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한국군 최초 대(對)테러부대 606부대 秘史

최강 특수부대원에서 권력자의 경호원으로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7-10-09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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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년 특전사 대원 중 무술·사격 특기자 선발
    • 소속은 특전사, 지휘는 청와대 경호실
    • 매일 밤 섬광탄 터뜨리며 항공기 침투 훈련
    • 1979년 12·12 직후 전두환 보안사령관 경호
    • 5공 출범 이후 대통령 경호 임무
    • 문민정부 출범 직후 해체
    한국군 최초 대(對)테러부대 606부대 秘史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 초기 군 일각에서 군사작전 검토설이 흘러나왔다. 한국군 전투부대를 아프간 현지에 투입해 인질을 구출하자는 얘기였다. 육군 특전사와 해병대가 파병 1순위 부대로 꼽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효성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대규모 전투병력을 아프간에 보내려면 관련 장비와 물자 이송, 주둔지 건설 등 파병 준비에만 몇 개월이 걸리는 데다 현지에 가더라도 인질이 억류된 장소가 험준한 산악 지형이라 곧바로 작전에 투입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굳이 전문가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런 종류의 작전엔 소규모의 특수부대가 적격이다. 실제로 7월 말 인질사태 해결을 위해 아프간 특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외신 보도가 나와 피랍자 가족들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720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아프간 미군기지에서 미군 특수부대로부터 인질구출 전문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한국군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성격의 부대는 육군 특전사 소속 707특수임무대대(이하 707특임대)다. 한국군에서 유일한 대(對)테러 전문부대인 707특임대는 88서울올림픽 개최와 관련, ‘국가 대테러활동지침’이 제정된 1982년에 창설됐다. 특전사 예하 여타의 공수부대들과 달리 특전사령관 직속인 이 부대는 1개의 고공지역대와 1개의 해상지역대, 2개의 특공지역대로 구성돼 있다.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사건



    707특임대는 한국군 최초의 대테러부대인 606특공부대를 본떠 만들어졌다. 1978년 창설된 606부대는 청와대 경호실 직속으로 비밀스럽게 운용되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 소리 없이 사라진 비운의 부대다.

    707부대는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이 부대와 관련된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606부대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물론 언론에 소개된 적도 없다. 그 정도로 이 부대의 존재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기자는 아프간 인질 사태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던 8월 중순 우연히 606부대의 실체에 접근하게 됐다. 이 부대 출신 예비역 군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다. 아프간 인질 구출이 절박했던 때라 그런 훈련을 전문적으로 했다는 606부대의 전설 같은 얘기는 자못 관심을 끌었다.

    606부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 그 계기는 1977년 10월에 발생한 독일 민항기 루프트한자 납치 사건이다. 1977년 10월13일 승객 86명을 태운 루프트한자 여객기가 권총과 수류탄을 든 테러범 4명에 의해 공중 납치됐다. 남녀 각 2명씩인 테러범들은 여객기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강제 착륙시키고는 RAF(Red Army Faction·적군파) 재소자 전원 석방을 요구했다.

    관제탑 협상팀과 납치범들 사이에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독일의 대테러 특수부대인 GSG-9 요원들이 비밀리에 기체에 접근했다. 섬광탄을 터뜨리며 기내에 진입한 이들은 5분 만에 납치범들을 제압하고 승객 전원을 구해냈다. 승객 중에는 경상자가 3명 있었을 뿐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반면 범인 4명 중 3명은 사살됐고 1명은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됐다.

    진급 유리하고 청와대와 가까워

    독일 연방경찰 소속인 GSG-9은 1972년 뮌헨올림픽 직후 탄생했다.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 창설 계기였다.

    GSG-9은 모가디슈 사건을 해결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40여 개 국가에서 대테러 특공대를 만들기 위해 GSG-9에 협조를 요청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을 불러 대테러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한국군 최초 대(對)테러부대 606부대 秘史

    606특공부대의 후신이라 할 만한 특전사 707특임대원들이 테러범을 진압하기 위해 건물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레펠 훈련을 하고 있다.

