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미국이 그리는 새로운 동북아 구도

‘協中 用日 容韓 交北’으로 다자안보협력 틀 꿈꾼다

  • 조성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국제관계연구센터장 joseon@riia.re.kr

    입력2005-10-25 10: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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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그리는 새로운 동북아 구도
    지난9월의 4차 6자회담을 앞두고 국내외 여러 전문가는 성공적인 타결을 기원하면서도 우려가 적지 않았다. 미국과 북한의 견해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번에도 공동합의문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우선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의미있는 ‘사건’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미국의 태도 변화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경수로의 ‘경’자도 공동합의문에 넣을 수 없다”는 기존의 태도를 바꿔 ‘적정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한다는 문안에 합의했다.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협상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에너지 제공에도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눈여겨볼 부분은 이번 공동성명이 단지 북핵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의 형성이라는 근본적인 이슈를 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 및 중국과 미일동맹의 대립이라는 기존의 동북아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려는 구상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에 충분하다. 동북아에서 50여 년간 지속되어온 냉전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해체의 흐름’ 속에서 이번 4차 6자회담의 공동성명이 나왔다는 분석이다.

    과연 미국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미국이 그리는 향후 동북아의 그림은 어떤 것이며, 이는 한반도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먼저 ‘힐 구상’이라 불리는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얼개를 살펴보고, 이 전략틀이 중국과 일본, 한반도 등 주요 동북아 국가 및 관련현안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분석해보기로 한다.

    1. 미국의 새 동북아 구상, 어떻게 나왔나



    미국의 새로운 동북아 구상, 특히 한반도 관련부분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미 국무부의 동아시아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은 동아태담당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이다. 지난해 8월 주한 미대사로 부임했던 힐은 7개월 만에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맡으며 서울을 떠나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7개월을 7년과 같이 보냈다”는 그의 말처럼 힐 차관보는 주한대사 시절 부임 초부터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비롯해 한국 내 반미(反美)감정의 무마, 한미동맹 재조정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반미주의’와 애국심에 기초한 ‘반미감정’을 구분해내고 경제발전과 민주화로 자신에 찬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게 된 듯하다. 이 같은 바탕은 힐이 6자회담에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국익을 대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내 대북 강경파를 설득해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을 이끌어내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힐은 단순한 ‘중재자’에 머물지 않고, ‘힐 구상’이라고도 부르는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을 추진하는 사령탑을 맡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는 보스니아 내전을 마무리한 ‘데이턴 평화협정’의 체결을 주도했고, 코소보 사태 때도 특사로 파견돼 나토의 유고 공습 이후 평화체제 및 코소보 지역 자치정부 수립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바 있다. 힐의 이러한 이력은 그의 다음 목표가 동북아와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냉전구조 해체’에 관여한 이력은 힐 차관보뿐만 아니라 2기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에서 동북아와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인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1기 시절의 ‘고상한 이상주의(lofty idealism)’가 아니라 ‘실용적 이상주의(practical idealism)’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스타일을 공유하는 이 그룹의 수장(首長)은 외교정책을 주도하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다. 이외에도 로버트 졸릭, 필립 젤리코, 닉 번스 등 국무부 요직에 앉은 라이스 장관 계열의 인사들은 한결같이 ‘큰 그림을 보면서도 말로만 떠들지 않고 외교정책에 반영할 줄 아는 인사’로 평가받는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추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8월초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을 베이징에 보내 중국 지도자들과 전략협의를 진행하도록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졸릭 부장관은 중국측에 한반도 현상 변경의 필요성을 말하며, 미국과 중국에 모두 우호적인 한반도를 위한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자회담을 동북아시아의 다자간 안보틀(multilateral security framework) 마련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는 문제 또한 중국과의 협의 주제였다.

    힐 대사를 동아태 차관보로 승진시키면서 6자회담 미국측 대표로 임명한 라이스 장관은, 뒤이어 거물급 외교관인 알렉산더 버슈보를 공석 중인 주한 미대사에 임명함으로써 한반도 및 동북아 질서 재편작업에 의지를 보였다. 버슈보 대사는 나토와 러시아대사를 역임했으며, 미 국무부 소련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붕괴과정, 즉 동서 냉전구조의 해체를 직접 지켜보고 관리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다.

