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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당신 살아 있었군요”

문학, 세계의 반영

  • 글: 이윤기 소설가 / 번역가

“호메로스, 당신 살아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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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화에서 발원해 3천여 년 동안 계승·발전해온 문학 텍스트.인류가 그 이상의 원자재를 하루 아침에 생산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새삼스러운 듯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읽는 이 놀라운 현상을 보라.
“호메로스, 당신 살아 있었군요”

신화의 세계를 문학으로 복원한 또 한 명의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

2000년 9월27일 이스마일 카다레 씨를 만났다. 한 신문사가 만든 대담 프로그램 ‘이스마엘 카다레로부터 듣는다’의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자격으로 나와 그가 만난 자리였다. 1990년 조국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 카다레 씨는 해마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유럽의 대표적인 소설가이기도 하다. 당시 카다레 씨는 대산문화재단이 주관한 ‘2000년 서울 국제 문화 포럼’ 참석차 서울에 와 있었다. 나보다 11년 연상인 카다레 씨는 체구가 자그맣고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카다레 씨는 영어에 어둡고 나는 불어에 어두워 통역을 놓고 마주 앉았다.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선생님의 고향 ‘기로 카스타르’는 그리스 국경에서 30km 떨어진 알바니아 마을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알바니아어를 모릅니다만 기로 카스타르는 어쩐지 ‘둥근 성(城)’을 뜻하는 말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더 넓어지지도 깊어지지도 못했다. 그는 나의 질문이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선생님의 소설은 호메로스 서사시가 지닌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알바니아어를 알지 못하지만 호메로스를 통하여 선생님의 고향 마을 이름이 지니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호메로스의 텍스트에서 나는 ‘둥근 성’을 뜻하는 ‘귀로 카스트로’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내가 느낀 것은 선생님과 내가 호메로스 체험을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나는 호메로스(인류의 보편적 가치) 이야기를 한동안 더 했다. 기원전 8세기의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에 관한 한 나에게는 뼈아픈 추억이 있다.

1991년에 도미,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교환교수 아파트에 정착한 직후, 나는 미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한국인 언어학자를 만났다. 그는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귀국길이 원천 봉쇄된 그런 분이다. 한동안 그분과 가까이 지냈다. 하루는 그분이, 자신은 고대 그리스어로 진행되는 호메로스 원전독회(原典讀會)에 나가고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고전 그리스어에 관한 한 나는 완전 초보자에 지나지 않았으나 독회의 수준이 어떤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흡사 친구 따라 처음 교회에 나가는 중학생처럼 쭈뼛거리며 그분을 따라 독회에 참석했다. 그러고는 절망했다.

고대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원전을 해석하는 영어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안함을 참지 못하고 독회가 끝나기도 전에 슬며시 강의실을 나왔다. 2년 뒤 나는 뼈를 깎는 노력을 각오하고 그 독회에 다시 나가기로 결심했지만 독회는 닫힌 지 오래라고 했다.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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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는 물론이고 12년이 지난 지금도 땅을 치며 후회한다. 조급한 마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문학의 먼 시원(始原)으로 거슬러 오르는 기회를 붙잡지 못한 것이다. 그때를 후회하면서 여전히 땅을 치고 있을 즈음, 이스마엘 카다레 씨를 만났다. 나는 카다레 씨 앞에서 이 이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내 고백을 인상적으로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이어 나와 카다레 씨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다레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작품에 최고의 찬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여기에 와 있습니다. ‘부서진 4월’은 견딜 수 없이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올림포스 신들을 패러디한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속에서는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서사시의 거장 호메로스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어떤 프랑스 비평가가 쓴 책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와 단테에게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문학 프로세스의 발현 같은 것이지요.”

카다레의 소설 ‘H서류’의 ‘H’는 ‘호메로스(Homeros)’의 두문자(頭文字)다. 이 소설은 미국의 고전학자 두 명이, 호메로스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인지 아니면 편집자인지를 궁금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갓 발명된 거대한 ‘녹음기’를 짊어지고 고대의 서사시 전통이 음유시인들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알바니아를 현장 조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조사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못하다. 알바니아 정부가 두 고전학자를 스파이로 단정하고 현장인 N군의 군수에게 철저한 밀착 수사를 지시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이기 때문이다. 군수에게 고전학자들은 감시의 대상이지만 군수의 아내에게는 ‘혼외 사랑’의 대상이다. 군수의 아내는 그들에게서, 질식할 것 같은 결혼생활의 돌파구를 찾는다. 두 고전학자는, 독자들이 짐작하고 있겠지만, 알바니아에서 현장조사를 통해 호메로스의 정체를 밝히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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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윤기 소설가 /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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