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보이는 것 그 너머

  • 글: 박신의 경희대 교수·문화예술경영학 / 미술평론가 lunapark@khu.ac.kr

    입력2003-01-22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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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익은 매체의 낯선 활용으로 새로운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현대미술. 이를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제도와 질서와 법칙들이 혼란스러워지는 불편을 겪어야 할 것인가.
    현대미술의 복잡한 자기 변신과 다양한 형태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이 그런 복잡다기한 양상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때는 그 현상에 내재하는 어떤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주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애써 교과서적인 답을 찾거나, 그런 질문을 던진 교수에게 무슨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해서인지 아예 입을 다물기도 한다.

    학생들은 궁리 끝에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거나 “윤리적으로, 미학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거나 “숭고미의 체험” 같은, 어려운 미학·철학 서적에나 나올 법한 답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나름대로 ‘체면’은 살려보려 하지만, 결코 확신에 찬 낯빛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답변은, 거의 쓰레기 같은 재료를 가지고 설치미술을 한다거나 도무지 이해할 길 없는 영상물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미디어 아트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될 수 없음을 학생들도 잘 안다. 결국 멋쩍은 웃음과 함께 논의의 주도권은 교수인 내게로 돌아온다.

    그 순간 나는 학생들을 더 애태우지 않으려고 바로 답을 말해버린다. “예술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면 학생들은 또다시 의아한 표정을 짓지만, 그 중 몇몇은 짐짓 그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앞서 학생들이 내놓은 답들이 전적으로 틀리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근대철학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답안’이다. 하지만 그 의미와 맥락이 시대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예컨대 “예술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얘기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전제로 한 그리스 철학의 원리 자체가 아니라, 다시 말해 현실과 일상을 떠난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을 반영하고 현실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생각과 가치체계, 이념 등과 관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평범한 우리를 찜찜하게 만드는 무엇

    “윤리적으로, 미학적으로 올바르다”는 것 역시 미적 가치가 반드시 순수미나 절대미의 기준이라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르는 가치판단의 문제와 관련해 생각과 가치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칸트에서 비롯된 “숭고미의 체험”이라는 것도 본래 절대불변의 진리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다는 의미지만, 현대사회에서라면 자신의 생각이 바뀌면서 주어지는 변화에 대한 체험과 같은, 어떤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인데, 나는 이 의미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제까지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저 사실이라고 믿는 것, 너무 익숙해서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을 바꾸는 일은 실제 아주 불편한 일이다.

    그런데 왜 예술은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으려 하는가. 예술이 그런 것이라면 없어도 되는 게 아닐까. 예술가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사실 예술가라는 존재 자체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없으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비엔날레라는 거대한 국제 현대미술제를 위해 엄청난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고, 종잡기 어려운 작품들을 놓고서 ‘예술’이라며 감상해야 하는 고역을 치르지 않아도 될 테고, 읽기조차 어려운 미술평론이나 미술이론들로 눈을 피곤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극단적으로 말해 과연 예술은 필요한 것인가. 과거에 그랬듯이 그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를 올려다보는 것을,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바라보는 것을 예술이라고 못박아 놓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가 살던 시대에도 그들은 많은 사람에게 아주 ‘불편한 존재’였다. 자신들의 새로운 예술적 기준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늘 교회 세력이며 귀족들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관습과 관행, 윤리에서도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주는 불편함은 기존 세력에 대한 것인 만큼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예술이란 평범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일에서 시작해 한 사회를 불편하게 하고, 위정자들에게도 불편한 존재여서 그들이 마구 권력을 행사하거나 독재를 부리는 일에 제동을 걸 수도 있게 한다. 물론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의 그림은 지금에 와서 그 불편함의 의미가 달라져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지만, 사실 감동을 받는다는 것도 조금 더 생각하면 우리를 ‘부드럽게’ 불편하게 만드는 일 가운데 하나다. 감동이란 우리를 예사롭지 않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고, 어쨌든 움직이는 일은 불편한 것이니 말이다.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마르셀 뒤샹 작 ‘샘’

    다시 현대미술의 결코 부드럽지 않은 불편함으로 얘기를 돌려보자. 1910년대 중반부터 유럽과 미국을 풍미하던 다다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인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자. 남자 소변기를 가져다 거꾸로 돌려놓은 작품이다.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본다면 누구라도 “이게 작품이야?”라고 반문할 것이다.