    부대가 들어설 부지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차 실장은 경호실 정보담당관인 김택수 중령에게 이 임무를 맡겼고, 김 중령은 김포공항 주변을 물색한 끝에 공군 부대의 유류저장고가 있는 낮은 구릉지대를 부지로 선정했다. 김포공항에 가까운 지역을 고른 것은 부대의 주임무가 항공기 납치사건 해결인 만큼 공항 주변에 있는 폐(廢)비행기를 훈련대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창설 요원은 전원 특전사 소속. 특전사 예하 각 여단에서 무술 고단자와 사격 특기자를 중심으로 뽑았다. 이들은 공군항공의료원에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고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쳐 606특공부대로 전입했다. 606부대는 편제상 특전사 소속이었지만 청와대 경호실에 예속돼 경호실장의 지휘를 받았다. 초대 부대장은 김택수 중령이 맡았다.

    창설 당시엔 1개 특공대만 있었으나 1년쯤 후 1개 더 늘어 모두 2개 특공대로 구성됐다. 각 특공대는 장교 4명과 부사관 44명으로 구성됐다. 장교는 특공대장인 소령과 위관장교 3명으로 구성됐고, 부사관 중에는 중사가 가장 많았다.

    그밖에 지원부서 병력이 20여 명 됐다. 지원부서는 인사, 작전, 정보, 군수팀과 수송부로 구성됐다. 지원부서엔 병이 많았는데, 특히 정보팀엔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이 배치됐다. 당시 606부대에 배속된 프랑스어 특기병은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의 아들이었다.

    606부대 창설 요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특전사 대원이 모였기 때문이다. 특히 장교들의 경우 경쟁이 치열했다. 진급에 유리한 데다 청와대와 가깝다는 점 때문이었다.

    대우도 좋았다. 특공부대원 전원에게 급여 외에 경호수당으로 매월 10만원이 지급됐다. 부사관에게는 큰돈이었다. 식사도 잘 나왔고 피복 지급 상태도 좋았다. 오늘날 경찰특공대(SWAT)가 입는 까만 전투복과 까만 베레모의 기원이 바로 606부대원의 복장이다.

    매일같이 헬기에서 뛰어내려

    부대 막사는 현대건설이 지었다. 비행기 모양의 2층 건물이었다. 장교와 부사관은 영외거주자로 출퇴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606부대원들은 대부분 부대에서 기숙했다. 야간훈련이 많았기 때문이다. 야간훈련이 많다 보니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또 훈련 양이 많은 까닭에 식사를 제때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606부대원들은 기존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보다 훨씬 센 훈련을 받았다. 무술훈련, 사격훈련, 낙하훈련, 항공기 침투 훈련이 대종을 이뤘는데, 골절환자가 속출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606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무술 유단자였다. 그럼에도 매일 몇 시간씩 무술훈련을 받았다. 그들이 새로 익힌 무술은 이른바 실전무술, 혹은 살상무술로 불리는 특공무술. 현재 군내에 널리 보급돼 있는 특공무술의 본산지가 606부대인 셈이다.

    특공무술은 태권도의 발차기, 유도의 낙법, 합기도의 꺾기, 호신술 등이 결합된 것으로 606부대 훈련과정에서 새로운 종합무술로 탄생했다. 실제 상황에 대비한 무술훈련이다 보니 몽둥이에 맞는 등 다치는 사고도 종종 일어났다.

    합기도 고수로 ‘족기(足技)의 달인’이라는 평을 듣던 장수옥씨가 초빙돼 사범을 맡았다. 606부대의 요청을 받을 당시 장씨는 홍콩 영화사로부터 무술 영화 촬영 제의를 받고 출국을 앞둔 상태였다.

    검은 베레모를 쓴 군인들이 몰고 온 지프를 타고 606부대에 도착한 장씨는 가장 무술실력이 뛰어나다는 부대원과의 시범 대련을 통해 실력을 인정 받았다. 현재 대한특공무술협회 총재인 장씨는 606부대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5공 초 청와대에 들어가 25년간 경호실 무술사범을 지냈다.

