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생명·휴머니즘·유토피아

인간의 근원, 학문의 근본

  • 글: 박홍규영남대 교수·법학

    입력2003-01-22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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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자유의 사상이다. 신체의 자유, 그리고 정신의 자유. 자유는 배타주의를 배타하고, 금지를 금지한다. 그것은 다원주의이며 보수와 진보를 포함한 모든 사상의 공존과 대화를 인정한다. 그것이 곧 민주주의다.
    “개혁이라는 단어가 사람들 입에 어찌나 자주 오르내리는지, 누구와 대화를 나누더라도 그것이 가장 빈번한 주제가 된다.”(뷔로)

    2003년 1월 현재, 한국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이 말은, 사실 500여 년 전 르네상스기의 인물이 한 말이다. 르네상스는 개혁 그 자체였다. 우리 시대에도 개혁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르네상스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담아, 나는 너를 세상의 중심에 세웠노라. …너 자신을 실현하고 창안하는 자로서, 네 자유의 존엄성으로부터 네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미란델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다.”(리누치니 ‘자유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름다움과 힘과 영민성 같은 자연의 특별한 은총을 찬미해 마지않는다.”(모어 ‘유토피아’)

    이 말들 역시 2003년 1월, 한국인의 새해 좌우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역시 500여 년 전 르네상스기의 가장 위대한 경구들이었다. 르네상스는 바로 그런 사회, 르네상스인은 바로 그런 인간을 추구했다. 우리 시대에도 그런 인간, 사회, 자연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르네상스의 인간관·사회관·자연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때라 해서 완벽한 개혁이 이루어졌거나, 자유의 존엄성이 완전하게 보장됐거나, 의심할 바 없는 자연의 은총이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기 인간은 ‘자유의 존엄성’을 그 어느 때보다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적어도 르네상스에서 인간은 ‘자유인’을 추구했다. 그렇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자유, 사회의 자치, 아름다운 자연을 향한 개혁의 몸부림이었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활동과 함께 인간의 육체도 그 존엄성을 획득했다. 이전까지 육체는 신의 이름으로 경멸당해왔을 뿐이다. 비로소 사람들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자유의 존엄성을 해치는 궁핍과 무지, 편견과 독단, 권위와 억압은 비난받았다. 법이 그 존엄성을 인권으로 규정하거나, 궁핍과 무지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정신만은 확실히 고양돼 있었다.

    ‘전문가’는 전인적 지성인의 적

    르네상스인(성·계층·국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은 개혁가이자 창조자고, 박식가이자 사상가며, 여행가이자 생활인이었다. 그들은 학문과 예술에 두루 관심을 가졌으며 항상 자기만의 새로움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다. 또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모든 곳을 여행했으며,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 충실했다.

    이로써 그들은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상대적 관용으로 다양성과 변화를 인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롭고 드높은 삶의 보편성을 추구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는 그렇게 지성인·교양인·보편인이라는 참된 인간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인·교양인·보편인이란 흔히 그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대학 교수 등 이른바 전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앞뒤가 꽉 막힌 ‘전문가’는 오히려 보편인의 적이자 르네상스의 전인적 지성인 혹은 교양인에 반하는 개념이다.

    그보다는 다양한 지식과 교양을 추구하고, 새로운 사회와 세계, 조화로운 자연을 모색하는 성실한 생활인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흔히 천재들의 명단과 그 작품들로 대변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런 ‘암기용 리스트’가 아니라 르네상스의 핵심 정신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휴머니즘·유토피아·생명력을, 그 핵심을 형성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어느 영문학 교수와 르네상스 이야기를 하며 셰익스피어를 언급하자, 그는 왜 셰익스피어를 르네상스에 포함시키냐며 의아해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르네상스 하면 이탈리아, 그것도 피렌체, 그리고 거기서 산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만을 떠올린다. 이른바 ‘르네상스의 3대 천재’라는 식의 암기교육이 낳은 폐해다. 르네상스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중부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3대 천재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와 학자를 낳은 것은 사실이다. 알베르티나 마키아벨리도 여기 포함될 것이다.

