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보이는 것 그 너머

  • 글: 성완경 인하대 교수·미술 이론 / 미술평론가 lunapark@unitel.co.kr

    입력2003-01-22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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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오세영 작 ‘투계’. 만화를 문학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수작이다

    만화는 재미있다. 만화는 우리를 빨아들인다. 대부분의 만화는 그렇게 재미있지만, 한편 그렇고 그런 상투형(常套形)이다. 그런 만화들은 대개 빨리 읽어치우고 잊어버리게 된다. 소비적 만화들이다. 사실 만화를 읽을 기회나 환경이란 것 자체가 집중적 독서나 진지한 감상과는 거리가 있다. 만화란 가볍고 흔한 것이어서(사실 요즘엔 어디에나 만화가 있다) 오다가다 시간 때우기로 잠시 뒤적거리거나 빨리빨리 책장을 넘겨가며 대충 보는 대상이지, 뭐 명작소설이나 명화 감상하듯 찬찬히 음미해가며 즐기는 대상은 아니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또 설사 만화가 감동을 준다 하더라도 그 감동의 강도나 깊은 맛, 여운 같은 것이 명작소설이나 한 편의 좋은 영화, 혹은 음악이나 미술작품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상투적 재미를 넘어 진지한 창작품으로서 깊은 감동을 주는 것들도 있다. 스토리가 좋아서건, 그림이 좋아서건, 혹은 그 둘 다이건.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어떤 만화는 대단히 심오하고 감동적이며, 그것이 보여준 ‘새로움’(모든 예술은 새롭다는 것이 생명이다) 때문에 마음이 설레는 경우도 있다. 천재적 예술성에 깜짝 놀라는 그런 만화들도 있다.

    그러나 만화가 가벼운 소일거리냐 진지한 예술이냐의 구별이 곧 좋은 만화와 그렇지 않은 만화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만화가 만화 고유의 대중문화적 즐기기의 대상이란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만화에는 그 특유의 문화가 있다. 팬덤(스타를 좋아하는 방식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마니아의 세계가 있고 특유의 숭배와 열광, 평판과 비평의 형식이 있다. 이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열광을 나누며, 주관이 확고한 비평가의 몫까지 톡톡히 해내고, 때로 직접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 그들은 대개 인터넷 사이트를 갖고 있으며 독특한 커뮤니티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만화가가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도 많다.

    꺼벙이와 무당거미,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는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독자와 독자 사이에 주고받는 쌍방 소통적 요소가 중요하며 팬덤과 마니아의 정서가 가득한 영역이다. 한국의 아마추어 만화문화의 저변은 대단히 넓다. 수천개의 아마추어 만화 동아리들이 학교 또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결속돼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중·고등학생 등 어린 세대가 중심이 된 것이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탄생했다 사라지는 것도 있지만, 1986년 이래 12년간 판진(Fanzine ; 만화 마니아이자 아마추어 작가인 이들이 만드는 잡지. 실험성과 도발성이 도드라진다)을 발행하고 있는 동아리도 있다.



    ‘판진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아마추어 만화의 특징은, 프로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보편적’ 취향과는 다른, 독자들 자신의 개성에 기반한 더욱 다양하고 소수자적인 취향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여고생들이 좋아하는 보이그룹 멤버들을 만화 속에 등장시켜 서로 동성애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한다든지, 이미 프로로 데뷔한 작가가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는 단편들을 발표하기 위해 다른 필명으로 판진을 발간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런 동아리들에 활동 무대를 제공하는 정기 행사 또한 많이 열리고 있다.’(김낙호 ‘한국의 아마추어 만화’ 2003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한국만화전 카탈로그 중에서)

    이렇게 보면 만화는 저자와 독자가 인기·애정·대화를 함께 나누는, 대단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장르라 할 수 있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이 만화를 텔레비전과 더불어 쿨 미디어의 하나로 정의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독자가 참여하는 미디어라는 뜻이다. 이 점은 만화라는 장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놓치지 말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열쇠다.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김진 작 ‘바람의 나라’

