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WTO 등에 업은 곡물메이저들의 실체

거미줄 정보망에 정부도 ‘쥐락펴락’, 세계 농민 목조르는 ‘보이지 않는 손’

  • 윤석원 중앙대 교수·농업경제학 sukwon@cau.ac.kr

    입력2005-01-24 19: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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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TO 등에 업은 곡물메이저들의 실체

    다국적 곡물메이저가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WTO 농업협상 결과 제3세계 국가와 농민 계층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온 국민의 관심을 모은 쌀 재협상에서 우리나라의 쌀 재고가 크게 늘어나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부각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우리 식량의 해외 의존도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양곡 자급률이 사료용 곡물까지 포함해 26.9%에 불과하며 그나마 쌀을 제외한 양곡 자급률은 5% 미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곡물시장에서 콩의 자급률은 6.9%, 옥수수는 0.8%, 그리고 밀은 0.1%에 불과하다. 주식인 쌀만 겨우 자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아래 올해부터 어떤 형태로든 쌀 시장이 개방된다면 주요 곡물의 자급률은 더욱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식량의 해외의존율이 높더라도 국제시장에서 수입할 수만 있다면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현재 세계 식량 사정과 국제 곡물시장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 국민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식량위기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인식의 핵심에는 ‘WTO 체제’와 ‘다국적 곡물메이저’가 자리잡고 있다.

    사실 식량, 원유, 원자재와 같은 자원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곡물메이저들이 맹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근본적 배경에는 WTO 체제, 즉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세계화가 있다. WTO 체제는 시장지향적 자유무역을 통한 인류의 후생 증대, 농산물시장의 개방과 자유화를 통한 식량문제의 해결, 기아와 빈곤의 퇴치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내걸고 WTO 체제가 출범한 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WTO 체제는 많은 학자와 운동가들로부터 강하게 비판받고 있다.

    폴라리스 연구소 토니 클라크 의장은 “WTO는 민족국가의 인민주권으로부터 전지구적 다국적기업의 인민주권으로의 이행을 가속화하고 확장하는 메커니즘”이라고 강조했고, 제3세계 네트워크 대표인 마틴 코어는 “WTO는 남반구의 후진 개발도상국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했다. 인도의 환경사상가인 반다나 시바는 “WTO 규정은 산수와 난해한 용어로 포장된 강도질 규칙”이며 식량과 농업의 전지구적인 자유화야말로 “최대의 난민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WTO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계 각국이 처한 현실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피터 싱어 교수는 “일단 어느 정부가 WTO에 가입하면 그 정부와 차기 정부는 회원으로 남아 있으라는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고 말한다.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수출산업이 수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만약 WTO의 규정을 어기면 그 나라의 수출산업이 파괴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WTO 체제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보조금에 의존하는 선진국 농업

    그러나 WTO 체제는 결국 국가간, 지역간, 산업간, 계층간 불균형을 더욱 확대 조장할 뿐이다. 즉 한 국가 내에서 이른바 경쟁력 있는 특정산업은 발달할 가능성이 있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소득은 증가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산업은 축소되거나 사라져 이 부문 종사자의 소득은 하락하게 된다. 이는 산업간 소득격차를 유발하고, 나아가 빈부격차를 초래하며 사회구성원간의 갈등으로 나타날 위험성이 크다. 이러한 논리는 국가에도 적용돼 국가간 빈부격차를 확대한다.

