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서점 한 구석 고독한 문제작을 찾아

문학, 세계의 반영

  • 글: 이재룡 숭실대 교수·불문학

    입력2003-01-22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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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가을이면 프랑스의 서점에는 각종 문학상을 겨냥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2002년 가을에는 소설만 663편이 출간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1993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숫자다. 그 중 번역소설 221편을 빼면, 프랑스 소설만 1년 동안 442편이 발표된 셈이다. 어디에서나 문학의 위기를 운위하는 시대에 프랑스만 예외인 듯싶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리 밝지만도 않다. 수백편의 소설 중 대부분은 서점에 진열도 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한 해 동안 베스트셀러에 끼는 책 가운데 프랑스 소설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나마 독자의 환심을 산 작품 중에서 문학성을 인정받을 만한 작품도 그만큼 드물다. 풍년인 줄 알고 부푼 마음으로 키질을 했더니 쭉정이만 바람에 날리는 형국이다.

    그러나 황량한 들판에서 귀하게 거둔 알곡일수록 미래를 꽃 피우는 씨앗이 되기에 소중한 법이다. 파리에서 출간된 소설은 프랑스를 비롯한 불어권 독자 뿐 아니라, 수십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의 시차가 점차 짧아지면서 의외로 많은 프랑스 소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문제작으로 대접받는 작품도 번역을 거쳐 바깥으로 나오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나라마다 문화적 맥락이 다르고 심성이 제각각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우리네 서점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고독한 소설 중에서는 프랑스 문학의 진풍경을 엿볼 수 있는 문제작도 적지 않다. 물론 좋은 작품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중에는 ‘현대의 고전’이라 보아도 무방한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을 고르기 위해 독자의 수고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문학상 선정위원이다. 문학상을 중심으로 거론되는 작품은 적어도 인체에 유해한 불량식품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작품이 소위 ‘노벨리자블’이라 불리는 작가의 작품이다. 우격다짐으로 생긴 용어겠지만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가’란 뜻의 노벨리자블은 매년 가을 어김없이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 언론에 그 이름이 거론된다.

    1986년 클로드 시몽이 노벨상을 받은 이래, 매년 가을이면 프랑스 바깥에서는 미셀 투르니에(1924), 밀란 쿤데라(1929), 이스마엘 카다레(1936), 르 클레지오(1940) 등이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프랑스에서 독자와 평론가의 존경을 받는 파트릭 모디아노(1945)와 쥘리앙 그락(1910)을 더하면 현재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거목들의 목록이 완성된다. 각자 한 그루 나무라기보다는 울창한 숲이라 불러야 적절한 거장들이다. 이 정도 무게의 작가들은 우리나라에도 이미 오래 전에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으니 프랑스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들일 것이다.



    사람과 시간의 검열을 견딘 명작들

    프랑스 바깥에서 보았을 때 눈에 띄는 작가가 ‘노벨리자블’이라면 ‘공쿠라블’은 일차적으로 내수용 문학이다. 신간 소설이 발표돼 자국 독자와 평론가의 관심을 끈다 싶으면 상투적으로 붙는 딱지가 바로 ‘공쿠르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란 형용사다.

    1904년부터 시작된 공쿠르 수상제도는 백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수상자를 낳았다. 국내에 소개되는 프랑스 소설들도 대개 공쿠르 수상작품, 아니면 적어도 과거에 수상 경력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란 광고 문구가 빠지지 않는 것에서도 공쿠르상이 얼마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공쿠르상 외에도 르노도상, 메치치상, 페미나상, 아카데미상 등을 수상한 작품은 적어도 한 해에 추수한 문학적 성과 중 알곡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앞서 열거한 문학상 외에도 프랑스 내에만 대충 1000개가 넘은 문학상이 있지만 대부분 선별의 의미보다 위기에 빠진 문학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격려와 자축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제로 전투기’(1996), ‘전투’(1997), ‘비밀을 위한 비밀’(1998), ‘나는 떠난다’(1999). 최근 몇 해 동안, 국내에 번역됐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진 공쿠르 수상작들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서술 구조의 ‘잉그리드 카벤’이나 우리에게 생소한 프랑스의 브라질 식민사를 다룬 ‘붉은 브라질’ 또한 비슷한 운명을 겪을 것 같다. 같은 프랑스 작품인 ‘오페라의 유령’이나 ‘개미’‘뇌’를 생각하면 원작자나 역자는 다소 억울한 심정이 들 법도 하다.