    생명·휴머니즘·유토피아

    르네상스의 두 천재, 미켈란젤로(왼쪽)와 다 빈치

    그러나 이는 르네상스의 절정기(High Renaissance)일 뿐, 그 앞에는 초기 르네상스가 있고, 뒤에는 이탈리아 북부와 유럽 대륙에서 전개된 후기 르네상스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한다. 이탈리아 밖의 르네상스는 에라스무스, 몽테뉴, 라스 카사스, 라블레, 모어, 브뤼겔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인에 버금가는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은 휴머니즘·유토피아·생명력이라는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인 못지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17세기 이후 그런 ‘르네상스정신’이 사라지면서 서양의 근대가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흔히 르네상스를 ‘근대의 봄’이라 한다. 그러나 ‘중세의 가을’이라 보는 견해도 있는 만큼 근대와 중세 사이의 시기, 그러니까 14~16세기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뜻한다 하는 것이 무난할 게다(한국에서 르네상스 연구의 태두라는 역사학자 차하순은 ‘르네상스의 사회와 사상’에서 그 시기를 1300~1500년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그렇게 하면 그가 르네상스기 인물에 포함한 셰익스피어(1564~1616) 등은 제외되고 만다). 여기서 근대란 르네상스인들이 자기 시대를 부른 말로 이전의 고대, 중세와 구분된다. 이러한 역사 구분을 3분법이라 한다.

    현대의 몇몇 학자들이 르네상스를 ‘중세의 가을’이라 불렀다. 르네상스가 지닌 중세적 요소의 핵심은 봉건제와 가톨릭이다. 물론 그 둘은 13세기말부터 진행된 화폐경제의 부활, 도시민의 대두, 상공업의 발흥, 세속문화의 형성과 종교적 분열이라는 ‘근대의 봄’ 기운에 의해 점차 쇠퇴했으나, 기본은 르네상스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더라도 필자는 르네상스를 중세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세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근대의 봄’으로 규정할 경우 그후의 근대사는 르네상스의 발전태인 ‘근대의 여름 그리고 가을’이 된다. 17~19세기의 종교개혁(시작은 16세기), 봉건국가를 대체한 국민국가의 형성, 자본주의 발전, 과학혁명을 비롯한 지성혁명 등은 르네상스의 ‘여름’에 해당할 것이다. ‘가을’이란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자본주의가 서서히 저무는 것을 말한다. ‘가을’이 아니라 ‘겨울’이라 해도 무방하다. 르네상스로부터 17~19세기, 나아가 현대까지의 연속성에 방점을 찍는 견해다.

    이처럼 르네상스를 중세 및 근대와 연결하는 일반적 사관은,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연속성을 인정하는 일반론에서 보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연속성보다 단절성이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시기도 있다. 적어도 르네상스의 개혁성을 강조한다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그 단절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결국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필자는 르네상스를 문화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개혁’의 시기로 보아 중세 혹은 17세기 이후의 근대와 구별한다. 이는 지성사적 측면에서 볼 때 르네상스에서 나타난 구체성·다양성·상대성·관용성· 통합주의·회의주의 등의 경향이 17세기 이후 추상성·절대성·배타성· 획일성·실증주의 등으로 대체되면서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낳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흔히 르네상스를 ‘문예부흥’이라 번역한다. 일본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문예’란 문학과 예술을 합친 말이다. 한편 국어사전에는 문예를 문학, 즉 문학예술의 준말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문예부흥을 이해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르네상스는 문학의 부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브리태니카는 르네상스를 ‘고전 학문과 지식의 부활’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이 또한 범위가 너무 좁다.

    르네상스에서는 신대륙의 발견(이는 유럽인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과 탐험, 지동설의 천동설 대체, 가톨릭과 봉건제의 몰락, 도시국가 및 국민국가의 탄생, 민족언어의 발전, 상업의 성장, 종이·인쇄술·항해술· 화약 등 신기술 발명 및 응용이 이루어졌다. 문예와 학문뿐만 아니라 이 모든 변화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문화’란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생명·휴머니즘·유토피아

    왼쪽부터 토마스 모어, 몽테뉴, 라블레

    다음 ‘문예부흥’에서 ‘부흥’이란 기독교에서 부흥회란 말을 사용하듯 다시 일어나게 북돋운다는 뜻이다. ‘부활’ 또는 ‘재생’과도 비슷한 의미다. 이는 르네상스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를 부흥시켰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고전문화의 재조명은 르네상스의 출발점일 뿐 르네상스는 결코 그리스·로마 고전문화의 복사판이 아니다. 도리어 그 재조명 작업을 통해 중세문화를 개혁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따라서 르네상스란 ‘문화개혁’이라고 봐야 한다.

