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통일부, ‘한반도 평화체제 실행 프로그램’ 작성 중

외교·국방·남북관계 총망라하는 외교·국방·남북관계 총망라하는 ‘한국 안보정책 마스터플랜’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9-28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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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원래 외교통상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 관계 부처에서 작성하던 4차 6자회담 전략에는 평화체제 문제를 적극적으로 의제화하는 방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회담을 앞두고 대통령이 ‘평화체제 문제는 이슈가 되지 않느냐, 이를 거론하는 것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시한 게 계기가 됐다. 회담 준비팀에겐 일정이 촉박한 주문이었지만 이내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고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다시 보고했다. 이에 따라 대표단은 4-1차 회담에서 평화체제 논의를 주도하게 됐다.”

    8월8일자 ‘중앙일보’ 1면에 실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남·북·미·중 공식 논의키로’ 기사와 관련해 정부의 한 외교안보 관계자가 한 말이다. 7월 말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참가국들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별도의 관련국 포럼을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전한 이 기사는, 복수의 회담 관계자를 인용해 “잠정 합의문(중국측이 마련한 4차 초안)에 이 부분이 명기되어 있으며 관계국들이 모두 동의했다”고 밝혔다.

    회담 관계자들은 “평화체제에 관한 북한측 요구를 한국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나섰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고 전한다. 북한은 1차 6자회담에서부터 평화협정 논의를 주장해온 상태. 6자회담에서 평화체제와 관련된 별도의 포럼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은, 향후 북한의 핵 폐기 등에 관해 잠정적 합의가 이뤄지면 정전(停戰)협정의 당사국이 모여 정전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뜻. 9월13일 재개된 4-2차 회담에서 최소한의 합의라도 나오면 평화체제에 관한 관계국들의 논의도 곧바로 시작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9월12일에는 새로운 소식이 이어졌다. 정부가 13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16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회담 대변인인 김천식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은 브리핑에서 “이번 장관급회담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시작점이 돼야 한다”면서 “정부는 그동안 평화번영 문제를 계속 주장해왔지만 현실적으로 이 문제에 주안점을 두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정부 관계자들은 장관급회담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키로 하고 이를 공개한 일 또한 대통령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북핵 문제 해결은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란 큰 그림 아래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 한마디로 최근의 ‘평화체제 논의’는 노무현 대통령발(發)인 셈이다.



    상황이 빠르게 전개되자 실무 부처는 다급해졌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검토하는 작업이 발등의 불이 된 것이다. 외교부와 국가정보원 등도 ‘학습’에 들어갔지만, 구체적인 임무를 맡은 부서는 공식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담당하는 통일부 정책홍보실 산하 평화협력기획과. 지난 2월 기존의 정책기획과와 평화협력담당관실이 통합돼 만들어진 이 부서는, 8월부터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평화체제 방안과 이행전략을 정리하기 위해 주요 쟁점별로 전문가 자문을 받고 기관간 토의를 이끄는 실무작업에 본격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북아 안보 상황의 ‘총체적 변화’

    정전협정은 1953년 7월27일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해방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가 서명해 체결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정전협정은 많은 규정이 사문화됐으며, 정전체제 자체도 1991년 한국군 장성이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임명되고 이듬해 북한과 중국이 각각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철수하면서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그렇다 해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한반도 안보 환경의 변화, 무엇보다 주한미군의 지위와 직결된 부분이라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현재 주한미군의 유사시 지휘권은 법적으로 6·25전쟁 때 결성된 유엔사령부가 갖고 있기 때문.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면 전쟁 상태가 50여 년 만에 공식 종료되므로, 유엔사를 해체할 수밖에 없어 주한미군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또한 평화체제가 수립되려면 정전협정을 대체해 비무장지대(DMZ)를 관리할 새로운 관리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에 대해 DMZ를 맞대고 있는 남과 북이 합의해야 하고, 이를 감시·감독할 제3자 검증기구(정전협정의 중립국감시위원회 같은) 설립도 검토해야 한다. 전방에 과도하게 집중된 현재의 군사력 배치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북 군축논의도 수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한마디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은 동북아 외교안보 상황 전반에 걸쳐 총체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노무현 정부는 평화체제가 미칠 이러한 파급효과에 대해 어떤 복안이 있는 것일까. 평화체제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6자회담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하자고 주문한 대통령은 평화체제의 구체적인 형태와 방안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말은 많았으나 준비된 것은…

    사실 노무현 정부는 평화체제에 대한 의지를 이미 여러 차례 표명했다. 출범 초기부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대북외교정책의 핵심 과제로 설정했고, 노 대통령은 2003년 8·15 경축사를 통해 평화체제 구축의 필요성을 강하게 언급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국정홍보처는 ‘NSC 사무처 한반도 평화체제 담당관’이 작성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제목의 정책 설명자료를 펴냈고, 2004년 3월 NSC 사무처가 발간한 ‘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도 이 부분에 한 절을 할애했다.

