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현대중공업의 현대전자 보증계약은 불법

무지, 무원칙, 무대책으로 2억달러 날렸다

  • 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ans@donga.com

    입력2003-11-26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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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중공업은 옛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위해 보증을 섰다가 캐나다 은행 CIBC에 2억2000만달러를 물어줬다. 현대중공업은 하이닉스 등에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현대중공업의 손을 들어줬다.
    • 그러나 현대중공업과 CIBC의 거래는 여러 모로 불법이라 CIBC에 돈이 지급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안 줘도, 혹은 덜 줘도 될 돈을 몽땅 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전자 보증계약은 불법
    지난해 1월25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다. 이날 법원은 현대중공업이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외화유치 당시 지급보증을 섰다가 입은 2400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며 하이닉스와 현대증권,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등을 상대로 낸 외화대납금 반환 청구소송에서 현대중공업에 1718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현대중공업이 지급보증 과정에서 현대전자·현대증권의 이사회 결의 여부조차 문의하지 않는 등 적법성을 따지지 않은 책임도 물어 배상액을 전체 손해액의 70%로 정했다.

    전말은 이렇다. 1997년 7월 현대전자는 보유하고 있던 현대투신 주식 1300만주를 담보로 제공하고 캐나다 은행인 CIBC(Canadian Imperial Bank of Commerce)로부터 1억7500만달러를 빌렸다. 만기는 3년. 그런데 CIBC는 현대투신의 주식 가치가 하락할 것을 우려해 3년 후 이 주식을 되팔 수 있는 권리(풋옵션)를 요구했다.

    이에 현대그룹은 현대증권의 주도로 계열사 가운데 비교적 자금사정이 좋은 현대중공업으로 하여금 미리 정한 가격에 3년 후 이 주식을 되사주도록 CIBC와 풋옵션 계약을 맺게 했다. 현대전자가 빌린 원금에 이자를 더한 금액으로 가치가 하락한 경우에 주식을 인수하기로 되었으니 사실상 현대전자를 위해 지급보증을 선 것이다.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CEO들은 현대중공업측에 ‘문제가 생길 경우 어떠한 재정적 손실도 끼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줬다.

    2000년 들어 만기가 다가오자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현대증권에 CIBC로부터 주식을 재인수해 보증을 해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두 회사가 응하지 않자 그해 7월 현대중공업은 주식 인수대금 2억2000만달러를 CIBC에 대납했다(3년 전 현대전자가 CIBC에 1주당 1만2000원에 매각한 현대투신 주식은 이 무렵 장외시장에서 2000원대에 거래됐다). CIBC의 주식 인수 요구에 불응할 경우 유동성 부족으로 계약이행 불능상태에 빠진 것으로 시장에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후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회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은 법적 구상권을 행사하기 위해 현대전자·현대증권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현대중공업의 ‘7대 3 판정승’. 이 판결은 대기업 계열사간의 빚 보증 등 각종 부당 지원행위에 쐐기를 박고, 이사회 중심의 투명경영과 사외이사제 활성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받았다.



    “안 줘도 될 돈 줬다”

    이 사건에서는 ‘왕자의 난’에 이어 불거진 또 한 차례의 현대그룹 내홍(內訌)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 것인가, 그리고 이사회의 기능과 일반 주주의 이해관계를 도외시한 기업 최고경영진의 전횡에 대해 법원이 어떤 심판을 내릴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렇듯 시선이 ‘안’으로만 쏠린 상황에서 ‘밖’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논점이 간과됐다. 사건의 단초가 된 현대중공업과 CIBC의 거래 자체에는 과연 문제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문제가 있었다면 현대중공업이 CIBC에 돈을 지급한 것도 비정상으로 봐야 한다. 현대 계열사들의 잘잘못만 가리려 했지, CIBC의 잘못은 따져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부 국제금융 전문가들이 “현대중공업과 CIBC의 거래는 당시 적용된 외국환관리법 등에 위배되므로 불법 거래 당사자인 CIBC에 돈이 지급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 마디로 현대중공업이 ‘안 줘도 될 돈’ 혹은 ‘덜 줘도 될돈’을 내줘 국부를 유출했다는 것.

