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살아남은 다섯 마당, 잃어버린 일곱 마당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도

  • 글: 유영대 고려대 교수·국문학’ yyyy@korea.ac.kr

    입력2003-01-22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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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 외모와 감성과 소리와 연기력을 겸비한 판소리 명창은 전통사회의 음유시인이자 서민예술의 대표자였다. 그들이 펼치는 인간사 열두 마당 훑어 읽기.
    할머니 품에서 잠들어본 기억이 있는가.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품에서 옛날 이야기 듣기를 무척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는, 학술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제보자’였다. 할머니 품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다 잠들고, 다음날을 맞는 게 그 무렵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할머니가 이야기 잘하는 분으로 동네에 소문나 있었기 때문에, 내 또래 아이들도 우리 집에 모여 할머니의 이야기를 함께 즐겼다. 할머니의 이야기 레퍼토리는 아주 다양했다. 무서운 이야기와 우스운 이야기, 임경업 장군 이야기와 장화홍련 이야기, 긴 이야기와 짧은 이야기를 섞어가며 어린 나의 구미에 맞게 잘 얘기해주는 좋은 ‘구연자’였다. 할머니는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간혹 동네 이야기꾼이나 노래 잘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조금 더 큰 규모의 ‘이야기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판에서 어떤 이야기는 노래로 아주 길게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그 무대는 ‘소리판’으로 바뀌었다. 놀이·연희·공연을 위한 무대를 우리는 전통적으로 ‘판’이라 불러왔다. 전통사회에서는 유랑 예능인들이 놀이판을 마련하고 땅재주나 줄타기 등 곡예를 공연했다. 그들이 공연한 무대를 ‘굿판’이라 했으며, 굿판에서 벌인 여러 예술 형태를 묶어 ‘판굿’ 혹은 ‘판놀음’이라 불렀다.

    전통사회의 굿판에서 광대들이 벌인 판놀음에는 풍물이나 줄타기, 꼭두각시놀음 등 여러 레퍼토리가 있었으며, 판소리는 명창이 청중을 대상으로 부르는 소리의 측면이 강화된 연행예술이었다. 판소리는 명창이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정도 걸리는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가며 흥미롭게 노래하는 판의 예술이다. 연행하는 형태를 보면 음악극의 모습이며,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보면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는 서사극이기도 하다. ‘판’에서 이야기와 노래와 연행이 함께 이뤄지는 종합예술의 형태가 바로 판소리인 것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 민중예술의 하나로, 민중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시켜 노래한 서민예술이다.

    탁하면서 맑은, 거칠면서 부드러운



    판소리 명창은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소리를 하는데, 잘 들어보면 노래로 하는 부분과 말로 하는 부분이 교차돼 나타난다. 노래로 부르는 부분을 ‘창(唱)’이라 하고 말로 하는 부분을 ‘아니리’라고 한다. 아니리는 소리와 소리 사이에 나타나는 대목으로, 평탄한 말로 이야기 줄거리를 요약해주거나 이야기의 진행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니리를 하는 동안 광대는 막 들려준 노래로 죄어놨던 청중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자신은 숨을 돌리고 목을 쉬면서 다음 소리를 대비한다. 또 광대는 서서 노래만 하는 게 아니고연극적 동작도 하는데, 이를 ‘발림’ 혹은 ‘너름새’라고 한다. 고수는 북을 쳐서 반주하며 소리 중간중간에 ‘얼씨구’ ‘좋다’ 따위의 추임새를 연발한다. 판소리 명창은 전통사회의 예술인으로서 음유시인이자 작곡가이며, 가수이자 연극배우라 할 수 있다.

    판소리 명창은 훌륭한 가수로서 좋은 목을 타고나야 한다. 또 오랜 훈련을 통해 완성된 성음을 구사해야 한다. 판소리에 필요한 음색과 여러가지 발성 기교를 습득하는 것을 득음(得音)이라 한다. 판소리는 쉬어서 거친 듯한 탁한 목소리, ‘곰삭은 소리’를 구사하여 연행한다. 그러나 탁하면서도 맑아야 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소리를 지향한다.

