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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東亞日報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 글: 김언수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2/11
그가 늙은 사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빗방울 몇 개가 예리한 각도로 유리창에 부딪혔다. 비가 오는군. 그가 말했다. 그럴 리가, 오늘은 날씨가 화창할 거라고 일기예보에서 말했는데? K가 옆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빗방울 몇 개가 떨어졌는걸. 그가 다시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빗방울은 좀더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신봉자인 K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자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앞 건물에 매달려 있는 늙은 사내는 비가 내리자 옥상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옥상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17층에 매달려 있던 늙은 사내는 자신이 앉아 있던 발판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늙은 사내의 허리춤에 있던 안전 벨트가 밧줄과 엉켜서 늙은 사내의 허리를 붙잡았다. 늙은 사내는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안전 벨트를 풀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늙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안전 벨트를 잘랐다. 늙은 사내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발판이 기우뚱했다. 순간, 늙은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늙은 사내가 급히 밧줄을 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늙은 사내가 잡은 밧줄은 이미 자신이 잘랐던 안전 벨트의 밧줄이었다.

늙은 사내는 안전 벨트와 함께 17층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놀라서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도 모르게 1초, 2초, 3초 하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늙은 사내가 17층에서 떨어져 지면에 다다를 때까지의 시간을 쟀다. 사내가 떨어지는 시간은 딱 3초였다. 늙은 사내는 그의 삶에 남아 있는 마지막 시간을 공중에서 허둥대다 보냈다. 늙은 사내의 몸은 아스팔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찰흙처럼 퍽! 하고 일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그는 참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고무공처럼 몇 번 튕겨 오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한 인간의 죽음을, 그것도 자신과 조금이나마 안면이 있던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고작 떨어지는 시간이나 재고 있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배반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늙은 사내가 죽는 광경을 보고 애도하는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왜 고무공처럼 튕겨 오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자신이 아주 나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악마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K가 갑자기 아주 큰 소리로 “이봐! 이봐! 저기 사람 떨어졌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무실 직원들은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진짜? 어디? 어디? 하고 소리지르면서 창가로 모여들었다. K가 유리창 청소부가 떨어져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직원들이 창가에 모여서 웅성거리거나 탄성을 지르면서 죽음을 구경하는 저마다의 놀라움을 표현했다. 눈이 나쁜 여직원 한 명이 저기 까만 쓰레기 재활용 봉투처럼 보이는 것이 그 시체냐고 K에게 물었다. 그러자 K가 “내가 처음부터 지켜봤는데 말이야 떨어지는 데 딱 3초 걸리더만, 죽는다는 게 그렇게 싱거운 일이야” 하고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는 K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K도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계속 K를 쳐다보자 K는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는 K에게 “저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야” 하고 말했다. K는 저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늙은 사내가 회사 유리창을 청소하러 왔을 때 자신이 물을 가져다주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K는 피식 웃으면서 “여기 4천만의 친구가 나타나셨군” 하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K가 몹시 미워졌으므로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고 현장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찰흙처럼 일그러진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직원들은 “정말 신기하다” “나는 사람 죽은 거 처음 봤어” 같은 말들을 떠들어대면서 모두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회사에서 멀어지다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금세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다시 열어보았다. 이제 책상 서랍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으므로 더 이상 사무실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가방을 들었다. 가족 사진 액자 때문에 가방의 지퍼가 닫히지 않았으므로 그는 가방에서 가족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가족 사진을 다시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파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은 그가 버린 업무상 가치가 있거나 혹은 가치가 없는 서류 파일들과, 그가 이름을 보아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명함들로 이미 가득했으므로 그는 가족 사진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 안을 발로 꾹꾹 밟아야 했다. 그가 쓰레기통 안을 발로 꾹꾹 밟고 있을 때 다시 K가 다가와서 부장님도 참석하고 더구나 상무님까지 참석하니 열시 반에 있을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에 늦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했다.

그는 사무실을 나와서 잠시 휴게실에 들렀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고 담배를 피웠다. 몇 번이나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빌딩 유리창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고개를 내밀어 늙은 사내가 떨어진 지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늙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득 아까 K가 말한 일기 예보를 떠올렸다. K가 들은 일기 예보에 따르면 오늘 날씨는 화창해야 했다. 그렇다면 유리창 청소부의 죽음에 기상청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비가 오는 줄 알았다면 늙은 사내는 유리창을 닦기 위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은 사내의 죽음과 상관없이 오늘 저녁 뉴스에도 여전히 예쁘장한 리포터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일의 비 올 확률이 20%라든가 혹은 비 안 올 확률이 20%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자 그는 조금 화가 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열시 반에 그는 회사문을 나섰다. 물론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 회의에 참석한다고 해도 공격, 전략, 마케팅에 대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격이니 전략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나 그를 두렵게 만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장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장이 생각하기에 상무님이 참석하는데 나머지 부하 직원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부장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합리적인 이유를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 어쩌면 프라이데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퍽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그는 프라이데이가 누구인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회사 빌딩의 회전문을 밀치고 나왔을 때 회사 앞은 119 구조대와 경찰들이 몰고 온 구급차와 경찰차 그리고 소방차로 혼잡했다. 거기다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노란 테이프로 선을 쳐두었기 때문에 거리는 마치 폭탄 테러를 당한 도시처럼 삼엄하고 부산스러웠다. 그는 사내가 살아 있을 때는 알량한 밧줄 하나만을 내려주던 이 사회가 죽은 시체를 위해서 저렇게 막강한 장비와 인원을 보낸다는 것이 다소 의아했다.

그는 늙은 사내의 마지막 모습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사고 현장은 너무나 복잡했고 또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는 안내판을 붙이고 경찰들이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는 늙은 사내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빌딩 유리창에 30년 동안이나 매달려 살았고, 죽어서는 저렇게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노란 테이프 속에 갇혀 있으니 늙은 사내의 인생은 무척 외로웠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은 이제 내리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한방 쏟아질 듯한 두껍고 무거운 구름들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일기 예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우선 회사 근처에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으므로 종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업무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빌딩의 옥상 위에는 왕관을 쓴 것처럼 저마다 거대한 광고판이 올려져 있었고 그 광고 속에 들어 있는 예쁜 여자들은 맥주나 샴푸 같은 것을 손에 하나씩 들고 이런 상품을 가지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그가 걷는 보도 위에 엽서 같은 낙엽들을 노랗게 떨구었다. 그것을 보니 그는 가을이 왔다는 것을, 그가 좋아하는 시월이 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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