    너무 엉뚱해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반대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반응은 어떤 배신감에서 오는 것이리라.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에 대한 배신감 말이다. 우선 뒤샹은 작품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작가란 위대한 작품을 위해 혼신을 불태우며 작업에 몰두,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줘야 마땅한 게 아닌가. 그럼에도 이 불성실한 작가는 변기 파는 가게에 가서 소변기 하나 달랑 사와 미술관에 던져놓았을 뿐이다. 그런 것이 작품이라면 예술가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예술가란 무엇이고,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뒤샹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그 강도가 제법 세다. 왜냐하면 불편함의 파장이 근본적인 데 있기 때문이다. 과연 예술작품의 기준은 어디에 있고,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 뒤샹은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작품은 더 이상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무어라? 그럼 뭘 만들어낸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한다. 우리의 생각을 ‘개념적으로(conceptually)’ 바꿔놓는 일이라고, 또한 시각적인 부분에 집중한 예술작품은 이제 장식적인 기능밖에 할 수 없다고, 예술가란 그런 점에서 장식적 작품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고(思考)의 축을 바꾸기 위해 ‘개념을 던지는 자’라고….

    그래서 뒤샹은 일단 예술작품을 소변기로 선택한다. 우리에게 오랜 믿음으로 자리한 예술작품 개념이 확실히 깨지는 순간이다. 소변기는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철학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며, 종교적이라 말할 수도 없는 물건이다. 그는 소변기에 작가의 서명 대신 소변기 제작회사 이름인 ‘Mutt’라는 글자만 남겼다. 이로써 다시 한번 우리에게 오랜 믿음으로 자리한 위대한 예술가의 신화가 여지없이 깨진다. ‘신화 깨기’, 이것은 엄청나게 심기 불편한 일이다.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사에서 ‘개념미술(Conceptualism)’의 장(場)을 연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개념미술이란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이 시각적인 것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그 핵심이 옮아갔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개념적인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독자들이 익히 겪은 바대로, 이제 더는 예술가들이 그림을 예쁘게, 조각작품을 근사하게 만드는 경우를 보기가 어렵다.

    예쁘고 근사하기는커녕 일상에서 흔히 보고 사용하는 물건들을 갖다놓질 않나, 신문이나 광고 사진을 그대로 사용하질 않나, 고물과 폐품들을 마구 늘어놓질 않나, 도무지 예술가들은 그럴 듯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샹은 작품이라는 말 대신 기성품이라는 뜻인 ‘레디메이드(Ready Made)’ 개념을 제안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그 물건(objet·오브제)을 선택한 동기에 달려 있고, 나아가서는 그 물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해석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의 개념은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일상에 가까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작품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걸작)’와 같은 완결된 개념이 아니라 미완의 것이며, 과정(process)의 의미다. 개념적으로 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제 일방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람객도 그 의미를 만들고 ‘발견’하기 위해 동참해야 하는 ‘숙제’와도 같은 것이 됐다. 그렇게 참여해야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 것인가. 현대미술?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을 바꾸는 데 있다. 게다가 예술은 딴 세상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 안에서 삶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생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한다면 그게 어찌 나쁜 일일까. 자, 그럼 이런 관점에서 현대미술을 함께 만나보도록 하자. 즐겁게, 기꺼이 불편해지자.