    즉 현대중공업은 CIBC와의 장외 파생금융상품 이면계약으로 외국환관리법을 위반했고, 공시도 하지 않은 채 계열사를 위해 외화약속어음을 발행, 지급보증을 함으로써 증권거래법·공정거래법·외국환관리법을 위반했으며, 불법 거래에 따른 결제대금 지급행위 또한 외국환관리법 위반이라는 지적이다.

    이들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의 경우처럼 미리 정한 시점, 미리 정한 가격에 주식을 되사주는 풋옵션의 금융선물거래계약을 장외에서 하는 것은 외국환관리법 위반이라는 것. 현대중공업 민사소송 2심에서는 현대중공업이 재경원의 허가를 받지 않고 관련 거래를 한 사실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장외 주식선물거래인 풋옵션 거래는 허가나 신고를 요하는 게 아니라 명백한 금지사항이었다는 게 이들 전문가의 중론이다. 주식을 대상으로 하고 외국환은행을 통하지 않은 장외 금융선물거래는 아예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외국환관리규정 제13장은 금융선물거래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이에 따르면 금융선물거래란 ‘금융선물시장에서 금융선물거래소가 정한 기준 및 방법에 따라 행하여지는 거래’로서 여기에는 통화선물거래, 이자율선물거래 등과 함께 주식선물거래가 포함됐다. 하지만 장외 금융선물거래에는 통화선물거래, 이자율선물거래, 스왑금융거래만 포함시켰을 뿐 주식선물거래는 제외했다.

    아울러 13-3조는 금융선물거래를 ‘외화자산 및 부채의 환율변동위험, 이자율변동위험, 주가변동위험을 방지하거나 외화차입비용의 절감 등을 위한 경우’에 한해 허용하며 ‘금융공여 또는 금융비용의 보상 등을 목적으로 행해져서는 아니된다’고 못박았다.

    자금이동 투명성 위해 규제

    당국이 장외 금융선물거래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은 자금이동의 투명성을 높여 불법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장내 금융선물거래의 경우 거래대상을 통화, 주식, 채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허용하는 것은 거래소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이 불특정 다수의 경쟁매매를 거친 공정한 가격인 데다, 선물거래법 등에 따라 선물회사를 통한 위탁형태로 거래되므로 자금이동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장외 금융선물거래는 가격의 공정성을 검증하기 힘들고 자금회수 여부도 불투명하다. 특히 현대투신과 같은 비상장기업의 주식은 경쟁매매와 대량거래를 통해 형성된 가격이 없어 사전 이면계약에 따른 매매가 이뤄져도 불공정 행위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외 금융선물거래는 이자나 환율변동 위험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국내 기업이 해외 금융기관과 장외에서 주식선물거래를 할 경우 향후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외화가 불법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 가령 국내 기업 A가 해외 금융기관 B에 주식을 담보로 외자를 유치하면서 주가 변동에 대비해 옵션계약을 했다고 하자. 즉 A는 일정 시점에 일정 가격으로 주식을 되사는 콜옵션을, B는 일정 시점에 일정 가격으로 주식을 되파는 풋옵션을 가졌다. 약속한 시점에 주가가 내렸다면 B는 당연히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풋옵션을 행사할 테고 그 차익은 해외로 불법 유출될 것이다.

    반대로 주가가 올랐다면 A에게 시세차익이 생기므로 B에게 콜옵션을 행사할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A는 국내에서 차익을 실현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애초 계약 자체가 위법인 이면계약이므로 시세차익을 낸 사실을 밝히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A는 B로 하여금 자신이 지정하는 해외 계좌로 결제하게 해 외화를 도피시킬 공산이 크다.

