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교황 참회의 이론적 배경이 된 국제신학위원회 보고서

가톨릭 2000년 史 초유의 大사건 교황의 참회

  • 입력2006-11-21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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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관 ]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해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인 라칭거 추기경은 동 위원회에 ‘교회와 과거의 과오’에 대한 주제를 연구할 것을 제안했다. 동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베그 신부, 브루노 포르테 대주교(소위원장), 세바스찬 카로템프렐 신부, 롤랜드 미네라스 추기경, 토마스 노리스 신부, 라파엘 살라바 카데나스 신부, 앤튼 스트러켈 추기경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설립됐다. 본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수 차례에 걸친 소위원회 회의와 1998∼99년 로마에서 개최된 국제신학위원회 회기 중에 이뤄졌다. 이 보고서는 국제신학위원회의 기명투표에 의해 승인됐으며, 라칭거 추기경에게 제출돼 출판을 승인받았다.

    [ 서론 ]

    교황청의 2000년 대희년 선포칙서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1998.11.29)는 신도들이 더 큰 은총 속에 살아가도록 죄의 기억을 정화할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정화의 목표는 잘못된 유산인 모든 원한과 폭력을 역사적 신학적으로 새롭게 평가해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방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올바르게 진행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죄를 인식할 것이고, 또한 화해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로 죄지은 자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현재도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정화의 과정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정화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행한 잘못된 일들을 인식하기 위한 용기있고 겸손한 행동”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다거나 전지하신 하느님의 판단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신비체로 합일케 하는 끈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의 잘못과 과실의 짐을 지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교황 바오로 2세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나는 용서의 해를 맞아 교회에 요청하노니 주님께 부여받은 강고한 신성함으로 신 앞에 무릎 꿇고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한다”고 했다. 또한 교황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행동에 침해받은 자 앞에서, 그들이 행한 잘못을 시인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행함을 어떤 대가도 없이 할 것이며, 오로지 ‘우리들 가슴 속에 솟아오르는 주님의 사랑’으로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용서에의 요청은 성심과 은혜의 정신으로 로마 주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반향을 불렀다. 교황이 보여준 진리의 힘으로 나타난 무조건적인 믿음은 교회 안팎에서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행동으로 교회 칙령은 더욱 신뢰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판단을 유보했는데, 이들이 거북하게 생각했던 점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교회의 자녀들이 행한 잘못을 단순히 인정하기만 하는 것은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잘못을 행했을 때 이를 묵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의와 반대 속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의 요청’에 대한 이유, 조건, 적합한 형태를 명확하게 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국제신학위원회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기억의 정화’를 행하기 위한 신학적 조건들을 본문에 제시한다. 위원회가 답변하게 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기억의 정화가 필요한가? 누가 해야 하는가? 목표는 무엇이며 역사적 신학적 판단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려면 목표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제기될 것인가? 도덕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 끼칠 영향은 무엇인가?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특정한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참회를 정초할 전제조건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중략)

    서문의 결론을 대신하여, ‘기억의 정화’ 행위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위원회의 활동을 고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찬미다. 신성한 진리(Divine Truth) 앞에 복종하며 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요구사항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과 더불어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정의를 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진리에 대한 신앙에 의해 지탱되고 조망되는 ‘죄의 고백’(신앙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찬미고백’이 되었으며, 하느님 앞에서만 과거와 현재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우리는 유일한 세상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는 것과 우리를 침탈한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용서의 제안은 우리가 역사의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행해온 수많은 박해를 고려할 때 특히 의미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황이 취한 행동과, 과거의 잘못과 관련하여 그 분이 요청한 것들은 교훈적이고 예언적인 가치를 지니며, 이는 정부와 국가는 물론이고 각 종교에도 해당되는 것이며, 가톨릭 교회의 존재 가치를 넘어서는 것이며, 결국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은총과 화해의 행사로서 강생의 대희년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길이다.

    [ 제1장 문제: 어제와 오늘 ]

    1.1 제2 바티칸공의회 이전

    희년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기쁨의 시간으로서, 하느님 백성의 삶에 현재하는 죄에 대한 참회와 화해를 위한 특별한 제전으로, 교회와 항상 함께 해왔다. 1300년 보니파시우스 8세 시기에 처음 기념한 이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을 향한 대사순례는 예외적인 대사를 허가하는 것과 관련됐으며, 죄에 따르는 잠벌(일시적인 벌)을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면죄해주는 성례 면죄와 관련이 있다. 성례의 용서와 일시적 벌을 면제하는 것은 모두 개인적인 성격을 지닌다. ‘용서와 은총의 해’에 교회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교회에 내려준 은총의 사면을 제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념된 어떤 희년에서도 교회의 과거 잘못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도, 최근 또는 오래된 과거에 행했던 일에 대해 신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되지 않았다.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 과거 잘못에 대해 교학권(Magisterium)이 용서를 요청한 전례는 없다. 물론 공의회와 교황 칙령은 성직자와 평신도에게 죄를 남용하지 않으려 했고, 많은 사제들이 진실로 그들을 교정하려 애썼다. 그러나 교회 권력(교황, 주교, 또는 공의회)이 스스로 잘못이나 남용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던 적은 매우 드물다.

    한 가지 유명한 예외적인 사례가 개혁적인 교황 아드리안 4세로, 그는 1522년 11월25일 뉴렘버그 회의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공개적으로 당대 ‘로마궁정’의 ‘혐오, 남용, 거짓’은 죄이며, 그것은 ‘구성원 최상층부’에서부터 퍼져나온 ‘뿌리깊고 널리 퍼진 질병’이라고 했다. 아드리안 4세는 당대의 잘못에 대해 개탄했으며, 다음 계승자인 레오10세 역시 그러했으나 두 교황 모두 사면을 위한 요청은 하지 않았다.

