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기술의 힘을 빌어, 청중과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도

  • 글: 황성호 한국예술종합학교·음악학 / 작곡가 shhwang@knua.ac.kr

    입력2003-01-22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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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소통의 모더니즘’을 넘어 대중 곁으로 달려가고 있는 현대음악.
    • 기술의 발달은 청중의 감정, 뇌파와 근육 상태까지도 음악적 표현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인간·음악·기술, 그 접점은 어디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대음악을 ‘동시대 음악(contemporary music)’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이 개념으로 본다면 현재 작곡돼 연주되는 모든 음악들, 즉 미국의 잘 나가는 작곡가인 존 콜리리아노의 작품만이 아니라 자우림의 노래도, 황성호의 컴퓨터 음악도 다 현대음악이다.

    아울러 음악사적으로 현대음악은 모던뮤직(modern music)을 뜻한다. 이는 모더니즘 양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시대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 모더니즘 음악을 하나의 양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포괄적이지만, 서양음악사에서 모더니즘은 1910년경 표현주의의 무조음악으로부터 음렬음악의 전성기인 1950, 60년대까지의 음악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14세기 새로운 경향의 음악을 뜻하던 아르스 노바가 이제 과거의 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처럼 모더니즘 역시 과거의 것이 되고 있다.

    일반인들만이 아니라 현대음악을 모더니즘으로 파악하는 사람들 또한 이를 난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음악이라 생각한다. 낯설고 이상한 소리들, 어설픈 해프닝이라고 평가하며 과장된 해설 등은 가히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익숙함을 거부하는 이 반동의 소리들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왜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일반인들이 볼 때 무모한 일들을 자행하는가? 전통 가치로부터 이탈을 시도한 이 시기 음악들은 기존 음계와 형식, 더 나아가 어법과 상식을 거부했으며 녹음기, 전자매체, 컴퓨터 등 테크놀로지의 산물을 음악의 도구로 삼으면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모색했다. 이제까지와 다른 모든 것이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를 통해 실험됐다. 이 모든 거부와 이탈을 기존 질서의 붕괴라는 시대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음악을 소리를 통한 언어라고 한다면, 어느 시대나 작곡가들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통용되는 음악 단어와 문법으로 음악 언어를 구사한다. 바다처럼 거대한 공통의 관습 속에서 성장한 작가는 자신만의 어법을 통해 제 생각을 주장함으로써 개성을 찾지만, 그도 공통 관습에서 본다면 큰 강의 한 거품 정도인지 모른다. 바흐나 하이든만 하더라도 자기 개성, 작가 의지를 주장하기엔 그를 둘러싼 사회의 힘이 너무 컸다. 우리는 바흐의 음악이 고용주가 바뀜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공과 맺은 불평등 고용 계약서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경외하는 대 작곡가가 주변에 얼마나 종속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지만 원하는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베토벤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작가의식과 그 위대성을 알게 된다. 작가의식은 곧 개인의식의 발현이었으며 시민 정신의 상징이었다. 이를 통해 베토벤은 형식 위주의 고전주의를 벗어나 낭만 정신을 이끌 수 있었으며, 공통 관습의 양식화를 거부한 그의 작가 의식은 후대에 의해 양식화되면서 새 사조인 낭만주의의 근원이 된다.



    불소통을 전제로 한 모더니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바그너에 이르러 작곡가는 하이든이나 바흐와 같은 일방적 고용인이 아니라 한 사회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단계에 오른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어 작곡은 철학적 사고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작곡가의 신분 상승 과정은 음악에 있어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작가의식이 강해지면서 작가의 음악 언어는 일반인들의 것과 먼, 개인적인 것이 되어 소통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감각과 교양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더 많은 생각과 작가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공통 관습의 중력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음악은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이르러 정치적·사회적·음악적 이유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 분화 과정에서 자신의 어법을 찾는 수단으로 기존 조성이라든가 음계를 벗어나는 일들을 꾀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반음계 화성을 구사하여 조성을 흐리게 했으며, 이에 반해 클로드 드뷔시는 온음만으로 이루어진 온음음계라든가 옛 교회선법, 민속음계 등을 사용해서 조성을 비껴갔다.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옥타아브 안의 12음을 대등하게 구사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조성을 타파했으며, 더 나아가 반음의 반음을 사용하는 미분음계를 사용한 체코의 알로이스 하바와 같은 이도 있었고, 심지어 한 옥타브가 아니라 두 옥타브 개념의, 즉 두 옥타브 사이를 일정 간격으로 나눈 음계를 구사하는 일도 생겨났다.