    필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르네상스는 문화개혁만이 아닌 인간개혁·사회개혁·자연개혁이었다고 본다. 르네상스의 기반인 그리스·로마 고전 연구의 목적도 단순히 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종교적·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자치(自治)하며 자연스러운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이 사는 사회와 세계를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한 학문·예술·생활이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르네상스기, 인간은 오직 스스로 세상에 서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노력을 통해 신을 대체하는 보편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는 존재로 추구되었다. 여기서 보편적이란 모든 학문과 예술에 정통한 것을 뜻한다. 바로 보편인 또는 만능인의 인간상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했고, 그 자유의지에 따른 모든 사회활동을 존중했다.

    따라서 르네상스인은 무엇보다 정치인이며 경제인이고 기술인이었다. 르네상스인들은 시민 자치의 정치를 추구했다. 예컨대 알베르티·미켈란젤로·마키아벨리 등 많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의 독재정치를 비판하고 시민 자치의 도시국가를 옹호했다. 흔히 정치 술수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마키아벨리도 사실 현실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진력했다. 에라스무스·몽테뉴·모어·라블레·브뢰겔 등도 당대의 정치나 전쟁을 비판했으며, 특히 라스 카사스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착취에 대해 평생을 두고 저항했다.

    중세에는 경제력 추구가 비난의 대상이었으나 르네상스에선 긍정하였다. 알베르티가 ‘가족론’에서 가정의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리는 합리적 정신을 찬양하거나,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본질은 소유욕이며 정치란 그 욕망을 이용해 정치적 실현을 도모하는 기술이라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식의 ‘경제적 동물’까지 예찬한 것은 아니었으며, 부의 추구는 어디까지나 자유와 학예를 위한 수단으로써만 정당화됐다. 브뢰겔처럼 자본주의의 악폐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거나 모어처럼 아예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주장까지도 나왔으니 말이다.

    또한 르네상스인은 자신이 속한 세상과 우주를 대상화해 관찰하고, 서로의 완성을 위해 그 대상과 당당히 교감하는 주체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인을 합리인, 경험인 혹은 과학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빈치에서 보듯 당시 과학은 예술과 분리돼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하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형태를 추구한 점에서 17세기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에 전개되는 과학사상과 구별된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자유·자치·자연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개혁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휴머니즘이라는 지적 개혁으로부터 시작됐다. 그 학자를 휴머니스트라 했는데, 이들은 당시 중세 신학에 젖은 대학 교수가 아니라 대학 밖에서 활동하는 세속 문필가였다. 이들이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중세의 이상인 속죄의 생활 대신 자유·창조를 위한 투쟁을 주장한 점, 전통 종교가 강요한 정신의 억압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탐구 및 비판의식을 자극한 점, 인간 사고와 창의력의 가능성에 새로운 자신감을 부여한 점 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즘 흔히 휴머니즘을 인문학의 또 다른 표현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휴머니즘이란 특정 분야 혹은 학문 및 예술에 대한 특정한 태도가 아닌 하나의 ‘정신’이며, 그 핵심은 생활과 지혜의 결합, 지적활동과 실천능력의 조화다. 이른바 문·사·철(문학·사학·철학)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구체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중시하는 실천적 명제인 것이다.

    르네상스인은 한없는 모색과 탐구의 자유정신을 갖는다. 추구하는 대상은 한정이 없고, 모색 기간 또한 정함이 없다. 그는 모든 구분과 경계를 자유자재로 뛰어넘으며 언제나 변화한다. 이러한 개별의 미완·유동·다양은 전체의 통일·조화·균형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르네상스적 전인(全人)의 핵심이다.

    그 전형이 최초·최고의 만능인라 불린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다. 르네상스인은 모두 그 경지에 다다르고자 노력했다. 알베르티는 말했다. “인간은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르네상스 인간은 모든 지식과 예술을 포용하는 동시에 육체적 사회적 성취를 비롯,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알베르티를 비롯한 르네상스인은 자유로운 인간이 누리는 ‘삶의 환희’를 생의 모토로 삼았다. 단테의 ‘신곡’ 등 르네상스 문학·미술에 나타난 인간은 개성과 관능이 넘치는 자유분방한 존재다. 육체와 감각을 죽이는 중세적 종교인이 아니라 육체와 감각에 젖은 현실인,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적 인간과 근대적 과학 사고가 규정하는 ‘확고하게 자리잡고 변화 없는 기계적 인간’ 사이의 차이점이다. 르네상스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어떤 고정된 위치나 자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이는 르네상스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상황이었기에, 그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요구된 것이기도 했다.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위기의 시대다. 위기에 대처할 수 없는 과거 대신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곧 개혁이다.