    판소리는 목소리를 표현매체로 사용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목소리의 특징을 설명하는 ‘목’ ‘성음(聲音)’ 등의 용어로 소리의 특징과 완성도를 규정한다. 성음은 명창이 내는 소리의 특질을 의미하는 용어로, ‘통성’ ‘수리성’ ‘천구성’ ‘떡목’ 등의 표현으로 소리의 등급과 완성도를 나타낸다. 통성은 뱃속에서 위로 뽑아내는 호방한 소리를 말하며, 수리성은 쉰 목소리같이 껄껄하게 나오는 소리를 뜻한다. 천구성은 거칠고도 맑으며 높은 음역으로 내는 슬픈 선율의 소리를 말하는데, 가장 좋은 성음으로 친다.

    판소리 명창은 연극배우처럼 연희를 보여주는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소리뿐 아니라 몸짓을 통해서도 판소리를 연기한다. 광대가 소리를 하면서 보여주는 몸짓이나 연기가 너름새와 발림이다. 너름새는 사설이 그려내고 있는 장면을 춤이나 동작을 통해 보조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부채를 펴서 박 타는 흉내를 내거나 부채를 떨어뜨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비유를 하듯, 너름새는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상징화·양식화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광대가 갖춰야 할 요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 ‘너름새’ 등 4가지 덕목을 꼽고, 그중에서도 순식간에 천태만상을 보여주기 위해 너름새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다섯 마당, 잃어버린 일곱 마당

    조선 헌·철종대의 명창 모흥갑이 평양 능라도에서 소리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19세기에 활약한 명창들로는 권삼득,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고수관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박유전, 이날치, 김세종 등이 19세기 후반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20세기 전반기에 활약한 명창으로는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전도성, 김창룡, 유성준, 정정렬 등이 있으며, 이들 명창의 소리는 유성기 음반으로 남아 있어 그 소릿결을 지금도 확인해볼 수 있다.

    명창은 소리마다 음색이 독특하고, 스타일도 다르다. 어떤 명창이 독창적인 대목을 창작해서 불렀는데, 그 대목이 인기를 누려 다른 명창들도 그대로 흉내내어 전승력을 가질 때 이 부분을 ‘더늠’이라 부른다. 더늠은 ‘더 넣는다, 더 늘어난다’는 의미로 뛰어난 창자(唱者)에 의해 새롭게 짜여져 늘어난 부분이다. 물론 작가이자 작곡가로서 창자의 창작을 인정해주며, 이후 그 대목을 부르는 창자들은 소리의 모두(冒頭)에 그 작품의 창자를 밝혀준다. 김창환의 ‘제비 노정기’라든가, CF로 더욱 유명해진 “제비 몰러 나간다”의 권삼득이 창안한 더늠 ‘제비가’가 대표적이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옥중에서 절망감에 빠진 춘향의 적막한 독백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 한 시대를 풍미한 노래가 됐다.

    판소리는 전승된 지역에 따라 가창 방식과 소리 놓는 법 등이 서로 다르다.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 판소리가 전승되는 지역에 따라 소리 하는 방식이 각각 독특한 형태로 발달해왔으며, 그것이 하나의 법제로 굳어졌다. 이들 지역은 이름난 명창이 살던 지역이기도 하다. 전통사회에서는 명성과 교육 능력을 가진 명창의 집에 학생들이 함께 기식하면서 오랜 시간 학습했다. 같은 스승에게 배우다 보니 배우는 이들의 소리 스타일도 거의 같게 됐다. 씩씩하고 웅장한 맛이 나게 소리를 끌어가거나, 애원처절하며 기교 위주로 소리 하는 것은 소리를 독자적으로 수련해 이뤄낸 명창의 특별한 능력이지만, 이것이 일가를 이뤄 제자들에게 전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동일한 지역에서 불리는 동일한 스타일의 판소리가 된다.