    또 종래 기능화성 체계에서 벗어나 음향 개념으로 음들의 집합을 다루기 시작했고, 리듬과 박자, 강약의 구성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사(敍事)나 감정 대신 주변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인상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빈의 쇤베르크, 베르크와 같은 작곡가들은 인간의 정신을 탐색했다.

    기술의 힘을 빌어, 청중과 함께

    클로드 드뷔시

    핵분열처럼 작가들은 기존의 모든 개념을 해체한 후 나름대로 재구성했다. 사실 20세기 초반의 제1차 대전, 사회주의 혁명, 제2차 대전 등은 기존 체제를 부정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주었다. 정치·사회·경제구조의 대변혁, 대중이라는 계층의 출현과 교육 및 대중문화의 확대는 음악문화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음악가들은 음악이 갖는 사회적 기능에 눈을 떴으며, 때로는 음악을 사회주의 전파의 도구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제3세계 음악가들은 민족주의 경향으로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을 해결했으며, 문화 강대국의 작곡가들은 제3세계 음악으로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과학정신에 매료된 음악가들은 음악을 논리적이며 구조적인 것으로 몰아갔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녹음기, 컴퓨터, 전기악기 및 전자음악 신시사이저, 대형 PA시스템, 멀티미디어 등 새로운 개념의 음악도구와 전달방법을 사용해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음악가도 나타났다.

    바벨탑이 수많은 방언에 의해 무너졌듯 불안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 누가 이들의 언어를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 소통의 어려움은 작곡가들 자신이 일반인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음악은 자폐증에 빠진 아이의 웅얼거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기에 소비에트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현대음악을 전혀 생산성이 없는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산물로 매도했는지 모른다.

    낯선 언어를 구사하면서, 또 존립 배경이 점점 희미해지는 가운데 현대음악 작곡가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잠시 고교 국어시간을 떠올려보자.

    국어시간에 우리는 고전문학과 더불어 현대문학을 배웠다. 자유시, 현대시, 상징시에서 각 시어가 지닌 원개념과 보조개념을, 그리고 시어마다 숨어 있는 암호들을 해독하여 나름대로 의미 부여하는 것을 배웠다. 즉 우리는 제3자의 표현을 통찰하고 이해하는, 또 그의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드는 훈련을 받았으며 결국 우리 내부에 잠재된 수많은 감정들을 시인의 것과 일치시킬 수 있었다. 한마디로 국어시간은 단순히 현대문학을 이해하는 시간이라기보다 다른 이의 감정을 세심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결코 안식의 시간이 아니었다.

    음악과 미술시간은 어떠했던가? 이 시간은 한마디로 쉬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회 가는 이유를 물으면 “좀 쉬기 위해서”라고 한다. 맞다! 그들이 바라는 음악은 그들로 하여금 숙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과 위안을 주는 기호식품과 같은 것이다. 즐거움과 편안함. 이렇게 생각하니 열린 음악회가 누리는 인기를 이해할 수 있으며 작곡가들의 쇼맨십도 고맙게 느껴진다.

    하지만 즐거움이 정말 ‘모든’ 것일까? 적절한 템포가 유지되면 으레 기계 인간처럼 박수를 치는 것이 즐거운 것일까? 축구 경기장의 응원처럼 감정마저 복제된 듯 하나같이 즐거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음악회장에는 현실이 없다. 음악회장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약 먹은 것처럼 현실을 떠나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듣는 훈련이 안 돼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작가에 대한 무관심과 음악에 대한 기대 결여로 나타난다. 진정한 작가란 무릇 문제의식을 갖고 고민하는 사람이다. 요즘처럼 경제적 이윤추구가 치열한 세상에서 문제의식 운운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바로 그런 것들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투영하며, 그들의 사고를 통해 진지해진다.