    현대미술의 난해한 양상의 예로 빈번하게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설치미술(Installation)이다. 설치미술은 내용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복잡하게 늘어놓은 형식에 대해 거부감과 낯설음을 호소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일단 ‘설치’라는 말은 일종의 형식이고 기법이다. 다시 말하면 조각의 방식에서 시작해 그 의미가 확장된 것인데, 조각이 입체적 조형을 다루는 반면 설치는 그보다 훨씬 더 건축적인 공간개념 속에서 작품을 배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작품을 놓는 좌대 위에 얌전히 있는 것이 조각이라면, 설치는 좌대를 던져버리고 공간 전체를 점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인 만큼 조각보다 훨씬 과격한 것이다.

    공간을 점유하면서 설치는 대형화되고, 또 공간 구성에서 사뭇 무대장치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또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 공간 자체가 예술적 체험이 될 수도 있다. 설치는 미술관 안에서도 가능하지만, 그 규모나 성격으로 인해 미술관 밖에서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치적 기법을 만들어냈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실제 모든 형식은 내용적 결합을 통해 완성되는 법이다. 그러니 설치적 기법으로 진전시킨 내용적 계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앞서 설치란 조각의 연장이자 확장이라 했다. 그런데 조각은 처음부터 좌대 위에 얌전히 놓인 작품이 아니었다. 좌대 위에 독립적으로 놓이게 된 것은 사실 현대에 와서 벌어진 일이다. 그 이전 조각은 건축물 속의 부속물로, 혹은 공공 공간의 기념물로 존재해왔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으로 만들어져 그 무거운 지붕을 이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상을 생각해보라. 또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에는 그 모든 이야기를 구성하는 인체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지 않은가.

    조각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와 맥락 속에서 만들어졌고, 또 중요하게는 어떤 의미와 맥락을 갖는 장소에 특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 조각은 작가 개인의 예술 표현으로 그 개념이 바뀌면서, 좌대 위에 놓인 작품은 특별한 의미와 맥락을 갖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의미와 맥락을 갖는 장소에 배치되는 것도 아닌 독자적인 물건이 된다. 현대조각은 그저 창백한 화이트 큐브(white cube·하얀 입방체, 즉 전시장의 조건을 비유하는 말이다)에 전시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조각은 조각의 오랜 역사를 통해 보존해왔던 이른바 의미와 맥락, 그리고 ‘장소성(siteness)’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크리스토(위)와 일리아 카바코프(아래)의 설치작품

    그런 점에서 일단 설치미술을 ‘조각이 잃어버린 장소성을 회복한 것’이라 생각해보자. 물론 여기에서 장소성은 실재하는 장소뿐 아니라 장소적 의미와 맥락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설치미술은 그렇게 뭔가를 늘어놓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인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따라서 우리는 조각 같은 어떤 입체적 조형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서구에서 설치미술이 시작된 때를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으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 들어 예술가들은 공간에 대한 해석을 점차 통합적으로 하면서 환경과 건축적 공간개념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대지미술(Land Art)이 출현하면서 예술가들은 환경 자체를 작품의 소재로 삼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장소성 개념을 던져준 것이다.

    그 가장 좋은 예로 크리스토라는 작가를 살펴보자. 그는 아예 자연과 환경 자체를 포장하는 개념으로 설치작업을 하는 작가다. 그 규모가 충격적일 만큼 크다. 그는 미국의 광활한 대지를 둘러싼 고속도로를 포장한다거나 마이애미 주의 작은 섬 주변을 포장한다거나 해서 자연에 대한 체험을 전혀 다르게 제공한 바 있고, 파리의 퐁네프 다리와 베를린 국회의사당을 통째로 포장해버린 경력이 있다. 그래서 그곳 시민들은 한 달 정도 포장된 다리와 건물을 보면서 지내야 했는데,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익숙한 환경을 전혀 색다르게 바라보는 일이다.