    교황이 사면의 요청을 동시대인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표명하게 된 것은 바오로 4세에 와서였다. 제2 바티칸공의회 제2차 회기의 개막연설에서 교황 바오로 4세는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며 … 또한 우리(가톨릭 교회)로 인해 침탈되었다고 느낄 동방교회의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간청하면서 그 자신이 당한 침탈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바오로 4세의 제안에 따라 양측은 ‘기독교인의 분리’라는 죄에 대해 용서를 주고 받았다.

    1.2 공의회의 교훈

    제2 바티칸공의회는 바오로 4세와 같은 접근방법을 채택했다. 통합을 방해했던 죄에 대해 공의회 신부들은 “우리가 우리를 침탈한 이들을 용서함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용서와 분리된 형제들로부터의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또한 공의회는 통합에 대한 잘못에 덧붙여 과거 기독교인들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부정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즉, “때때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발견되는 특정한 태도를 개탄”하면서 이러한 태도로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이 상호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인식했다.

    또한 공의회는 ‘무신론의 발생’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과 종교의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감추려 하고 태만했기 때문이다. 또한 공의회는 시기와 국가를 막론하고 반유대주의를 표명한 것과 교회가 행한 박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언급한 사실에 대한 용서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제2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결점없는 충실성과 과거와 현재의 교회 구성원들(성직자와 평신도)의 유약함을 구분했다. 즉, “티나 주름없이 거룩하고 흠없는”(에페소 5:27) 그리스도의 신부(the Bride of Christ)와, 면죄된 죄인으로 영속적인 회개(metanoia)를 요청받으며 성령 속에서 다시 태어날 그 자녀들을 구별한 것이다. “교회는 죄인을 그 가슴 속에 포용함과 동시에 성스러우며 언제나 정화될 필요가 있고 끊임없이 고해와 부활의 길을 추구한다.”

    공의회는 과거 잘못에 대한 현시대 사람들의 죄와 책임과 관련하여 이를 식별할 기준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공의회는 두 가지 상이한 맥락에서 과거 종교공동체의 구성원이 저질렀던 잘못은 전가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의 수난기에 행해졌던 일들을 당대와 현대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전가할 수는 없다.”

    ·”전체 친교에서 가톨릭 교회와 대형 공동체의 분리는 양측 구성원 모두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분리의 죄를 이제 양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부과할 수 없으며, 가톨릭교회는 그들을 우애적인 존경과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

    공의회가 끝난 뒤 1975년 성스러운 해(the Holy Year)를 맞아 바오로 4세는 사도훈령 ‘아버지의 자비(Paterna cum benevolentia)’에서 ‘부활과 화해’라는 주제를 제시하면서 모든 충정스런 가톨릭 교회가 먼저 화해를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성스러운 해는 교회 성례의 검약의 수단으로 신에 대해 죄인들이 개심하고 화해하는 행사의 시초가 된다.

    1.3 바오로 2세의 용서를 위한 요청

    요한 바오로 2세는 바오로 4세와 제2 바티칸공의회가 그러했듯 기독교 분열의 역사가 있게 한 ‘애석한 기억’에 대해 유감을 다시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나 기독교도들의 개별집단이 연루된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용서를 위한 요청을 확장했다. 교황은 사도의 서한 ‘3천년기의 강림(Tertio millennio adveniente)’에서 2000년 대희년은 교회가 지난 밀레니엄에 발생한 모든 형태의 ‘반증과 추문’으로부터 기억의 정화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교회 자녀들의 죄에 대해 더욱 자각”하도록 권고했다. 교회는 “교회와 교회의 죄많은 자녀들을 인식”하고 그들이 과거의 과실과 불신, 모순, 지체된 행동에 대한 회개를 통해 스스로 정화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과거의 잘못과 함께 오늘날 교회의 결속이 특별히 강조됐으며, 우리 시대의 악마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도 언급됐다. 서한에는 기독교도의 분리나 과거 선교시 사용됐던 ‘폭력과 편협적인 방법’과 같은 명시적인 언급도 있었다.

    바오로 2세는 훈령 ‘화해와 회개(Reconciliato et paenitentia)’에서 과거의 잘못에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대인들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것에 대해 심층적인 신학적 탐구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고해성사에서 “죄지은 자는 죄와 회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홀로 선다. 어느 누구도 그의 이름으로 대신 회개하거나 용서를 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죄는 그로 인해 전체 교회가 손상된다 하더라도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며, 하느님과 합일되는 은총의 성례적 중개자인 고해 신부에 의해 중개된다.

    ‘사회적 죄’(인간공동체에서 정의, 자유, 평화가 손상되는 경우)가 벌어지는 상황은 언제나 수많은 개인적 죄의 집적과 집중의 결과다. 도덕적 책임은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희석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죄는 유추 방식으로 언급해야 한다. 즉 과오를 떠넘길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과 태만의 방법 또는 과실을 통해 자발적으로 동의한 개인들의 집단을 넘어서 확장되어서는 안된다.

    1.4 문제의 제기

    교회는 수세기 동안 지속된 살아 있는 사회다. 교회의 기억은 전통과 교회의 신앙과 생명에 대한 규범적인 것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영위해온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역사적 경험의 풍성함 속에서 존재한다. 많은 부분 교회의 과거는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 교리, 예배의식, 교회법, 수도전통은 믿음의 공동체에 자양분을 주고 그를 모방하기 위한 비길데 없는 전례이다. 그러나 전체 순례여행을 돌이켜보면, 우량한 곡식은 어쩔 수 없이 왕겨와 섞이기도 했다. 신성함은 불신이나 죄와 나란히 존재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과거의 잘못을 정의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역사적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건을 다루려면, ‘기독교’ 시대의 사회상을 참조하거나 일시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밀접하게 뒤얽힌 권력구조를 제시하는 속에서 교회 구성원에게 귀속될 수 있는 책임과 잘못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서로 삼투성을 지닌 신앙공동체 교회가 한 행동과 당대 사회의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역사적 해석이 필요하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과거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취한 단계는 교회의 신뢰성을 강화시키는 등 교회의 생명력과 성실성을 표상하는 징표로 이해된다. 더욱이 교회가 그 스스로 잘못된 모습으로 변모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특히 교회를 몽매주의나 옹졸함으로 정의한 일부 의견의 경우 그것이 무지의 소산이든 잘못된 신앙이든간에 더욱 그러하다.