    1997년 삼성자동차의 계열사이자 주요 주주들인 삼성전자, 삼성전관, 삼성전기는 아일랜드 소재 투자회사인 팬퍼시픽과 2억8000만달러를 삼성자동차에 신규 출자하는 내용의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은 겉으로는 외국인 직접투자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만기인 10년, 혹은 그 이전에라도 회사 정리, 지급불능 등으로 삼성자동차의 상환능력에 이상이 생길 경우 삼성전자 등이 원금과 이자에 해당하는 외화를 상환하고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풋옵션계약이 담겨 있었다. 팬퍼시픽이 주식을 담보로 차관을 제공하면서 삼성자동차 계열사들이 그 차관에 보증을 선 것이다. 현대중공업-현대전자-CIBC간 계약과 여러 모로 유사하다.

    참여연대는 이 계약과 관련, 삼성전자 등을 외자도입법과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고발했는데, 1998년 6월 검찰은 이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외자도입법 위반에 관한 한 관계 장관이 고발할 일이고 외국환관리법의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참여연대가 들이댄 법리가 적절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참여연대는 삼성전자 등이 재경부 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이런 거래를 했다며 외국환관리법상 거주자와 비거주자의 자본거래에 대한 위반으로 고발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등은 이 거래가 신고수리나 허가가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면계약을 한 것이므로 이는 비거주자와의 옵션거래, 즉 외국환관리법상 금융선물거래 규정에 따른 법 적용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같은 장외 주식선물거래는 신고나 허가를 요하는 사항이 아니라 금지사항이었다.

    보증계약이자 채권계약

    일부 로펌들은 장외 주식선물거래에 대한 법적 자문을 해주면서 이 거래가 외국환 관련법상의 옵션이 아니라 주식 우선매수청구권(합작 자본 중 일방이 주식을 팔 경우 제3자보다는 합작 상대방에게 먼저 매수를 제시하는 것) 성격에 가깝다며 관행의 일종이라는 의견을 내놓아 법망을 피하려 의도했다. 법은 옵션을 ‘권리를 일방에게 부여하고, 권리가 부여된 일방은 상대방에게 대가를 지급할 것을 약정하는 거래’라고 정의했는데, 대가(옵션 프리미엄)가 지급되지 않았으니 법상의 옵션이 아니라는 논리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전자 보증계약은 불법

    현대중공업의 지급보증계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하지만 이러한 거래에서는 대부분 거래의 양 당사자가 풋옵션과 동시에 콜옵션으로 권리와 의무를 교환하기 때문에 옵션 프리미엄이 상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가를 주고받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설사 대가가 없는 거래라 해도 법은 거래소 시장에서의 거래를 정의한 것이므로 장외거래와는 무관하다고 한다. 또한 주식 우선매수청구권은 선물계약처럼 미리 시기나 가격을 정하는 게 아니라 일방이 주식을 팔 때 그 당시 시가로 상대방에게 매수를 먼저 제시하는 것이라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것.

    더욱이 현대중공업은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것은 물론 당국의 승인(외환 지급보증을 하려면 재경부 장관 또는 한국은행 총재의 허가가 필요하다)도 받지 않고 현대전자를 위해 지급보증을 했다. 관련 사실을 공시하지도 않았다.

    또한 현대전자와 CIBC의 계약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현대중공업과 CIBC의 계약은 보증계약이라기보다는 채권계약에 가깝다. 보증계약은 채무자가 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될 경우 보증자가 대신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채권계약은 언제 얼마를 지급하기로 계약 당사자끼리 1대 1로 약정하는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CIBC에 외화약속어음(P-노트·Promissory Note)을 발행해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는 CIBC가 현대전자의 신용만 믿고 돈을 내줬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채권자는 주채권채무관계를 발생시키는 계약이 문제가 되는 경우 그와 연관된 보증계약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해 대개 보증자에게도 채권계약을 요구한다. 예컨대 미성년자와 계약을 하고 계약대금 지급을 타인이 보증한 경우 나중에 미성년자와의 계약이 법적으로 취소될 수도 있으므로 보증인에게 약속어음을 끊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CIBC도 풋옵션 계약 이행시점의 환전지급 승인 문제 등을 감안해 보증자인 현대중공업으로부터 P-노트를 받아 챙겼을 것이 분명하다. P-노트를 발행하면 약속한 날짜에 무조건 지급할 의무가 생기며, 만일 지급하지 않으면 곧바로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된다.