    그러나 정부가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는 징후는 확인하기 어렵다. 앞서 설명한 NSC 관련 자료들은 총론 수준일 뿐 지향하는 평화체제의 특정한 국제법적 형식이나 틀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북핵 문제 등 현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NSC 평화체제 담당관 역시 관련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 대통령이 평화체제와 관련한 지시를 내리고서야 NSC 내 6자회담 담당자들이 이 문제를 챙기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이러한 상황은 “평화체제라고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니 준비된 것이 거의 없더라”는 정부 관계자들의 토로에서도 확인된다. 이 문제를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의 장기적인 과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6자회담 등의 정세변화에 맞춘 구체적인 그림이나 공식적인 실행 플랜은 완성된 게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 또한 원론적인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있을 뿐, 정교한 복안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천식 통일부 교류협력국장이 9월12일 남북장관급회담에 대해 브리핑하면서 “어떤 식의 평화체제가 돼야 하고 그 구성 요소는 무엇인지,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지 등은 추후 계속 논의할 사안”이라고 말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통일부 평화협력기획과의 준비작업도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예상되는 쟁점을 정리하고 신경 써야 할 과제들을 확인하는 ‘목록작성’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이전 정부가 밝힌 평화체제 관련 견해 가운데 현재 상황에 맞게 수정하거나 새로운 요소를 반영할 부분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작업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

    그 가운데서도 통일부가 가장 고심하고 있는 것은 평화협정의 ‘주체’의 문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정전협정은 형식상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중국 인민해방지원군의 3자(者)가 체결했으나, 한국 정부는 교전국이었음을 근거로 평화협정의 당사자 자격을 주장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이른바 ‘2+2’(남한과 북한에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형태) 체제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후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평화체제 구축 방향은 ‘2+2의 평화협정 체결’로 모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2005년의 상황이 4자회담 당시와는 상당부분 차이가 있다는 점. 핵심 당사자인 북한이 미국과의 협정을 주장하면서 굳이 중국의 참여를 고집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눈치이고, 미국은 중국의 참여를 껄끄러워하는 분위기다. 중국은 1957년 인민해방지원군을 북한에서 철수하면서 정전협정의 관리를 북한에 위임했고 이후 정전체제 운영에 사실상 무관심해왔기에, 국제법상 중국의 권리는 이미 소멸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중국의 의사가 변수가 되겠지만, 남·북·미 3자가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누가 평화협정의 주체가 될 것인지의 문제는, 당장 4-2차 6자회담에서 관련 포럼이 만들어질 경우 어떤 나라가 포럼 참가국이 되느냐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더욱이 이 문제는 향후 한반도 평화관리기구 참여 주체 등 주요 쟁점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므로 한국 입장에서 어떤 것이 더 유리한지 사전에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이 긴요해진 셈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통일부는 내부적으로 2+2안(案)을 기본으로 하되 3자안(案)도 탄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기조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의 2+2안과 비교해볼 때 3자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올지를 분석하는 것도 평화체제 준비작업의 주요 포인트다.

    통일부는 그간 진행해온 평화체제 관련 연구에 대해 쟁점별로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통합·검토한 뒤 외교통상부나 국방부 등 관련 부처와 협의해 최종 방안을 정리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평화체제는 남북 문제뿐 아니라 외교·군사 문제가 긴밀하게 얽힌 복잡한 주제이므로 부처간 논의는 필수적이다. 한 관계 당국자는 “사실상 대한민국 외교안보정책의 그랜드 마스터플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했다.