    대중의 정서와 애환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민감하게 형성되고 바뀌기 때문에 나름의 섬세하고 미묘한 결이 있다. 한국은 개항 이래 지금껏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사연을 간직하며 숱한 변화를 겪고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풍속·문화적으로도 그렇다.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군사독재, 민주화, 초고속 압축 성장과 IMF 구제금융 위기, 세계화 등 그야말로 격동과 변화 그 자체가 우리 역사다. 그만큼 상처와 고통, 보람과 희망, 좌절과 방황도 많고, 생활양식과 의식의 변화에 따른 갈등과 희로애락의 감정 폭 또한 매우 넓고 깊을 수밖에 없다. 한국만화는 탄생하면서부터 그러한 시대 상황과 정서를 반영하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왔다.

    한국만화의 역사는 19세기말~20세기초 창간된 애국 계몽적 신문의 풍자만화와 더불어 시작됐다. 일제 치하에서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공출을 위해 쌀의 생산을 독려하기 위한 관제 만화가 창작되기도 했다. 해방후 격동의 현대사에서 만화는 전단이나 포스터 같은 프로파간다로 폭넓게 활용되었다. 전쟁중 피란지 어린이들의 위안거리가 되었던 ‘딱지 만화’를 거쳐서, 종전후에는 성인 대상 오락 잡지와 만화전문 잡지가 탄생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단행본 출간 유행과 더불어 만화 대본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본소는 혼란스런 시절,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환상의 공간이었다.

    1966년부터 한국만화는 검열과 독점이라는 두 가지 악재에 시달려야했다. 이 암울한 시기, 어린이 잡지에 정기적으로 연재된 명랑만화와 성인용 잡지에 연재된 성인극화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길창덕의 ‘꺼벙이’ 등 명랑만화, 고우영의 ‘삼국지’, 강철수의 ‘팔불출’, 이두호의 ‘객주’ ‘임꺽정’ 등 역사극화는 독자를 매혹시켰다.

    1980년대 대본소 만화의 붐을 이끈 작가는 이현세다. 최고 히트작은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무당거미’도 이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1986년 창간된 ‘만화광장’을 통해 발표된 많은 리얼리즘 만화들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농촌·도시빈민 문제 등을 다룬 이희재의 단편이나 1970년대 SF작가인 김형배가 월남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조망한 만화 ‘투이호아 블루스’,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허영만의 ‘오! 한강’, 김혜린의 뛰어난 단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화가 ‘만화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6년 ‘만화광장’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오세영은 근대 조선 민중의 얼굴과 조선의 풍광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1990년대 이후 발표한 중·단편 만화문학관은 만화를 문학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끌어올린 수작이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어린이 만화로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가 있다.

    1980~90년대 한국만화는 새로운 시각문화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한국만화는 민중미술과 만나면서 외연을 풍부하게 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한겨레그림판을 맡아 그린 박재동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대본소 극화 붐은 작품의 양적 확산을 가져왔을 뿐 질적인 도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본소 만화는 점차 시스템에 따라 제작되는 만화로 굳어졌으며, 이에 식상한 독자들은 대본소 만화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드래곤볼’ ‘슬램덩크’ 같은 일본만화다. 이를 기화로 일본만화는 우리나라에 자국의 출판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한동안의 혼란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작가군이 만화 잡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의 욕망과 개성적 시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양영순, 이유정, 권가야, 박흥용이 그렇다. 1990년대 중반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가 순정만화라 불리는 여성만화의 약진이다. 대표작으로 김진의 ‘바람의 나라’, 김혜린의 ‘불의 검’을 들 수 있다. 황미나, 김혜린, 김진, 신일숙, 강경옥, 박희정 등 1980년대 작가들에 이어 등장한 1990년대 작가들은 일상의 영역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여성작가들의 약진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홍승우, 조남준, 이우일, 홍윤표 등 또다른 신세대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주로 일상의 이야기를 만화로 옮기는 데 남다른 기량을 발휘했다.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만화의 조상 중 하나인 이집트 벽화