    문학상 수상작은 몇몇 명망 높은 비평가가 둘러앉아 고심 끝에 고른 작품이기에 시간의 검열을 지난 뒤에도 명작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명작이란 ‘누구나 말하지만 아무나 읽지 않는 작품’을 뜻한다. 사정은 프랑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의 호기심은 문학 교수나 평론가의 진지한 추천보다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댄 화제작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각종 문학상에 후보로 선정되었다가 결국 심사위원의 지나친 조심성, 무사안일, 불편부당에 희생되어 오히려 화제가 된 작품에 독자가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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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데릭 베그브데

    명작이 아닌 화제작을 꼽는다면 단연 두 작가가 떠오른다. 미셀 우엘벡(1958~)과 프레데릭 베그브데(1960~)다. 각각 ‘플랫폼’과 ‘3년, 사랑의 유예기간’이 번역돼 우리 독자들도 말썽 많은 두 악동의 실체를 어슴푸레 엿볼 기회가 생겼다. 두 작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첫 소설이 젊은 세대에게 컬트로 부각되며 오랜 입소문으로 유명해졌으나 비평계는 상반된 평가를 내림으로써 양쪽으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또 두 작가 모두 작품을 둘러싼 소송, 표절 등 무성한 구설수에 휘말려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다.

    프레데릭 베그브데의 경우 1990년 발표한 첫 소설이자 ‘올해에 나온 가장 속물스러운 소설’이란 평을 받은 ‘정신 나간 한 젊은 남자의 회고록’은 작가의 자전적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24세의 마르크는 ‘체크 무늬 와이셔츠와 포스트모던한 허무주의가 유행하는 시대’에 술과 여자와 나이트클럽에서 젊음을 탕진한다.

    ‘결코 세계 일주를 못할 것이며, 인기가수 50위 안에 들지 못하며, 대통령이 될 수 없고, 헤로인 중독자도 안 될 것이며,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사형선고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정크 푸드의 과용으로) 자연사할 것이다.’(베그브데 ‘정신 나간 한 젊은 남자의 회고록’ 중에서)

    세기말을 사는 프랑스 젊은이의 앞날에는 이렇듯 아무런 모험과 열정도 예정되어 있지 않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화자는 ‘좌익 신문에 우익적 글을, 우익 신문에는 좌익적 글’을 기고하며 연명한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열정은 파티뿐이고 연일 축제가 벌어지는 나이트 클럽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모험의 세계다. 인공 낙원에서 만나는 여자들만이 당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한 허무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이지만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술이 깨는 생활도 그리 신명나는 일은 아니다.

    그들에게 삶이란 ‘태어나고, 뛰어다니고, 허둥지둥 살아가면서, 책도 읽고 극장도 가고 아침식사도 하고, 그러다가 죽는다. 가끔 자기는 독신생활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자칫하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예쁜 여자에게 동시에 거짓말을 하는 때도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럿이 모여 자기만의 고독을 확인하는 파티에 싫증난 인물들은 약물중독, 자살을 택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들이 일컫는 지루한 포스트모던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99년에 발표한 ‘99프랑’은 물신주의에 찌든 현대 프랑스의 아픈 데를 꼬집은 베그브데의 대표작이다. 표절 혐의에 휘말리는 바람에 더욱 큰 화제를 모았다. 베그브데는 글솜씨가 있는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이렇게 되돌아본다. 17세기에는 12음절로 희곡을 쓰고, 18세기에는 철학적 에세이, 19세기에는 부르주아의 여흥거리인 소설을 쓰며 연명했다. 그러던 문학이 20세기에는 무슨 장르로 눈을 돌렸을까. 글쟁이에게 가장 수익성이 높은 장르는 광고 문구라는 것이 ‘99프랑’ 주인공의 생각이다.

    단 몇 줄의 광고로 거액의 글 값을 챙기는 주인공은 매일 밤을 파티로 즐기지만 사는 것이 그리 재미있지 않다. 베그브데 작품의 인물들의 신조는 ‘①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②사랑은 불가능하다 ③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유에 대해서는 길게 고민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그브데의 소설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흥청거리는 광고업계를 그렸다면 우엘벡의 처녀작 ‘투쟁 영역의 확장’(1981)은 컴퓨터 산업에 종사하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나중에 더욱 다양하게 펼쳐질 우엘벡의 생각은 이 처녀작의 제목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 투쟁의 양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광고와 마찬가지로 각광받는 분야인 컴퓨터 업계에서 일하며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인물이 ‘포스트모던한 허무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바로 투쟁 영역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인간 사이의 갈등을 그리는 장르라면 그 갈등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작품의 성격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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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셀 우엘벡

