둥대고 있는 사이 연말까지 최종 제안서를 내 본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MOU 당시의 ‘예상 흐름도’는 폐기됐다.

    GM은 배타적 협상시한을 넘겨 이를 반영한 ‘마지막 제안서(Final Proposal)’를 올해 2월6일에 내놨다. MOU 체결 때 모두 인수하기로 했던 24개 해외법인 가운데 9개만 인수하고 인수대금도 12억달러에서 8억5000만달러로 깎겠다는 것으로 MOU의 틀을 완전히 깨는 내용이었다.

    우리측은 아연실색했다. 협상은커녕 만나는 것 자체를 기피하며 한 달여 간 기(氣) 싸움을 벌였다. “다시 만들어 가져와라”(우리측)- “그렇다면 대우차와 채권단의 대응 제안서(Counter Proposal)를 제시하라”(GM)- “될 만한 걸 들고 와서 다시 얘기하자”(우리측)는 원칙적인 얘기들만 오갔다.

    2월말부터 3월초까지 일부 재협상에 들어가 사소한 우발채무 문제는 상당히 해소했으나, 여전히 우발채무에 대한 사후 책임과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GM과 MOU의 골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우리측 입장은 팽팽히 맞섰다. 양쪽 모두 “끝났다”고 선언하고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기도 했다.

    판이 거의 깨지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GM측이 대우차 인수를 포기할 경우를 전제해 작성한 언론발표문을 내밀었던 것. GM은 시한을 정해놓고서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본국으로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우리 협상팀도 “마음대로 하라”며 “양해각서의 기본틀을 흔들면 본계약 체결을 포기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 맞섰다.

    이 과정에서 우리측은 GM으로의 매각이 무산될 경우에 대비해 비상대책을 짜는 한편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업체에 인수 의사를 타진,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GM을 압박했다. 협상이 사실상 결렬됐다는 국내외 보도도 잇따랐다.

    채권단과 대우차는 GM과의 협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차라리 GM으로의 매각이 아닌 다른 방도를 모색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는 이같은 생각이 이번에는 GM을 흔드는 데 성공했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GM은 시한이 지났는데도 결렬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고, 비공식 접촉을 통해 “다시 얘기해보자”고 합의, 힐튼호텔에 모여 마지막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다. GM이 기존 방침에서 후퇴해 일단 가격을 양보하자 우리측은 인수범위 축소제의를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우발채무 문제도 거의 해소되는 등 대화는 둑 터지듯 풀려나갔다. 부평공장 인수조건을 구체화하자는 우리쪽의 요구도 수용됐다.

    3월15일 새벽 5시. 대부분의 조건에 합의한 뒤 힐튼호텔을 나온 우리 협상팀은 모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후 17건에 달하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이를 검토하는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4월23일 본계약 체결설’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직전에 또 한 차례 고비가 찾아왔다. GM이 대략 합의가 이뤄진 브랜드 문제 등 한두 개의 문제를 추가로 제기한 것. GM은 “유럽에서 초기엔 ‘대우’ 브랜드를 사용하더라도 몇 년 뒤에는 이를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넣자”고 수정 제의했다.

    우리측은 “미국 판매법인도 매각대상에서 제외됐는데, 이 제의를 수용할 경우 ‘하청기지화’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버틴 끝에 결국 브랜드를 바꾸려면 채권단 주주(33%)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4월26일 모든 계약이 마무리됐고, 내친 김에 본계약 체결 날짜도 4월30일로 정했다. 5월1일이 근로자의 날인데다 대우차가 다음날인 2일 소형 승용차인 칼로스 신차발표회를 갖기로 해 그 이전에 본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GM측의 의사가 반영됐다. 잭 스미스 GM 회장은 본계약 날짜에 맞추기 위해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방한했다.

    본계약의 골자는 GM과 제휴사가 현금 4억달러(지분율 67%)를 출자, 신설법인인 ‘GM대우오토앤드테크놀러지’를 설립하고, 신설법인은 채권단에 연리 평균 3.5%로 12억달러 상당의 배당부 상환 가능한 장기 우선주를 발행해 지급한다는 것.

    신설법인이 인수하는 대우차 국내외 채무는 5억7300만달러로 MOU에서보다 줄었다.

    매각대상도 창원·군산(승용)공장과 베트남 하노이공장, 그리고 오스트리아·베네룩스·프랑스·독일·이탈리아·푸에르토리코·스페인·스위스 판매법인 및 네덜란드의 유럽 부품회사 등으로 축소됐다.

    매각대상이 줄고 매각가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부평공장 추가 인수와 해외시장에서의 브랜드 사용 문제, 연구·개발(R&D) 기능 유지, 차종 개발 등 대우차의 유지·발전과 관련한 부분은 MOU보다 더 명확하게 정리됐다.

    협상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부평공장은 최소한 6년간 신설법인에 차량, 엔진, 부품 등을 공급하고 2교대 가동, 연 4% 생산성 향상, GM 평균 품질기준과 노사분규로 인한 작업 손실시간 기준 충족시 의무 인수하기로 명시했다.

    이종대 회장은 본계약을 체결한 뒤 “MOU에는 ‘노사관계나 품질, 생산성이 만족할 만한 수준일 때 가져간다’고 해서 주관적 판단의 여지를 남겼다. 아무리 만족스럽게 만들어줘도 ‘우리 기준에 불만이다’고 하면 그만이도록 돼 있었다”며 “하지만 본계약에서는 이를 객관화하고 수량화해 시비를 없앴다”고 강조했다.