    ‘對테러 전쟁’에서 ‘민주주의 확산’으로

    이상의 ‘선수명단’은 힐 차관보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새로운 동북아 전략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구상은 아직 공식문서로 작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2기 부시 행정부의 변화된 대외전략과 4차 6자회담 과정에서 드러난 구상의 일단, ‘공동성명’의 내용 등을 추적하면 대체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집권 2기를 맞아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외교 독트린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무렵 라이스 장관은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지목하며 새로운 독트린을 북한에 적용할 것임을 시사했다. 2기를 맞이한 부시 행정부가 1기 때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점차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전략 중점을 옮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였다.

    ‘테러와의 전쟁(GWOT·Global War on Terror)’이 단기적이고 전술적이며 군사적인 대처방법이라면, ‘폭력적 극단주의 대처전략(SAVE·Strategy Against Violent Extremism)’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략은 장기적이고 전략적이며 사회문화적인 처방이다. 이러한 전략 수정의 배경은 무엇일가. 우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쟁에서 무력사용의 한계를 겪었다는 점이다. 전쟁 수행과정에 유럽을 포함한 국제적인 지지와 도움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특히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기존 동맹관계가 약화되는 부작용이 있었음을 일정부분 반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지역에 한정해서 살펴보면, 1기 부시 행정부의 동북아 전략은 전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군사변환(Military Transformation)과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Global Posture Review)으로 요약된다. 그 위에서 우선 한미 및 미일동맹 재조정 작업을 마친 뒤 쌍무동맹을 연결해 ‘한·중·일 3자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동맹 재편을 추진하는 형식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對)중국 포위망을 구축하는 작업을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남북한 관계의 급진전과 한중관계의 긴밀화, 과거사 및 영토문제를 둘러싼 일본과 한중 양국의 갈등양상을 지켜보면서, 미국은 1기 부시 행정부의 정책으로는 역내(域內) 주도권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질서를 목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2기 부시 행정부는 한미 및 미일 쌍무동맹을 바탕으로 하면서 여기에 덧붙여 장기적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동북아 다자안보협력틀’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2기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흐트러진 동맹관계를 재정비하며 악화된 한일관계를 되돌려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중국과 협력해 북한체제의 변환(regime transformation)을 촉진하고 동북아 다자안보틀을 형성하는 등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두는 모습도 보인다.

    동북아 전략변화의 구체적인 조짐이 처음 드러난 것은 지난해 7월 라이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때 라이스 보좌관은 중국 당국자들과 미중 관계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제, 대만 문제 등을 폭넓게 협의했다. 그러나 당시는 부시 대통령의 재선(再選)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였고, 부시가 재선되더라도 라이스가 어떤 직책을 맡게 될지 확실치 않았던 까닭에 이러한 협의내용이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라이스가 국무장관에 기용된 이후, 특히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 등을 통해 전략변화의 조짐이 드러난 이후인 2005년 3월 라이스 장관의 중국 방문과 8월 졸릭 부장관의 중국 방문은 그 무게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2단계 4차 6자회담이 있기 수일 전, 부시 미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9월13일 정상회담을 열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자리에서 후 주석은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견제를 막고 미중 양국의 고위층 교류와 각종 전략대화 개최를 제안했다. 양국 정상은 북핵 문제뿐 아니라 대만 문제에 관해서도 긴밀하게 의견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대외정책과 관련해 2기 행정부가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고려를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선 미국은 현실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이 가진 영향력을 받아들이고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다. 1996년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을 통해 ‘글로벌 파트너십’을 선언한 바 있지만, 미국은 한반도 문제나 동북아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대화 상대로 일본이 아닌 중국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앞으로도 미일동맹을 강화하겠지만 이는 대중 포위망 구축이나 지역 차원에서 패권의 대행자 역할로 활용한다는 것이지, 전략 차원에서 미국이 중국과 일본을 대등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뜻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미 국방부의 생각도 같다. 2003년 4월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펜타곤 내에 회람시킨 ‘북한 정권교체 메모’ 내용 가운데 “중국과 협의를 통해”라는 대목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미국은 이미 이때부터 한반도 미래에 관해 중국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이 그리는 새로운 동북아 구도

    미국의 새로운 동북아 구상을 이끄는 사람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 알렉산더 버슈보 신임 주한대사.