    최근 세계은행은 선진국들의 과다한 농업 보조금과 농산물 수입관세가 개발도상국 농촌지역의 빈곤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발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들은 2000~2001년 자국 농업 보호를 위해 총 농업생산의 46%에 달하는 2300억달러를 썼는데, 이중 37%는 직접 보조금 형태로, 나머지 63%는 외국 농산물에 대한 수입관세로 부과돼 국산품 가격을 낮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도국들의 농산품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프랑수와 부르기뇽은 “개도국 빈곤층의 70% 가량이 농촌지역에 살기 때문에 농업 부문의 개혁이 이들의 삶의 질 향상에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선진국들이 시행하는 강력한 농업보호 정책이 이들을 강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도 지난주 “선진국들은 농업보조금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 인구 6억1900만명의 총소득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업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첨단산업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 산업이어서 WTO 체제 아래에서는 국내적으로도 불리할 뿐 아니라 보조금에 의해 유지하고 있는 선진국 농업과도 경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는 제3 세계 국가들의 농업, 그리고 농촌은 선진국의 농산물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같은 제3세계 농산물 수입국의 농업 피폐화는 농촌과 농민의 피폐화로 직결되고 있으며 이는 농촌 지역사회의 공동화현상을 초래하여 결국 국토의 황폐화로 연결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와 같이 WTO 체제는 제3세계 국가의 ‘농업’이라는 산업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농촌’이라는 공간과 농사짓는 사람인 ‘농민’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우리를 전율케 한다.

    세계 식량사정을 어렵게 하는 요인에는 이처럼 WTO 체제와 곡물메이저로 대표되는 구조적 요인 외에 지구환경의 변화나 중국, 인도 등 인구대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국제 곡물수급의 불안정 요인도 있다.

    1900년대 중반 이후 화석연료 등 각종 에너지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지구환경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 엘니뇨, 오존층 파괴 등의 현상이 그것이다. 특히 엘니뇨는 1980년대 이후 5차례 정도 발생한 것으로 관측됐는데, 태평양 연안국가에 심각한 식량수급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 가뭄, 홍수, 폭풍, 저온 등을 동반하여 농작물에 한해나 냉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속출하는 기상이변

    지난해 12월26일 동아시아의 쓰나미가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와 자연파괴를 초래한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또한 지난 1월8일부터 유럽 북부를 휩쓴 폭풍우는 1월10일까지 적어도 16명의 희생자를 냈다. 폭풍은 아일랜드를 강타한 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을 거쳐 러시아 서부지역까지 휩쓸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원유 생산이 중단되고 독일에서는 열차와 여객선 운항이 금지됐다. 아일랜드에서는 15만 가구에 전기 공급이 끊겼고 영국에서는 3명이 숨지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브라질에는 가뭄과 폭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브라질 남부 리우그란데두술 주 당국은 금년 1월10일 가뭄 비상사태를 26개 시에서 87개 시로 확대했다. 또 알라구이나스, 바이아, 세르지페 등 북동부지역도 식수 부족과 수확 위기를 맞고 있다. 연일 40℃의 살인적인 더위가 이어지는 이들 지역에는 지난해 12월 초부터 비가 오지 않고 있다. 반면 이날 중부 4개 주에는 폭우주의보가 내려졌다. 이러한 기상이변은 식량재고를 수년 내 최저치로 떨어뜨려 5년여 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으며 반대로 곡물 가격은 거의 두 배나 급등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중국의 곡물생산량이 크게 줄어 세계 곡물수급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3년 중국의 곡물생산량(3억1500만t)은 1998년 대비 7000만t이나 감소했다. 밀 생산량은 1998년 1억973만t에서 2003년 8600만t으로, 옥수수 생산량 역시 1998년 1억3295만t에서 2003년 1억1400만t으로 줄었다.

    중국의 곡물생산량이 감소한 것은 주로 물 부족과 사막화, 경지 전용, 고소득 작목으로의 전환, 농업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수확면적이 감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도 1978년 83.4%에서 2001년 66.0%로 줄어들었다.

    결국 중국은 부족한 곡물을 국제시장에서 대량 수입하게 되고 국제 곡물가격은 급등하게 된다. 인구 13억의 중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제 곡물시장의 수급불균형은 심화될 것이고 이는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인구 10억명의 인도 경제가 국제 곡물시장에 미칠 파급효과까지 감안하면 곡물가격 급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식량위기 가능성을 더욱 현실화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WTO 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존재다. 곡물메이저는 곡물을 저장·수송·가공하는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으로서 국제 곡물시장은 실질적으로 이 곡물메이저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위성으로 작황 파악

