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한 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도

  • 글: 김현준 재즈비평가 artaylor@hanmail.net

    입력2003-01-22 15:4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재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초와 마찬가지로, 주로 20·30대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이는 새로운 음악적 패러다임에 대한 갈구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재즈는 이미 100년의 역사를 지닌 서양문화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새로움을 안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듯 재즈는 언제나 가까운 듯 멀게만 느껴진다.

    재즈처럼 그 매력과 특성을 만끽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음악이 또 있을까. 재즈는 첫눈에 빠져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문득 깨닫게 되는 그것처럼 깊고 넓고 복합적이다.

    대한민국에서 재즈를 듣는다는 것

    재즈가 멀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애초 우리 문화 속에 재즈가 온전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우리나라에 유입된 재즈는, 그러나 1970년대가 지나도록 클래식이나 팝 음악처럼 대중을 위한 음악으로 재정립되지 못한 채 부유를 거듭했다. 지금도 서울, 대구, 인천, 부산 등지에 재즈를 듣는 이들이 더 많은 이유는 그곳이 미군 주둔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 중심의 문화 편중 현상도 한몫했겠지만, 적어도 재즈가 ‘우리의’ 음악이 아닌 ‘그들의’ 음악인 시절이 훨씬 더 길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음악인들 사이에 새롭게 부각된 재즈의 중요성은 10여 년의 세월을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뒤늦게나마 공연문화나 연주생활에 있어 나름의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재즈를 흔히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생각하지만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그 대중성이란 극히 일부의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중적으로 널리 회자될 수 있는 스타일의 재즈는 전체의 10~20%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재즈에 대한 관심을 갖는 이가 10이라면 1년 뒤에는 3으로 줄고, 다시 1년 뒤에는 채 1도 못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까스로 그 곁에 머물러 있게 된다. 재즈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들을수록 어려운 것이 또 재즈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재즈에 대한 관심을 쉽게 접어버릴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재즈의 역사, 그리고 재즈 이해를 위한 세 가지 코드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름의 답을 대신한다.



    장르의 변천으로 살펴본 재즈의 역사

    ① 초기 재즈(Early Jazz)

    재즈는 멕시코 만과 연해 있는 미국 남부의 항구도시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흑인 노예 후손들의 정서를 담고 있는 블루스(Blues)가 그 모태가 됐다. 뉴올리언스는 식민지 시절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군대 유입이 빈번했고 이들을 맞기 위한 군악대도 발전해 있었다. 군악대를 형성하는 주 악기는 관악기다. 주로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기존의 블루스와 달리, 관악기로 연주하는 블루스는 190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약 20년간 변형, 발전하여서 초기 재즈가 되었다. 최초의 재즈 녹음은 1917년, 백인 음악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학자들은 이미 1910년대 초반에 초기 형태의 재즈가 연주되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흑인과 백인 연주자들이 함께 연주한 초기 재즈를 발생지의 지명에 따라 ‘뉴올리언스 재즈’라 부른다.

    유흥가인 스토리빌에서 주로 연주된 뉴올리언스 재즈는 반복적이고 짧게 끊어지는 아주 단순한 리듬 패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군부가 지역의 퇴폐문화 일소를 명분으로 스토리빌을 강제 폐쇄하면서 뉴올리언스 재즈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처음 미국 북부 시카고로 옮겨갔던 본거지는 다시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뉴욕으로 건너갔다. 재즈는 1930년대 초까지의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문화 암흑기를 이겨낸 뒤 스윙(Swing)이라 불리는 안정된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재즈의 근간이라 일컬어지는 스윙의 독특한 느낌(Swing Feel)은 여러 중요한 음악적 현상들을 불러일으키며 발전을 거듭했다. 네 박자를 기준으로 해서 첫 번째와 세번째 박자에 박수를 치게 되는 다른 음악과 달리 두번째와 네 번째에 박수를 쳐서 엇박자의 효과를 내는 리듬 패턴은 바로 이때 정착된 것이다.

    스윙은 재즈의 한 장르이자 리듬 패턴의 근간이며 매우 흥겨운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에, 처음 재즈를 듣는 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금도 처음 재즈를 들으며 그 매력을 느끼게 되는 대상이 스윙인 경우가 많은데, 초기 재즈가 미국 전역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스윙을 통해서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재즈는 당시의 전형적 대중음악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라디오 방송의 발달과 더불어, 주로 댄스홀에서 연주되던 스윙은 현대적 의미에서 미국이 낳은 여러 춤곡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뉴올리언스 재즈를 연주했던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스윙을 일구어낸 주인공이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지, 글렌 밀러가 모두 이러한 스윙의 거장들이다.