    교황에 의해 공식화된 ‘용서의 요청’은 교회의 안팎에서 긍정적인 경쟁을 자극했다. 이제 국가나 정부의 수장들, 사적 공적 결사체들, 종교 공동체들은 부정으로 얼룩진 사건이나 역사적 시기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은 단순한 수사법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일부에서는 꺼려 하는 가운데 과거 잘못을 시인하는 것(그 중에는 법적인 측면도 포함된다)에 대한 참여비용을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엄격한 식별력이 필요하다.

    아직도 충실한 신도들 중 일부는 혼란에 빠지고 교회에 대한 충정이 흔들리고 있다. 일부는 범죄와 잘못이 교회의 탓으로 돌려질 경우 어떻게 교회에 대한 사랑을 젊은 세대로 넘겨줄 수 있는가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또 일부는 잘못 시인이 상당 부분 한 쪽으로 편협해질 것을 우려하면서 교회를 험담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일부 신도들은 앞선 시대를 부정한 결과가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다른 이들은 현 신도 세대가 동의하지 않은 일로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은 교회가 과거 개입했던 모호한 행동과 관련하여, 단순히 우리 사회가 발전시킨 가치관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기억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따르면, 교회는 우리 시대의 도덕적 양심에 따른 비난을 거부하고 과거 동시대의 그것으로 판단해야 하며, 과거 사악한 행동에 교회만이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과거의 행동이 오늘날 교회의 자녀들에게 전가되어 상처받았다고 느낄 사람들과 상호이해 속에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국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과의 유추를 통해서이건 아니면 그들이 잘못된 것으로 고통받았다고 믿기 때문이건, 자신의 관점에서 용서를 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어떤 경우에도 기억의 정화는 교회가 신앙과 도덕의 영역에서, 진실과 교회에 위탁된 것에 대한 선포를 중단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다. 오늘날의 양심은 십자군이나 종교재판과 같이 고립된 역사적 현상을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양심으로 과거의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신의 진리와 그 도덕적 요구사항이 언제나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로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어떤 태도를 받아들이든 이들 문제와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은 계시와 교회의 신앙 속에 있는 생동하는 전파에 기초한다. 따라서 가정 먼저 제기될 문제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할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며, 특히 현대인에게 해당되는 것은 신과 이웃과 화해하는 성서적 신학적 지평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2.1 구약성서

    죄 를 고백하고 그 죄를 사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은 성서 전반에 걸쳐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많고 많은 고백의 더미들 속에서 어떻게 중요한 성구들을 추려내고 분류하는 가이다.(중략)

    우리들은 이렇게 모아진 증거들로부터 ‘조상의 죄’가 언급되는 모든 경우에도 고백은 오직 하느님에 대해서만 할 수 있고,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고백하는 죄들이 다른 인간들에게가 아니라 하느님에게 직접 밝히는 것임을 결론지을 수 있다(민수기 21장 7절에서 유일하게 백성들이 원망했던 모세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성서를 쓴 사람들이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선과 악에 있어서 강력한 일치가 있었음에도 왜 그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들에 대해 현재의 대화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는가에 관해 의문이 제기된다.

    이 문제의 답변에 있어서 우리는 다양한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성서에는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하느님에 대해 저지르는 죄를 우선시하는 신중심주의가 널리 퍼져 있다. 창세기 2∼11장과 신명기 7장 2절, 그리고 사무엘서 15장과 신명기 25장 19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에게 저지른, 이들 민족들나 후손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폭력행위가, 오히려 신의 명령을 따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의 명령은 어떠한 식으로도 용서를 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민족으로부터 받은 학대의 경험과 그로 인한 원한 역시 그들에게 행해진 악에 대해 용서를 청하겠다는 생각을 가로막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죄(와 은총)에 있어서 세대간 연대감은 성경에 남아 있으며,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했듯이 ‘조상들의 죄’를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여, 우리 조상의 하느님. 당신을 저버린 죄를 범하고 모든 악을 행하였나니 당신의 명에 주의하고 복종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유대인들이 유배 후 그들의 조상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한 기도이다. 교회는 그 예를 모방하여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역사적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2.2 신약성서

    죄의 사상과 관련된 기본 주제이자 신약성서에 널리 나타나 있는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 신성함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며, ‘거룩한 아버지’로 떠오르며 ‘거룩한 신’으로 불린다.(중략)

    예수의 가르침에서 절대적 중심을 차지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요한복음에서 ‘새로운 계명’이 되었다. 즉, 사도들은 예수가 ‘마지막까지’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도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상호관계를 반영하듯이 인간 사이에도 상호관계를 부여하는 사랑과 용서를 행하도록 소명받았다.

    이런 시각에서 화해와 죄의 용서가 강조된다. 예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자를 사하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며 항상 용서하는 것처럼, 그의 사도들에게 과오를 범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도록 항상 준비하라고 요구한다. 이웃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사도는 비록 용서를 빌지 않더라도 그에게 죄를 범한 사람을 ‘일흔입곱번’ 용서할 자세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해서도 예수는 상처받은 사람이 그 자신도 진정으로 간청한다면 절대 용서를 거부하지 않는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로써 죄를 지워버리는 행동을 먼저 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서 예수는 죄인에게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원망 들을 만한 일을 한 형제에게 가서 화해”하도록 요구한다. 이웃에게 준 상처를 치료할 의지가 없는 사람이 하는 예배 행위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바꾸고 적절한 방법으로 진정 화해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항상 자비롭고 우리의 죄를 사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죄가 하느님과 그리고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죄를 순화시켜 준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다. 따라서 죄를 범한 사람이나 그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은 자비로서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하느님에 의해 화해를 하게 된다. (중략)

    2.3. 희년

    화해와 과거 극복을 위한 중요한 성서적 관례는 희년식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레위기에서 규정되었다. 종족, 씨족, 가족들로 이루어진 사회구조에서 개인이나 가족이 그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땅, 집, 하인, 또는 자식을 양도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하면 그로부터 벗어나려기 위해 다투고 불가피하게 무질서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영토나 씨족이 소수의 부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나머지 씨족들은 빚을 지고 노예상태에서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 의존하여 살아가도록 강요당하게 된다.