    세계 5대 곡물메이저로는 미국계의 카길, 아처다니엘스 미드랜드(ADM), 콘 아그라(Peavey), 그리고 유럽계의 루이 드레퓌스(LDC), 분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전체 곡물 교역량의 약 80%에 달하고 있으며, 유통 분야 시장점유율도 총 저장능력에서 75%, 수출취급 능력에서 56%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들은 ‘곡물 마피아’라 불릴 만큼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특정국가에 요란하게 진입하지 않으며 진입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금씩 서서히 스며드는 전략을 취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국 정부의 고차원적 곡물수출정책에 기생하거나 편승해서 독점적 폭리를 취하고, 국내외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공위성을 통해 밀, 옥수수, 쌀 등 세계 주요 농작물의 국가별 작황까지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

    WTO 등에 업은 곡물메이저들의 실체

    우리나라도 쌀을 제외하면 밀과 옥수수의 자급률은 1%에도 못 미쳐 식량위기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곡물메이저들이 국제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들이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부터 WTO 체제하 국제농산물 자유무역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는 점이다. 1993년 12월에 타결된 UR 협상을 통해 이뤄진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뒤에서 조정한 것이 바로 이들이다. 예컨대 미국이 내놓은 농산물 자유무역안을 실질적으로 작성한 사람은 카길사의 부회장인 대니얼 암스테드였음이 UR 협상 초기인 1987년 3월 로이터통신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암스테드를 실무책임자로 한 국제농산물 교역질서 개편 기도는 UR 협상이 타결되기 10여년 전인 1983년 이미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곡물메이저는 미국 정부와의 인사 교류, 대정부 로비 등을 통해 미국과 세계 농업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컨대 미 농무성 차관 출신인 팜비이는 콘티넨털의 부사장으로 영입되어 1972년 콘티넨털의 대소련 수출 계약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닉슨의 통상특별고문 피아스와 농무성 고위관료 팔머 마커는 카길의 부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들이 얼마나 정부와 밀착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농업협상에서는 아예 카길이 미국측 의견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처럼 곡물메이저는 미국 정부뿐 아니라 세계 농업정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쯤 되면 세계 곡물시장이 국가간 약속이나 WTO 협정 등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보다는 곡물메이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1990년대 들어 곡물 수입국들 사이에 민영화 바람이 불면서 수요자는 분산되고 있는 반면, 곡물메이저들은 오히려 인수와 합병 등을 통해 몸집을 키우면서 시장지배력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곡물메이저인 카길은 1865년 윌리엄 카길이 오하이오주에서 소금판매업을 시작한 데 그 기원을 두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미국 최대의 개인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자본의 90%를 맥밀런 일족과 카길 일족이 지배하고 있을 정도로 폐쇄적인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카길은 국제시장에도 적극 진출해 현재 50여개국 800여개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직원만도 8만여명에 이른다.

    특히 카길은 1980년대부터 관련기업을 적극 인수합병하면서 규모를 키워왔다. 예컨대 1986~1998년 12년간 개당 1억달러가 넘는 곡물 저장용 엘리베이터 50여개를 인수했으며, 콘티넨털사의 곡물부문 유통사업을 인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세계 최대 곡물메이저의 기틀을 다졌다. 이로써 카길은 곡물의 저장과 수출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랐고, 곡물 무역, 축산물, 식품원재료, 농자재, 종자, 비료 등은 물론 금융업과 석유·에너지 산업에까지 진출했다.

    박동선 사건 배후도 카길 의혹

    카길은 대부분의 곡물메이저가 그러하듯 전직 관료 등 로비스트를 고용해 미국 정부를 매수하거나 외국의 독재정권과 결탁해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 부당한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1976년 한국의 박정희 정권과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박동선 커넥션’의 배후 역시 카길로 알려진 바 있다.

    월간지 ‘The Ram’s Horn’의 발행인 브루스터 닌은 그의 저서 ‘보이지 않는 거인(Invisible Giant)’에서 카길의 급성장 배경에는 미국의 식량제국주의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몇 년간 이른바 ‘세계 구제’를 위해 만든 농업수출진흥법(PL 480호)과 1985년 농업지원법, 그 뒤를 이은 수출 증진 프로그램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카길이라는 것이다.