    구소련 출신의 일리아 카바코프는 ‘토털 인스톨레이션’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말 그대로 총체적인 설치미술의 사례를 보인다. 그는 미술관에서 본격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아파트와 공공시설물 같은 건축물을 만들고, 그 안에 침대나 가구, 부엌용품을 비롯한 갖가지 집기를 들여놓아 거의 실제와 다름없을 정도의 완벽한 복원을 이뤄낸다. 그가 복원해놓은 아파트와 공공건물들은 모두 구소련의 것이다. 그는 이미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서구로 망명하면서 조국을 등졌지만, 그의 작품 소재는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희망과 절망, 애정과 혐오, 따스함과 냉냉함, 추억과 악몽 등 구소련에서의 삶에 얽힌 모든 기억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들의 아파트 공간을 거닐어보라 한다.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오인화 작 ‘유실물 보관소’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작가 오인환의 경우를 보자. 올해 제4회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된 오인환의 ‘유실물 보관소’는 전시장 안에 실제 만들어진 보관소다. 이것은 작품이면서도 전시 기간 공식적인 유실물 보관소로 기능했다. 잃어버린 물건이 없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면 이 작품은 작품이 될 수 없다.

    보관소는 점차 관람객이 잃어버린 물건들로 채워지고, 작가는 그 물건들을 촬영하고 기록한다. 때로 물건을 찾으러 온 주인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관람객은 잃어버린 물건을 찾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보관소 진열대에 마치 전시된 작품처럼 놓여진 자신의 물건을 ‘낯설게’ 바라보고, 그리하여 그 물건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인생에서 잃어버리고 되찾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느 유실물 보관소에서라면 이런 성찰을 할 수 있을까. 전시장 안에 난데없이 유실물 보관소가 출현함으로써 우리는 평소 생각지도 않던 인생에서의 유실(流失)과 회생(回生)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참으로 예술가란 쓸데없는 짓을 하는 존재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려고.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차용한 앤디 워홀의 작품

    설치미술이 추구하는 것은 총체적인 공간개념과 환경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어떤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개념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게다가 작품이라는 것은 전시가 끝나면 철거해야 하니 남는 게 없다. 남는 게 없으니 미술시장에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설치작품이 팔린다면 물건이 팔리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idea 혹은 concept)’이 팔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렇듯 보이지 않는 개념을 사는 콜렉터(소장가)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투자가치로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예술가의 정신적 후원자로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니 멋진 작품이 계속 만들어지기 위해서 멋진 콜렉터가 나와줘야 할 텐데….

    설치작업은 정말 ‘설치는’ 작업이다. 설치다 보니 미적 형식의 중심과 주변의 위계질서가 없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의 기준이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작품의 주제도 이미 일상으로 완전히 내려와 앉았기 때문에 예술의 고고한 위상에 대한 콤플렉스도, 열등감도 없다. 작품은 늘 미완성이니 완결된 작품에 대한 강박관념도 없다. 또한 이전에는 사용할 엄두도 못냈던 일상용품과 폐품 등 하찮은 것들이 허다하므로 재료에서도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사라진 셈이다.

    실제 이런 변화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변화는 비단 설치미술만이 아니라 1950년대 후반 이래,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서구에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어서 그렇다. 다시 말해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발생한 모든 변화들, 즉 대중매체 시대로 돌입하면서 위세를 떨치게 된 대중문화, ‘소비가 미덕’이라 할 만큼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된 소비문화 등의 현상이 이전의 많은 가치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는 중심이던 고급문화가 주변이던 대중문화에 밀렸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이제 고급 대 대중에 담겨 있던 문화적 위계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여기서 잠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살펴보자. 포스트모던은 우선 ‘모던 이후’라는 의미의 시기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 조건은 후기산업사회로 명명되는 일련의 경제적 현상과 일치시킬 수 있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대중매체 시대의 문화적 변화는 너무도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미술관에서 추상미술을 감상하는 고급문화 향유자의 일원이 아니다. 우리는 광고와 사진, 영화, 만화, 디지털 영상, 컴퓨터 게임 등을 더 즐기는 대중문화 향유자다.