    작가에 대한 관심은 곧 자기 성찰로 이어진다. 또한 작곡가의 작업은 과거에 비해 더욱 전문적이어서 감성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음악을 이해하려면 이에 관한 역사적 관심과 더불어 음악에 관계된 여러가지 지식도 필요하다.

    또한 진정한 작가는 세련되고 정제된 표현을, 또는 실험을 통해 늘 새로움을 선보여 우리를 즐겁게 하며 또 앞으로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그들은 주문배수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매력 넘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술과 정신이 충만한 작가는 늘 진지하며, 자신 넘치고, 또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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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전위작곡가 크세나키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할 광대만 기대하고 있다. 이런 작가가 누굴까? 그런 매력 있는 작곡가가 있다면 왜 이런 글이 존재할까?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벼랑에 몰린 사람과 같다. 사회의 문화 인력권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 그 과정은 작가에게는 매우 멋있는, 의미 있는 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에 도취된 나머지 그들은 너무 멀리 나가버린 것이다.

    예술가들의 개인의지는 어쩌면 18세기부터 서서히 발아된 시민정신의 구체적인 표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금세기 두 번의 대전(大戰)과 커다란 사회변화에서 받은 충격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로 침잠한 예술가들은 표현보다는 오로지 실험에만 몰두했다.

    물론 크세나키스, 루토슬라브스키, 블레즈와 같은 작곡가들처럼 표현을 위해 실험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실험에만 집착한 작곡가들이 즐기는 말은 “나는 무엇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학교와 현대음악계라는, 사회와 유리된 수도원의 울타리 안에서, 연금술사처럼 결과는 없이 무한한 실험만을 지속해온 그들에게 대중문화와 매스 미디어로 대변되는 바깥 세상은 너무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이렇게 그들의 안전지대에서 마피아 보스 같은 스타 작곡가들을 앙모하며 자신들끼리도 소통하기 어려운 언어로 근근이 존재해왔다. 유일한 위로는 국가나 공공기관, 사회재단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어지는 페스티벌과 음악회에서의 연주, 그리고 언젠가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이다. 하물며 우리 작곡가들은 어떠한가? 원로 음악평론가 박용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이야기한다.

    “형식의 해체를 몰고 온 유럽 중심의 문화예술은 세기말을 향해 치졸화로 비탈길을 달렸다. 그 뒤꽁무니를 잡고 숨가쁘게 따라온 우리나라의 문화예술도 가관이었다.”(객석 1997년 1월호)

    우리나라의 현대음악은 정신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의 역사, 사회와 진정한 상관관계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서양 정신이 우리 것인 것처럼, 서양의 현상이 우리의 현상인 것처럼 착각하곤 했다.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은 독일의 모더니즘을,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미국의 모더니즘을 주장한다. 마치 국제 문화의 대리전 양상을 느끼게 한다. 어찌 그들의 모더니즘이 우리의 모더니즘이 되며 이를 어떻게 우리 이웃들에게 이해하라고 할 것인가?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21세기에도 이렇듯 국적 없이 막연한 구미음악 취향은 현대음악과 청중을 더욱 멀어지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 창작음악가들은 전통과 현실, 과거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사회와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때 청중은 그들의 동시대 음악으로 돌아올 것이다. 현실에서 대중문화가 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를 예술가는 해야 할 의무가 있다.