    둘째, 일본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관철하려는 부시 1기 행정부의 동북아 전략 구상은 미일동맹 강화와 ‘한·미·일 동맹간 네트워크’ 강화로 나타났으나, 중국의 반발을 사고 한국의 부정적 태도가 이어짐에 따라 그 효용성에 한계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과 일본은 비교적 쉽게 ‘공통전략목표’에 합의했지만 중국과 북한에 대한 한미간 현격한 시각차로 한·미·일 3자의 공통전략목표 도출이 더욱 어려워졌으며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전진 배치되어 있던 미군전력을 일부 축소하고 3자 동맹 네트워크를 통해 동북아 지역에서 패권을 관철하려던 미국의 구상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은 중국을 현실적인 파트너로 인정하고 동북아 신질서 형성에 관해 미국과 중국이 협의하는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논의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셋째, 지난해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LA연설과 올해 초 ‘동북아 균형자론’ 표명 등에서 알 수 있듯, 외교안보 분야에서 한국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자 미국은 한국을 자국의 동아시아 전략 수립과정의 ‘종속변수’가 아닌 ‘독립변수’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가능하다. 미국의 ‘한·미·일 3자 동맹 네트워크’구상과 한국의 ‘동북아균형자론’은 논리적으로 정면충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향후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협력, 평화공존 과정에서 남북한의 주변국에 대한 전략 및 정책은 동북아 역학구도에 만만찮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평화공존, 통일과정에서 한국이 미국, 중국, 일본에 대해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해지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통일의 시기와 양상은 동북아의 역학구도를 크게 바꿀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에 대한 한국의 전략은 앞으로도 통일 한국의 평화와 번영에 직결된, 사활적 이해를 갖는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2. 신(新)질서하의 미중·미일·한미관계

    지금까지 미국의 새로운 동북아전략이 어떻게 형성됐으며, 이전의 정책과 구별되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다음의 관심사는 새 전략틀이 구체적으로 동북아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하는 점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 한국과 북한 등 이 지역의 주요 국가는 모두 미국과 까다로운 국제정치 현안 및 쟁점을 안고 있다. 과연 이들 현안은 어떻게 풀려 나갈지, 그 결과는 각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중국, 일본, 북한, 한국의 순으로 살펴보겠다.

    중국 : ‘군사적 압도’ vs ‘적응과 협력’

    미국의 세계전략 및 동아시아 전략 변화의 중심에는 중국의 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미국 내 논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미 국방부 관리들은 미국의 군사력을 과시해 중국이 지역 군사강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단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국무부 관리들은 중국이 자신의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중국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체제를 수용하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미 의회에 보낸 ‘2005년 중국 군사력’ 보고서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며 장기적으로 주변국가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년 2월초 발간 예정인 ‘QDR 2005(4개년 국방정책 재검토 2005)’에도 유사한 내용이 담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시각은 올해 초 중앙정보국(CIA) 포터 고스 국장이 “중국군의 현대화가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반면 국무부에서는 중국과의 충돌보다는 적응과 협력을 강조하는 온건한 주장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중국의 평화적 등장(和平堀起, 和平發展)이나 초강대국화를 사실로 받아들여 불필요한 중국 위협론을 확산시키거나 일본 등 동맹국을 부추기는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확정되지 않은 ‘중국 위협론’을 근거로 중국과 전략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학계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무역규모가 2004년 말 현재 미국, 유럽연합, 일본과 각각 1696억달러, 1722억달러, 1678억달러를 기록하고 있는 만큼, 중국을 경제동반자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결코 미국이나 일본에 불리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내세운 ‘화평발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20년 까지는 미중 대립관계를 조성하지 않으려는 속내를 갖고 있다. 미중 대립구도가 조기에 가시화할 경우 중국의 국력은 국방력 건설에 소모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경제발전에 큰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최근 동중국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해양 갈등도 중국이 원하는 상황은 아니다. 중일 갈등은 미일동맹 강화의 구실이 되고 이는 자칫 미중 대립구도의 조기 형성으로 연결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 삐걱거리는 미일동맹 재편