    예술가들은 또 어떤가. 1960년대 미국의 팝아트 작가들은 마릴린 먼로와 코카콜라, 미키 마우스와 배트맨 등의 대중매체 이미지를 예술적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고급문화냐 대중문화냐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환경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아무도 대중문화를 주변문화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문화가 중심이 될 정도인데, 그것은 우리들이 호흡하기에 가장 가까이 있기도 하지만 말하는 방식이 훨씬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간단치 않다. 대중문화가 우리와 가까이 있지만, 그것이 늘 건강에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고는 거짓말을 하고, 대중스타는 우리에게 희망만 주지 않는다. 그러니 앤디 워홀이 왜 마릴린 먼로를 그렸겠는가. 그것은 마릴린 먼로가 섹스 심볼로 기능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풍경을 그린 것이고, 아울러 그 이미지를 반복함으로써 마릴린 먼로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림자 같은 껍데기만 남은 오늘날 영상문화의 현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낸 골딘의 사진작품(왼쪽)과 차이 코캉의 설치작품 ‘문화혼성탕’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문화’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문화의 언어를 읽어가고, 그 의미구조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또 다른 신화를 ‘해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말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라는 엄청난 바다를 향해 새롭게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항해를 시작하는 일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많은 새로운 미술현상들, 이를테면 페미니즘과 문화의 혼성, 복합문화주의 등이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이전에는 주변으로 내몰렸다면 청소년 세대와 그들 특유의 여러 하위 문화, 소수민족 문화와 제3세계 문화, 이민자 문화, 동성애 문화 등이 처음부터 주변부 문화였다면, 이제 그 문화들이 또 하나의 중심을 만들어가면서 주요 미술현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부 인생만을 찍어온 낸 골딘의 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론이다.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변부로 내몰려 살지만 나름대로 삶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인생들, 그리고 에이즈 환자들…. 중국 작가 차이 코캉의 ‘문화혼성탕’은 문화의 세계화 속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고 섞이면서 혼성의 과정을 겪는 현실을 목욕탕에 비유한 작품이다. 오늘날 과연 순수한 동양문화가 있을까.

    또한 우리는 어떤가. 진정한 한민족의 변함없는 문화적 정체성을 지금도 제시할 수 있을까. 단군신화보다 차라리 퓨전문화가 오늘의 젊은이에게 더 익숙한 문화가 아닐까.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는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짬뽕’한 캐릭터다. 그런데 그 얼굴에서 친근한 우리들의 모습을 읽는다. 하지만 그 모습이 참인지 거짓인지, 착각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이제 현대미술은 ‘문화 읽기’라는 과제로 방향을 돌렸다고나 할까? 예술가들은 그 텍스트를 만들어 우리에게 던져주고, 우리는 이를 읽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편히 놔두질 않는다.

    미술관을 넘어 미디어 속으로

    현대미술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면 금세 다른 언어로 옮겨간다.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또다른 모를 언어를 만들어대니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들이 여러분을 정신사납게 하기 위해 무작정 새로운 것만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니까.

    그들은 급변하는 문화의 지형 변화에 늘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 변동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주도하기 위해 그토록 분주한 것이다. 앞서 다양한 양태의 미술현상을 소개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언제나 일관된 목표, 즉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데는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앞으로도 현대미술에 대한 신뢰를 쉽게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이제 디지털 시대의 미술을 얘기해야 되겠다. 미술은 기술매체의 발달과 그로 인한 문화변동에 따라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만일 현대미술의 흐름을 기술매체 발달과 문화변동의 단계로 본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 모더니즘 시기라 할 20세기 전반, 그러니까 기계적 생산이 활발하던 기계 시대가 있겠고, 20세기 중반의 대중매체 시대,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디지털 시대가 그것이리라.

    문화적 양상에 따른 미술양식의 변화를 보면 기계 시대에는 생산성 문제가 중시되면서 포토몽타주나 새로운 실험사진, 기계적 개념을 결합한 각종 실험 등이 가능했으며, 대중매체 시대에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화론적 배경에서 다양한 문화담론 형성이 집중됐으며, 디지털 시대에는 컴퓨터 문화를 통한 새로운 기술적 결합이 주어졌다고 하겠다.