    그러나 9월 중순 현재까지 부처간 논의는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 때문에 평화체제 문제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주한미군 지위 문제나 정전협정을 대체할 DMZ관리기구 설치 문제도 구체적으로 결정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평화체제 주무 부서는 통일부이지만 6자회담 주무 부서는 외교통상부다 보니, 평화체제 구축 일정을 북한의 핵 폐기 및 검증 스케줄과 연동해서 설정하는 작업도 별다른 진척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이슈는 향후 세부 추진단계가 얽히고설켜 ‘저쪽에서 하나를 진행하면 이쪽에서도 하나를 진행하는’ 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 전문가들이 정부가 너무 늦게 준비작업을 시작한 게 아니냐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들이 “6자회담은 핵 폐기뿐 아니라 항구적인 동북아 평화체제의 장이 돼야 한다”고 거듭 밝힌 사실이나 노무현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주요 정책으로 홍보했던 것에 비춰보면, ‘북핵 정세’를 반영한 평화체제 실행방안을 진작부터 완성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면 정부 당국자들은 “이제부터 시작해도 늦은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현재 상황은 ‘평화체제를 논의할 포럼을 만들기로 합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일 뿐’이므로 시간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 통일부 관계자는 “4-2차 6자회담에서 포럼을 만든다는 합의문이 나와도 실제 포럼 개최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개최 후에도 상당기간 탐색전을 벌일 것이므로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관계 부처간 논의를 거쳐 추진방안이 완성되고 청와대 보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승인 받으려면 수개월이 걸리겠지만, 포럼의 논의 일정이 이보다 빨라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주장이다.

    성문법과 불문법

    이러한 한계는 사실 논의가 진전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평화체제 준비과정에 관여한 일부 전문가들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준비작업이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형식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평화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린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성문법 vs 불문법’ 논쟁이다. 핵심은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당사국들이 서명하는 ‘평화협정’이라는 공식 합의문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여부.

    ‘성문법’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4자 회담 등의 테이블에서 협상 문안을 도출해 공식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불문법’을 선호하는 이들은 합의문을 만드는 과정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이 크므로 굳이 문서를 만들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차라리 평화체제를 실질적으로 구축하는 다양한 조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논란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

    지금까지 알려진 통일부의 추진방향은 전자에 가깝다. 당사국들이 모여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나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문을 능가하는 역사적인 합의문, ‘남북관계의 새로운 장전(章典)’을 도출하는 식이다. 특히 다자틀 안에서도 남북한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그림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먼저 평화협정을 구성하고 이후 평화체제를 이행한다는 의미에서 ‘선(先) 협정 후(後) 체제’인 이 방식은, 1990년대 후반의 4자 회담에서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논의되고 있는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상응 조치’가 대부분 평화체제 구축의 ‘다양한 실질 조치’의 주요한 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최근 상황은 ‘불문법적 접근’에 더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주한미군 재배치와 역할 변경 이슈가 이미 한미간 논의 테이블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나, 남북한간 군사회담을 통해 서해상 NLL(북방한계선) 문제 등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는 점도 ‘불문법적 접근’에 힘을 실어준다. 6자 회담과 한미 협상을 통해 이들 조치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플랜이 마련되면 여기에 약간의 ‘노력’을 더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평화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문법’적 접근에는 골치 아픈 쟁점 하나를 우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로 한국의 평화협정 당사자 여부다. 앞서 말했듯 한국은 정전협정 서명국이 아니지만 한국 정부는 교전국으로서 ‘실질적 당사자’이므로 평화협정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해왔다. 반면 북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북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다가, 1974년부터 북미평화협정 체결로 내용을 바꾼 상태다. 향후 평화협정 관련 논의가 구체화되면 이 부분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큰데, 아예 평화협정 문서를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논란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6자회담 부분부터 살펴보자. 평화체제의 핵심은 6·25전쟁 당시 적대국이던 미국과 북한이 50여 년간 이어진 전쟁 상태를 해소하는 것이다. 6자회담에서 그간 논의된 것처럼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상응 조치로 양국이 외교관계를 맺게 되면 현실적으로 전쟁 위협은 상당부분 해소된다. 전쟁 중인 두 나라가 새로 수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북미·북일 수교만 이뤄져도 사실상 평화체제의 반은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이 요구한 바 있는 ‘미국의 대북불가침선언’ 혹은 ‘북미평화선언’이 현실화된다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 그간 북한이 ‘6자회담의 실질적인 목표는 평화체제의 구축이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 정전체제가 해소되면 법적 근거를 상실한 유엔사는 해체될 수밖에 없고, ‘북한으로부터의 방어’로 규정된 주한미군의 임무도 변경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한미 양국은 2003년부터 진행된 FOTA(한미미래동맹정책구상) 회의와 올해 초부터 시작된 SPI(한미안보정책구상) 회의를 통해 주한미군의 대북(對北)방어 임무를 지역안정 유지로 전환하는 논의를 진행해왔고, 그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주둔 근거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나 이를 보충하는 ‘신안보선언’의 필요성이 깊이 있게 거론되기도 했다.