    판소리의 곡조·장단, 그리고 고수

    판소리는 문학적 내용의 시로 이뤄진 사설에 악곡과 장단을 배합해 짜맞춘 형식으로 돼 있다. 내용으로 보면 서사시나 연극적 성격이 강한 문학작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노래극이기도 하다. 판소리엔 각각 사설들이 있고, 이 사설의 의미에 부합하는 악곡과 장단을 짜넣어서 완성한 음악극의 형식이다.

    판소리 사설은 일정한 장단과 악상에 따라 그 정서가 결정된다. 보통 슬픈 내용의 사설은 느린 장단에 슬픈 악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사설은 빠른 장단에 슬픈 악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그 슬픔의 정도를 강화하는 독특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판소리 사설에 장단과 악상이 결합하는 양상은 아주 다채롭다. 서양음악에서는 장조가 기쁘고, 씩씩하고, 남성적인 악상을 주며, 단조는 슬프고, 어둡고,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판소리에도 이와 같은 악상이 있다. 악상에는 슬픈 선율과 즐거운 선율이 있고, 장단에는 느린 장단과 빠른 장단이 있어서, 이 둘의 결합방식에 따라 흥겨운 느낌이나 장중한 느낌, 슬픈 느낌 등 다른 방식으로 직조된다. 판소리의 각 대목은 소리의 미의식이나 지향에 따라 우조, 평조, 계면조 등의 정서로 구분된다.

    우조(羽調)는 웅장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악곡으로 장엄한 장면, 남성다운 장면, 영웅적 인물의 호탕하고 씩씩한 기상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선택된다. ‘춘향가’ 중 ‘적성가’와 ‘심청가’ 중 ‘장승상 부인’ 대목을 우조로 노래한다. 평조(平調)는 편안하고 화평한 느낌을 주는 악곡이다. 기쁜 장면이나 흥겹고 화평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면에 주로 쓰인다. ‘춘향가’의 ‘기산영수’ 대목이 평조로 불린다. 계면조(界面調)는 판소리의 기본이 되는 조로 슬프고, 애절히 탄식하는 장면, 슬픈 이별의 정서를 노래하는 장면에 흔히 사용된다. ‘춘향가’ 중 ‘이별가’나 ‘심청가’ 중 ‘추월만정’을 계면조로 노래한다.

    소리는 합당한 장단이 있는데, 판소리 광대의 소리에 고수가 북으로 장단을 맞춰준다. 장단은 서양음악의 박자와 흡사한데, 소리의 빠르기를 북으로 조절해주는 기능을 말한다. 어떤 대목에선 북이 강하게 각을 쳐 소리의 진행을 강조하거나 소리의 미진함을 보완하며, 다른 부분에선 북소리를 거의 내지 않아 소리의 흐름을 터주면서 소리와 반주의 조화를 이뤄낸다. 이것들이 고수의 역할이다. 판소리에 사용되는 장단으로는 가장 느린 진양조부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으로 빨라지며, 이밖에 엇모리, 엇중모리 등의 장단이 있어서 소리의 빠르기를 규정하고 호흡을 조절한다.

    고수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정해진 리듬을 치는 것 외에 소리의 완급과 사설이 가진 정서까지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고수는 다양한 장단의 틀을 가지고 창자의 소리 운용 태도에 따라 기교를 달리해 북을 친다. 소리에 장단을 붙여가는 방식으로 ‘대마디 대장단’이나 ‘부침새’ 등이 있다.