    그런데 왜 미술은 기술매체와 지속적으로 결합하는가. 그것은 곧 미술이개념적 확장을 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술이 관람객을 만나는 방식에는 참으로 제한이 많다. 기껏 전시회를 통해 제한된 날짜에 일부러 미술관을 찾아가야만 서로 상봉할 수 있다.

    이런 방식에 한계를 느낀 예술가들이 눈을 돌린 것이 바로 기술매체와 그것의 존재방식이다. 다시 말해 기술매체는 커뮤니케이션 체계를 현대화하고, 또 그것의 전달방식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의 그림이 한 점도 팔리지 않아 절망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오늘날처럼 그의 작품들이 화집으로 만들어져 불티나게 팔리고, 엽서로, 기념품으로, 영화로 엄청난 산업을 형성한 것을 알면 기분이 어떨까. 만일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 그는 인터넷에서 최고의 천재화가로 추앙받으면서 인기 만점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술관에서 조용히 전시회를 하고 끝나는 일보다 훨씬 진보적이지 않은가. 기술매체란 그렇게 미술의 존재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이동기 작 ‘아토마우스’

    최근 들어 회자되는 ‘미디어 아트(Media Art)’라는 것의 원리가 바로 그런 것이다. 미디어 아트는 기술매체를 인간적으로 이해해 인간의 감각을 새롭게 살리는 일과 결합하고, 작품의 유통경로를 미술관이 아닌 대중소통의 회로와 결합시키며, 나아가 기술주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문화적 인터페이스를 실천할 가치론을 제시하는 것이 그 본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잘 알지만, 이를 미디어 아트의 맥락에서 보는 일엔 그다지 익숙지 않다. 쉬운 예로 백남준의 첫번째 인공위성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떠올려보자. 이 작품은 비디오 아트라는 것을 인공위성을 통해 방영함으로써 TV 문화가 갖는 시공간의 초월이라는 특성을 최초로 실현시킨 작품이다. 또한 대중문화의 속성에 개입해 그 안에서 판치는 상업적 요소를 거둬내고 어떤 평화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미디어 아트의 매우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미디어 아트가 기술매체의 속성을 살려 미술의 개념적 확장을 꾀한다고 했는데, 실제 그것의 가능성은 엄청나다. 1984년에 미술관이 아닌 거실에서 TV를 통해 예술작품을 감상하리라고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더욱이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작품을 언제라도 감상할 수 있다. 예술작품이 미술관을 벗어나 정보회로를 네비게이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은 여전히 비물질적인 것, 그리고 개념적인 것이다. 오히려 작품은 버추얼 리얼리티나 하이퍼텍스트 등의 개념 속에서 또 다른 주제를 만들어간다. 가상현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예술적 소재로 사용하면서 더욱 확장된 현실개념을 말하고, 비선형적인 방식의 서사구조로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제 예술가들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장르 구분 없이 총체적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미디어 아트란 어떤 정해진 양식이나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매체의 예술적 결합’이라는 방법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성강이 ‘마리 이야기’를 만들었고, 전통적인 미술대학 교육을 받고 화가로 활동하던 조범진은 ‘아씨와 씨팍’이라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화가 출신인 박재동도 시사만평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오돌또기’를 통해 작업한 바 있다.

    어쩌면 우리 대학의 미술교육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잘 된다면, 우리는 미술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영상문화 속에서도 충분히 예술적 감성과 개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변화란 예술가들이 거의 1세기 이상 꿈꾸어왔던 미술의 확장이 아닌가.

    하지만 그 변화가 이뤄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제도적 질서와 법칙들이 혼란스러워지는 불편함을 겪어야 할 것인가. 현대미술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위해 저 높은 정신세계로부터 우리네 낮은 일상의 세계로 내려왔다고 했는데, 이제 더 확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 불편함…. 그러나 불편함의 정체를 알면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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