    사격훈련의 경우 장거리 소총 사격과 권총 속사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직경 20m의 콘크리트 원통형인 공군부대의 유류저장고 자리를 속사 훈련장소로 활용했다.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이 훈련하는 경기도 송추의 자동화 사격장도 이용했다. 부대원들에게는 저격용 소총 등 최신형 총기가 지급됐다. 더러 사고가 났는데, 대표적인 게 특전사 축구선수 출신인 김모 대위가 속사훈련 중 총을 급하게 뽑다 자신의 허벅지를 쏜 사건이다.

    606부대 출신 이봉상 예비역 소령의 국가유공자 신청

    “신체 이상 있었다면 606부대원 발탁 불가능”


    육사 29기인 이봉상 예비역 소령은 1978년 2월 606부대에 부임해 초대 1특공대장을 맡았다. 현재 육군 1, 3군사령관인 김태영 대장과 백군기 대장이 그의 동기생이다. 그는 606부대 창설 당시 동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발탁됐다.

    3년여 동안 606부대에서 힘든 생활을 한 이 소령은 1981년 6월경 육군대학에 합격한 데 이어 프랑스 참모대학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는 육사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부터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의 무관을 꿈꿔왔다.

    그해 8월부터 한국외국어대에서 프랑스어 위탁교육을 받았다. 고생길이 끝나고 희망의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한 달 뒤 이 소령은 수업시간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강남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받다가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국군통합병원 군의관은 위궤양으로 진단해 위 수술을 시도했다. 하지만 수술과정에서 식도정맥류파열이 발견되자 간 부위의 병이라고 추측하고는 급히 봉합했다. 이에 이 소령은 서울대병원을 찾아가 재수술을 받았다. 간경변증이었다. 수술 후 다시 통합병원으로 후송돼 1982년 2월까지 병상에 누워 지냈다.

    퇴원 후 이 소령의 보직은 한양대 학군단 교관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무관의 꿈은 아득히 멀어졌다. 교관 재직 중에도 서울대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았으나 한번 나빠진 간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될 기미마저 보였다. 결국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1983년 10월 전역했다.

    지난해 7월 이씨는 우연히 606부대 부사관 출신인 김모씨를 만나 국가유공자 제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김씨는 606부대 훈련 도중 허리를 다쳤는데 국가보훈처에 관련 기록을 제출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됐다며 그에게도 신청을 권유했다.

    지난해 10월 국가보훈처는 이씨가 제출한 통합병원 병상 치료 기록은 인정하면서도 공무 관련 질환으로 인정하기 곤란하다면서 국가유공자 비해당 처분을 내렸다. 이에 그는 지난 5월 서울행정법원에 보훈처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소송대리인 서영득 변호사는 “이씨의 간경변이 공무상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인정하느냐가 쟁점인데, 외국에선 이런 경우 인정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씨가 606부대원으로 발탁될 때 정밀 신체검사를 통과했던 점과 통합병원에서 퇴원할 때 공상심의위원회로부터 공상 처분을 받았던 점도 고려 요소다.

    공군 법무감 출신인 서 변호사에 따르면 606부대원으로 발탁된 군인들이 신체검사를 받은 공군 항공의료원은 당시 군 병원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의료기관이었다고 한다. 신체검사에서 탈락해 606부대에 전입하지 못한 장교와 부사관도 적지 않았다는 것. 이씨에게 국가유공자 신청을 권유한 김모씨도 “당시 신체에 조그마한 이상이라도 있으면 606부대원으로 발탁될 수 없었다”며 보훈처가 이씨의 신청을 기각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공수훈련도 특전사 부대원보다 훨씬 강도 높게 받았다. 공수부대에서는 한 달에 몇 차례 하던 훈련을 606부대에서는 매일같이 했다. 헬기에서 뛰어내리거나 줄을 타고 내려오는 훈련(레펠)이었다. 낙하 고도는 400m. 행주대교 주변에 있는 공터와 개화산이 강하 훈련장이었다. 종종 야간에 비행기에서 낙하해 기습 침투하는 훈련도 실시했다.

    항공기 침투 훈련은 606부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훈련이었다. 부대의 주된 임무가 항공기 납치범을 제압해 인질을 구출하는 것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훈련이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제공한 낡은 비행기가 훈련 대상이자 훈련 장소였다.