    이른바 계급적 차원의 갈등은 비교적 선명하게 선악과 피아가 구별된다. 많이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현 상태를 고수하려 들고, 전혀 갖지 않은 자는 어차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을 뒤집으려 한다. 근대소설이 그 사이에 낀 중간층의 어정쩡한 이중성, 그 내면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우엘벡의 소설에서 지목하는 갈등의 급소는 전혀 다른 데 있다. 28세가 되도록 한번도 여자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화자의 친구 티스랑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어떤 놈은 무수한 여자를 건드리며 섹스를 만끽하는데 내겐 하나도 없다. 내 정도의 수입으로 여자를 돈 주고 살 수도 있다. 계산해보면 일주일에 한 명 정도는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다. 그런데 어떤 놈은 공짜로, 게다가 사랑까지 덤으로 얹어서 여자를 즐긴다.”

    여기에서 여자란 단어를 돈으로 바꾸면 이 독백은 곧 전 시대의 구호가 된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설명하는 바, 바로 그 불평등한 사회의 모습이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소외와 불평등이 물적 토대, 생산력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우엘벡이 생각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갈등은 바로 사랑의 빈곤에 있다. 빵보다는 사랑, 어렵게 말하면 개체보존보다 종족보존에서 벌어지는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섹스의 빈곤화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신봉하는 자유경쟁 시대에 더욱 가속화된다. 컴퓨터 전문가인 주인공은 가상공간에서는 뭇 여성을 유혹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번번이 사랑에서 소외된다. 그래서 우엘벡 소설에는 수음행위가 빈번하게 묘사된다. 자유경쟁이란 ‘자유’라는 그럴듯한 접두사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영역에서는 가장 부당한 경쟁제도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빵의 영역에서 벌어졌던 투쟁이 섹스의 영역으로 확장된 시대를 그리면서 우엘벡은 나이트 클럽을 바로 그 자유경쟁의 장으로 예시한다. 예컨대 뭇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금발의 미녀가 시장 한복판에 있을 경우, 정상적 남자라면 머뭇거리며 범접 못하기 십상이겠지만, 무턱대고 대들어 결국 쟁취하는 자는 대개 겉만 번지르르한 건달, 밑져야 본전이라는 뻔뻔한 심보의 남자라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라는 것을 대단히 불신한다. 사랑의 영역에 적용되었던 자유에 대한 불신은 점차 정치, 사회적 차원까지 확대된다.

    예컨대 68세대가 부르짖은 ‘모든 영역에서의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페미니즘은 세기말에 이르러 우엘벡 세대를 낳았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듯 하다. 68세대의 남녀평등주의, 자유스런 계약에 의한 남녀관계, 자유스런 성, 소위 프리섹스를 주장했던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세기말에 이르러서는 모두 남자에게 버림받은 중년 아줌마가 됐다는 것이다. 20대에 성의 자유를 주장했던 페미니스트가 50대에 이르자, 경제력을 무기로 여전히 성을 만끽하는 동년배 남자에 비해 성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자신이 신봉하던 자유에 제 발등을 찍히는 세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성적 욕구불만에 가득 찬 신경질적인 세대가 바로 68혁명기의 페미니스트라는 우엘벡의 주장은 당연히 여성계의 강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하여튼 성적 소외현상과 관련, 유전자 조작에 의한 무성생식이나 종족보존의 문제를 자유경쟁이 아닌 합리적 과학, 예컨대 유전공학에 맡기자는 우엘벡의 주장은 그간 그의 소설세계에 호의적이던 평론가들조차도 당황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개별 입자’ ‘플랫폼’과 같은 작품이 잇달아 화제가 됐음에도 우엘벡은 문학상 심사위원의 눈밖에 났고, 상의 공정성에 시비를 거는 기자들조차 ‘우엘벡이 상을 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올해의 문학상은 성공적이었다’는 조롱을 퍼붓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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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스칼 키나르와 그의 대표작 ‘은밀한 생’