    소리의 맥을 제대로 살려주는 고수의 기능과 역할을 중요시하여 예전부터 ‘일고수 이명창’이란 말로 고수의 위치를 높여주기도 했다. 고수가 소리판의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고 창자를 북돋워주려고 ‘얼씨구’라든지 ‘좋다’ 등 일정한 조흥구를 노래 사이에 집어넣기도 하는데, 이를 추임새라 부른다. 특히 소리꾼의 컨디션이나 입장을 잘 헤아려 적절히 북 반주하는 것을 ‘보비위’한다고 말한다. 고수가 내는 추임새는 광대의 구연 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적극적 탄성이지만, 관중도 감상하는 자리에서 추임새를 발할 수 있다. 관중의 추임새는 판소리를 들으면서 야기된 감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감탄사이며, 생동적인 판으로 이끌어 나가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살아남은 다섯 마당, 잃어버린 일곱 마당

    국악인 이영태씨(왼쪽)가 ‘어린이 판소리반’ 수강생들에게 목청 틔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판소리의 전체 레퍼토리는 얼마나 될까? 흔히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는 말처럼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12종류가 있다. 마당이란 용어는 ‘마당에서 길게 제대로 하는 소리’라는 의미에서 판소리 종류를 범칭하는 용어다. 원래 판소리 무대가 마당이란 점에서 이렇게 두루 열두 마당이라 불렀다. 그런데 최근엔 ‘판소리 다섯 바탕’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마당 소리’에서 ‘바탕 소리’로 진행한 데에는 판소리의 기반 변모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함부로 불리는 예술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바탕 소리’라는 용어가 ‘마당 소리’를 대체했기 때문이다.

    판소리엔 모두 열두 마당이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5개의 노래는 전승되고 있으며, 7개의 노래는 실전(失傳)됐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다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이고, ‘변강쇠타령’은 곡조는 없어지고 노랫말만 신재효가 남긴 사설집에 남아 있어 이 여섯 가지 레퍼토리를 판소리 여섯 마당이라 부른다.

    실전판소리는 ‘변강쇠타령’ ‘옹고집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모두 일곱 작품이다. 이들 작품도 조선 후기엔 중요 레퍼토리로 전승되고 있었으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주제가 대체로 민중적 세계관에 철저하다는 점이나, 사설의 내용이 발랄한 민중 언어로 돼 있다는 점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전승이 끊겼다. 민중적 기반 속에서 태어난 판소리는 19세기 들어 자체 변모와 발전을 통해 다수의 양반들을 청중으로 끌어들이기에 성공했으나, 이들의 적극적 개입과 참여 속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됐다. 이 과정에서 양반의 감성과 미의식에 적합하지 않은 일곱 작품이 탈락하게 됐다. 이 작품들은 내용에서 철저하게 세속적 욕망의 세계를 그려냈으며, 절제와 균형, 세련을 요구하는 양반층 문화와는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에 탈락한 것이다.

    ① 춘향가

    조선 후기 사회의 본질적 모순인 신분의 갈등 양상을 신분이 서로 다른 남녀간 사랑을 통해 문제삼고 있는 작품이다. 춘향이라는 미천하지만 아름답고 당찬 기생과 이몽룡이라는 멋지고 사내다운 양반집 도령의 이루어질 수 없을 듯 보이는 사랑의 과정을 달콤하게, 슬프게, 다시 신나게 묘사한 게 이 작품의 흐름이다. 두 사람이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함으로써, 궁극적으론 사람들의 자유로운 교류를 막아온 신분제도가 당시 사회의 심각한 모순이라는 점을 밝힌 것이 중요한 주제라 하겠다. 또 변학도를 통해 당대의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과 이에 맞서 싸우는 서민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춘향은 남원 퇴기 월매의 딸이다. 그녀는 남원골 사또 자제 이도령과 광한루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고 혼인을 약속한다. 사또가 승직하여 한양으로 가게 되자 두 사람은 후에 만날 기약을 남기고 오리정에서 이별한다. 변학도가 남원에 부임하게 되면서 춘향이 기생 신분임을 알고 수청을 강요하나 춘향은 거절하여 옥에 갇힌다. 한편 이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돼 남원에 나타나고 옥중에서 춘향과 상봉한다. 다음날 동헌에서 열린 변학도의 생일잔치 자리에 출두한 이도령은 변학도의 탐학상을 공개하고 춘향을 구해내서 혼인에 이르게 된다는 줄거리다.