    한 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

    스윙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위)과 글렌 밀러(아래 왼쪽), 듀크 엘링턴

    ② 모던 재즈(Modern Jazz)

    1930~40년대, 스윙을 통해 음악적 역량을 다져온 일련의 젊은 음악인들이 스윙보다 예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새 스타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델로니어스 몽크, 버드 파월 등으로 대변되는 이 신세대 음악인들은 춤곡으로 연주하던 스윙에서 탈피해 소규모 재즈 클럽에서 연주하는 감상용 음악으로 재즈를 창안했다. 이것이 바로 비밥(Bebop)이다.

    1930년대말에서 1940년대초 비밥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는데 이로 인해 1940년대 재즈계는 스윙과 비밥이 혼재된 상태가 되었다. 연주자 개개인의 연주력이 유난히 강조된 비밥은 보수주의자들의 극심한 지탄과 혁신주의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상당수 음악인들이 비밥의 음악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음은 물론이다. 아직 대중적으로는 스윙이 대세였지만 비밥이 초기 재즈 시대를 잇는 모던 재즈란 새 물결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비밥이 흑인 음악인 중심 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백인 음악인들이 비밥의 매력에 휩싸이게 됐지만 지금도 비밥은 ‘흑인들의 재즈’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재즈는 음악적으로 한층 더 정제됐다. 흑인 중심의 비밥과 달리 백인 정서에 부합하는 또 다른 비밥, 즉 쿨 재즈(Cool Jazz)가 등장하면서 비밥과 쿨 재즈는 모던 재즈를 형성하는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부분의 쿨 재즈 연주자들은 비밥을 그 교과서로 삼되 빠르고 변화무쌍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비밥에 비해 좀더 여유로운 정서를 드러내는 연주를 했다.

    쿨 재즈의 시작은 재즈에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리 멀리건, 리 코닛츠, 스탄 겟츠, 쳇 베이커 등이 쿨 재즈를 대표하는 백인 음악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만의 독창적 연주 스타일을 창안한 재즈의 거장들이다.

    언뜻 보기에 매우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비밥과 쿨 재즈는 기본적으로 스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들을 총칭하는 모던 재즈는 현대 재즈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됐다. 재즈를 듣는 입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대체로 모던 재즈는 재즈를 듣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양적으로도 모던 재즈는 재즈 전체에서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모던 재즈는 1940~60년대, 오랜 기간 전성기를 구가했다.

    ③ 프리 재즈(Free Jazz)

    이 세상 어떤 예술 분야에도 아방가르드(Avant Garde), 즉 전위예술이 존재한다. 유난히 강한 실험성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이들은 기존의 그 어떤 형태의 예술도 철저하게 부정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재즈에서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경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프리 재즈라 한다. 오넷 코울먼, 세실 테일러, 앨버트 아일러, 돈 체리 등이 그 선구자다.

    프리 재즈 음악인들은 1970년대가 지날 때까지 재즈를 욕되게 했다는 오명을 쓴 채 수많은 문제작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재즈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유럽 쪽으로 넘어가면서 이들의 진취적 음악성은 많은 동조자들을 양산하기에 이르른다.

    프리 재즈가 재즈의 역사에 있어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은 가장 큰 이유는, 대중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남에도 실험정신을 꾸준히 실천에 옮겼다는 데 있을 것이다. 사실 처음 재즈를 듣는 이들에게 프리 재즈는 음악이 아닌 소음 같다는 인상을 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프리 재즈는 많은 연주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획득했으며 젊은 시절 한때 프리 재즈에 몰두하지 않은 음악인이 드물 정도로 그 심오한 음악성을 인정받고 있다.

    재즈는 모던 재즈 시기를 거치면서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 자리잡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는데, 프리 재즈는 그중에서 가장 마니아적 취향이 강한 장르다. 현재도 미국, 유럽 등 전세계에서 많은 프리 재즈 음악인들이 수준 높은 연주력을 과시하며 지속적 실험을 통해 매년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

    ④ 퓨전 재즈(Fusion Jazz)

    모던 재즈와 프리 재즈가 혼재하는 1960년대를 보내면서 많은 재즈 음악인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정도 정형화한 모던 재즈나 너무 난해한 프리 재즈 사이에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1960년대말 모던 재즈의 거장 중 한 사람인 마일즈 데이비스는 재즈 록(Jazz Rock) 퓨전이라는 또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냄으로써 재즈 역사상 최고의 문제작들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 록 음악이 남긴 진한 흔적이 재즈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인데, 재즈의 리듬과 달리 맺고 끊는 맛이 강한 록 음악의 비트(Beat)와 전자 악기를 사용한 새로운 음색의 도입이 재즈 록 퓨전의 근간이 되었다.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프리 재즈가 시도될 때보다 거부감을 더 강하게 드러냈지만 대중은 매우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등, 비난과 호평이 엇갈리는 상황을 연출했다.