    앞서 설명했듯 부시 1기 행정부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단연 미일동맹의 강화였다. 2기 정책의 틀 속에서도, 중동에서 동북아지역에 이르는 이른바 ‘불안정한 활꼴(arc of instability)’ 지역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한반도 유사시 및 양안(兩岸)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은 앞으로도 미일동맹을 더욱 강화하려 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미국이 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의 방위력 증강을 촉구하는 목적은,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패권을 나누어 행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역내 주둔미군의 감축으로 초래될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에 가깝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은 미일동맹 강화를 지지하고 편승하는 전략을 취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중국을 자극하거나 과도하게 역할을 분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현재 미일동맹 재조정작업은 올해 11월 ‘중간보고서’를 발표하고, 내년 1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미(訪美) 때 새로운 ‘미일 신안보 공동선언’을 발표한다는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양국은 2월19일 ‘공통전략목표’에 합의하고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임무 및 기능 조정작업을 거의 마무리했으나, 주일미군 기지의 재편·재조정 작업은 후텐마 기지의 이전방안을 놓고 난항을 거듭하다 미국의 요구가 관철되는 형태로 최종 타결됐다.

    뿐만 아니라 GPR의 핵심인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미국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도 마찰을 빚고 있다. 당초 미국은 미 육군 1군단 사령부를 자마 기지로 이전해 ‘불안정한 활꼴’ 지역을 총괄토록 하고, 5공군(요코다)과 13공군(괌)의 두 사령부를 통합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일 안보조약’의 ‘극동조항’을 내세운 일본측의 반대로 미 육군 1군단의 작전범위가 ‘필리핀 이북지역’에 국한되면서, 당초 자마 기지에 광역사령부(UEy)로 만들어 4성 장군을 임명하려던 미국의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괌 소재 13공군 사령부를 요코다 기지로 옮기려던 통합이전 구상도 무산됐다. 이로써 미국은 주일 미군사령부로 하여금 ‘불안정한 활꼴’ 지역에 대한 총괄 사령부 역할을 맡게 하려던 당초의 구상을 접었다.

    이런 가운데 동북아지역에서 다자안보협력의 틀을 만들려는 미국의 신전략이 미중 양국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도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 모든 참가국이 아니라 ‘직접 관련당사국’에만 참가티켓을 주기로 함으로써 일본이 배제되는 형국이다.

    미중 양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일본은 소외감을 가지면서도 새로운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지난 9월11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임기 중 북일 수교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으며, 6자회담 공동성명에 합의한 다음날인 9월20일에는 마치무라 외상이 북일 수교협상을 위한 정부간 협의를 재개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북일 양측은 4차 2단계 6자회담 기간에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일본 대표 사사에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세 차례 공식접촉한 바 있다.

    이미 두 차례나 평양을 방문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동북아 질서재편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북일 수교협상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이에 따라 북일 양국 정부간 접촉은 2004년 11월 이후 11개월 만인 10월 중에 재개된다.

    북한 : ‘정권교체’에서 ‘체제전환’으로

    미국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전략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2002년 2차 북핵 위기 발발 당시 라이스 안보보좌관이 제기했던 ‘대담한 접근법(bold approach)’을 부활시켰다. 라이스가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미국은 종전의 현상유지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현상변경’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번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 및 동북아 냉전구조의 해체라는 현상변경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부시 행정부 1기 동안 국방부나 다른 부처의 네오콘 인사들은 북한에 대한 선제 핵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2003년 4월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펜타곤 내에 회람시킨 메모를 보면 ‘북한 정권교체’도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라크 전후처리가 장기화하고 이란 핵 문제가 새롭게 불거지면서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을 배제하고 평화적 해결의지를 거듭 천명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한반도 현상변경을 위한 전략을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하고 있다. 하나는 6자회담 공동성명에 따라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고 평화협정체제를 구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 한국을 염두에 둔 ‘한미동맹 공동비전’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먼저 미국은 6자회담 공동성명에 따른 한반도 비핵화 실현 외에도 생화학무기, 미사일의 확산방지 및 폐기를 위한 ‘협력적 위협감소(CTR)’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를 억제하면서 역내 강대국들과 협력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역내 군비경쟁 관리,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등 구체적인 사안을 해결하려 시도하고 있다.