    하청기지화 우려나 브랜드 사용 문제에서도 연구개발본부를 인수하고 차량 개발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이회장은 “‘대우’ 브랜드는 부분적으로 살고 부분적으로는 죽는데, 국내를 포함해 3분의 2는 살게 되므로 분명히 하청생산은 아니다”며 “‘대우’ 브랜드를 ‘유지’ ‘발전’ ‘제고’시킨다는 규정이 본계약에 못박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대우’ 브랜드 포기와 관련, “GM이 ‘미국에 대우차 딜러가 500개이고 시보레 딜러가 1000개인데 누가 팔면 더 많이 팔겠느냐’고 물어오니 논리적으로 맞설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으며 “결국 생산은 한국에서 하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다른 협상 관계자도 “새 법인의 이사진 10명 가운데 우리측 인사가 3명이고 우리측 지분이 33%인데, 특정지역에서 브랜드를 바꾸거나 GM이 자기 지분을 파는 등 중대 사안에 대해서는 과반수가 아닌 이사 8명이나 지분 75%의 동의를 얻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협상 막바지에 우리 의도를 상당부분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은 GM이 대우차를 반드시 인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대우차 안팎의 해석이다. GM이 대우차 인수에 강한 의지를 보인 데다,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하려면 이쪽의 여론도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배수진을 쳤다.

    협상팀 관계자는 “GM이 지난해 말 본계약 체결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라일리 인수팀장을 임명했다는 사실 등에서 GM이 대우차를 절대 놓치지 않고 반드시 사갈 것이라는 자신을 갖게 됐고, 따라서 어차피 가져갈 거면 모양새를 갖춰 가져가는 게 향후 한국내 비즈니스에서도 유리할 것이라는 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고 말했다.

    GM은 또 앞서 지난해 12월 대우차가 생산중인 기존 차량과 최근 출시된 L6 매그너스, 칼로스, 그리고 현재 개발하고 있는 J-200(누비라 후속모델)의 시험차량을 미국의 자기네 연구소에 가져가 성능을 시험해본 뒤 새삼 놀라움을 표시하고 대우차의 R&D 능력을 적극 활용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이 사실 또한 협상팀이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데 한몫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잭 스미스 회장이 본계약 체결 후 부평공장에 들러 대우차 생산차량을 장시간 타보고 만족감을 나타낸 데서 대우차는 GM의 부평공장 인수 가능성을 읽고 있다.

    협상팀의 대우차측 책임자였던 김석환 사장은 “대우차와 채권단이 추구하는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지만 일사불란하게 대응했고, 정부도 협상과정에 개입하지 않아 전권을 갖고 임할 수 있었다”며 “특히 관련부처 장관과 금융권 수장 등이 대우차뿐 아니라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위한 측면에서 큰 그림을 갖고 문제에 접근, 전략을 짜기가 쉬웠다”고 평가했다.

    본계약 체결 장소는 당초 양측의 마지막 격전장이었던 힐튼호텔로 잡혀 있었으나, 대우차 정리해고자와 대우차판매 노조원 등이 점거하는 바람에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으로 황급히 옮겨졌다. 잭 스미스 GM 회장과 이종대 대우차 법정관리인, 정건용 산업은행 총재가 서명한 뒤 악수했다.

    한편 이번 협상실무팀의 대표는 GM 아태지역 신규사업본부장인 앨런 페리튼 이사와 산업은행 특수관리본부장 이성근 이사, 대우차 매각사무국 김석환 사장 등 3명이었다.

    대우차 매각뿐 아니라 GM과 대우차, GM과 한국자동차산업의 관계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페리튼 본부장은 1970년대 후반 대우차 전신인 새한자동차 시절부터 경영에 깊숙이 간여한 지한파. 1972년 뉴욕의 GM 해외사업부 기획개발부에 입사한 뒤 2년 만에 한국의 GM 해외사업부 부사장보로 임명돼 1977년까지 재임했으며, 이후 새한 부품담당 부매니저로 일하다 1978년 매니저로 승격됐다.

    대우차 관계자는 “페리튼 이사가 새한의 GM측 자재조달 담당자로 있던 1978년, 김태구 전 대우차 사장이 새한 자재본부장이 되면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공동결재란에 나란히 사인을 했다”고 회고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 한국말을 금세 익힌 페리튼 이사는 맏형처럼 푸근한 이미지의 김 전사장과 서로의 집을 오갈 정도로 친해졌고, 김 전사장은 페리튼을 충청도 사투리로 동생을 의미하는 ‘동상’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페리튼은 1979년 본국으로 돌아가 조립부품 담당 이사, 자재관리 총괄 부사장, 해외구매부문 총괄 이사 등을 거치며 GM의 핵심인물로 부상했고, 1996년 GM코리아 사장으로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외환위기 사태로 대우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김태구, 패리튼 두 사람은 각각 대우 구조조정본부장과 GM코리아 사장으로, 업무 파트너가 아닌 협상 파트너가 돼 1998년 2월 전략적 제휴를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패리튼 이사는 한국어를 잘하지만 기자와 만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통역을 붙여서 영어로 얘기하며, 협상에서 작은 실수 하나 용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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