    만화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우선 만화시장의 규모를 통해 그 크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2001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 1년에 발행되는 만화 타이틀 숫자는 약 1만종이며(정확하게 9177종), 이는 전체 출판물의 4분의 1을 넘는다(26.5%). 부수로 따지면 그 수치는 더욱 증가해, 4200만부로 전체 출판물 부수의 35.9%를 점하고 있다(일반 단행본 만화와 학습만화를 합친 숫자임). 이것만으로도 만화가 갖는 문화적 지위는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다. 문화산업 면에서 본다면 만화와 형제지간인 애니메이션 산업 및 팬시·캐릭터 시장의 규모도 점차 증가 추세에 있고, 여기에 또 사촌지간인 게임·영상·음반·테마파크·방송까지 합치면 대단한 규모에 이른다. 정부가 최근 문화 콘텐츠진흥원이란 기구까지 설립해 이 분야에 대한 지원을 하고 나선 것도 이처럼 이른바 문화콘텐츠 산업이 갖는 큰 성장 잠재력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관련 학교의 숫자도 점점 늘고 있다. 청강문화산업대, 순천대, 목원대, 상명대, 세종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지대, 경민대, 공주문화대, 부산예술문화대, 전주대 등 많은 대학이 만화 관련 전공 학과를 두고 있다. 애니메이션이나 멀티미디어 디자인까지 합치면 50개가 넘는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현상이다. 한국에서 이 분야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만화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꼭 산업적 외형이나 직업적 인기에서만 찾을 일은 아니다. 하나의 소통 언어이자 표현수단으로 만화 내지 만화적 언어가 우리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만화는 현대 생활에서 다양한 쓰임새를 갖고 있다. 출판뿐 아니라 상업 광고와 공공 캠페인, 교육, 방송, 디자인, 패션, 문구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만화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이제 이런 현상들을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안목이 아닌, 좀더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시야로 볼 필요가 있다. 왜 만화가 주목을 끄는지 왜 만화가 중요한지에 대한 문명사적·문화론적 관심, 그리고 예술적인 시각에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만화란 무엇이냐’는 기본적 인식부터 확고히 해야 한다. 이 인식은 문화적·인문적 시야를 요한다.

    ‘보여주며 말하기’의 막강한 힘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에르제의 ‘땡땡’. 칸과 칸 사이 비어있는 시공간을 채우는 건 독자의 상상력이다

    만화가 주는 매혹의 근원은 이야기, 형상, 마술의 상호 관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형상의 비밀은 이야기에 있다. 이야기(이스토리아) 없이 형상(피구라)은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야기는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지금까지 항상 존재해왔다. 인류의 역사가 곧 이야기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이 세계와 자신을 이해해왔다. 그리고 또 통어(通語)해왔다.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냥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던 귀신 이야기나 도깨비 이야기를 떠올리면 된다.

    그렇다면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는 곧 형상, 이미지다. 형상은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눈에 보이는 형상보다 중요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이다. 더 정확히 말해 형상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중간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형상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반대로 형상은 곧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인류 문화의 역사는 곧 이미지의 역사다. 원시 미술을 보자.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마법이고 아니마(anima)라면 모든 이야기와 모든 형상의 핵심은 마법이다. 형상과 이야기는 마법의 산물이다. 형상과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고 서로 작용함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세계의 비밀이자 모든 종교와 문화예술의 비밀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정신적·상징 문화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실용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전서나 의학·천문 서적 등에서 알 수 있듯, 그리고 오늘의 멀티미디어·웹디자인에서 보듯 말과 그림의 결합은 (그리고 소리의 결합은) 지식 전달에 가장 효과적인 형태다. 따지고 보면 그림과 말의 결합 없는 어떤 문명도, 나아가 어떤 종교, 예술, 지식, 기술도 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과 말의 결합이 낳은 힘의 핵심은 ‘사로 잡는 것’과 ‘잘 알게 해주는 것’에 있다. ‘보여주며 말하기’는 모든 예술, 모든 지식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우월한 형태다.

    이제까지 얘기한 것을 축약하면 이렇다. 이야기와 그림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만화는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폭 빠지도록 사로잡는 특별한 힘을 원천적으로 갖고 있다. 또한 만화는 이 두 가지를 그저 단순히 합친 것이 아니다. 매우 복합적으로, 그리고 독자를 깊이 개입시키는 형식으로 그 연출 노하우를 개발해왔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칸과 그림의 연쇄를 통한 다양한 방식의 시공간 편집이며 이에 기반을 둔 이야기의 독특한 전개방식이다.