    레위기 25장의 규정은 이를 타개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다. 여기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사회적 구성을 보존하고 소수의 가족일지라도 자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매 50년마다 희년식을 거행하였다.

    레위기 25장에서 결정적인 것은 출애굽으로 그의 백성들을 해방한 신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고백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느님 여호와이니라.” 희년식은 묵시적으로 죄를 용인하는 것이자 올바른 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시도였다.

    희생과 고통속에서 자유를 얻는 것은 예언서의 내용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이사야는 이러한 암시들을 속죄와 자유, 귀향과 구원이라는 주제로 희년 예배식 속에 전개시켜 나간다. 이사야 58장은 사회 정의와 관련이 없는 의식에 대한 공격이며, 특히 혈족의 의무에 중심을 둔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에 대한 부름이다. 좀 더 분명하게, 이사야 61장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주님의 영광의 해를 알리기 위해 보내진 하느님의 사자로서 신권왕을 묘사하기 위해 희년의 형태를 이용한다. 예수가 일생의 과업과 사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문구는 이사야 58장 6절에서의 암시와 더불어 누가복음 4장 17∼21절에 나타나 있다.

    2.4. 결론

    이상에서 보아, 요한 바오로 2세가 희년을 맞이하여 과거 그리스도의 자손들에 의해 저질러진 죄를 인정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호소가 성서와 정확히 괘를 같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 백성의 세대를 초월하는 결속, 그리고 백성들의 죄 많음에 관해 말하고 있는 성서에 기초한다. 교황의 호소는 하느님이 창조물에 대해 애초에 계획했던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성스러운 희년의 정신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애초에 예수가 시작했던 ‘오늘’의 희년 선언이 그의 교회의 희년 의식 속에서 계속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또한 이러한 특이한 은총을 경험함으로써 하느님 백성들은 모두 주님으로부터의 위임을 더 크게 인식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한 죄를 용서할 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자극받는다.

    “기독교 신앙이 두번째 천년에 가까워짐에 따라 교회도 그리스도 정신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멀어졌던 때, 그리고 신앙의 참뜻으로 고취된 삶을 세상에 증언하는 대신 반대 증언과 추문에 빠졌던 역사상의 모든 시간들을 돌이키면서 교회의 자녀들이 지은 죄를 보다 완전하게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교회는 항상 교회의 아들 딸들이 지은 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중략)

    3.1 교회의 신비

    ”교 회는 역사 속에 있지만 동시에 교회는 역사를 초월한다. 사람들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서만 교회를 가시적인 실체 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성스러운 삶을 운반하는 정신적 실체로서 볼 수 있다.”

    교회의 두 가지 차원은 역사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지만 삼위일체적 삶에 참여하고 세례받은 자들의 일체감을 유발하는 영적 교섭 속에서 “인간적인 요소와 성스러운 요소로부터 기인하는 하나의 복잡한 실체”를 만들어낸다. 영적 교섭의 힘으로 교회는 자녀들의 행한 은혜, 공훈, 과실을 떠맡을 수 있는 인간사에서 절대적으로 유일한 주체로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런데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 말씀의 신비를 유추하는 데서도 기본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신성, 순결, 순수한 그리스도는 죄를 몰랐으나, 오직 세상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왔다. 그러나 그의 품에 죄인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신성함과 동시에 항상 정화할 필요가 있으며 끊임없이 참회와 일신의 길을 추구한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죄가 없다는 것을 교회의 탓으로 귀결시킬 수는 없다. 반대로 각자는 그 안에서 방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화해야 한다. “성직자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죄라는 잡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밀알과 함께 섞여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구제를 받은 죄인들을 거둬들일 뿐 아니라 여전히 신성함의 과정에 있다.”

    바오로 6세는 이미 교회는 “품 속에 죄인을 안고 있지만 은총이라는 삶 이외에는 다른 삶이 없기 때문에 신성하다. … 이것이 교회가 고통받고 죄를 속죄하는 이유이며, 이로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선물을 통해 교회의 자녀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신비 속에서 거룩함과 나약함에 부닥치며, 끊임없이 구제받고, 아직도 항상 구원의 힘을 필요로 한다.

    3.2 교회의 신성

    교회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스스로 버린 그리스도에 의해 죄를 씻었고, 끊임없이 충만한 성령에 의해 신성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신성하다. “우리는 교회가 무결하게 신성하다고 믿는다.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교회를 그의 신부로 사랑하였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교회는 신성하게 되었으며, 성령의 선물로 채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에서는 모두가 신성하다.”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신도들은 ‘성자’로 불린다.

    그런데 ‘교회의 신성함과 교회에서의 신성함’은 구분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에서 찾아지는 교회의 신성함은 생이 끝날 때까지 하느님 백성의 사명을 지속하는 것을 보장하며, 개인적인 신성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신도들을 돕는다. 신성함이 취하는 유형은 각자가 받는 사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사명과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주어지며 요구되는 것이다. 개인적 신성함은 항상 하느님과 다른 것들에게로 돌려지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모두의 선을 지향하는 ‘교회에서의’ 신성함이다.(중략)

    3.3 계속적인 부활의 필요성

    우리는 죄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 속에서 계속적인 부활과 지속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지구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진정 신성함’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전체적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기 때문에 흠이 나고 구겨져 있다. 그러나 고백을 통해 주름이 펴지고 흠이 깨끗이 사라진다. 교회는 고백으로 정화되기 위해 기도자 앞에 서 있으며,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 있는 한 그럴 것이다”고 말하였다.(중략)