    베그브데나 우엘벡에게 문학상이 돌아가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희소식이라는 평가와는 달리, 2002년 공쿠르상을 둘러싸고 이채로운 소문이 떠돌았다. 파스칼 키나르(1948~)에게 상을 주자는 의견이 모아지자 심사위원 중 일부가 공쿠르상을 주기에는 너무 벅찬 작가란 이유로 선정을 망설였다는 것이다. 한국 독자들은 2001년에야 파스칼 키나르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키나르의 작품은 우리 소설 독법으로 보면 매우 낯설고 난해하지만, 읽을수록 종교적 명상과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 번역가의 고생 덕분에 우리말로 다시 태어난 ‘은밀한 생’은 파스칼 키나르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줄거리 없이 작가의 철학적 독백만으로 이뤄진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는 우엘벡과 다름없이 사랑이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매우 전근대적,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적이다. ‘은밀한 생’의 끝에 붙은 작가 소개를 대충 옮기면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파스칼 키나르는 풍금 제작에 종사하는 집안 분위기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 첼로 등을 연주하며 고전음악과 친숙하게 되었다. 생후 18개월과 16세에 자폐증을 앓았고 1966~69년 혁명 분위기 속에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더불어 철학 공부를 했다. 21세가 되던 1969년 ‘말 더듬는 존재’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벵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의 교수로 재직했고,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페스티벌을 창단했다. 그는 첼로 연주자이자 시나리오 작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한 고전문학 번역가이기도 하다.

    ‘은밀한 생’은 네미 사틀레라 불리는 여인에게 첼로를 배우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독백이다. 무거운 첼로의 선율을 배경음으로 깐 듯한 그의 글은 금발의 여인들, 술과 마약이 흥청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몇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대언어 전문가답게 그의 사유는 언어의 원천에서 시작된다. 몇 문장만 읽어보자.

    “사랑(amour)은 젖가슴을 찾는다는 고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고대 라틴어 어휘는 희한하게도 태생 포유동물의 특징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포유동물은 지질시대 제3기에 태어났고, 그때 인간의 운명에 가장 독특한 조건들이 형성되었다. ‘사랑(amor)’은 ‘젖꼭지(amma)’ ‘유방(mamma)’ ‘유두(mamillia)’에서 유래된 단어다. ‘유방의(mammaire)’라는 단어와 ‘엄마(maman)’라는 단어는 거의 구분하기 어려운 형태다. ‘아무르(amour)’는 말을 하는 입이라기보다는, 배가 고파 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본능적으로 젖을 빠는 입 모양에 더 가까운 단어다.”

    파스칼 키나르 소설이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은 항상 근원적인 것부터 탐색해나가는 현학과 명상이 주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화자와 첼로 선생 사이에서 96일간 지속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첫머리에 잠깐 언급될 뿐, 이 소설은 동서고금의 무수한 일화를 환기하며 사랑의 본질을 성찰하는 철학서에 가깝다. 그래서 길이가 제각각인 53장으로 이뤄진 ‘은밀한 생’은 쉽게 요약될 수 없다. 짧은 아포리즘(“더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처럼 품위를 손상시키고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를 자화시킨다”, “진정한 사랑은 준비되지 않고 협상되지 않은 관계다” “사랑에만 고유한 경험은 결별에 있다” 등)부터 고대 일화(기원전 2세기 중국 주오원쥔과 스마시앙루의 사랑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을 마주한 독자는 현란한 철학적, 역사적 모험을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파스칼 키나르는 기존 문학 장르에 가둘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낸 작가다. 앞에 거론한 작가들이 자유분방한 현대적 삶을 진부한 형식으로 그려냈다면 파스칼 키나르는 고전적 사유를 분방한 형식으로 표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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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필립 투생(왼쪽)의 대표작 ‘욕조’

    현대 프랑스 문학 풍경을 둘러보다 가장 돌올한 산등성이가 눈에 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미뉴 출판사의 작가들이다. ‘미뉴’라는 출판사 이름은 이제 현대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전위, 새로움, 품위의 동의어가 돼버렸다. 20세기 후반기의 굵직한 문학사는 미뉴를 중심으로 씌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인’의 마그리트 뒤라스, ‘욕조’의 장-필립 투생, ‘나는 떠난다’의 장 에슈노즈 등 우리나라에 소개된 미뉴의 작가들은 사실주의 전통에서 본다면 다소 낯설고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란 연구서에서 블랑크망은 앞서 거론한 파스칼 키나르와 더불어 장 에슈노즈를, 새롭게 변신하는 과정에 있는 프랑스 서사문학의 가장 앞자리에 선 작가라 치켜세우고 있다. 로브그리에에 따르면 진정한 소설가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사람이며 어떤 방식으로 말할 것인가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거리다.