    만화의 핵심적 속성은 ‘연속된 칸과 페이지 그림으로부터 이야기가 태어나는 것’이다. 스토리 그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원시 동굴벽화로부터 이집트·고대 멕시코의 벽화, 불교 벽화, 중세 기독교의 수사본 삽화들, 바이외(Bayeux) 태피스트리, 근세의 연속된 장면으로 된 교훈적인 풍속화 등, 미술사 속 이야기를 담은 그림의 긴 전통이 모두 만화의 조상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화는 지면에 인쇄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서사이며 대중문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근대적 의미의 만화는 신문이라는 대량 인쇄술의 발전과 구독자 경쟁, 여행과 여가 활동의 증대(심심풀이 읽을거리의 필요)를 기반으로 태어나고 발전했다.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 20세기 대중문화의 총아들이 모두 19세기말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공통의 기반이 대중사회의 출현이다.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스콧 맥클루드의 ‘만화의 이해’ 중에서

    만화의 형식은 다양해서 어느 하나의 틀로 고정시켜 얘기하기 힘들다. 시대와 지역, 작가에 따라 만화는 다양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가 그렇듯 만화도 어느 정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형식을 갖고 있다. 칸, 페이지, 이야기라는 세 요소가 그것이다. 만화는 인쇄된 지면이라는 공간 속에 특유의 방식으로 이야기와 그림을 분절시키고 배열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연속체를 만들어낸다. 연속된 칸 그림으로 지면을 구성한 만화 형식이 우리를 사로잡는 힘은, 그것이 칸과 그림과 텍스트로 구성된 지면 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묘한 교차배합을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끌어들이는 특이한 방식을 떠나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칸과 칸 사이,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 한 칸의 그림과 전체 지면 사이에서 시선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고 되짚어 배회하기도 하면서 시각적인 동시에 문학적인 서사를 음미하고 그래픽과 공간의 매혹에 빠져든다. 그것이 만화 특유의 마력이다. 칸들의 배열과 그 상호연결, 칸과 페이지의 관계. 그림과 문자 텍스트의 연결방식, 다양한 모양의 의성어나 의태어, 그리고 만화 특유의 그래픽으로 전환된, 흔히 ‘만화 아이콘’이라 부르는, 등장인물이나 동식물, 물건, 풍경들. 이 모든 것이 만화에 특유한 방식으로 공간과 시간을 분절하고, 축약하고, 연결하고, 중첩시키고, 우회시키는 등 다양한 시공간 편집을 해내면서 만화의 이야기와 그 매혹을 만들어낸다.

    특히 중요한 것은 칸과 칸 사이의 관계다. 칸의 구성은 이야기의 구성이자 시간 흐름의 공간적 구성이며 그림의 구성이기도 하다. 이 구성에는 대체적인 컨벤션(관습)이 있지만 자유롭고 새로운 형식의 구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개 각 칸을 따라 우리 눈동자가 움직이지만 사실 만화가 촉발시키는 상상력이 작용하는 공간은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나의 칸과 다음 칸 사이 이 틈에서 행위의 혹은 장면의 상호 관련성을 포착하고 음미하면서 하나의 사건이나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만화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다. 만화는 독자를 칸과 칸 사이의 ‘도랑’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독자의 상상력에 가속도를 붙게 한다.