    20세기말, 현대음악계의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20세기 초·중반까지 빈번했던 해체적 실험 경향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960년대를 풍미한 다름슈타트 유의 조성·음계·화성·선율·리듬의 해체, 그리고 음향 위주의 악기 연주법 확대 등 기존 가치를 넘어선 실험들은 이제 기법의 하나로 정착됨으로써 원래의 의미를 잃었다. 따라서 1960년대까지를 해체의 시기라고 한다면 그 이후의 기간은 통합의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래 실험성만으로는 누구나 난해한 것으로 생각한 이 기법들이 오랜 시간 우리 귀에 익숙해진 다른 기법과 공존하면서, 청중은 더 이상 그것들을 낯설어하지 않고 현대의 독특한 어법, 어투로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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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신시사이저인 테레민복스를 발명한 러시아 과학자 레프 세르게이비치 테르멘

    이러한 경향은 할리우드 영화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작곡가의 표현 세계를 폭넓게 만들어 존 콜리리아노, 알프레드 슈니트케, 볼프강 림처럼 대중적으로 성공한 현대음악 작곡가도 생겨나게 했다. 또한 지나칠 정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개념적 작곡 태도에 싫증이 난 일부 작곡가들은 과거 형식으로 돌아가는 복고 경향도 추구하고 있다. 슈니트케의 콘체르토 그로소와 같은 바로크 양식의 원용, 소나타와 교향곡과 같은 고전 낭만주의 형식의 일반적인 채용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고적 분위기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아르보 페르트, 페테리스 바스크스 등과 같은 발틱 지방의 작곡가들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또한 복고란 점에서 모차르트나 브람스 시대와 다른 방식으로 조성(調聲)하려는 회복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콜리리아노, 슈니트케, 페르트, 구레츠키 등의 음악이 좋은 예다. 이러한 흐름은 청중의 관심을 끌어 1991년에 출반된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는 전세계에서 100만장이나 팔렸다.

    펜데레츠키, 카겔 등 과거 실험음악의 거장들 역시 노령화하면서 조성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작곡가들이 노년으로 가면서 보수성향을 지니는 것은 이전에도 흔히 나타난 현상이다. 종래의 극적 구조에 대한 집착에서 탈피한 미니멀 음악들도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의 실내악 수준에서 존 애덤스의 대편성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확대되었으며 영국의 개빈 브라이아스, 마이클 니만, 독일의 하멜 등으로 이어져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현대음악의 두드러진 경향은 다른 문화나 장르와 혼합하는 하이브리드 경향이다. 세계화와 더불어 이러한 현상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과거 서양음악에서 볼 수 있었던 이국 취미와는 다른, 본질적 측면에서 타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절충하려는 시도는 이미 1960년대 미니멀 음악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친 바 있으며 최근 더 많은 신경향의 음악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단순하면서 명상적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는 몰튼 펠드먼, 크로노스 현악사중주단이 선보인 베트남·이집트 등 제3세계 작곡가들의 음악들이 대표적이다. 또한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국악에 심취해 있는 알반 호바네스의 음악을 들어보라.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후반 발틱은 물론 아시아·남미·호주 등 다양한 지역에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다. 1960~70년대 독일 모더니즘을 답습하고 있는 우리 작곡계 입장에서 본다면 주목해야 할 태도이며 요구되는 가치관의 변화다.

    문화와 장르의 혼합

    그리하여 지역마다 나름의 특색과 주제가 있는 현대음악제를 개최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점차 음악문화가 특정 지역 위주가 아니라 다원화함을 뜻한다. 여러 문화권에서 서구 현대음악이 일방적인 의미를 갖는 일은 점차 없어지고 있고, 잦은 여행과 국제 음악제, 위성방송, 인터넷 등으로 글로벌해진 환경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다원화 경향은 지역 문화에서만이 아니라 작품 및 연주회에서의 크로스 오버 경향으로도 나타난다. 이는 기본적으로 작가 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관계가 좀더 밀접해진 문화상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취향보다 작품 시장의 요구에 더 민감한 예술가들은 익명의 소비자들을 위한 서비스에 충실한다. 음악시장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대중문화는 종래와 달리 풍부한 제작비와 뛰어난 환경 속에서 고학력의 문화기술자들에 의해 생산되어 고도의 유통구조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리하여 다양한 선택 가능성 속에서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장르의 것을 필요에 따라 향유하는 음악 소비자들이 생겨났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간격을 좁힌, 절충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전위문화의 실험성까지도 흡수하고 있다.