    고전적 의미의 서사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소설만이 여전히 백년 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누보로망이 미뉴 출판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모험의 글이 글의 모험으로 대체된 누보로망은 흔히 소수 엘리트 독자의 소설, 대학 강단에서 연구하는 소설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1999년 장 에슈노즈가 ‘나는 떠난다’로 공쿠르상을 받으면서 대중과 폭넓게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장 에슈노즈의 소설에는 장르 소설이란 새로운 명칭이 따라다닌다. 그는 모험 소설, 탐정 소설과 같은 기존 장르의 형식을 변형해 새로운 서사틀을 만들어내는 목수 같은 소설가다. 에슈노즈가 서사의 전범으로 삼은 탐정 소설은 주로 서스펜스를 자아내 독자를 사로잡는 장르다. “소설이 유발하는 흥분과 시간 사이에는 수학적 함수관계가 있다. 그 관계가 바로 서스펜스”라는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 서사가 진행되는 시간을 고려해 그것을 묘사하는 문장의 호흡 조절은 탐정 소설가의 중요한 덕목이다. 장 에슈노즈는 그 수학적 함수를 정확하게 계산하며 거기에 탐정 소설에선 쉬 찾기 힘든 섬세한 유머까지 곁들인다.

    ‘나는 떠난다’에서 주인공은 북극에 남아 있는 보물선을 찾아 떠난다. 보물의 위치를 귀띔해 준 친구는 주인공이 고생 끝에 보물을 찾아오면 나중에 가로챌 속셈을 갖고 있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소설이 제공하는 재미는 이런 줄거리에 있지 않다. 근시를 위한 작품이란 평을 듣는 그의 소설은 여기저기 행간에 내장된 묘사가 아주 작은 폭죽, 미세한 불꽃처럼 터지면서 눈을 즐겁게 한다. 물론 언어의 음악성에 치중하는 그의 문장은 번역과정을 통하면서 손상되기 마련이고 유머만큼 국경을 넘기 어려운 감각도 없다.

    에슈노즈 외에 우리에게 소개된 미뉴 작가로 장-필립 투생을 꼽을 수 있다. 그는 5년 가량 침묵한 뒤 지난 가을 ‘섹스하기’란 도발적 제목의 작품을 발표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황산을 구입한 뒤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로 시작하는 이번 신작은 부인과 헤어지는 과정을 일본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기하학적 문학이란 평을 들을 만큼 정교한 문체와 문장을 구사하는 벨기에 출신 장-필립 투생은 소설보다는 영화, 사진에 빠져 한동안 작품 발표가 뜸했다. 또 다른 벨기에 출신의 미뉴 작가로 ‘개의 날’을 쓴 카롤린 라마르슈를 꼽을 수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발표된 불어권 소설 중 매우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개의 날’은 벨기에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빅토르 로셀상을 받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거목들의 이름을 나열한 뒤 세간에 소문난 화제작과 소수 평론가가 선별한 문제작의 순서로 프랑스 문학을 일별했지만 정작 프랑스 문학의 진경은 이런 주마간산에 포착되지 않는다. 아멜리 노통, 에마뉘엘 카레르, 파스칼 부르크네르, 탕기 비엘, 디디에 반 코벨라에르, 안나 가발다, 파트릭 베송 등이 빠졌으니 제 모습을 갖춘 풍경일 수 없다. 인위적인 분류를 하고 나면 항상 어떤 범주에도 딱히 넣을 수 없는 작품이 생기고 개성적 작품이란 그 정의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예컨대 ‘적의 화장법’의 작가 아멜리 노통의 기발한 상상력과 발칙한 반전, 경쾌한 대화체는 번역이란 세금을 떼고도 본전이 남아 있는 경우이고, 집요하게 정체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콧수염’의 작가 에마뉘엘 카레르, 철학적 내용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함께 전달하는 ‘아름다움을 훔치다’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의 파스칼 브뤼크네르도 일독에 넉넉히 값하는 작가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소설이 발표되었다는 2002년의 프랑스 문학 풍경을 한눈에 훑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수백종의 포도주를 각자 입맛에 맞춰 골라 음미하듯, 프랑스 문학은 독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고 독창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한 권의 소설을 100만명이 읽는 곳보다 100권의 소설을 1만명의 독자가 읽는 곳이 문학이 자라는 데 유리한 풍토일 것이다.



    참고로 35명의 평론가가 뽑은 프랑스 신세대 작가(1962년 이후 출생한 작가) 10명의 명단을 덧붙인다. 이들이 앞으로 10년 동안 프랑스 문학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란 예상이 적중할지 두고 볼 일이다. 평론가 둘 중 하나가 신세대 작가 중 가장 뛰어나다고 꼽은 이들은 아멜리 노통, 마리 느디예, 마리 다리위섹, 필립 베송, 얀 모아, 니콜라 파르그,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니나 부라위, 프레데리크 베그브데, 안나 가발다로 프랑스 문학을 이끌 기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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