    만화 형식으로 만화를 탁월하게 해설한 책으로 유명한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의 저자 스콧 맥클루드는 이것을 ‘도랑에 흐르는 피’라는 말로 설명한다. 칸과 칸 사이에 진짜 이야기를 구성하는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맥클루드는 두 칸으로 된 만화를 예로 들어 이 점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 칸에 “이제 죽어라” 하고 외치며 도끼를 치켜든 남자와 “악! 안 돼!” 하고 외치며 도망치는 남자가 있다. 그 다음 칸에는 원경으로 잡은 도시의 야경이 있고 “아악!!”이란 큰 의성어 글자가 밤하늘을 찢고 있다. 독자의 상상력은 이 별개의 두 장면을 하나의 생각으로 바꾸어낸다. 독자의 연상이 살인을 완결하는 것이다. 좀 멋 부려 얘기하면 ‘독자가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가 적극적으로 매체의 동맹자가 되는, 독자의 연상이 변화와 시간과 동작의 중개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라는 주체의 이같은 적극적 역할은 아이콘이나 캐릭터의 카툰적 특성, 곧 핵심을 살린 약화식 그림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와도 상통한다. 카툰식 그림이란 일종의 ‘그림 기호’나 ‘시각 상징어’처럼 상징성과 연상성, 특징화와 전달성이 강화된 약식 그림이다. 흥미 있는 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대개 사진 같은 사실적 그림보다 만화식 약화 그림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만화적 아이콘이나 캐릭터가 독자를 자기 동일시로 강력하게 이끌기 때문이라고 맥클루드는 설명한다. 주인공 속에 자기 투사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만화식 약화 그림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뫼비우스(본명 장 지로)의 장편 ‘아르작’

    만화식으로 그린다, 곧 카툰화한다는 것은 형상을 추상화함을 의미한다. 이는 세부 묘사를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핵심적 의미를 좇아 주어진 형상을 벗겨내면, 사실 묘사를 했을 때보다 그 의미가 더 커진다. 단순화가 의도 전달에 더 효과적인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카툰이 갖는 보편성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 카툰에 가깝게 그릴수록 더 많은 사람을 묘사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보편성이 커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어서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나 무생물에도 동일성과 감정을 부여하고, 세상을 우리와 닮게 고친다. 얼굴을 사진이나 사실화로 보면 나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확실히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만, 카툰의 세계로 들어가면 자기 자신으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이 카툰에 빨려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카툰이라는 진공상태로 독자와 그의 의식이 빨려들어가며 그 빈 껍데기를 타고 다른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된다.

    카툰의 세계에서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 독자가 느끼는 일체감이 카툰의 최대 강점으로, 이를 통해 카툰은 전세계의 대중문화를 파고들 수 있다. 만화는 우리의 감관을 확장해 이 세계와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다. 마치 우리가 운전할 때 차의 기어라든가 운전대, 백미러 등이 우리 몸의 연장이 되어 차와 일체(감)를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독자들이 카툰화된 주인공 속에 몸을 숨기고 감각을 자극하는 세계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마음껏 모험을 펼치는 것이다.

    만화는 역사상 존재한 어떤 장르의 예술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아이콘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약호화된 인물의 도상이 독자의 내면의 추상적·개념적·일반적 인지작용 방식과 맞물려 대단히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만화는 또한 그래픽(그림)상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형식을 실험해볼 수 있다. 앞서 만화의 칸과 칸 사이의 공간에 관해 말했지만 칸과 칸 사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페이지 전체도 중요하다. 독자의 시선은 한 칸에서 다음 칸으로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만화는 한쪽 페이지 전체, 혹은 양쪽 페이지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파놉티콘(panopticon·한곳에서 내부가 전부 보이는 원형 교도소)적 시각장치를 가진 서사 형식이다. 이 점은 만화와 영화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만화는 페이지 공간에서 구현되는 그 시각장치의 다양하고 창조적인 운용에 크게 빚지고 있다. 만화작가마다 혹은 작품마다 다른 개성도, 그 시각장치의 운용방식과 그 안에 담기는 그래픽적·회화적 표현의 특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림의 개성과 매력은 이 시각장치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다. 만화는 다른 어떤 조형예술 장르보다 더 폭넓게 ‘그리기’의 자유를 실천해왔고, 의미를 담은 그림,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라는 그림의 오래된 본능과 전통을 현대적·대중적으로 재해석해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효용가치가 높은 시각 상징어라는 점에서든, 회화적으로 밀도 있는 멀티미디어 언어라는 점에서든, 만화가 보여주는 시각적 서사의 다양성과 그 그림의 표현미학적 질, 그리고 실험성은 정말 현기증이 날 만큼 대단한 것이다.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아트 슈피겔만의 퓰리처상 수상작 ‘쥐’