    ② 심청가

    조선 후기 사회의 가난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의 환상적 극복을 노래한 작품이다. 애초 ‘심청가’는 미천한 신분의 모녀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노래한 것으로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청 어미인 곽씨 부인의 품팔이 노래라든지, 심청이 동냥하는 대목, 선원들이 처녀를 사가는 대목, 뺑덕어미의 등장 등은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노래들이다.

    작품의 후반부는 심청이 구출되고 귀하게 되는 과정을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용궁에 가서 어머니와 상봉하고 귀하게 된 후 꽃봉을 타고 돌아온다. 도사공이 심청이 탄 꽃을 황제에게 바쳐 심청은 황후에 이르게 되며, 황후의 부탁으로 황성에서 맹인잔치를 연다. 그 자리에서 부녀가 상봉하고, 심봉사가 눈을 뜨며, 모든 맹인도 함께 눈을 뜨게 된다는 낭만적 결말이다. ‘심청가’는 슬픈 대목이 너무 많아 비극적 정조가 강하지만, 향유층이 양반층으로 상승되면서 심봉사도 양반으로 격상되고, 심청이 장승상 부인과 만나는 등 우아한 내용이 첨가되기도 했다.

    ③ 흥보가

    형제간 우애 문제를 다루면서 조선 후기 서민사회의 궁핍한 정황을 살갑게 그려낸 작품이다. 흥보가 갖고 있는 착한 성품과 놀보의 심술궂고 악착같은 성품을 대비해 보여줌으로써 흥미를 돋운다. 흥보는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고쳐준 대가로 박씨를 얻고, 그곳에서 돈과 쌀과 비단과 집이 나와 행복하게 살게 된다. 형인 놀보는 일부러 제비다리를 분질러 봉욕을 당하고 재물을 빼앗기게 된다. ‘흥보 매품을 파는 대목’이나 ‘가난타령’ ‘돈타령’ 등을 통해 가난한 서민들이 고생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흥보의 박에서 밥과 옷과 집이 나온다는 것도 조선 후기 민중의 의식주에 대한 꿈을 환상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④ 수궁가

    조선 후기의 정치 현실을 우화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힘은 없으나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토끼로 대변되는 민중층과 탐욕적이고 부도덕한 용왕 및 별주부로 대표되는 지배층 사이의 갈등이 우의적으로 잘 그려진 통쾌한 정치풍자다. 토끼는 서민으로 그려지고 용왕과 별주부는 지배층으로 풍자된다. 지배층의 우두머리로서 갖춰야 할 덕목도 없이 매일 주색에 빠져 있다 병을 얻어 울어대는 세속적 인물이 바로 용왕이다.

    용왕이 병이 들자 명의가 토끼의 간이 약이 된다고 진단을 내린다. 충신인 별주부가 토끼를 구하고자 육지로 오게 되는데 이 과정을 그려낸 노래가 ‘고고천변’이다. 별주부는 육지에 와서 ‘상좌다툼’하는 모습을 보다가 드디어 토끼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세상살이의 고달픔과 함께 용궁생활을 이상향으로 제시하며 토끼를 꼬여 수궁으로 데리고 간다. 수궁에 당도한 토끼가 비로소 속은 줄 알고 꾀를 써서 용왕을 속이고 수궁을 빠져나오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육지에 도착한 토끼는 덫에 걸리거나 독수리에게 잡혀다니는 등 고난을 겪으며 살아간다. 허세와 위선에 가득찬 기존 지배세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수궁가’는 토끼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 풍자가 위주가 되면서 발랄한 서민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 계층간 갈등보다는 골계적 요소를 강조하고 별주부의 충을 강조하는 쪽으로 내용이 변개(變改)한다.