    고급문화랄 수 있는 현대음악 분야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음악이 고급문화 속성을 지니면서도 대중의 새로운 욕구에 부응해 대중성마저 획득할 수는 없을까? 그리하여 청중의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을까? 어느 한 편에 편중되지 않은 균형감각을 찾을 수는 없을까?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음악들이 70년대 전자악기와 테이프 녹음 기술의 발달에 따라, 또 그간 양성된 풍부한 음악인력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뉴욕 WNYC의 진행자이며 음악비평가인 존 쉐퍼는 이렇게 나타난 모든 음악들을 ‘새로운 사운드들(New Sounds)’이라고 했다. 절충문화, 중간문화로서의 ‘새로운 사운드들’은 청중 재확보란 점에서 무엇보다 연주가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신선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청중에게도 환영받았다. 사무엘 펠맨(Samuel Pellman)은 지금까지의 음악 도구 기술의 발전과 음악과의 상호작용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음악 양식이 변함에 따라 음악 기술도 변하지만, 음악 양식도 청중의 사회·경제 조건과 관계 변화에 따라 변한다. 음악 양식은 테크놀로지 자체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데 음악 테크놀로지는 최신 테크놀로지에 의한다. 예를 들어 오르간의 공기 풀무술은 피아노에 이르러 기계 기술로 대체됐다. 이 또한 아날로그 신시사이저의 전기 기술로 대체되었으며 다시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대체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기 기타의 등장으로 대단위 대중음악 공연이 가능해지고, 코러스·와와·플랜져 등 부속 액세서리의 발달이 기타 연주 테크닉과 대중음악 스타일을 바꾼 것과 같은 방식이다.

    로버트 무그와 같은 기술자와 많은 음악가들의 요구가 일치해 탄생한 1960년대의 신시사이저는 이후 대중매체를 통해 전자 기술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 도구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더 큰 변화는 1982년 미디(MIDI·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 출현 이후에 일어났다. 이는 회사마다 다른 방식의 전자악기들을 호환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컴퓨터를 포함한 네트워크로 사용되는 미디는 연주된 음악을 악보로 바꾸어주기도 하고, 콘트롤 데이터와 음색 정보를 저장하고 불러들인다.

    다채널의 연주 데이터 녹음과 편집, 재생이 용이한 미디 시퀀싱의 성공으로 수많은 개인 홈 스튜디오가 등장했으며, 아티스트들은 혼자 힘으로 레코딩해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미디 시퀀서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페르마타, 아고기크(리듬을 기계적으로 다루지 않고 속도에 완급을 주어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연주기법), 템포 루바토(음의 길이를 조금 바꾸어 빠르거나 느리게 하는 것) 등을 음악적으로 유연하게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디 시퀀서 프로그램들은 이를 실시간 레코딩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새로운 악기, 새로운 교감의 등장

    1980년대 중반 이후 미디 시퀀서, 디지털 신시사이저, 마이크로 컴퓨터를 무대 위로 올리기 시작하면서 라이브 공연자는 스튜디오에서나 가능했던 강력한 테크닉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음향 또한 미리 녹음된 미디 명령들에 의해 연주되기 때문에 테이프 음악 재생과 차이가 없게 되었다.

    실시간으로 컴퓨터와 사람이 인터랙티브하게 작용하려는 시도는 1990년대부터 있었다. 마크 코닐리오와 몰튼 수보트니크가 개발한 인터랙터(interacter)는 공연중 특정 조건에 대해 일정한 명령 발생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프랑스의 밀러 푸케트와 데이비드 지카렐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미디 명령을 처리하고 반응하는 오브제를 제공하는 MAX 프로그램을 개발했다(MAX란 이름은 컴퓨터 음악의 대부 맥스 매튜스를 기려 지어졌다).