    이와 관련해 유럽만화의 그래픽 어휘가 가진 다양성과 실험성이 그들의 형상문화 전통과 제도에, 또 그 제도의 인문성과 세속성에 얼마나 크게 빚지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만화적 어휘와 발상법의 풍요성은 단지 만화 자체의 전통만이 아닌, 인접한 다양한 예술 및 시각 커뮤니케이션 형식(회화·건축·조각·판화·일러스트레이션·카리카튀르·아동도서·광고·신문·화보잡지·패션·사진·영화 등)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이같은 형상문화의 풍요로운 전통은 곧바로 만화 어휘의 풍요성과 다양성으로 이어지며 역으로 흘러나오기도 한다. 서로 흘러들고 흘러나가며 끝없이 번안·실험·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유럽 형상문화의 풍부함은 한국의 현실과 도저히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근대 계몽주의 시기 이래 ‘비주얼라이제이션’의 전통이 있었다. 우리의 경우 이에 비견할만한 형상문화의 근대적 제도가 없었고(같은 동양권이지만 일본은 이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근대적 세속성에 뿌리를 둔 형상 언어 번안의 전통도 없었다. 만화 창작은 만화 자체만이 아니라 이렇게 넓은 형상문화의 전통과 그 창고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사실 유럽만화의 매력에서 그래픽의 풍요로움과 깊이가 중요한 몫을 한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오리지널리티와 풍요로움은 만화 자체의 상투형의 습득에서보다는 미술과 그래픽 아트 전반의 폭넓은 체험과 그 크로스오버에서 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모든 방식으로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만화형식의 파괴자’로 불리는 크리스 웨어의 ‘지미 커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똘똘한 아이’의 한 부분. 할아버지-아버지-지미로 이어지는 가계 흐름을 오직 그림만으로 표현했다.

    조형적·심미적 매혹의 측면만 따지더라도 만화는 이른바 미술관 미술이나 순수 미술, 그래픽 아트에 결코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오히려 앞서가는 예술 장르다. 이미지 예술이라는 시각에서, 혹은 시각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화와 미술, 그래픽과 만화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만화사의 뛰어난 걸작들을 보면 이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주류 미술사의 모든 위대한 작품들과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그래픽, 영화 언어의 빛나는 형식들이 만화라는 블랙홀에 빨려들면서 다시 만화 고유의 형식으로 방사되는 느낌이다.

    꼭 그림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만화는 고급한 장르에서 저급한 장르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래의 거의 모든 문예 장르에 젖줄을 대고 있다. 가장 현실적, 당대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허구적, 환상적, 민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끌어들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낸다. 서사시, 풍자, 다다, 의식의 흐름 계열 심리소설, 전기, 엽기적 공포물, 초현실주의, 민담, 에로티카, 추리물, 공상과학 등 만화가 다루지 못하는 영역은 없다.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화 특유의 시각적 서사 형식으로 재가공되어 강력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는 점이 만화의 저항하기 힘든 괴력이다.

    이 괴력은 최근의 그림소설(Graphic Novel·우리나라의 경우 극화 형식의 단행본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대부분 고급지에 칼라 인쇄하고 그림의 스타일도 매우 정교하고 회화적이며 복합적인 편이다)이라 불리는 만화 장르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미국 만화계의 거장 윌 아이스너가 말했듯이 “코믹스(보통 만화)가 멜로디라면 그래픽 노벨은 심포니다.” 소재와 스타일의 가공할 다원주의와 혼합성, 그리고 독창성과 실험성이 이러한 그림소설류 단행본 ‘저자 만화(작가 만화)’의 주요 특징이다.

    작품 ‘쥐’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이 “만화는 연극보다 유연하고 영화보다 심오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완성에 13년이 걸린 ‘쥐’와 같은 작품을 포함한 그림소설류의 저자 만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최근의 몇몇 만화들은 멀티미디어형 예술을 지향하는 흥미로운 실험들을 보여주고 있다. 데이브 맥킨이나 크리스웨어의 만화에서 일종의 시각적 사운드를 지향하는 만화, 하이퍼텍스트 구조의 만화를 만난다.