    ⑤ 적벽가

    ‘적벽가(赤壁歌)’는 원래 중국소설 ‘삼국지연의’ 가운데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조조의 화용도 피란까지의 줄거리를 차용해 서민 시각에서 새롭게 개작한 정치풍자 작품이다. 수많은 영웅, 장수들이 등장하여 전쟁의 참상과 웅혼한 장수의 기상을 전하는 대목이 많아 빠른 장단에 웅장하고 씩씩한 우조를 많이 사용하는 남성적인 작품이면서, ‘군사서름타령’이나 ‘군사점고’ 등 서민 군사들의 서러움을 직접적으로 토로할 때는 계면조의 노래도 많이 등장하는, 아기자기한 묘미도 있는 작품이다.

    ‘적벽가’는 조조를 정당성이 결여된 권력의 핵심으로 규정하여 풍자하고, 부당하게 전쟁에 동원돼 죽음으로 내몰리는 민중의 한을 절실하게 그려낸다. 전쟁에 대한 혐오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내용이며, 타락한 정치지도자를 여지없이 풍자하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적벽가’는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형제가 되는 ‘도원결의’ 대목에서 시작해 공명을 찾아가는 ‘삼고초려’ 대목으로 이어지며, 적벽대전에서 공명이 동남풍을 빌려 조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하자 관우가 그를 사로잡았다 놓아주는 대목까지 부른다. 그러나 각각의 부분에서는 민중의 입장에서 새롭게 개작된 대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⑥ 변강쇠가

    천하의 오입쟁이인 강쇠와 성욕이 왕성한 옹녀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조선 후기 서민과 천민의 여러 삶의 모습을 흥미롭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노랫말은 ‘신재효 사설집’에 실려 있으며, 송흥록 명창이 이 소리를 잘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제 때까지 부분적으로 불려졌다. 최근에 박동진 명창이 이를 재현해 부른 적이 있다. ‘변강쇠가’는 ‘가루지기 타령’ 혹은 ‘횡부가(橫負歌)’라고도 불린다. 시체를 ‘가로(橫)+지기(負)’하여 치상하는 정황을 그린 판소리라는 의미다. 뻗뻗하게 굳은 시체를 지게에 가로져서 내가는 것은 아주 가난한 천민들의 장례풍속이라 할 수 있다.