    무용 동작에 따라 음악이 생성되거나 변화되는 시도는 1965년 존 케이지가 데이비드 튜더 등의 도움으로 커닝햄 무용단과 공연한 ‘변주곡Ⅴ’에서 테레민(theremin)을 사용, 소리 발생에 동작 제어의 개념을 시도한 이래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미디의 출현은 기존의 다양한 센서 값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미디 기기에 적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더욱 정교한 소리 제어를 가능하게 했다. 실시간 제어는 초음파·압력·온도·습도·빔 등 여러 센서들과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 이들을 통해 얻은 값을 미디 데이터화한 후 제어에 사용하는 것이다. 배우의 동작이나 위치를 미디 값으로 변환하여 이미 만든 음악 패턴들을 재생하거나 변화시키는 등 많은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 1986년부터 하이퍼 인스트루먼트를 실험한 MIT미디어 랩의 토드 맥코버의 최종 목표는 요요마와 같은 최고의 연주가가 더 폭넓은 음역으로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만들어진 하이퍼 첼로를 피터 가브리엘리가 로스앤젤레스 필과 협연하여 음반으로 출시하기도 했다.

    사람이 의자에 앉아 허공에 팔을 움직이면 음악이 연주되는 센서 의자(sensor chair)는 청중이 실제로 앉아 제어(연주)함으로써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 성공으로 그는 디지털 바튼, 그리고 여러 해 전 화제를 모았던 브레인 오페라 프로젝트를 완성했고, 최근에는 이를 장난감에 응용, 음악적 훈련 없이도 아이들이 쉽게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센서를 이용한 이러한 실시간 제어는 곧 인터랙티브 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개발자가 이들 프로그램을 위한 오디오/비주얼 오브젝트를 개발해 선보이고 있다. 센서 값이 소리만이 아니라 영상이나 조명까지도 제어함에 따라 멀티미디어 공연이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1980년대 도스(DOS)상에서 프랙탈 이미지나 BMP 파일 이미지의 색 팔레트를 미디 노트 명령이나 벨로서티 값으로 제어했던 프랙튠(Fractune), 그리고 이보다 진일보한 비디오델릭(Videodellic) 등이 있다.

    비디오델릭은 카메라로 촬영하는 실시간 영상을 미디 신호나 입력 오디오 신호로 변형시키는 프로그램으로 실시간 첼로 연주의 음역이나 강도 등에 따라 색을 바꾸는 등의 작업이 가능하다. 따라서 연주나 동작에 정확히 맞춰 실시간 영상 변화가 일어나 정교한 인터랙션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MAX와도 연계되어 더욱 정교한 실시간 인터랙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현재 SoftVNS, 지터(Jitter), 네이토(Nato) 등의 프로그램들이 개발, 사용되고 있다.

    현대의 기술 발달은 몸짓과 표정만이 아니라 뇌파, 근육의 상태 등 또 다른 내면까지도 인터랙티브 표현 방식의 요인으로 삼게 하고 있다. 미래 예술의 소재와 표현 방식의 한계를 정하기란 쉽지 않다. 앞으로 공연이 어떤 양상으로 변할 것인지는 누구도 주장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기술 발전과 더불어 우리의 경험 역시 미래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음악을 작곡가 중심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21세기초 지금의 음악문화는 분명 청중과의 인터랙티브가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종래 청중의 기호에 맞추거나 작가의 의도로 몰아가려는 단방향이 아니라 청중 반응을 작품의 구성요소로 접수하여 다시금 표출하려는 이 태도는 앞으로 음악을 비롯한 많은 공연 예술의 형태를 변화시킬 것이다. 게다가 인터랙티브 환경인 인터넷이 음악문화의 중요한 터가 되면서 창작음악에 새로운 인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간 현대음악은 우리의 것이라기보다 서구의 선진문화 양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세계무대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 음악 테크놀로지 분야를 보면서 ‘이제 우리 현대음악이 제자리를 찾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중심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오늘날의 현대음악은 관심 있게 지켜 볼만한 것이다. 각 나라 작곡가들의 사고와 관심을 읽으면서 그들의 표현 양식과 기술에 관심을 가져보자. 또한 그들과 우리 작가와의 차이와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우리 현대음악의 고유성과 세계성을 생각해보는 일은 의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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