    완전한 교회는 신자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신 앞에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덕과 용서하는 포용력을 찬양한다.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유대 덕분에 시간과 공간을 떠나 세례받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교섭으로 각자는 그 자신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영적인 것을 활발하게 주고받는 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식으로 각자의 신성함이 다른 사람들의 덕을 증진시키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죄 역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짐이 되고 저항에 노출되며, 이러한 점에서 교회를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암부로스의 교부들은 “우리의 타락으로 교회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경계하자”고 촉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신성할지라도 … 참회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 교회는 항상 죄많은 아들과 딸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3.4. 교회의 모성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성령의 힘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자녀들의 죄를 책임진다는 신념은 ‘모성(母性)교회’ 사상 속에서 특히 잘 표현되었다. 바티칸 2세는 교회가 “설교와 세례를 통해 교회가 신도들에게 새롭고도 불멸의 삶을 낳게 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머니가 된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통을 반영한 사상을 내세운다. 즉, “이 성스럽고 영광스러운 어머니(교회)는 마리아와 같다. 그녀는 아기를 낳았으며 처녀이다. 그녀에게서 당신이 태어났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낳고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일원이 될 것이다”고 한다. 시프리안은 이를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할 수 없다”고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따르면 교회는 한 신도에서 다른 신도로 지속적으로 성령이 교환되고 전달되는 환경이라 하겠다. 이러한 생동적인 전달 덕분에 세례받은 사람은 각자 동시에 교회의 자식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교회 속에서 신성한 삶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새로운 자식들을 낳는데 협력한 신앙과 사랑에 의해 모성교회가 된다. 그의 신성함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가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모성교회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례받은 사람은 그의 마음 속에서 교회로부터 떨어졌다고 할 때라도 죄로 인하여 교회의 자식임을 떨치지 못한다. 그는 항상 은총의 샘물로 되돌아올 수 있고 그의 죄가 모성교회 공동체 전체에 지우는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 바꾸어 진정한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자녀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상처받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라도 자녀의 죄가 만든 짐을 스스로 책임진다고 할만큼 지속적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중략)

    [ 4.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 ]

    과거의 잘못에 대한 규정은 무엇보다 역사적 판단이 올바르게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기초로 신학적 평가의 토대가 마련된다.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변증론과 역사적으로 공인되지 않은 힐난은 모두 피해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재판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평가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학권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반적 윤리를 수행할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론에 의해 조종되었던 과거의 형식들에 의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흔히 침착하고 객관적인 식별을 방해하는 격렬한 감정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윤리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역사가들에게 먼저 묻는 이유이다. 역사가에게 묻는 것은 그것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지만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사건과 풍습, 당시의 사고방식 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4.1 역사의 해석

    역사적 지식의 관점에서 과거를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이것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석하는 주제와 해석되는 대상 사이에 관계의 복잡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과거의 사건이나 말들은 결국 ‘지나간 것’이다. 그것을 현재의 구조 속으로 완전하게 끌어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실질적인 비중을 가지고 있으며 복잡하다. 따라서 그것들이 현재 우리 시대에 보여준 내용과 도전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사고방식이나 여건, 생활방식 등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역사적 비판적 조사를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둘째, 과거와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끈이나 의사소통이 없는 상태에서 해석자와 해석되는 것 간의 공통성을 인지하여야 한다. 이 의사소통의 끈은 어제든 오늘이든 모든 인류는 복잡한 역사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언어의 중재가 필요하다. 인간은 역사속에 있다. 해석자와 해석되는 대상간 연대의식을 밝히는 것은 과거가 남겨 놓은 여러 가지 형태의 증거를 통해서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연구 동기가 된 문제들과 발견된 대답의 효력,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의 정황,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공동체를 해석하는 것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적에서 해석 과정에서 실질적 효력을 측정하고 적정화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이에 대한 사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끝으로, 알고 평가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해석자와 해석되는 과거의 대상간에 삼투작용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바로 여기서 이해행위가 적절하게 이루어진다. 과거는 노출 잠재성과 현재를 개조하려는 자극 속에서 파악되며, 기억은 새로운 미래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된다. (중략)

    4.2 역사적 조사와 신학적 평가

    만약 이러한 작업들이 모든 해석적 행위 속에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내부에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이 통합되는 해석과정의 일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해석에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구별과 이질성의 요소에 최대한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누군가 과거의 잘못 가능성을 판단하려고 할 때, 역사적 기간이 다르고, 교회가 행동했던 사회 및 문화적 시기가 달랐으며, 한 사회와 한 시대에 적절했던 패러다임과 판단으로 다른 시대를 평가에 한다면 잘못될 수 있고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개인, 기관, 그리고 다른 각각의 권능체들은 생각하는 방식과 조건이 다르다. 따라서 과거의 말과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교회가 용서를 구하는 방법과 수준은 다양할 것이다. 모든 것이 아주 상이한 역사·지리적 배경에서 일어났기에 일반론을 피해야 한다. 어떤 진술을 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맥락에서 적절한 주제여야 한다.

    두번째,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간의 상관관계에서 신앙을 해석하는 데에 과거와 현재간의 연결에는 현재의 이해관계와 공통성만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정신에 의한 통합 행위와 신앙심 많은 자들의 영적 교류 원리에도 기반을 두고 있다. 교회는 모든 시기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어느 면에서 유일한 주체로서 다양한 상태와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에 부합하도록 명받은 초자연적인 모습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하나의 성령 속에서의 영적 교류는 오늘 세례받은 자들이 어제 세례받은 자들과 연결감을 느끼는 힘으로써, 통시적인 측면에서 ‘현자’들은 영적 교류를 확립해 나간다. 그들은 그들의 공적으로 은혜를 입으며 신성하다고 입증됨으로써 보호받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죄의 부담을 질 의무를 느낀다.