    남도에 사는 천하 양골 변강쇠와 평안도에 사는 천하 음녀 옹녀는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살지 못하고 떠돌다 만나 부부가 된다. 이들은 처음엔 도시 살림을 해보지만, 강쇠가 놀기만 일삼고 강짜만 부리기 때문에 지리산 속으로 들어간다. 변강쇠는 놈팡이나 왈패 같은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리산에 가서도 놀기만 하던 변강쇠는 장승을 베어다 땔감으로 때고는 동티가 나서 죽는다. 그런데 변강쇠를 치상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다른 양상으로 확대된다. 변강쇠를 치상한 후에 옹녀와 살기로 하고 이 일에 나선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땅에 들어붙는 변괴가 생겨난다. 그러나 사당 거사패들과 뎁득이가 지성으로 귀신에게 빌어, 붙었던 궁둥이가 떨어지고 치상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변강쇠가’엔 음란한 노래가 포함돼 있기도 하지만,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을 직접적 소재로 하여 인간사의 여러가지 문제를 다뤘다. 농촌에서 유리된 유랑민들의 뿌리뽑힌 삶의 모습, 왈패와 유랑 연희패들의 구체적 삶의 모습, 장승과 관련한 신분간 싸움의 모습들을 함께 읽을 때 이 작품의 진정한 면모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⑦ 배비장타령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은 실전 판소리지만, 소설 ‘배비장전’에 의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도덕군자인 체하는 배비장이, 제주도에 가서 애랑(愛娘)이란 여자에게 반한다는 내용이다. 행실의 바름을 뽐내던 배비장의 비속성이 드러나고, 형식에 치우쳐 공허한 유교적 도덕 관념을 통렬히 풍자하며 전체적으로 해학이 넘쳐흐른다. 서울의 김경(金卿)이라는 양반이 제주목사가 되어 부임하는 길에 서강(西江)에 사는 배선달을 비장(裨將)으로 데려간다. 배비장은 심지가 곧기로 이름이 나 있어 제주에 도착하여 주색을 멀리하고 도도하게 지낸다. 상관인 제주목사의 명을 받은 기생 애랑과 방자는 계교를 써서 비장을 유혹한다. 배비장은 애랑의 집에 찾아갔다가 알몸으로 뒤주 속에 갇힌 채 바다에 버려진 것으로 꾸며진다. 실제로 배비장이 버려진 곳은 바다가 아니라 감영의 뜰이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모르고 헤엄쳐 나오다 둘러선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⑧ 강릉매화타령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로 소개됐으나 사설이 전하지 않다가, 1992년 이 사설을 바탕으로 한 ‘매화가(梅花歌)’란 소설이 발견돼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이 작품은 타락한 인물인 골생원에 대한 풍자와 희화화를 통해 삶의 건전성과 균형감각을 일깨우고자 했다. 강릉부사의 책방 골생원이 강릉의 일등 명기 매화를 만나 즐겁게 지내는데, 서울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부친의 편지가 온다. 서울에 온 골생원은 과거시험 답지에 매화를 그리워하는 시를 써내고 낙방하여 강릉으로 돌아온다. 강릉부사는 거짓으로 큰길가에 매화의 무덤을 만들어두고 매화가 죽었다고 전한다. 골생원은 매화의 무덤에 가서 통곡하고 매화의 초상화를 그려 껴안고 지낸다. 황혼 무렵, 사또의 지시로 매화가 귀신인 체하고 골생원과 만난다. 다음날 매화는 골생원을 나체로 경포대에 유인한다. 골생원은 매화와 함께 자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사또에게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⑨ 옹고집타령

    ‘옹고집타령(雍固執打令)’은 소설 ‘옹고집전’의 내용과 일치할 것으로 생각된다. 옹진골 옹당촌에 사는 옹고집은 욕심 많고 고집 센 인물이다. 그는 불도(佛道)를 능멸하여 동냥 온 중들에게 행패를 부리다 도승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도승은 도술을 부려 지푸라기로 허수아비 옹고집을 만든다. 가짜 옹고집은 진짜 옹고집의 집에 찾아가 진짜를 내쫓고 그의 아내와 함께 산다. 진짜 옹고집은 가짜에게 쫓겨난 후 갖은 고생 끝에 개과천선하고, 도사의 용서를 받은 다음 다시 집에 돌아와 살게 된다. 옹고집은 놀보와 같은 유형의 인물로서, 조선 후기에 등장한 서민 부자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조선 후기 화폐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심화된 계층간 갈등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이 보여주는 극단적 이기심과 일탈적 행동이 서민들의 반감을 사 신랄한 풍자 대상이 됐던 것이다.

    ⑩ 장끼타령

    ‘자치가(雌稚歌)’라고도 불린다. 소리는 실전됐으나 소설 ‘장끼전’이 전하고 있어서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장끼가 까투리의 말을 듣지 않고 콩을 주워 먹다 짐승을 잡는 틀에 치어 죽는다. 그러자 까투리는 여러 새들의 청혼을 받게 되나, 결국 문상 온 홀아비 장끼에게 시집 가서 잘살았다는 이야기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며,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려선 안 된다는 등 교훈적 내용을 중심으로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풍자와 기층민중에 대한 참혹한 수탈의 양상을 아울러 함축한 작품이다.