    예술이면서 예술이 아닌

    만화는 예술이면서 또한 예술이 아니다. 이 점이 만화의 큰 장점이요 다행스러운 점이다. 만화는 미술관에서 보는 미술보다 훨씬 더 상호반응적이고 참여적이다. 만화는 평등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으며 디지털 시대의 심적 상태랄까 문화적 본능과 잘 맞아떨어지는 본성을 갖고 있다. 만화는 저비용의 일인 제작 영화이자 독립 출판물이고 혹은 아티스츠북(Artists’ Book·예술가들에 의한 비규격 실험 출판물)이기도 하다. 또한 ‘비규격 그래픽 아트’로 디자이너로부터도 환영받는다. 한편으로는 보통 사람끼리 자유롭게 소통하는 그래피티(낙서)이자 온라인 대화방 같은 것이다. 만화는 21세기에 가장 어울리는 글로벌한 심적 상태, 지구의 정반대 쪽 사람과 서로 즉각 알아보고 쉽게 소통하게 만드는 일종의 대중적 영매(靈媒)라 할 수 있다.

    비단 영화(제7)와 TV(제8)에 이어 ‘제9의 예술’이라 불리는 문예적 명칭의 귄위를 빌리지 않더라도 만화는 엄연히 존재하는 문화이고 또한 중요한 예술 장르다. 유럽에서는 만화가 주류 문예 장르와 어깨를 겨룰 만큼 확고한 힘을 갖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만화에 대한 인식이 차츰 바뀌고 있다. 따지고 보면 만화가 예술이냐 아니냐는 이제 거의 무의미한 질문이다. 만화를 예술로서보다 오히려 ‘새로운 언어’로 보는 것이 필요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는 이제 영상문화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이해로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영상언어와 영상문화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이며, 왜 만화가 21세기 멀티미디어형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장르로 주목받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화에서 우리는 이미지와 의미 사이의 다중적 포섭관계, 멀티미디어 형식의 서사, 디지털 인터페이스 디자인, 하이퍼텍스트 문제 등 오늘날 영상문화 시대의 여러 문화론적·인문학적 화두와 만난다.

    디지털 기술은 모든 매체들의 속성을 한데 녹여 형질이 변화된 다중매체(멀티미디어)로 통합시킨다. 문자, 그래픽, 소리, 비디오, 애니메이션과 같이 과거에 분리되었던 매체들이 다중매체로 결합되어 하이퍼미디어의 체계로 구축되는 이 공간은 잡종적(하이브리드) 텍스트성의 공간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인터페이스 개념이다. 좁은 의미로 인터페이스란 이와 같은 다중매체적 가상공간에서 사용자들이 지닌 다양한 문화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이를 의미 있는 구조로 만들어내도록 인지적 기제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넓은 의미로 보면 우리의 지식과 감각과 마음을, 삶과 문화의 전 체계를 상호 연결하고 통합시키는 일종의 지적·미학적 융합력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 감각의 기제와 삶의 경험을 하나로 융합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인간이 이 세계와 문화 속에서 거주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보고 해석하고 창조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디지털시대 융합언어의 뿌리

    만화 자체가 오랫동안 본능적으로 추구하고 실현해온 것, 그리고 최근 크리스 웨어 같은 만화가의 작품에서 느끼는 가장 유연하고 매혹적인 측면이 바로 이것이다. 삶과 시간과 사건,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묘하고도 느긋한 혹은 강박적인 통찰력,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지극히 미세하고 유연한 혼성적 구성력 말이다. 크리스 웨어, 데이브 메퀸, 아트 슈피겔만, 윈저 메케이, 보두앵, 댄 클로우스 같은 작가들에게서 특히 이런 측면을 더 주목해볼 수 있다.



    문자 텍스트, 그래픽, 사운드, 동영상을 하나의 다중미디어로 통합해내는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핵심적 감각은 만화의 본능이기도 하다. 팬덤 만화문화에서 보이는 상호대화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이미 만화는 첨예하게, 그리고 생래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 융합과 쌍방향 소통, 열린 참여적 예술형식의 본능을 실천해온 예술이다. 만화는 중요한 예술 장르일 뿐 아니라 새롭고 잠재력이 큰 언어 형식이다. 만화는 디지털 시대 융합 언어의 뿌리로 더욱 놀랍고도 새롭게 발전하는 궤적을 그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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