    “행동하라, 무위는 죄악이다”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휴머니즘은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갔다. 수많은 휴머니스트 중 ‘왕’이라 불릴만한 이가 에라스무스다. 그는 유럽 방방곡곡을 누비며 많은 책과 편지를 썼고, 각국의 휴머니스트들과 친교를 맺어 유럽 사상계의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는 자유인답게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으며, 추기경을 비롯한 어떠한 직업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어지러운 세파에 휩쓸리지 않았다. 자유는 그의 운명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그러나’라는 말을 자주 해 ‘그러나 박사’로 불리기도 했다.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형식적인 경건에 대립해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선을 주장한 ‘바보 자찬’을 비롯, 풍자문학으로 당시 현실을 비판하여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 그러나 자신은 끝까지 ‘그러나’로 상징되는 정신적 균형을 유지했다.

    또한 그는 최초로 신약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성서 번역의 효시가 되었으며, 성서의 부정확성을 폭로해 원전 비평의 기초를 닦았다. 대중도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계속했다. 신학자로서 그는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했고, 형식에 구애받는 성직자와 복잡한 사변에 몰두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며, 소박하고 순수한 원시 기독교로의 환원을 주장했다.

    프랑스의 몽테뉴나 라블레 또한 에라스무스를 숭배한 전인적 휴머니스트다. 이들은 라틴어로 글을 쓴 에라스무스와 달리 프랑스어로, 풍자와 비유의 걸작인 ‘에세’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를 각각 썼다. 이들은 위선·가장·전통을 거부하고 신체적 활동에 주목한 민중문화의 선구자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추구한 다양성이란 단순히 잡다한 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권력이 지배하는 추악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끝없이 저항해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그리는 사회적·정치적 태도와 연결된다. ‘최고의 르네상스인’ 알베르티는 이렇게 말했다. “행동하라, 무위는 죄악이다.” 그는 언제나 인간의 이성과 현실의 시민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도덕생활의 원리인 법과 사회생활의 수단인 경제를 중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작고 자유로운 도시, 활기찬 자치의 도시, 저마다 개성을 갖는 다양한 시민들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도시라는 시민 자치의 정신에서 비롯됐다. 미켈란젤로가 지키고자 한 피렌체가 그 상징이고, 모어가 추구한 유토피아도 바로 그런 곳이다.

    이상(理想)에 비해 현실의 도시들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휴머니스트들은 무엇보다 부패한 교회에 저항했다. 에라스무스와 모어, 알베르티나 미켈란젤로도 그랬다. 다 빈치는 아예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배타적 종교개혁에 반대했고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다.

    르네상스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 목적에 맞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정치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민중군주론을 주창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교회국가가 재흥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악마의 변호인으로 비난받았다.

    시민 자치의 유토피아를 추구한 모어는 국가주의가 아닌 자치적 사회주의의 기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한 르네상스인이다. 르네상스 유토피아 사상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는 과학 만능의 유토피아를 구상한 베이컨과는 명백하게 구별되는 사회개혁가다.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비판을 가한 휴머니스트는 많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조차 식민지 침략을 합리화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폐해가 아직 그 심각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때임을 감안하면 일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가운데도 라스 카사스는 평생을 두고 제국주의 침략과 원주민 인권탄압에 맞서 싸워, 국제주의 정신을 구현하는 선각자가 됐다.

    르네상스 예술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의 삶과 자연에 대한 사랑, 또 하나는 과거의 틀에 박힌 형식을 벗어던지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추구하는 태도다. 단테의 ‘신곡’은 그 구조와 사상이 중세적이기는 하지만,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표현한 점에서 르네상스 문학의 선구자다. 최초의 휴머니스트라 불리는 법학도 페트라르카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탈리아어로 현실적 애욕을 고백하는 연애시를 썼다. 이는 중세의 플라톤적 사랑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페트라르카의 친구인 금융인 보카치오는 역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데카메론’을 썼다. 당시 기준으로는 가히 포르노 수준인 ‘위험한’ 소설이다. 그 속에 묘사된 성도덕의 해이는 당시 사회상을 반영함은 물론 그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애욕의 시, 삶의 환희, 나체의 묘사