    현대중공업이 이렇듯 일방적이고 적극적인 의무밖에 없는 채권계약을 하면서도 이사회 결의와 당국의 승인을 미필했다면 CIBC와의 계약을 불법으로 볼 여지는 더욱 커진다. 관련 임원들이 배임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지급 안 돼야 정상

    현대중공업과 CIBC의 계약을 불법으로 본다면 외국환은행은 그런 불법 계약에 의한 환전지급 요청을 당연히 거절하는 게 옳다. 외국환은행에서 외화 환전송금을 하려면 관련서류를 제출해 지급사유를 밝혀야 한다. 은행측은 송금자가 외국환 관련법에 따른 신고, 허가절차를 밟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더구나 현대중공업처럼 거액의 외환을 지급하는 경우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외국환관리법은 ‘국내법령에 반하는 행위와 관련된 지급을 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의 대납금 2억2000만달러는 무슨 영문인지 고스란히 CIBC로 전달됐다. 외국환 업무의 최종 책임은 한국은행에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수출·수입·용역 등 경상거래에 따른 환전지급의 경우 증명서만 구비하면 별도의 신고·허가가 불필요하지만, 자본거래에서는 대부분 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외국환은행이 환전지급을 했다면 그 원인이 된 거래가 신고·허가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대답을 내놨다.

    “거주자의 주식을 비거주자가 매입하면서 일정한 조건으로 환매계약을 하는 경우 부작용이 많았다. 특히 벤처붐이 한창이던 무렵에는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급급한 나머지 나중에 주가가 떨어지면 원금의 두 배를 물어주고 주식을 되사기로 하는 등 외국 자본과 불공평한 풋옵션 계약을 맺는 벤처기업들이 허다했다. 일부는 코스닥 상장을 앞두고 주가를 띄우기 위해 자신이 해외에 빼돌린 돈으로 주식을 사면서 외국인이 사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건실한 기업이지만 국내에서 펀딩이 제대로 안 돼 부득이하게 풋옵션 계약을 하고 외자를 유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드물지만 이런 경우엔 다소 편의를 봐줬다. 이를테면 이를 금융선물거래로 뭉뚱그려 보지 않고, 비거주자가 거주자의 주식을 매수한 것은 외국인 직접투자로 신고하게 한 뒤 비거주자가 풋옵션을 행사할 때는 단순히 거주자가 비거주자의 주식을 매입한 것으로 분리해서 절차를 밟게 했다. 그러나 갈수록 부작용이 더 커진다고 판단되어 2000년 이후로는 금융선물거래를 엄격하게 규제했다.”

