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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의 세상읽기

위로받기 위하여

위로받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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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로 아들을 잃은 고(故)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55)씨는 무엇이 진정한 소통이고, 위로인지를 보여준 분이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가슴에 묻고 사는 어미 아비 마음이, 세월이 간다고 잊히겠니….” 아들의 영정 앞에서 조시(弔詩)를 읽던 김씨는 끝내 엎드려 통곡했다고 한다. 아내는 온종일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들 사진을 붙잡고 울고, 개인택시를 몰던 그는 아들 생각에 정신을 놓쳐 그새 두 번이나 접촉사고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택시도 팔려고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천향대병원에 차려진 철거민분향소에 찾아가 아무 이름도 쓰지 않은 흰 봉투에 10만원을 넣어 조의(弔意)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유족 분들이 풀이 죽어 앉아 계시는 걸 보니 내 일처럼 가슴이 찢어집디다. 우리 남훈이는 그래도 49재도 지냈는데… 너무 가여웠어요.” “장례식 비용도 없다는데 참 큰일입니다. 지금 나가도 보금자리가 없는 분도 있을 것 아닙니까. 정부도 입장이 있겠지만, 그래도 정부가 아니면 이 사태를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용산 시위대 일부가 경찰을 폭행한 데 대해서도 “사태가 이렇게 해결되지 않으니 화가 안 풀린 분이 많겠죠. 그렇지만 경찰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질서 유지를 담당하고 있으니 그렇게 나가는 것뿐인데…. 경찰을 왜 이렇게들 미워하느냐, 우리 남훈이도 가슴 아파할 것”이라며 고개를 떨궜다고 한다.(중앙일보 2009년 3월10일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어쩌면 가해자일 수 있는(검찰 발표대로라면) 철거민의 유족들이 풀죽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가여웠다고 했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에 중음(中陰)을 떠돌던 아들의 영혼도 안식(安息)할 수 있을 터이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에 철거민 유족들도 위로받을 것이다. 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고 진정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엄정한 법치’만으로 증오와 적대, 분노와 원한을 풀 수는 없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야말로 얼음장 같은 갈등의 벽을 녹일 수 있다. 김권찬 씨는 그것을 조용하게 일러준 셈이다.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조차 없이, 비통함에 잠긴 유족들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는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워준 셈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얼마 전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라고 말했다. 이 말이 들춰보기 거북한 ‘불편한 진실’인지, 작가의 함축된 자의식의 표출인지, 그것을 따져보는 것은 이 글의 취지가 아니다. 다만 이 땅에 지금 ‘도둑이나 바보(행복하다고 믿는 사람)’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만은 분명하다.

지금 행복하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 경제위기로 고통 받고 강퍅한 세상에 진저리난 그들은 위로받고 싶어한다. 하기에 많은 이가 ‘워낭소리’를 보고,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다.

여든 살이 다 된 늙은 농부와 마흔 살인 늙은 소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2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저예산 독립영화다. 수백~수천억원을 쏟아 붓는 할리우드 산(産) 블록버스터에 비한다면 볼거리가 빈약하다. 스케일이라고 할 것도 없고,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고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관객은 그저 서로 닮은 늙은 농부와 늙은 소의 걸음걸이처럼 느릿느릿 화면을 좇아가야 한다. 농부의 아내인 할머니의 가벼운 지청구가 지루함을 달래줄 뿐이다. 그러나 관객은 느림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만난다. 거기서 돈으로만 셈할 수 없는 노동의 가치, 경제로만 계산할 수 없는 관계의 가치를 떠올린다. 늙은 농부와 늙은 소의 동행과 이별에서 성장 신화(神話)와 경쟁에 쫓기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된다. 소가 죽기 전 농부는 평생의 굴레였던 코뚜레와 워낭을 풀어준다. 이별은 슬프지만 슬픔은 보는 이를 정화(淨化)한다. 그리고 맑아짐은 마음을 위로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위로받기 위해 ‘워낭소리’를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은 영화에 200만의 관객이 몰려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엄마라는 말에는 친근감만이 아니라 나 좀 돌봐줘, 라는 호소가 배어 있다. 혼만 내지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줘, 옳고 그름을 떠나 내편이 되어줘, 라는. 그럼에도 장성해 엄마의 곁을 떠난 딸은 엄마에게 늘 화를 내듯 말했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대들 듯이 말했다. 엄마가 돼서 왜 그래? 책임지라는 듯이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뭐할 건데? 무시하듯 말했다. 그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가족은 소중한 엄마를 생각한다. 제가 하는 일은 엄마의 삶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엄마를. 엄마는 부엌이고 부엌은 엄마여서 엄마와 부엌을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엄마를. 앞으로 10년 동안 해야 할 계획에서 빠져 있던 엄마를.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가난 때문에) 하지 못하게 한 게 당신이라고 생각해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엄마를. 평생 말을 안 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겠거니 하며 살아온 아내를.(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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