    사실 1970년대 초에 본격화한 초기 재즈 록 퓨전은 상당히 난해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의 노력이 또 다른 실험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재즈 록 퓨전이라는 말 대신 퓨전 재즈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한 197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마치 1930년대 중반의 스윙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성이 매우 강한 장르가 되었다. 초보자의 상당수가 퓨전 재즈를 통해 재즈와 첫 인연을 맺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재즈보다 록 음악에 훨씬 더 가까운 느낌을 주는 등, 퓨전 재즈는 재즈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웨인 쇼터, 칙 코리아 등의 초기 재즈 록 퓨전 음악인 외에, 팻 메시니, 보브 제임스, 마커스 밀러 등 또한 넓은 의미의 퓨전 재즈 연주자라 할 수 있다.

    ⑤ 현대 재즈(Contemporary Jazz)

    스타일에 있어 재즈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다양성이다. 재즈의 이미지를 특정한 한두 가지로 귀결시키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즈가 지닌 이미지는 그 폭넓은 리듬 패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몇몇 요소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 ‘재즈를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은 우문(愚問)일 수밖에 없다. ‘어떤 장르의 재즈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는 1980년대 이후의 퓨전 재즈를 비롯, 현재 행해지는 모든 장르의 재즈를 일컬어 현대 재즈라는 다분히 애매한 명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재즈라는 음악의 한 흐름이 시대의 변천에도 아랑곳없이 꾸준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뉴올리언스 재즈가 연주되는 곳이 있으며, 프리 재즈든 모던 재즈든, 그 어떤 스타일에 대해서도 모두 ‘현재의 재즈’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현대 재즈가 보여주는 경향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장르의 파괴와 융합을 통한 새로운 스타일의 창조다. 지금껏 재즈가 만들어낸 장르들이 주로 재즈를 ‘안쪽’에서 바라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면, 이제는 클래식, 월드 뮤직처럼 이미 오랜 시간 존재해온 바깥의 여러 장르들과의 결합을 통해 재즈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클래식과 재즈의 교류는 1950년대부터 활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특별할 것이 없다. 그보다는 정보 교환이 용이해진 1980년대 이후 재즈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온갖 민속음악과 결합하는 양상은 눈부실 정도다. 재즈가 소재로 선택하지 않은 음악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는 재즈를 결정짓는 요소가 몇몇 리듬 패턴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편곡 성향, 혹은 그러한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라는 좀더 유연한 시각의 정립을 가져왔다. 우리는 앞으로 더욱 다양한 스타일의 재즈와 만나게 될 것이다.

    재즈 이해를 위한 세 가지 코드

    ① 블루스(Blues)

    재즈의 본질을 엿보기 위해서는 블루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블루스가 우리나라에서는 느린 춤곡(Slow Dance)을 뜻하는 말로 잘못 쓰이고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블루스란 아프리카의 토속음악이 미국의 서양음악과 만나 오랜 세월에 거쳐 형성된 12마디 진행의 독특한 음정 체계를 갖춘 음계 형식을 일컫는다. 블루스 장르의 음악들이나 대부분의 흑인음악, 심지어는 초기 록 음악까지도 모두 블루스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여러 스타일이라고는 해도 이제 블루스 장르는 비비 킹(B.B. King)으로 대변되는 도시 블루스(Urban Blues)만 살아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어쨌든 블루스는 하나의 악곡 형식인 동시에, 흑인 음악의 중추적 장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기 재즈부터 모던 재즈, 현대 재즈에 이르기까지 블루스 형식은 음악인들이 재즈 곡을 만드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한때는 블루스 형식의 곡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가 좋은 재즈 연주자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이는 재즈가 특유의 끈적거리면서도 여유로운 정서를 갖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 또 장르에 따라 블루스 형식과 정서가 더 강조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도외시된 때도 있다. 정도의 차이를 떠나 블루스에 대한 감각적 이해는 재즈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만약 재즈가 흑인들의 역할을 배제한 채 서양 음악의 그늘 아래에서만 형성됐다면 분명 재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됐을 것이다. 흔히 재즈를 흑인음악의 일종인 양 인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② 즉흥연주(Improvisation)

    재즈를 말할 때 흔히 함께 거론되는 것이 바로 즉흥연주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재즈는 아무런 준비 없이 연주자들이 그때 그때의 감성에 의존해 마음가는 대로 연주하는 음악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재즈에는 악보가 없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음악보다 더 원초적이고 감성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는 매우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잘못된 인식이다.