    부대원들은 매일 밤 이 비행기를 납치된 비행기라고 가정하고 침투하는 훈련을 되풀이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섬광수류탄을 터뜨리면서 기내에 침투해 마네킹으로 만들어놓은 납치범을 제압하고 인질을 구출하는 훈련이었다.

    청와대에서 특공무술 시범

    실제로 섬광수류탄이나 폭음탄을 터뜨렸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눈이 마비되고 귀가 멍멍해지는 등 신체적 압박감이 심했다.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현장에서 훈련 내용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브리핑 시간이 이어졌다.

    특수부대인 만큼 구보 등 체력 강화 훈련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틀에 한 번씩 총기를 지니고 배낭에 30㎏의 모래주머니를 넣은 채 10㎞를 달렸다. 무장구보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모래주머니의 무게를 다시 재는 혹독한 훈련이었다.

    그밖에 김포공항측의 협조를 받아 각국의 기종을 식별하고 탑승객을 안전하게 이끄는 훈련을 실시하고 출입국 절차도 익혔다. 또한 해군 UDU(수중폭파팀) 부대로 가서 수영훈련도 받았다.

    한국군 최초 대(對)테러부대 606부대 秘史

    606부대는 현재 군에 널리 보급돼 있는 특공무술의 본산지다. 육군 특전사 대원들의 특공무술 시범.

    이처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를 꿈꾸던 606부대원들에게 박 대통령의 죽음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 부대의 운명이 그토록 소용돌이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10·26이 일어나던 해 606부대원들은 민방위훈련 시간에 광화문 앞에서 헬기 레펠 시범을 보였고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 앞에서 특공무술도 선보였다.

    청와대 경호실은 606부대에 대해 외국 특수부대를 견학하고 각국의 주요 공항을 답사하는 교육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비명에 간 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돼버렸다.

    12·12로 집권한 신군부는 606부대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부대원 전원이 서울 서빙고동에 있던 국군보안사령부에 포진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경호를 맡았다. 부대장은 전 사령관의 측근인 오형근 중령으로 바뀌었다.

    5공 출범 후 606부대는 대통령 경호와 대테러 두 가지 임무를 병행했다. 부대 이름도 27부대로 바뀌었다. 대테러 훈련보다는 경호 업무 비중이 높았다. 사복을 입고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과 함께 대통령에 대한 복식 경호를 했다. 대통령의 지방 행차에도 따라다녔다. 이처럼 본연의 임무가 아닌 경호에 동원되다 보니 부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707부대로는 안 된다”

    1982년 특전사령부에 대테러 임무를 목적으로 한 707부대가 생겨났다. 특전사령관 직속인 이 부대의 창설 주역은 606부대의 부(副)부대장 출신 장교였다. 이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대비해 경찰특공대가 만들어지면서 606부대는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끝내는 문민정부 출범 직후 부대가 해체됐다. 부대원들은 대부분 ‘고향’인 특전사로 돌아갔다.

    606부대 출신들은 부대 해체 이후 모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모임 이름은 ‘27전우회’. 5공 출범 후 바뀐 부대명인 27부대에서 따온 것이다. 회원이 수백명에 이르는데, 1년에 한두 번씩 정례모임을 갖는다.

    ‘27전우회’는 공식적으로는 취재를 거부했다.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모임을 이끄는 한 예비역 부사관은 “대테러에서 경호로 임무가 바뀌었기 때문에 특별히 자랑할 만하거나 내세울 만한 내용이 없다”고 말을 아꼈다.

    606부대 출신 이봉상 예비역 소령은 아프간 피랍사태와 관련해 “606부대 같은 대테러 전문부대가 해체된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707부대도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606부대만큼 인질 구출을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를테면 606부대원들은 극약 사용법과 특수무기 사용법, 요인 암살 훈련까지 받았지만, 707부대엔 이런 훈련 내용이 없다는 것.

    “좋은 뜻으로 만들어졌는데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 채 해체됐다. 정치적 혼란기, 과도기에 부대의 존재가치가 상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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