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장기려 선생에의 추억

  • 김관선·현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입력2006-09-07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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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의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시던 장기려 선생을 병원에서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것도 그가 장로로 출석했던 교회의 담임목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별히 친밀했거나 오래 사귄 사이는 아니나 요즘 그이 생각이 종종 난다.

    그가 세상을 뜬 것은 1995년의 성탄절이었다. 국민의 이목이 온통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 사건에 쏠려 있던 때 그는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장기려 선생의 부음은 전직 대통령들의 더럽고 추한 욕망들을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만들었다. 눈이 땅 위의 더러운 것들을 덮어버리듯 그 죽음은 추한 소식들을 덮고 성탄의 아름다운 의미를 온누리에 소복하게 쌓이게 만든 것이다.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수많은 사람이 서울대병원 영안실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엔 얼굴만 봐도 알 만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조문객은 생전에 그를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거나 그에게 갚을 수 없는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애도하는 조문객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그의 향기였다. 삶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드러나게 만드는 향기 말이다. 그의 묘지에 놓인 방명록에는 이런 글들이 적지 않았다.

    “생전에 선생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마음으로 존경해왔습니다. 이렇게 묘지에 와서 인사를 드립니다.”



    평생을 변함없이 남을 배려하며 살기는 쉽지 않다. 장기려 선생은 평생을 의사로 사신 분이지만 자신을 위해 집 한 칸도 마련하지 않으셨다. 복음병원의 조그만 옥탑방에서 사셨고 뭔가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팔아 남을 구제하시던 이가 선생이다. 입원비가 없어 퇴원을 못하는 환자들을 직원 몰래 뒷문으로 도망치게 도와주기도 했고.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몇 달 밀렸다가 받은 의대 강사료 전액을 거지에게 주었는데 이 거지가 그만 경찰에 붙잡혔다. 물론 돈의 출처에 대한 추궁이 있었고, 장선생께서 돈을 준 것이 확인이 되고서야 그 거지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때문에 선생의 삶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그이 생각이 날 때마다 질문하게 된다. ‘무엇이 선생을 그런 인물로 만들었는가? 그가 수상한 막사이사이 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이룩한 복음 병원과 의학적인 업적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숱한 일화들 때문일까.’ 답은 이중에 몇이거나 모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선생에 대한 존경은 평생을 ‘타인을 위한 삶’으로 일관한 것에 대한 우리 시대의 열렬한 환호, 바로 그것이라고.

    장기려 선생의 아들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있다. 아니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 남에게 베푸는 삶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믿음의 확인이 그것이다. 선생은 평생 그 믿음을 간직하고 사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셨고, 그리고 그 열매를 보셨다는 것이다. 여섯 아들 중 유일하게 데리고 월남한 둘째 아들 장가용 박사(서울대학교 의과대학·전 제주대학교 총장)는 이렇게 아버지를 추억한다.

    “아버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어요.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이북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누군가가 꼭 사랑을 나눠줄 거라구요. 결국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걸 확인하신 것이죠.”

    아버지가 월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출신 성분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그의 자녀들은 북한에서 모두 잘 되었다. 친지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맏아들(택용)은 약학을 전공하여 그 분야에 종사하고, 셋째(신용)는 식품 공학을, 넷째(성용)는 김일성 대학을 나와 암 센터에 있고, 다섯째(인용)는 강계의과대학 교수이며 막내(재용)는 학교선생이라는 것이다. 선생이 북한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의 면면을 보면서 누가 감히 그것이 이 땅에서 장선생께서 보여준, 실천하는 삶과 무관하다 할 수 있겠는가? 남을 배려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왜 이다지도 모르는 것일까?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현상이 이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혐오시설인 분뇨처리장, 쓰레기 매립장, 장례식장, 장애인을 위한 시설 등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시설들인데도 우리 마을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집 값이 떨어지고 그런 시설이 들어서면 동네 이미지가 손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요하면 남의 마당에 세우라는 식이다. 집단이기주의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고, 그런 결과 남은 죽든 살든 내 이익만 챙기기에 급급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좁은 ‘우리’에만 매달리고 있다. 내 가족 내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야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이 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가족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저지르는 온갖 추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심한 호흡 곤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작은 일에서부터 남을 배려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장차 어떤 모양일까.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건 아닐까. 비좁은 골목길에 주차할 때, 횡단보도 앞에 정차할 때,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쓰레기를 처리할 때 등 수없이 많은 작은 일 속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내가 잘 살 수 있고 내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다. ‘우리’는 없고 ‘나’만이 존재한다든지, ‘너’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할 때 ‘나’도 설 땅을 잃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려 선생을 통해 받은 감동을 전하고 있는 손봉호의 글은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몇 년 전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 ‘바깥에 부스럭 소리만 나도 당신인가 하고 창 밖을 내다봅니다’란 구절을 읽고 눈시울을 붉힌 일이 있다. 장선생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장선생의 사모님을 찾아냈고, 북한 당국의 허락을 받아 중국에서 장선생 부부가 만날 기회를 주선했다고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장선생은 그렇게 오랫동안 애타게 그리워하던 부인과의 상봉을 거부하셨다. 수없이 많은 이산가족들이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만 홀로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 땅을 떠나신 장기려 선생이 종종 그리워지는 이유는 세상이 너무도 ‘너’를 배려하지 못하는 각박함에 멍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가 있게 하는 것이 왜 이다지도 힘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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