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사우디 무너뜨려 범이슬람 통일국가 건설 노렸다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에 비춰본 빈 라덴의 9·11 테러 분석

  • 김재명 <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입력2004-09-01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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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과 워싱턴을 강타한 9·11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 파장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신조어를 낳은 채 지금도 꼬리를 물고 있다. 9·11의 비극을 목격한 지구촌 사람들은 왜 미국이 공격을 받았으며, 오사마 빈 라덴은 무엇을 노렸을까 궁금해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 사건을 일으켰다고 시인한 적이 없다. 빈 라덴이 9·11의 총연출자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이슬람권 사이에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필자가 지난 1월 아프간과 파키스탄 카슈미르 취재 때 만난, 빈 라덴의 심정적 동조자들은 “9·11을 오사마 빈 라덴이 일으켰다는 주장은 미국과 유대인들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신에게 테러 주범이란 의혹이 쏠릴 때마다 빈 라덴은 이를 부인해왔다. 1998년 12월 미 ABC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선 “십중팔구 그런 공격 행위들은 대미항쟁에 대한 요청과 경고(빈 라덴이 1996년과 1998년 두 차례 발표한 대미항쟁 선언문)의 결과일 것이지만, 알라신만이 내막을 알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상투적인 반응은 “역사는 내가 범죄자인지 아닌지를 증언할 것”이란 투였다. 1998년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행정명령 12947호를 수정, 빈 라덴과 그의 핵심측근들을 테러리스트 목록에 올렸고, 그들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금융거래를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같은 조치는 9·11사건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필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9·11이 빈 라덴의 작품이라 판단한다. 첫째, 1990년대 후반 들어 발표한 대미항쟁 선언문이 이를 뒷받침한다. ‘빈 라덴 서한 : 전쟁 선언(1996년 10월)’과 ‘유대인과 십자군에 저항하는 세계이슬람전선의 성전(1998년 2월)’등 두 개의 문건에서 빈 라덴은 자신이 해석한 지하드(성전) 이론에 따라 어떤 수단으로든 미국인을 죽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펴왔다.

    두 개의 대미항쟁 선언문



    1996년 그가 발표한 대미 지하드 선언은 “십자군 세력(미군)이 우리의 비참한 상황을 낳은 주요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두번째 문건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아랍 테러조직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인 자료다. 이 문건에서 빈 라덴은 사우디 주둔 미군을 겨냥, “7년 넘게 아라비아의 성지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은 자원을 약탈하고, 이웃 이슬람국을 겨누고 위협하는 창끝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미군기지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건은 전세계 범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뭉쳐 아랍권에서 미국과 서방세력, 그리고 이스라엘 등 비이슬람세력과 세속적인 이슬람 정부를 몰아내자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1990년대 후반 빈 라덴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거듭 강조해왔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대사관이 폭탄공격을 받기 두 달 전인 1998년 5월 미 ABC방송과 가진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미국과 전쟁을 하고 미국인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것은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미국 군인과 시민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공격목표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빈 라덴은 1990년대에 일어난 여러 테러사건의 배후인물로 꼽혀왔다. 소말리아에서 일어난 미군에 대한 공격(1993), 사우디 주둔 미 군무원에 대한 폭탄공격(1996), 아프리카 주재 미 대사관 폭탄공격(1998), 예멘 항구에 정박중인 미 구축함 USS 코울호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2000) 등이 그 사례다. 9·11은 그 속편이자, 완결편으로 보인다.

    “미국민 살해는 합법”

    셋째, 9·11 뒤 나온 몇 개의 비디오 테이프는 오사마 빈 라덴과 9·11을 잇는 결정적 고리로 보인다. 9·11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인 지난해 12월13일 부시 행정부가 공개한 테이프는 빈 라덴이 9·11 총연출자라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이 테이프는 아프간 동부의 파키스탄 접경도시인 잘랄라바드에서 발견되었다. 잘랄라바드는 1996년 빈 라덴이 아프리카 수단에서 아프간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때 머무르던 곳이고, 지난해 11월 토라보라 공방전이 벌어지기 직전 빈 라덴이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낸 곳이기도 하다. 그 지역 부족 지도자들을 모아 ‘대미 결사항전’을 결의한 뒤 돈봉투를 나누어준 빈 라덴은 토라보라로 향했다.