    만약 ‘북한 문제’가 잘 풀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개혁·개방정책의 채택, 북미 수교가 이루어진다면 미국은 장기적으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에서 중국 등을 겨냥한 ‘민주화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 : ‘한미동맹 공동비전’의 마련

    한국과 관련해 살펴볼 것은, 앞서 미국이 한반도 현상변경을 위한 전략의 한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한 ‘한미동맹 공동비전’ 마련에 관한 것이다. 미국이 한미동맹의 재조정을 가속화하면서 진행하고 있는 이 공동비전 마련 작업은 현재 ‘한미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에서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역할분담 및 기능조정 형태로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한반도 통일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미국측과 불필요한 논란 발생을 우려하는 한국측 견해가 엇갈려 의견접근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반도의 ‘현상변경’이 평화체제로의 전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북한에서 예기치 않은 급변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또한 논의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외부압력이 없더라도 체제모순에 의해 발생할 수 있으며,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 전략의 영향을 받아 촉진될 수도 있다. 올해 초에 불거진 양국 군사당국 사이의 논란, 즉 ‘개념계획 5029’를 ‘연합작계 5029’로 발전시키는 데 따른 한미간의 갈등은 바로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군사계획을 ‘한미동맹 공동비전’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둘러싼 논의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문제는 윤광웅 국방장관과 럼스펠드 장관이 만나 ‘개념계획’을 합의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남북경협(經協) 위주의 대북정책에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명하며 한반도 통일상황을 상정한 ‘한미동맹의 공동비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새로운 시각에서 동맹비전의 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미일동맹 재조정의 파행과 ‘한·미·일 3자동맹 네트워크’ 구상의 좌절로 ‘현상변경’에 기초한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미 국방부가 주한미군 사령관에 4성 장군인 유럽주둔 지상군사령관 버웰 벨 대장을 임명한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때 주한미군 감축에 따라 주한미군 사령관을 대장에서 중장으로 낮추고, 주한미군의 4성 장군을 하와이나 일본으로 옮겨올 미 1군단 사령부로 이동시킬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2기 부시 행정부가 ‘현상변경’ 추진으로 동북아 전략의 방향을 바꿈에 따라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높아졌고, 미 국방부는 4성 장군 자리를 한국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3. 한국은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의 전략변화와 맞물려, 9월19일 6자회담 공동성명 채택을 계기로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는 급물살을 타게 될 것이다. 동북아 국제질서 재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현상변경’에 합의했으므로,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의 문제가 남았을 뿐 질서재편 자체는 기정사실이 된 듯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은 과연 무엇을 준비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바람직한 전략구도로서, 앞으로 상당기간 유일 패권국가로 존속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구도의 경우, 냉전시기에 수행했던 긍정적인 역할과는 달리 탈냉전시기에 들어와 일본의 군비증강을 정당화하고 중일 대립구도를 심화하는 부정적 요인도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은 평화체제 구축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한미동맹 +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구도를 기본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틀을 구축한다면 주한미군을 그 틀 안에서 관리할 수 있게 되므로 한국이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릴 위험성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된다.

    특히 향후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서는, 북한의 체제개선을 통해 남북이 통합을 이루는 연착륙 시나리오를 기본으로 하되 예기치 않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 급변사태에 중국이 먼저 개입하려 할 때 과연 한국군이 단독으로 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한미 공동대처방안의 마련은 필수적이다.

    끝으로 새로운 동북아 질서재편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는 것과 관련해 필자는 한미 양국의 국방장관이 만나는 현행 한미연례안보회의(SCM)를 외무장관도 참가하는 ‘2+2 전략회의’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러한 전략대화는 북핵 문제 해결에서 평화체제 구축, 통일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대처방안을 조율하는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동북아전략이 변하고 있다면, 한국은 단순히 그 하위변수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논의를 통해 그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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