    하느님 백성의 영적 교섭의 뛰어난 기반 덕에 신자들은 교회의 과거에 대한 해석을 특별히 중요하게 인식한다. 해석 과정에서 산출된 과거와의 만남은 현재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며, 미리 추정할 수 없을 만큼 ‘수행적’ 효능을 가진다. 물론 해석적 지평과 교회 사이의 강력한 일치성이 신학적 비전을 변명적 혹은 자기옹호적 독본으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 과거의 사건들과 진술을 이해하고 오늘날에 맞게 해석을 바로잡아 평가하려는 해석적 과정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하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중략)

    5.1 윤리적 기준들

    윤리의 수준에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책임에 대한 자백,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이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자백을 전제로 한다. 대개 윤리적 책임이라는 것은 행위와 그 행위를 저지른 자 간의 관계를 말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객관적일 수도 있고 주관적일 수도 있다. 객관적 책임이라는 것은 행위 그 자체의 윤리적 가치-그 행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간에-를 말하며, 따라서 그 행위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적 책임이란 행해진 행위의 선함과 악함에 대해 개인적 양심으로 인식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개인적 책임은 그 행위를 자행한 자의 죽음과 함께 끝나게 된다. 그것은 세대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며, 후손은 선조들의 행위에 대해 주관적 책임을 물려받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에 의해 상처받은 자들과 그 행위를 행한 자들이 한 시대에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역사 속에서 계속될 수 있는 유일한 책임은, 어떤 이가 자유롭게 주관적으로 신봉할 수도 있고 신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객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악한 행위는 행동의 결과를 통해 그것을 행한 이보다 오래 살아남아서 후손들의 양심과 기억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과거와 현재를 호혜성의 관계 속에서 결합시켜주는 연대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상황 속에서 양심에 가해지는 부담은 너무나도 무겁기 때문에 악한 행위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종교적 기억을 구성할 수 있으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공통적인 기억인 것이다.

    이같은 공통의 기억은 과거에 악한 일을 행한 자들과 현재에 살고 있는 그 자손들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연대에 힘있는 고백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어떤 객관적인 공통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책임감의 중압으로부터의 해방은 무엇보다도 과거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간청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으며, 다음으로는 ‘기억의 정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중략)

    5.2 기독교의 분리

    통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삶의 법칙이며, 하느님께서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힘 속에서 세상 끝까지 사랑이시며 이 삶을 자신의 것으로 하셨다. 이 통일은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인간의 삶의 교류하는 원천이며 형식이 되어야만 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같은 상호적 사랑의 법칙 속에서 산다면, “하느님과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 결과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게 될 것”(요한복음 17:21)이며 “모든 이들이 그의 제자들임을 알게 될 것”(요한복음 13:35)이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이와 같지 않았으며, 특히 지난 천년 동안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분할이 나타났다. 이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2 바티칸공의회는 이 사실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한 분할은 그리스도의 뜻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며, 세상에 대한 불명예이고, 성령의 뜻인 복음을 세상 만물에게 전하라는 말씀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천의무봉함에 영향을 끼치는” 지난 천년 동안의 주된 분할들은, 지난 천년이 시작되는 시기에 일어났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할과 그 400년 후 서구에서 발생했던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에 의해 야기된 심각한 분열이다.

    11세기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할은 문화적·역사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교의적 재단은 금세기의 교의적 발전에 힘입어 교회와 로마 교황의 권위를 고려하고 있는 바,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명쾌함에 이르지 못했던 주제였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경우 계시와 교의의 다른 영역들은 논쟁거리였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상호 사랑에 의해 고무된 교의적 발전이었다. 초자연적인 사랑인 아가페의 결핍은 분열된 두 쪽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던 듯이 보인다. 이러한 자비야말로 복음의 최고 명령이라는 점에서, 그것 없이는 모든 휴식이 단지 ‘시끄러운 징소리이거나 뎅그랑거리는 심벌소리’일 뿐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가 하느님의 용서와 ‘바로 우리’에 의해 공격받았다고 느낄지도 모르는 ‘헤어진 형제들’의 용서를 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1965년 제2 바티칸공의회에 의해 형성된 분위기 속에서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는 교황 바오로 6세와의 대화에서 ‘상호적 사랑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였다. 이는 반목과 상호불신, 그리고 적대의 역사를 보낸 후 몹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기억을 통해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과거의 문제였다.

    1965년의 사건(1965년 12월7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1054년의 파문을 파기함으로써 절정에 달한 화해)은 이전의 상호배제의 역사 속에서 잉태됐던 잘못에 대한 고백을 대표하는 것이었으며,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을 정화하고 새로운 기억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억의 근본은 상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으며, 혹은 더 나아가 그러한 삶을 살겠다는 새로운 약속인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기억은 우리를 과거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가톨릭과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과 정교회로 하여금 더욱 더 새로운 계율 안에서 미래의 설계자가 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기억에 대한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의 선언은 이런 의미에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통일이라는 길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적 요인들, 역사적인 조절,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리와 상호 불신을 촉진시키는 편견들 - 비록 그것들이 신앙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할지라도-에 의해 인도되는 유혹이다.

    교회의 아들 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자신들이 통일의 명령에 적극 복종하고 있는지, 그리고 ‘전적으로 주께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만 한다. (중략)

    5.3 진실에 봉사함에 있어서의 강압의 사용

    기독교의 분할에 덧붙여, 선한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 의심스러운 수단들이 사용됐던 지난 천년간의 다양한 사건들도 언급해야 한다. 교회의 아들 딸들이 후회의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또다른 슬픈 장은 진실에 봉사함에 있어 편협함, 심지어는 강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특정한 몇 세기 동안 묵인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수를 교정할 때 사용된 모든 형태의 강압은 물론이요, 밝혀진 진실을 선포함에 있어서 적절치 못한 방법을 사용했거나 혹은 인간의 문화적 가치에 적합한 복음 전교의 통찰력을 사용치 않았거나, 혹은 그 신앙이 제시하는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지 않았던 복음 전교의 형태들을 말한다.

