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공존의 원칙 부정하는 ‘뺄셈의 정치’ 벗어나라

  • 글: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 pjyoon@hanshin.ac.kr

    입력2004-03-26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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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실현과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대화와 경쟁, 공존의 원칙을 내팽개친 결과는 무엇인가.
    • 수구와 진보의 막무가내식 힘겨루기 사이에서 한국정치는 폐허가 됐고, 사회는 갈갈이 찢겨졌다.
    공존의 원칙 부정하는 ‘뺄셈의 정치’ 벗어나라

    3·1절 기념행사도 이념따라 따로따로. ‘한·미공조’를 주장한 보수단체의 시청앞 행사(위). ‘이라크전 반대와 SOFA개정’을 앞세운 진보진영의 탑골공원 행사.

    한바탕 정치활극이 벌어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사건이다. 이로써 한국 정치는 총체적 불확실성의 상태로 진입했다. 군사독재 청산 이후 어렵사리 자리를 잡아가던 한국 민주주의의 행로 자체가 불투명해진 것이다. ‘널뛰듯 어지러운 사회에서 예측 가능한 사회로의 진전’이라는 민초들의 소박한 꿈도 물거품이 돼버렸다.

    대낮 국회의사당에서 자행된 멱살잡이 난투극은 국회 바깥에서 무한정쟁의 형태로 확대 재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은 사생결단 식의 정치 싸움을 강도 높게 증폭시키는 촉매 노릇을 할 것이고, 보혁 사회세력간의 대립도 임계점 수준으로까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 와중에 민생고는 갈수록 깊어지고 사회 현안들은 표류하며 한반도 위기관리 조차도 실종될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 희망하는 것처럼 헌법재판소가 총선 전에라도 신속하게 탄핵 여부에 대한 최종심판을 내리면 사태가 진정될 수 있을까? 일시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헌재의 결정은 또 다른 갈등과 혼란의 시발점이 될 개연성이 높다.

    결국 한국 사회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천하대란적 상황으로 진입하고 만 것이다. 탄핵안 강행처리 과정에서 여야 의원간 몸싸움에 밀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흔들리던 국회의장석 뒤 태극기와, 통곡하며 몸을 가누지 못하던 열린우리당 한 의원의 모습은 한국의 이런 암울한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그림이다.

    【시대정신 외면한 대통령과 거대 야당】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여진 것처럼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장고(長考) 끝에 최대의 악수(惡手)를 둔 격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림으로써 일거에 정치판을 뒤집고자 했던 거야(巨野)의 무리한 시도는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요동치는 한국 정치현실에서 성급한 예단은 금물이겠지만 이런 여론의 흐름은 총선에서 야당에 불리하게 현현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나라 걱정보다 자신들의 권력 헤게모니 유지를 앞세웠던 파당적 책략가들에게 가해지는 역사의 응보일 수도 있다. 정략적 이유로 탄핵을 밀어붙인 야당이 한국 민주주의에 져야 할 책임은 참으로 엄중하다. 그들은 눈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그 책임의 일부분을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핵심은 그 정치놀음의 피해와 흙탕물을 국민들이 송두리째 뒤집어써야 한다는 현실에 있다.

    국민의 고통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 앞에 져야 할 책임이 야당보다 덜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돌이켜보자면 난산 끝에 태어난 참여정부의 출범 자체가 도도한 시대정신의 소산이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체 상태에서 멈칫거리고 있던 ‘민주화 이후 시대의 민주주의’의 과업을 반석 위에 놓으라는 것이 지난 대선에서 나타난 민심이었다. 동시에 이런 과업을 안정 속의 개혁을 통해 민의를 모아 추진하라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노무현 정부의 성적표는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 무엇보다 사상 최저치를 넘나드는 대통령 지지도가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출범 이후 끝없이 이어진 ‘수구야당과 수구언론’의 발목잡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포부를 펼칠 수조차 없었다는 대통령의 항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국사회를 장악한 기득권 세력의 바다 위에 떠다니는 돛단배에다가 스스로의 고단한 위치를 비교한 노대통령의 읍소가 처절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사상 최약체 정부로 출발한 참여정부의 객관적 위상은 대통령의 항변이 단순히 엄살이나 정치적 수사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 같은 존재라는 사실과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이 갖는 엄청난 상징적·실질적 권한, 그리고 대통령이 잘할 것이라고 믿는 취임 초기 대다수 국민들의 선의에 찬 희망과 기대 등을 종합해보면, 탄핵국면까지 밀려온 지금의 상황에 대해 노 대통령은 총체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참여정부의 출범은 대통령 개인의 성패로 환원될 수 없는 중차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앞선 두 문민정부의 민주주의 실험과 개발시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발전의 성과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합과 화해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취임 직후의 몇 가지 상징적 제스처를 제외하면 노 대통령은 줄곧 분열과 대립의 길을 걸어옴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자신의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하는 근본적 잘못을 범했다.

    대표적인 예로 탄핵위기의 실질적 발원점이 된 민주당 분당사태를 복기해보자. 물론 대통령과 그 열혈 지지자들은 분당이 불가피했음을 상황논리를 동원해 정당화하고 있다.