    유엔사 해체로 인한 파급효과도 수면으로 올라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군의 전시 작전통제권을 위임받은 유엔사가 해체되면 한국은 이를 환수해야 하고 따라서 한미연합사도 해체해야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2012년까지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기로 하고 실질적인 준비작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이렇듯 연합지휘체계가 재검토되고 있는 상황이니 평화체제 구축으로 인한 압박은 상대적으로 미미할 수밖에 없다.

    통일부, ‘한반도 평화체제 실행 프로그램’ 작성 중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식 장면. 왼쪽 테이블에선 유엔군측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국 해군 중장이, 오른쪽 테이블에선 북한측 수석대표인 남일 인민군 대장이 각각 서명하고 있다.

    또한 전문가들은 향후 평화체제 무드가 본격 조성될 경우 남북군사회담에서 진행된 서해 NLL 협상 등이 정전협정의 DMZ 관리규정을 대체할 새 관리규정을 만드는 작업의 바탕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1992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2장 11~14조는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단계적 군축과 검증 등 사실상 평화체제와 다름없는 상태를 규정하고 있어 남북이 합의만 하면 얼마든지 원용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기본합의서에 규정돼 있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정전위원회를 대체하는 새 관리기구 역할을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요 쟁점에 있어 평화체제를 구성하는 실질 조치의 기반이 이미 마련되어 있으므로, 이를 꾸준히 이행해 현실적인 수준으로 만든 다음 기존의 정전협정을 해소하는 국제법적 절차를 거치면 사실상 평화체제가 완성된다는 것이 ‘불문법적 접근법’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다. 앞서 이야기했듯 중국은 사실상 정전체제에서 빠진 상태이므로 북한과 미국이 합의해 ‘○월○일 정전협정의 효력을 정지한다’고 선언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는 “의식하지 않았을 뿐 사실 우리는 이미 많이 걸어온 셈”이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소요기간 5년에서 10년

    그러나 이러한 실질 조치가 진전되기까지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다. 북미·북일 수교 협상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주한미군의 임무를 전환하는 것도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한 중국의 경계심을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국군이 전시 작전통제권을 환수할 준비가 돼 있느냐, 남북군사회담이 서해 NLL 문제 등 다양한 갈등의 소지를 불식시키고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느냐도 낙관하기 어렵다. 한 통일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선 협정 후 체제’ 접근은 이러한 어려움을 감쇄(減殺)할 수 있다. 이런 실질 조치가 실현되려면 북미·한미·남북 간에 정상회담에 버금가는 최고위급 대화가 이뤄져야 할 텐데, 평화협정을 먼저 맺으면 그 흐름을 강제하는 효과가 생길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일단 체결되면 모든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사실 성문법적 접근과 불문법적 접근은 각각 장단점이 있어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2005년 가을의 동북아 정세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의 추진은 6자회담 및 북한의 핵 폐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평화체제 구축 일정은 북한 핵 폐기와 그 검증에 소요되는 시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평화체제의 여러 실질 조치 역시 짧지 않은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각각의 과제를 세부 추진단계로 나누고 이를 핵 폐기의 세부단계와 연결해 설계하는 고차원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보면 평화체제 구축은 북한이 핵 폐기에 동의하고 나서도 5~10년이 걸릴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2012년 무렵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된다면 어떻게 될까. 평화체제는 물론 통일이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에 비하면 훨씬 더 진전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이 급격히 감소한다는 점만 봐도 그 경제적·정치적 가치는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이는 북한이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결정하느냐, 미국이 동북아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상당부분 좌우될 것이다. 4-1차 6자회담에서 평화체제 논의가 합의문 초안에 포함된 것은 분명 긍정적인 신호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 당국자들 사이에서 극과 극으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만큼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분명한 것은 4-2차 6자회담과 남북장관급회담이 동시에 개최된 2005년 9월13일은 매우 의미심장한 날이라는 점이다. 역사는 두 회담의 결과에 따라 한반도 평화체제의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기록할 수도,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최소한의 모호한 합의문’ 정도가 4-2차 6자회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성과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그 모호한 합의문이라도 절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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