    교회의 아들과 딸들에게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실패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심을 집중해서 매우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부정과 폭력을 고발해야만 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된 상황 속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통찰력을 결핍하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용서를 청하는 대상은 무엇이든 행했어야 할 것들, 혹은 허약함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침묵 속에서 지나친 것들, 망설이면서 혹은 부적절하게 행해지거나 언급된 것들 모두에 적용돼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역사적·비판적 조사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확립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일단 요인들이 분석되고 나면, 그것의 객관적 중요성은 물론 영적·도덕적 가치를 평가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신화적 기억을 피할 수 있게 되고, 신앙의 불빛 속에서 전환과 부흥의 열매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미래를 위한 하나의 교훈이 도출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위원회가 언급한 숭고한 원칙에 온전히 매진하게 한다. 진실이란 그 자신의 진실성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을 강요할 수 없으며, 그에 의해서만 온유함과 강고함을 함께 갖추고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5.4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간의 관계는 양심의 특별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분야 중 하나다.

    “유대민족에 대한 교회의 관계는 교회가 다른 어떠한 종교와 공유하고 있는 관계와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관계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사실상 지난 2000년 동안 이러한 관계는 꽤나 부정적인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대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적의 혹은 꺼려함은 슬픈 역사적 사실이며, 다음의 사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깊은 후회의 원인이었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며, 성모 마리아와 12사도는 유대인이었다. 교회는 이방인들의 야생 올리브 가지에 접목된 선한 올리브 나무의 뿌리로부터 생명을 얻고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친애하는 형제들이며, 진실로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형님들’인 것이다.” (중략)

    5.5 오늘날의 악에 대한 우리의 책임

    “오늘의 세계에는 많은 빛이 존재하고 있지만 또한 적지 않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많은 형태의 하느님을 부인하는 현상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확실한 것은 이와 같은 부인이, 특히 그것의 더욱 이론적인 측면에 있어서 서구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의 영광의 쇠약해짐과 연관하여 사람들은 일련의 부정적 현상과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종교적 무관심, 인간의 생명에 대한 초월적 의식에 대한 광범한 결핍, 세속주의와 윤리적 상대주의의 분위기, 낙태를 허용하는 입법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생명에 대한 권리의 부정, 그리고 인류 전체의 광범한 분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의 절규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편치 않은 질문은 믿는 자들 자신들은 과연 얼마만큼이나 이러한 형태의 무신론에 대하여, 이론적이든 실제적이든, 책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 그들 자신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흔히 약간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왜냐하면 전체로 보았을 때, 무신론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다양한 원인들로부터 뻗어나온 것이다. 그러한 원인들에는 종교적 믿음에 대한 비판적 반응, 그리고 몇몇 지역에서는 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반응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무신론의 발생에 대하여 적지 않은 관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그럼으로써 기독교인들은 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세상 사방으로 나아가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진실을 전파할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바, 또한 삼위일체이시며, 그의 삶은 사랑 속에서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무한한 상호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진실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너희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너희 모두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 것이니라.”

    이런 이유로 흔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수련을 게을리하는 한, 잘못된 교의를 가르치는 한, 종교적·도덕적·사회적 삶에 있어서 불충분한 한 그 정도만큼 진실한 하느님과 종교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이 과거의 이러한 잘못을 언급하는 것이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고백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찬송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강조돼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사실상 죄악의 존재에 대해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죄악에 대한 용서를 믿는다. P> 덧붙여서 이러한 잘못을 회상하는 것은 선함과 악함 모두에 있어서 우리 앞에 진실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과 우리와의 연대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복음에 귀의할 강력한 이유를 제공하며, 상호 화해의 길을 열어주는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데 필요한 준비행위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러한 고찰들에 비추어볼 때,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교회가 그 아들 딸들에 의해 교회의 이름 하에 자행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의 사목적 목표는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잘못을 고치고자 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과 어떤 관련을 갖는가? 그리고 교회의 전교 노력과, 교회가 다양한 문화 및 종교와 갖는 대화와 관련해 야기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6.1 사목적 목표

    다음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 몇 가지 사목적 이유들이다. 먼저 이러한 행위는 기억의 정화를 향하고 있다. 이는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과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목표로 하는 과정이며, 현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죄악들은 빈번히 그 무게가 느껴지고 있으며, 현재도 또한 여전히 유혹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만약 과거의 죄악들에 대한 분노의 원인들이 제거되고, 과거에 행해진 것들로부터 뻗어나온 부정적인 영향들이 대화로 제거될 수 있으며, 병든 자들이 과거의 말과 행위로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자들과 상호이해를 추구한다면, 이는 교회 공동체가 화해와 진실을 지향하며 평화와 신성(神性)을 통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교황께서는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이며,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고, 우리가 오늘의 유혹과 도전들에 맞설 수 있도록 일깨워줄 것이며, 우리가 그것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잘못을 기억할 때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잘못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비록 이러한 잘못들 중 오늘날 빈번히 언급되고 있는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에의 충성과 자비로 이웃을 위한 봉사에 지불한 대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두 번째 사목적 목표는 첫 번째 목표와 밀접히 연관되는 바, 바로 하느님 백성들의 꾸준한 개혁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건과 시간의 영향이 도덕적 행위의 결핍과, 교회 기율의 결핍과, 심지어 교의가 표현되는 방법에서의 결핍을 가져온다면, 이러한 것들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하게 수정돼야 한다.”

    세례받은 모든 이들에겐 “그리스도의 의지에 대한 자신의 충성을 검토해야 하며, 일신(日新)과 개혁의 작업을 애써 행해야 할 것”이 요청된다.

    진정한 개혁과 일신의 기준은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충성이 되어야 하며, 그것은 우리가 현재의 잘못을 다루고 있든 혹은 과거로부터의 유산을 다루고 있든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그 이상의 목표는 교회가 자비로운 하느님께 드리는, 그리고 하느님께서 진실을 자유롭게 구하시는 것을 증거함으로써 보일 수 있다. 교회는 또한 이런 식으로 인류가 현재의 악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봉사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많은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무엇보다도 오늘날 교회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양심을 살펴보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였다. 새로운 천년의 문턱에서 기독교인들은 주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리하고, 그들이 오늘날 우리 세대의 악에 대해 갖고 있는 책임을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는 그들이 진리를 구함에 있어 빛나는 영광에 복종하면서 그러한 악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다.