    ⑪왈짜타령

    ‘왈짜타령(曰者打令)’은 ‘무숙이타령’이라고도 하며, 중고제 명창 김정근이 잘했다고 하나 소리는 전하지 않는다. 소설 ‘계우사(戒友辭)’는 ‘왈짜타령’의 사설 정착본인 바, 18세기 이래 서울의 도시적 유흥이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된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사회의 기생적 존재인 왈자의 행태를 풍자함으로써, 새롭게 등장한 평민 요호층의 삶에 대한 균형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왈자’는 왈패 혹은 건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설본에 의하면 주인공 김무숙은 대방왈자로 서울 중촌(中村) 갑부의 아들이며, 여자 주인공 의양은 평양에서 선발돼 궁중에 바쳐진 내의원 소속 기생이다. 무숙은 의양을 한 번 본 뒤 크게 혹하여 그녀를 기적에서 빼내 함께 살림을 차린다. 의양은 살림을 제법 규모 있게 꾸려가지만, 무숙이는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한다. 보다못한 의양은 무숙의 본처와 노복인 막덕이, 대전별감 김철갑, 다방골 김선달, 평양 경주인 등과 공모해 무숙을 극도의 경제적 궁핍에 빠지게 함으로써 마침내 개과천선케 한다는 게 이 작품의 내용이다.

    ⑫ 가짜신선타령

    ‘가짜신선타령(假神仙打令)’은 사설이나 소리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송만재가 쓴 ‘관우희(觀優戱)’란 작품에 따르면, 한 사내가 신선이 되려고 금강산에 들어가 노승에게 천도복숭아와 술을 구해 먹었으나 결국 그 중에게 속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고전소설 ‘숙영낭자전’과 일정하게 연결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는 창작 판소리를 몇 편 갖게 됐다. 창작 판소리는 변화하는 시대의 모습과 변혁적 요구를 판소리에 담아내기 위한 노력에서 발생한 것이다. 일제 때 벌인 전통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판소리는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명맥을 이어온다. 해방 전후 창작 판소리인 ‘열사가’가 생겨 항일정신을 판소리로 표현해낸 것은 아주 소중한 전통이다.

    20세기 후반, 판소리를 사회변혁운동의 도구로 삼으면서 새롭게 창작하고 보급한 사람이 임진택이다. 그는 김지하가 지은 담시인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등을 판소리로 짜서 불렀다. 김지하는 이농민이면서 서울에 올라온 안도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권력의 횡포와 민심의 동향을 풍자적으로 이야기하는 담시 ‘비어’를 발표했다. 임진택은 이 작품을 ‘소리내력’으로 제목을 바꿔 판소리로 짜서 노래했다. 그는 또 광주민주화항쟁의 일정을 사설로 만들어 창작 판소리 ‘오월광주’를 지어서 부르기도 했다. 임진택이 지어 부른 판소리엔 1970~80년대 암울한 시대의 단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사회 비판과 풍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창작 판소리는 판소리의 내용을 다채롭게 해주었으며, 시대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지금 판소리는 바로 듣기엔 이미 고전적인 장르가 돼버렸다. 판소리 감상회에 가보면 사설집을 넘겨가며 감상하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데 아주 멋있어 보인다. 예전에 할머니 품에서 소리를 듣던 경험에서, 이젠 사설집을 넘겨가며 듣는 것으로 풍속도가 바뀌었다. 이같은 청중의 취향이나 기호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판소리 시대를 여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해 또랑광대 콘테스트에서 컴퓨터게임의 추이를 판소리로 그려낸 작품이 상을 받았다. 판소리가 시대를 적절히 담아내는 예술이 되면서 그 의미는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앞으로 창작 판소리는 늘어날 것이며, 창작 창극은 전통 연극술의 적용을 통해 훨씬 정밀해지고 양식화되어 민족적 양식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판소리에 현대의 언어를 사용할 경우, 사설을 시적 율격(poetic diction)에 맞게 오늘날의 우리말로 바꿔야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새로 짓는 노랫말은 판소리에서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말투를 포함하여 판소리적 관습(convention)을 이용해야 한다. 노랫말과 동작이 맞게,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면밀하게 확인해가며 적용함으로써 생명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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