    하지만 법을 아무리 유연하게 해석한다 해도 현대중공업-CIBC의 경우는 편의를 봐줄 만한 사안이 못 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경우라면 환전지급 승인이 나지 않아야 정상이다. 외국환은행의 환전 관리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CIBC와 같은 지급보증거래를 할 때는 행여 미처 인지하지 못한 위법행위 등으로 인해 빌려준 돈을 못 받을 가능성에 대비해 로펌으로 하여금 상대 기업의 이사회 결의와 위법 우려, 관련당국 승인여부 등을 챙기게 해 법적 자문을 구한다. 금융기관도 자체 준법감시실(Compliance Office)에서 계약 관련 사항을 꼼꼼하게 검토한다. CIBC가 이런 절차를 제대로 거쳤다면 과연 이 계약이 준법감시실의 ‘OK’ 사인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을까. 당시 계약을 주선한 현대증권은 CIBC에 앞서 다른 몇몇 외국 금융기관과 접촉했으나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금융기관은 이와 유사하게 이면 풋옵션 계약을 하면서 허위 주식투자를 하는 경우 내부적으로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고 명성이나 신인도가 하락할 수도 있어 통상 자기 명의를 내세우지 않고 페이퍼컴퍼니를 내세운다. 하지만 당시 외자도입법상 국내 투신사에 투자하는 외국인은 본국에서 증권업허가가 있는 자여야 했다. 금융업종 제한 없이 유니버설 뱅킹을 할 수 있는 CIBC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명의로 현대투신 주식을 보유하고 풋옵션 이면계약을 했다.

    그러니 계약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신인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더욱 철저하게 사전 검토를 했어야 한다. 만약 문제점을 알고도 계약을 강행했다가 환전지급이 거절되는 등의 사태가 빚어졌다면 CIBC에게도 ‘악의적 과실’에 따른 귀책사유를 물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정작 적법성을 따지지 않은 주책임은 현대중공업이 아니라 CIBC에 물어야 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승소와 집행·회수는 별개

    따라서 현대중공업이 군말없이 2억2000만달러를 내줄 게 아니라, 불법 계약에 따른 외국환은행의 환전지급 미승인을 내세워 지급을 거부하고 관련 임직원을 문책하는 한편 CIBC에게도 적극적으로 책임을 묻고 나섰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현대중공업이 원해서가 아니라 그룹의 결정에 따라 본의 아니게 이뤄진 계약, 그래서 이사회 승인도 얻지 못한 계약이었다는 점도 ‘버티기’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CIBC가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겠지만, CIBC가 승소한다는 보장이 없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그런 소송이 제기될 경우 현대중공업이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비록 현대중공업-CIBC 거래가 위법이라고 해도 양측의 계약이 무효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개인이 집을 산 뒤 등기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동산투기제한지역에서 부동산을 매매하고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래 자체를 무효화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한다. 이른바 ‘사법(私法)자치’의 원칙이다. 다만 환전승인이 난 데 대해서는 외국환은행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

    불법 계약으로 인한 환전지급 거절과 관련, 참고할 만한 문서가 있다. 1995년 K그룹은 계열 골프장의 자금 조달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외국계 금융기관 I사가 관심을 보였다.

    K그룹은 I사에 골프장 회원권을 매각해 자금을 유치하고, I사는 7년 후 일정한 가격에 회원권을 K그룹에 되파는 풋옵션 계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I사는 이 계약에 문제가 없는지를 국내 한 로펌에 문의했다. 다음은 이 로펌이 I사에 작성해준 법률 의견서(legal opinion)의 주요 내용이다.

    ‘…풋옵션 계약 행사 시점까지 한국의 외국환관리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외국환은행의 승인을 얻어야 풋옵션 행사 대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승인을 얻지 못할 경우에도 회원권 풋옵션 계약은 유효하다. 이와 관련해 한국 법원에서 소송이 제기되면 귀측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이겨도 대금을 결제받으려면 환전승인이 필요한데, 즉각 승인될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K그룹의 해외 자산이 있는 국가에서 관련 소송이 제기되어 귀측이 승소하면 결제대금 회수가 가능할 수 있다….’

    I사가 승소한다손 치더라도 결제대금의 환전집행은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돈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의 자산이 확보되어 있는 외국에서 소송을 제기해 승소, 해외 자산으로 집행되게끔 하는 것인데, 이 또한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물며 골프장 회원권도 이러한데, 주식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K그룹과 I사의 거래는 I사의 거부로 무산됐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로펌은 2년 후 현대중공업-CIBC 계약 때도 법률 자문을 해줬다. 로펌이 부정적인 법률 의견서를 냈는 데도 양측이 계약을 강행했는지, 아니면 이 로펌이 2년 만에 사뭇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했는지 몰라도 이 계약은 성사됐다.