    이처럼 예술은 르네상스의 특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중세의 전통적 형식과 수업과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개성을 표현하였으며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정당한 사회적 대우를 고집했다. 이들은 전통 형식이 아닌 경험과 관찰에 의존해 작품을 생산했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눈과 그에 투영된 대상이다. 삶의 환희,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추구한 시대인 만큼 나체의 묘사야말로 가장 민주적이고 사회적이며 현실적인 주제였다. 예술가들은 같은 계급인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에는 회화가 있다. 중세 예술의 중심은 건축이었으나, 르네상스에 이르러 회화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지금도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화가 그때 시작됐다. 화가들은 이젤을 사용했고 원근법을 도입했다. 이렇게 확립된 사실적 자연주의 화풍은 이후 근대 회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한 점이다.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인 지오토의 작품을 지금도 성 프란체스코 교회 벽에서 만날 수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형식적인 스콜라주의를 배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영적 가치를 설교했다. 지오토의 그림은 명료하고 단순한 구도와 심리적 통찰에 의거한 새로운 양식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사상을 잘 구현하고 있다. 이는 단조로운 선 중심의 장식적이고 종교적 위계질서를 강조한 전통화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르네상스 예술가인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예술가이자 학자며 사상가다. 사생아 출신이며 동성애자로 추정되는 다 빈치는 자연인이자 반항인이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을 비롯한 그의 수많은 걸작은 정확한 형상과 초자연의 정신성을 결합한, 생명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민중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모나리자’는 어쩌면 생명력의 근원인 물을 배경 삼아, 임신한 여성 노동자를 그린 최초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흔히 다 빈치는 과학의 선구자로 지칭되나, 그가 대표하는 르네상스 과학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을 존중하는 유기적인 자연관에 입각한 것으로 17세기 이후의 기계적 과학과 확연히 다르다.

    시스틴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과 천장화 ‘천지창조’ 등으로 르네상스 미술의 일인자로 꼽히는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생명력을 풍부하게 표현하기 위해 구조와 비례의 원칙을 스스로 깨버리기도 했다. 인간의 벗은 몸을 미켈란젤로만큼 아름답게 창조한 르네상스인은 없다. 그는 모든 인간을 아름답게 그렸다. 이는 그가 민주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임을 보여준다. 또한 ‘최후의 심판’은 신에 귀의하는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보여준다.

    한편 이탈리아가 아닌 다른 유럽 지역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삶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예찬을 넘어서 민중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데 진력했다. 문학에서 그 대표자는 프랑스의 라블레와 몽테뉴,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 등이다.

    화가로는 네덜란드의 보스와 브뤼겔을 들 수 있다. 당대의 지식인인 보스는 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환상적인 필치로 표현했다. 당대의 민중화가 브뤼겔은 보스와 마찬가지로 중세적 화풍을 구사했으나 그 주제는 노동민중의 고뇌였다. 거지를 내쫓는 부자의 향연과 비만한 집달리에 쫓긴 걸인의 기아를 한 화면으로 보여주는 판화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폭로하고 있다.

    또한 그는 과장된 환상이나 멋진 정원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백성들의 눈에 비친 자연 그대로를 화폭에 옮겼다. 브뤼겔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진실에 대한 노동민중의 경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자유의 사상이다. 신체의 자유, 그리고 정신의 자유. 자유는 배타주의를 배타하고, 금지를 금지한다. 그것은 다원주의이며 보수와 진보를 포함한 모든 사상의 공존과 대화를 인정한다. 그것이 곧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자유로운 지성을 갖춘 시민들의 삶을 말한다.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란 자유인의 속성이 아니다. 최대 이윤의 추구나 절대적 신조의 신봉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삶의 모든 영역에 참여하며 적절한 책임을 진다. 참여와 책임,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르네상스 정신의 핵심이다.



    르네상스 예술가나 학자들은 삶·노동·지성·사회를 아우르는 교육을 받았으며 또 그런 예술과 학문을 추구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들은 구체성·다양성·상대성·관용성·통합주의와 회의주의를 추구했으나, 17세기 이후 그러한 정신은 쇠퇴해 추상성·절대성·배타성·획일성·실증주의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됐다. 그러한 지적 경향의 변화가 결국 20세기 인류의 역사적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자연 지배, 최대 생산 추구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르네상스로 되돌아가야 한다. 특히 일제 지배를 통해선 17세기 이후 서구의 지적·사회적 폐쇄주의를 강제받고, 해방 후에는 천민 자본주의와 획일적 대중문화에 침식되어버린 우리에게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인 자유로운 인간, 자치적 사회, 자연의 존중은 더욱 중요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인간과 사회를 생산하는 근간이 될 자유로운 교육이야말로 우리 시대 르네상스를 위한 최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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