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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시론

한국 외교정책, 패러다임을 바꿔라

‘약소국 현실주의’극복하고 ‘세계질서 관리’ 나서야

  • 이 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gnlee@snu.ac.kr

한국 외교정책, 패러다임을 바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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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나라는 스스로 정한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국의 능력을 엄밀하게 파악하고, 자국이 처한 외교적 환경을 명확하게 이해해 국가 목표 달성에 가장 적합한 외교수단을 사용한다. 이렇듯 국가 목표, 국가 능력에 대한 평가, 외교환경에 대한 이해,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한 최적의 수단이 체계적으로 결합한 것을 외교정책의 패러다임, 외교정책의 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 한국의 외교를 움직이는 패러다임은 과연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는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외교는 나름대로 완결된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국가 목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독립과 생존, 번영이었고, 스스로의 국력에 대해서는 매우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처한 외교환경은 공산 세력과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의 대결 상황이었다. 따라서 약소국 한국은 생존과 번영을 보장받기 위해 초강대국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수단을 사용했다. 이러한 기존의 외교 패러다임을 필자는 ‘약소국 현실주의’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약소국이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대국에 의존하는 현실정치(realpolitik)를 펴는 외교다.

반세기 동안 이러한 패러다임은 매우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6·25전쟁이라는 경험을 통해 한국은 스스로의 국가적 능력과 외교환경을 더욱 처절하게 평가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미동맹을 체결했다. 한미동맹이라는 외교안보 수단은 한국이 20세기 후반 냉전(冷戰)이라는 험악한 외교환경에서 안정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은 독립과 생존, 번영이라는 국가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약소국 현실주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국 외교의 ‘정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면 자신이 처한 위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외교환경 또한 늘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존의 패러다임은 조건의 변경에 따라 새롭게 변화하라는 압력과 도전을 받게 된다. 한국 외교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채 안 되는 극빈국(極貧國)이었지만 이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가 넘고 경제규모는 세계 11위로 도약했다. 초약소국에서 세계 굴지의 국력을 가진 나라로 상승한 것이다. 한미동맹을 통해 한미연합 군사력도 급속도로 강화됐고, 한국군은 세계적인 수준의 군대로 성장했다. 국내외 군사전문가들은 한미연합 전력을 세계 10위권의 군사력으로 평가하고 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뿐 아니라, 한류(韓流) 현상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역량, 국민의 교육수준이 반영된 인적 자원, 민주화 달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적 자신감도 한국의 총체적 국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한국을 둘러싼 외교환경도 1990년대에 들어와 급속도로 변화했다. 20세기 후반 동안 한국에 가장 큰 안보위협은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결이었지만, 냉전구도가 붕괴하면서 공산주의권은 사라졌고 북한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그 과정에서 초강대국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제는 한국보다 경제규모가 작은 러시아로 남게 됐다.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옛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제는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정점에 서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함께 세계화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불확실 요인들을 관리해 나가는 외교환경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외교환경은 이전보다 전체적 위협이 훨씬 줄어든 상태로 변화했다.

패러다임 관성과 변화 압력

이러한 변화는 ‘약소국 현실주의’라는 기존의 외교 패러다임에 충격을 가한다. 한국은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고, 외교환경도 다른 강대국의 군사공격에 대비해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냉전적 대결구도가 아니다. 북한의 위협은 상존하지만 북한은 전체 경제규모가 한국 국방예산(GDP의 약 2.7%) 수준에 불과한 극빈국이 됐고, 한미연합 전력은 이에 대해 충분한 억지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외교가 북한위협 대응과 한미동맹 지키기에만 전력을 기울이기에는 국력의 규모나 해외 진출 판도가 너무 커져버렸다. 미국도 이러한 변화를 고려해 최근 동맹 역할의 재조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민은 이러한 조건의 변화와 외교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변화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기존 패러다임의 관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우선 한국은 너무나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변화가 생생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식의 혼란이 생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에 집착하게 된 측면이 있다. 또한 세계적 냉전 종식과는 무관하게 한반도라는 ‘소우주’에서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대치상태도 영향을 끼친다. 한국이 아무리 부강해졌다 해도 주변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약소국이라는 상대성도 기존의 ‘약소국 현실주의’ 패러다임에 관성을 더하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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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gnlee@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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