    인도의 환경사상가 반다나 시바는 “WTO 농업 협상은 ‘카길 협상’으로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남반구 시장을 개방하고 ‘농민농업’을 ‘기업농업’으로 바꾸는 것이 카길과 농업 협정의 주요 목표”라고 역설했다.

    곡물메이저들이 세계시장을 독점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계의 기아를 담보로 불공정 무역에 나서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든지 수출금지, 가격 담합 인상 등 불공정 무역을 자행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세계 곡물시장이 WTO 등 국제기구의 규범이나 질서보다 이 곡물메이저들에 의해 혼돈에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곡물메이저가 담합해 곡물값 폭등을 조장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1972년 세계 식량파동 당시 세계 곡물생산량이 약 3% 감소하자 쌀과 밀의 국제가격이 각각 367%와 212% 뛰어오르는 등 4개 곡물가격이 100% 이상 급등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곡물창고에 쌓여 있던 밀 재고분의 56%는 이미 국제 메이저들이 점유한 상태였다. 1973년 닉슨 정부가 100일 동안 콩 수출 중단조치를 내렸을 때도 국제가격이 4.6배나 뛰어올랐으나 당시 곡물메이저들은 미국 곡물창고에 콩 재고분의 91%를 쌓아두고 있었다.

    1976년에는 자이르(현 콩고) 정부가 곡물 대금 결제를 지연하자 콘티넨털이 밀 공급을 중단해버렸다. 콘티넨털은 현금결제와 이듬해 밀 독점 수입을 약속받고 나서야 수출을 재개했다. 1988년 사하라 이남의 최대 소맥 수입국인 나이지리아가 자국 식량생산 감소를 이유로 소맥 수입을 중단하자 카길은 미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해 나이지리아의 섬유수출을 제재하기도 했다.

    그해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과 구상무역 형태로 밀 2000t을 수출하고 아연을 들여오기로 계약했던 카길은 북한의 아연궤가 준비되지 않자 운송중이던 수출선을 공해상에서 되돌려 다른 나라로 수출했다. 1997년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밀가루 가격이 70% 상승하자 빵 가게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고, 수입에 의존하는 사료를 감당할 수 없어 농민들은 가축을 정리해야 했다.

    결국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궁극적인 목적은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더욱 확대해 제3세계 국가의 농업을 서서히 말살하고, 정부 보조에 의지하고 있는 선진국 농산물을 수출해 세계 곡물시장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농업과 농민의 몰락

    다국적 곡물메이저는 현재 진행중인 WTO의 도하개발아젠더(DDA) 농업협상에서도 자신들의 이익 극대화와 사업 확대를 위해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우리 정부와 비정부기구(NGO)들은 DDA 협상이 ‘정부 대 정부’의 협상이라는 평면적인 시각에 그치지 말고 그 배후인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전략과 전술을 파악해서 대응해야 한다.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공격 대상에서 우리도 결코 비켜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카길, ADM(아처 다니엘스 미드랜드) 등의 곡물메이저와 일본계인 미쓰이, 미쓰비시 등이 지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옥수수, 밀, 대두 등의 수입량 가운데 60%를 곡물메이저로부터 수입한다. 옥수수의 경우 콘티넨털 그레인을 합병한 카길이 50%를 공급한다.

    이처럼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식량의 수입 자유화가 계속되고 다국적 곡물메이저들의 활동반경이 서서히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제 곡물시장의 냉엄한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WTO와 곡물메이저들이 주창하는 자유무역, 가격 경쟁력, 기업농 육성 같은 구호에 맞장구만 치고 있다.

    자유무역을 통해 세계경제의 성장과 후생의 증대, 그리고 식량문제와 기아 및 빈곤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WTO 체제가 얼마나 표리부동한 것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WTO 체제를 통해 특정 산업, 특정 국가, 특정 계층은 성장했을지 모르지만 농업과 제3세계 국가와 농민 계층은 전지구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더구나 지구환경 이상으로 인한 기후변화는 중장기적으로 농산물의 생산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다국적 곡물메이저는 호시탐탐 우리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의 몰락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의 중요성을 우리가 새삼 인식하고 시장, 경쟁, 효율성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농업과 농촌이 함께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인식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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