    6.2 교회의 의미

    용서에 대한 교회의 요청에 대해 교회의 삶이 함축한 것은 무엇인가? 아주 많은 것들이 언급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참회라는 행위를 받아들이는 상이한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맥락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맥락화된 역사와 연관된 사건, 혹은 언명들이 반드시 보편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아니며, 결정된 신학적 사목적 시각에 의해 조건지어진 행위들이 복음의 전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쳐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영적인 이득과 그러한 행위가 치러야 할 가능한 대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며, 또한 매체가 교회의 성명 중 특정 부분들에 대해 할애하는 부당한 강조에 대해서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항상 사도 바울의 훈계를 기억해야 하며, 신중함과 사랑으로 ‘신앙의 나약함’을 고려하고 그것을 지원해야 한다. 특히, 역사, 동일성, 그리고 동방교회 및 기독교의 존재가 소수에 불과한 대륙과 국가들에 존재하고 있는, 그런 현재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떠한 용서를 위해서도 불리워지는 이름은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그로 인해 용서받는 그 어떤 사람도 적절한 역사적 신학적 통찰력과 동일시되어야 하는 바, 이는 진실로 적합한 배상을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교회의 아들 딸들이 지닌 진실에 대한 사랑과 선의를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잘못과, 그에 대한 후회와 연관된 화해를 지향하는 집단들 간의 대화와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정도만큼 성취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씩은 상대방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상호작용이 불가능할 수도 있으며, 상호작용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사랑을 준다는 행위는 흔히 일방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배상을 위해 가능한 몸짓들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책임의 인정과 관련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효율적인 화해를 위한 가치를 가짐은 물론 상징적이고 예언자적인 특성을 지닐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정의함에 있어 우리가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제시할지도 모를 정당한 요구를 주의깊게 청취함으로써 그들과의 합동조사를 갖는 것이 또한 바람직하다.

    6.3 대화와 전교의 의미

    대화와 전교의 수준에 있어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교회의 인정이 갖는 예측 가능한 의미는 다양하다.

    교회가 전교를 위해 노력하면서 이러한 행위들이 부정적인 측면을 격화시킴으로써 그러한 열정을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그러한 행위들이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대한 신빙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진실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화해라는 과실을 맺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러한 행위들을 함에 있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이들이 그러한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주의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교회사의 여러 측면들은 유럽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세계교회주의와 관련하여, 교회가 참회하는 목적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주께서 바라시는 통일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상호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종교들 간의 상호작용 수준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교회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 복음에 대한 충성이 요구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며, 따라서 진실에 대한 믿음과 예수께서 드러낸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빛나는 증거임을 지적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반드시 거부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행위가 기독교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편견들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에 잘못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참회의 행위가 다른 종교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폭력과 대량학살, 인권의 침해와 가난한 자에 대한 약탈, 힘있는 자에 대한 찬미로 가득차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교들의 역사 또한 편협함, 미신, 부당한 권력과의 결탁, 양심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부인으로 점철돼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인들도 이로부터 결코 예외가 아니었으며,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양한 문화권과 대화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대화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참회와 용서에 대한 인식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교회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복음과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의 선물이라는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주는 자비의 발현이며, 용서의 근원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개념에 대해 완전히 생소한 문화권의 경우에는 그같은 행위를 하게 된 신학적 영적 이유들이 적합한 형태로 제시되어야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 중대한 예언자적 특징을 설명해야 한다.

    누군가가 믿음의 말씀에 대해서 편견과 무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곳에서는 교회의 참회가 가져오는 이중적인 효과를 고려해야 한다. 즉, 한 편으로는 부정적인 편견이나 경멸적이며 호전적인 태도가 더욱 굳어질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에 의해 행사된 신비한 매력에 동참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문화적 맥락에서, 특히 서구의 경우에, 기억의 정화에 대한 초대는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모두를 똑같이 공동의 약속에 연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같이 보편적인 노력 그 자체는 이미 진실에 대한 순응의 긍정적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민 사회와 관련, 때가 되면 신비로운 은총인 교회와 모든 인간 사회와의 차이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교회의 본보기적 특성은 강조되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상황에서 기억의 정화와 화해를 향해 유사한 단계를 취하기 위해서 교회의 용서에 대한 간청이 결과적으로 줄 수 있는 자극들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를 구함은…주로 교회의 삶과 구원을 전파하는 전교의 사명,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통일에의 복종, 한 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인의 삶을 구별짓는 일관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를 지탱하는 복음의 빛과 힘은 넘쳐 흐르고 시민사회의 독자성을 온전히 존중하면서 그들의 결정과 행동들을 지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세 번째 천년의 문턱에서 우리는 정치지도자들과 대중, 특히 증오와 과거의 상처의 기억 때문에 비극적인 갈등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가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는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인도될 것을 희망하며, 또한 개방되고 정직한 대화를 통해 그들의 차이점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희망한다.”

    [ 결론 ]

    결론으로는 다시 한 번 모든 형태의 과거 잘못에 대한 참회,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모든 몸짓들을 강조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그 분과 그 분의 자비에 영광을 돌릴 것을 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충성 서약으로 일생을 바칠 것을 요구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실의 힘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다. 용서에 대한 교회의 요청이 잘못된 비하의 표현 혹은 2000년 교회사를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돼서는 안된다. 교회는 자비와 문화와 성스러움의 영역에서 확실히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대신에 교회는 진실의 요청에 반응하고 있으며, 다양한 세대의 그리스도 사도들의 인간적 한계와 허약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화해와 평화의 근원이다. 교황께서 또한 말씀하시길 “진실에 대한 사랑은 그것을 겸손하게 추구할 때 오늘날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재결합시킬 수 있는 위대한 가치인 것이다…교회는 진실에 대한 책임 때문에 그 자녀들이 참회를 통해 과거의 잘못과 불충과 불일치와 더딤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서는 새천년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다. 과거의 허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정직과 용기의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모두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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