    사전적 의미의 순수한 즉흥연주로 이루어지는 재즈곡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재즈 세계에서는 리허설 없이 연주했다는 것이 큰 뉴스거리가 되기도 한다. 재즈에도 악보가 존재하며 좋은 작곡이 선행되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작품이 탄생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재즈에서 악보란 기본적인 곡의 멜로디와 리듬 패턴, 그리고 진행에 대한 구성을 담고 있는 것이 다다.

    연주자는 곡 중간 부분에서 자신의 연주력과 감성을 독자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갖는데, 바로 이때의 연주가 흔히 말하는 즉흥연주다. 이를 보통 솔로(Solo)라는 말로 구분해 부르는데, 때로는 원곡 멜로디와 전혀 다른 형식 연주될 때도 많아 처음 재즈를 듣는 이들은 당혹해 하기도 한다.

    결국 재즈에서의 악보는 기본적인 곡의 골격을 알려주는 일종의 안내서인 셈이고 나머지 부분은 연주자의 감성과 직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하나의 재즈 곡이 즉흥적으로 연주됐는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그보다는 한 가지 곡을 각각의 연주자들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재현해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재즈에서의 즉흥연주란, 곡 전체를 관장하는 절대적 기준이 아닌 연주 도중 연주자가 자신의 감성을 직관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선택하는 하나의 표현양식인 것이다.

    ③ 스탠더드(Standard)

    재즈 음악인들에게 통용되는 ‘진리’ 중 ‘한 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재즈는 해석의 음악’이라는 정의와 함께 어떤 장르의 재즈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즉흥연주 기법과 곡에 대한 다양한 편곡으로 인해 재즈는 같은 곡이라도 모두 다르게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어느 연주자에게 청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분위기 그대로 연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원곡이 매우 강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을 경우는 변주의 범위도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이와 관련, 우리는 ‘스탠더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스탠더드란 재즈 음악인들이 즐겨 연주하는 곡들을 말한다. 정통 재즈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이는 편의에 따른 것일 뿐 정확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엽’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Autumn Leaves’나 ‘Summertime’, 그리고 ‘My Funny Valentine’이나 ‘Moon River’ 등의 곡들은 원래 재즈를 위해 작곡된 작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재즈 음악인들이 즐겨 연주하면서 이제는 스탠더드, 즉 유명한 재즈 레퍼토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재즈에서 말하는 스탠더드의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말을 생각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새로운 창작곡이라는 의미의 ‘오리지널(Original)’이 바로 스탠더드의 이면에서 재즈 음악인의 작곡 활동을 대변한다. 실제로 재즈가 연주되는 라이브 무대에서 음악인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이번에 연주할 곡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스탠더드 넘버 ‘서머타임’입니다”, 혹은 “다음 곡은 우리 밴드의 피아니스트가 작곡한 그의 오리지널입니다.” 재즈는 음악인들의 곡 해석과 창작곡의 꾸준한 발표를 통해 이렇듯 발전을 거듭해왔다.

    한 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

    퓨전 재즈 연주자로 이름을 날린 보브 제임스(왼쪽)와 칙 코리아

    재즈는 연주자나 감상자에게 똑같이 접근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한다. 왕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답 또한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오답의 길을 걷는 경우는 종종 관찰되는데, 재즈를 들으면서 자신의 감성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 첫번째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명작 운운하는 작품이라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재즈가 그만큼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누구나 음악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오랜 시간 재즈를 듣다 보면 어느 정도 역사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며, 많은 이들이 명작이라 일컫는 작품의 가치를 깨닫을 기회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 나온 통계이긴 하지만 재즈의 위상을 가늠케 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있다. 미국 국민의 1인당 평균 국민소득 이상을 벌어들인 재즈 음악인이 전체 재즈 음악인의 9%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결국 나머지 91%의 재즈 음악인들은 평균 이하의 경제생활을 한다는 얘기다. 또한 어느 정도 음악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재즈 음악인의 평균 연령이 40대 초반이라는 사실은 어떠한가. 그런 상황에서도 연주에 몰두하는 재즈 음악인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가치에 눈을 뜬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본질적 답을 먼저 구한 뒤 재즈를 들으려는 이들에게 재즈는 오히려 매력적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재즈는 운명적으로, 획일화된 잣대가 통용되는 전근대적 사회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재즈라는 단어에서 상류층의 여유 있는 문화생활이나 어두운 클럽 안의 자욱한 담배연기 같은 퇴폐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무조건 부정할 수만은 없는 얘기다. 모든 문화 예술이 그러하듯 이를 충분히 향유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특히 음악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은 기본적 의식주를 해결한 후에나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껏 삶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재즈를 듣는 이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랫동안 재즈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니아일수록 경제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재즈는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중독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설적 미학이 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스스로 찾고자 하는 이에게만 자신의 매력을 마치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처럼 보여주는, 그런 음악이 바로 재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