    9·11 직후 찍은 것으로 미 CIA 관리들이 추정하는 이 테이프에서 빈 라덴은 “우리는 애당초 3층이나 4층에 (비행기가) 부딪힐 것으로 계산했다”고 말하고 있다. 카타르에 본부를 둔 아랍 위성방송 알 자지라가 올해 4월 방영한 또 다른 테이프는 빈 라덴이 9·11에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 테이프에서 빈 라덴의 측근이자 조직의 2인자인 이집트 의사 출신 아이만 알 자와히르는 9·11 사건 현장에서 희생자와 함께 죽은 테러리스트 19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세 가지 사실을 근거로, 빈 라덴과 자와히르가 9·11을 기획 연출했다고 본다. 이런 결론은 필자의 다음 논의를 끌어내기 위한 기본전제다. 그 논의란 명저 ‘전쟁론’으로 잘 알려진 프러시아의 군사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 이론에 비추어 9·11 사건을 해석하고, 빈 라덴이 9·11을 통해 노린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오사마 빈 라덴이 전쟁론을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빈 라덴은 클라우제비츠가 일찍이 설파한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우리 의지를 적에게 관철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클라우제비츠 학파에게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선(continuation of politics)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무게중심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무게중심은 ‘전쟁 당사국들의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힘과 움직임의 중심’을 뜻한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아군의 모든 에너지를 적의 무게중심을 공격하는 데 모아야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기획할 때 첫번째 임무는 적의 무게중심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가능하면 그것을 단순화하는 일이다”라고 설파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두번째 임무는 그 무게중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군의 전투력을 한군데로 집중하는 일이다. 만약 적의 무게중심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면, 또는 제대로 파악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격파하는 데 실패한다면,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사례로 든 것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다. 당시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무게중심을 수도인 모스크바로 설정한 것은 결정적인 잘못이었다고 클라우제비츠는 지적한다. 나폴레옹은 일단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광활한 영토를 지닌 러시아의 무게중심은 특정 영토(모스크바)가 아니라, 바로 러시아 군대라는 것이다.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후퇴를 거듭하는 러시아군을 쫓아 진격을 거듭, 마침내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후퇴전술로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가 혹한이 닥치는 겨울을 노려 나폴레옹 군대를 무찔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면 프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1870년대 보불전쟁에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무게중심이 수도 파리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파리가 함락되는 순간, 프랑스군은 상당부분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비스마르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군사전문가들은 클라우제비츠의 무게중심 이론을 전략적(strategic) 무게중심과 전술적(tactical) 무게중심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전략적 무게중심은 한 국가의 힘의 원천으로 해석된다. 전술적 무게중심은 군사작전이 펼쳐지는 현장(전장)에서 응용되는 개념이다. 전쟁 당사국의 무게중심은 때로는 쉽게 파악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질 당시 일본군은 하와이섬에 기지를 둔 태평양함대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전술적 무게중심이라 여기고 진주만 기습작전을 펼쳤다. 1990년대 초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전략전술적 무게중심은 이라크군 지휘부와 통제 체계였다. 영미군의 강력한 공습으로 지휘체계가 마비된 이라크군은 이렇다할 전투도 못해본 채 궤멸당할 수밖에 없었다.

    9·11을 클라우제비츠의 무게중심 이론에 적용하려면 오사마 빈 라덴의 전략전술을 분석해야 한다. 필자는 빈 라덴이 미국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단순히 미국민을 살상할 목적으로 9·11을 기획했다고 보지 않는다. 클라우제비츠 이론에 비추어볼 때 빈 라덴은 미국의 전략적 무게중심을 미국의 여론으로, 전술적 무게중심을 미국 자본주의와 군사력의 상징적 건물인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제에서 볼 때, 빈 라덴은 전술적 무게중심을 공격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략적 무게중심을 격파(점령)하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 여론을 비롯한 몇 가지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빈 라덴은 9·11 테러로 미국을 공격할 경우 반전여론이 일어나, 중동의 미군 철수 등 미국의 정책이 변화하리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부시에 대한 80% 수준의 높은 지지율이 보여주듯, 반전 여론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여론이 왜 중요한가. 여론은 국가권력이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 정치의 주요변수다. 어떤 여론도 국가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학자에 따라서는 정치 지도자의 정책과 리더십이 거꾸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하거나, 여론의 변덕 때문에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을 내놓는다(로널드 힌클리의 1991년판 저서 ‘국민, 투표, 정책입안자’ 참조).

    그렇지만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지도자는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민주적 정치체제의 합법성이 대중적 동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론은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적 관심 위에서 정치행위를 합리화하도록 만든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이 일단 미국 본토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는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격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을 법하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에 비춰보면, 빈 라덴은 미국의 무게중심을 파악하는 데 먼저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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