    민주당 내부에 지역감정에 기댄 지역정치 도매상들이 맹주로 버티면서 당내 개혁을 방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소수약체에 불과한 지지계층을 다시 쪼개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세계정치사에 드문 자충수를 둔 것은 다름아닌 대통령 자신과 그 맹목적 지지세력이었다.

    그 구성원이나 지지자들을 보자면 차별점을 찾기 쉽지 않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간극을 인위적으로 벌려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만든 것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통령의 정략적 언행 탓이 크다. 민주당을 지역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셈’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민주당의 위기의식을 자극해 과거의 동지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배반’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에 눈이 먼 민주당이 탄핵정국에서 보인 ‘한·민공조’ 같은 각종 ‘오버’ 행위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서로 연대해 동지가 될 수 있는 세력조차 내쳐 적으로 만듦으로써 정국불안을 구조화시키고 심화시킨 노 대통령의 협량(挾量)과 뺄셈의 정치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호시탐탐 권력 탈환의 기회를 노려왔던 거야의 불순한 의도가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대통령 자신이 제공한 셈이며, 탄핵에 유보적이던 의원들까지 자극해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탄핵 전날의 신중치 못했던 대통령 기자회견은 그 압축적 사례에 불과하다.

    탄핵정국에서 드러난 한국정치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직업정치인의 임무와 정체성을 다시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학의 거장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국가를 운영하는 프로 정치인의 소명을 ‘열정, 균형감각, 책임의식’에서 찾았다. 특정한 영토 위에서 국민의 안녕과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정치조직체인 국가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하면서 다중에게 합법화된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좌우하는 정당화된 폭력 위에 입각해 있다는 이 기본적 사실이야말로 정치인과 정치권력에 개인적 도덕차원과는 다른 고유의 윤리적 책임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현실정치는 책략과 권력의지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직업정치인의 임무는 권모술수라는 그림자와 주관적 도덕성이라는 빛 사이의 이분법적 대립을 뛰어넘는 고차적 책임윤리의 지평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베버는 ‘결과를 문제삼지 않는 궁극적 목적의 윤리’와 ‘자기행위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를 구별한다.

    종교의 윤리가 궁극적 목적윤리의 전형이다. 이런 윤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선의의 행위가 초래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러나 제도화된 폭력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일하는 직업정치인은 ‘선은 선에서, 그리고 악은 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일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주관적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입체적이고 거시적인 책임의 윤리에 봉사해야 한다.

    책임윤리라는 잣대에 비추어보면 한국 제도정치의 실상은 그야말로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

    다수 여론과 법리에 반(反)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킨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자신들의 파멸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해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직업정치인에 고유한 책임윤리라는 판관으로부터 이미 총체적 파산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어떠한가?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도덕성을 정권의 구호로 삼았고, 정치적 구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도덕적 선민의식은 대통령의 주요한 정치적 자의식을 형성했다. 잇단 측근 비리와 부패에도 거듭되는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 또는 티코자동차의 비유는 주관적 엄결성에 대한 참여정부의 집착을 반영한다.

    그러나 냉엄한 정치의 지평은 정치인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주관적 확신의 차원을 뛰어넘는, 심원한 책임윤리를 요구한다. 노 대통령이 과시한 서민적 풍모나 솔직함은 주관적 덕목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책임윤리에 대한 적절한 고려 없이 직업정치인의 행위에 그대로 대입될 때 ‘정치적 행위의 비극성’을 몰각하는 천박한 무감각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책임윤리를 결여한 열정의 정치인이 정치공동체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치는 결국 치세(治世)와 정책의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될 뿐이다. 이 점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국민과 나라 앞에 석고대죄해야 마땅하다.

    참여정부와 야권으로 구성된 제도정치권이 함께 노정하고 있는 책임윤리의 결여가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장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이다. 정치적 책임윤리의 부재가 빚어낸 최악의 결과로 혹자는 헌정중단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걱정되는 사태가 ‘사회의 찢김’이다.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수구의 안간힘과 서툴고 독선적인 진보가 펼치는 막무가내의 힘 겨루기 사이에서 차분한 지혜와 균형 있는 판단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물론 ‘국론통일’이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용어에는 과거의 어두운 유산이 언뜻 엿보이기도 한다. 다원주의적 민주사회에서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사람들의 견해가 다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대화와 경쟁, 그리고 공존의 원칙을 너무나 쉽게 부정하는 데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정의실현과 민주주의의 미명 아래 이런 민주적 규칙을 내팽개치는 역설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민주사회는, 인내심을 갖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차분히 지키는 데서 비로소 뿌리내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견해를 달리해 대립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선진미(全善盡美)한 것으로 강변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와 역사의 지평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될 수 없는 입체성과 복합성에 의해 특징 지워지기 때문이다. 누가 됐건 탄핵정국을 계기로 분신하고 투신하거나 폭력을 구사하는 것은 정치의 이런 입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찢겨진 사회는 결코 억지로 봉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침묵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남은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것은 넘치는 열정을 자제하는 냉정함과 주관적 확신을 넘어서는 책임윤리에 대한 투명한 이해 위에 비로소 가능하다. 파국을 피하기 위해 우리 모두 인내하고 인내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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