    현대중공업과 CIBC 간에 소송이 제기되고, 법원이 CIBC의 손을 들어준다 해도 현대중공업과 현대 계열사 간의 소송 판결에서 보듯 CIBC가 계약의 적법성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책임을 물어 손해액을 100%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법 규명 미진

    2000년 7월 현대중공업이 CIBC에 대납금을 치르면서 거래의 실체가 드러나자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주식 재매입 옵션계약이 어떤 배경과 조건 아래 이뤄졌는지 사실확인 작업을 시작했다”며 “현대중공업이 CIBC와 주식매입 계약을 맺으면서 외환관리법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이를 수사당국에 통보하고 현대중공업의 외환거래를 중지시킬 방침”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천명했다.

    그러나 두 달 후 금감원은 옵션계약과 손실보장각서를 재무제표와 사업보고서 등에 기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현대중공업에 4개월간, 현대전자와 현대증권에 3개월간 유가증권 발행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을 뿐이다.

    또한 재경부 관계자는 “현대전자가 외자를 도입한 1997년에는 외국환관리법상 시설재 구입용이 아닌 현금차관 도입이 금지되어 있어 당시 현대전자에 주식을 일정 가격에 되사주도록 한 이면계약을 해지하도록 요구했으나, 현대전자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며 “이번에 사실로 드러났지만 당시엔 변칙 도입이 불법이었다 해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관련법이 개정되는 바람에 법적인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됐다”고 면죄부를 줬다.

    외국환관리법 위반(위법거래 및 위법거래에 따른 지급)이라는 본질적 사안은 제쳐놓고 외자도입 용도제한이 풀린 것만 거론한 것이다. 외국환관리법이 폐지되고 외국환거래법이 시행중인 지금도 현대중공업-CIBC의 불법 거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법 규정은 없다. 외국환거래규정 제7-40조는 ‘파생금융거래를 자금 유출입, 거주자의 비거주자에 대한 원화 대출, 거주자의 비거주자로부터의 자금조달 등의 거래에 있어 이 법(法), 영(令), 규정에서 정한 신고 등의 절차를 회피하기 위하여 행하는 경우’는 한국은행 총재의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외환거래도 ‘有錢無罪 無錢有罪’?

    외국환 관련법은 워낙 복잡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나 중소기업은 자기도 모르게 위반해 처벌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다 계산 실수로 한도를 몇십달러만 초과해도 곤욕을 치르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처럼 선의의 범법자가 양산되면서도 한편에는 교묘하게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익을 얻고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는 세력이 있다. 특히 중간 매개체를 거쳐 파생금융거래를 하면서 신고의무를 회피하거나, 비거주자인 자본거래 당사자와 역시 비거주자인 중간 매개체 간에 국외에서 이뤄지는 거래를 포착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위법 사실이 적발되더라도 영향력 있는 변호인을 동원, “회피할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규정을 잘 몰라서 그랬다”고 발뺌하면 대개 경미한 처분을 받고 끝난다. 형사고발이 당연한 사안이 ‘관행’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또한 법 집행기관이 의도적인 유권해석을 내리거나 변호사가 궤변적인 법률 검토 의견을 내놓아도 일반 국민은 물론, 경제 관련법에 웬만큼 해박한 사람도 사실을 밝혀내기 힘들다.

    한 외환 전문가는 “이런 ‘태생적 약점’을 지닌 외환거래법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면 위반 사실이 드러날 경우 일벌백계하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도 “대기업 임직원이 외국환거래법을 위반한 경우 파렴치범이 아닌 데다 ‘나 개인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서 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대개 재산형에 처해진다. 그러니 벌금 몇 푼 내는 것을 겁내지 않고 위법행위를 반복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기업형 외국환 사범에 대해서는 신체형으로 방향을 틀 것을 검토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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