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복제인간

  • 박상준 < SF·과학 해설가 > cosmo@nuri.net

    입력2005-05-03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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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로 진입한 과학계에서 가장 첨예한 화두는 인간복제다. 아직은 반대론이 우세하지만, 신중한 찬성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는 형국이다. 그 와중에 이 흥미진진한 소재를 기본 설정으로 채택한 SF영화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통해 막연하나마 복제인간에 대한 미래상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복제인간이 탄생하는 과정, 복제인간의 정체성, 모체가 되는 인간과 복제인간의 공존상황 등. 사실상 이 모든 부분이 왜곡되거나 과장된 형태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복제를 소재로 삼은 SF영화와 실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붕어빵 찍어내기’는 불가능



    영화 ‘멀티플리시티’(1996)에서는 주인공과 똑같이 생긴 복제인간을 마치 틀에서 찍어내듯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이렇게 탄생한 복제인간은 주인공과 외모는 물론 기억까지 똑같이 공유한다.

    ‘6번째 날’(2000)의 기본 설정도 인체세포를 복제한 원형체(原形體)가 미리 대량 배양돼 있는 상태. 복제하려는 인간이 결정되면 이 원형체 중 하나를 택해 똑같은 외모를 만들고, 미리 저장해 둔 디지털 매체에서 기억을 복사해 넣는다.

    이렇듯 영화 속 복제인간은 대개 ‘붕어빵 찍어내기’와 다름없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그러나 이런 묘사는 허구에 불과하다.

    복제인간은 보통 인간과 마찬가지로 산모의 자궁에서 태아 상태로 성장하며, 임신 기간을 다 채운 뒤 신생아로 세상에 태어난다. 즉 여성들이 ‘배 아파 낳는 아기’임에는 변함이 없다. 위의 영화들처럼 다 자란 성인의 모습으로 단번에 복제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은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결합하여 태어난다. 두 세포가 결합한 수정란은 여성의 자궁 안에서 세포분열을 계속해 배아(胚芽)가 되고, 다시 태아로 성장을 거듭하며, 산모의 태반과 연결된 탯줄을 통해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복제인간은 이 과정에 맨 처음 부분, 즉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는 과정 대신 여성 혹은 남성 어느 한쪽의 체세포를 분열시켜 태아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정상적인 세포분열이 시작된 배아는 보통 인간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자궁 안에 착상해야 자라날 수 있다. 이 과정은 인간과 같은 포유류인 복제양이나 복제소를 탄생시키는 실험을 통해 이미 검증된 것이다.

    이러니 영화처럼 주인공과 똑같은 외모의 복제인간이 나오려면 나이도 똑같이 먹고 신체도 같은 수준으로 발달했어야 한다. 물론 외모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제반 환경도 똑같아야 한다. 영화처럼 복제인간을 속성으로 성장시키는 기술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렇다면 SF영화들이 하나같이 ‘붕어빵 복제인간’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별해내기 쉽지 않은 인물들을 동시에 등장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야 흥미로운 볼거리나 극적 전개가 용이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싶다면 오히려 안드로이드(외모와 행동이 인간과 똑같은 고성능 로봇)를 등장시키는 편이 더 과학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공도 미처 몰랐던 쌍둥이 형제라거나.

    한편 복제인간이 인공자궁에서 자라난다는 설정도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성급한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자궁과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인공자궁을 만들려면 적어도 50년은 더 걸린다고 내다보고 있다.

    신체와 기억은 별개

    앞의 영화들을 보면 복제인간은 몸뿐 아니라 기억까지도 주인공과 똑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멀티플리시티’에서는 복제인간이 세 명이나 생기면서 각자의 개성이나 정신적 능력에 편차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기억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6번째 날’에서는 아예 복제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 즉 자신을 복제인간이 아니라 원래의 모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인간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 물리적 차원의 ‘복제’일 뿐이다. 즉 모체가 되는 인간으로부터는 신체의 생물학적 특징만 물려받게 되어 있다. 두뇌 속에 들어 있는 정보는 복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갓난아기로 태어날 복제인간이 모체가 갖고 있는 성인의 기억이며 성숙된 가치관 등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신체 복제와는 별개로 기억 복제는 가능할까. ‘6번째 날’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기억을 디지털 디스크에 저장했다가 다른 사람의 두뇌에 파일 복사하듯 순식간에 주입해 넣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쉽지만 이 부분 역시 과학적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간의 두뇌는 아직도 신비의 영역이다. 기억이나 판단, 사고 등 여러 가지 정신적 두뇌활동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현대과학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6번째 날’에서처럼 인간의 기억을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하고 저장하는 일은, 인간 두뇌가 컴퓨터와 같은 연산처리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방법은 상당히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완전한 기억 복제도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 컴퓨터공학의 선구자 폰 노이만은 1950년대에 이미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신경세포간의 접합 부분인 시냅시스가 on-off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에 비추어볼 때 인간 두뇌는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컴퓨터다.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인간의 두뇌는 상당히 부정확하고 오류도 많이 발생하는 반면, 창조적인 사고와 발상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 두뇌의 논리 회로는 컴퓨터 언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 아닐까. 컴퓨터의 언어는 수학이지만, 인간의 두뇌는 그것과는 다른 논리 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컴퓨터의 수학적 연산 언어보다는 훨씬 깊이가 얕아 보이지만, 그보다는 뿌리가 다른 구조의 논리 언어 체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과는 상당히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기억 복제의 시도는 생물학적 인간복제보다 훨씬 오랜 세월이 지나야 가능할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은 인간복제와 관련된 제도적·법률적 규제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그 와중에 여러 종교 및 사회단체들도 저마다 치열하게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제는 인간복제라는 원론적인 차원을 넘어서, 배아복제를 반대한다거나 인간의 기준이 어디서부터냐 하는 각론 수준까지 논쟁이 진전되었다.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아직 복제기술의 성공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현재 포유류 복제는 암컷에서 채취한 난자의 핵을 제거하고 여기에 복제하고 싶은 대상의 체세포 핵을 삽입, 배아로 성장시킨 뒤 암컷의 자궁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제까지 세계 각국에서는 이 방식으로 소, 돼지, 원숭이 등의 복제에 성공했지만 전반적인 성공률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복제양 돌리의 경우에도 복제 난자 277개 중 단 한 개만 성공할 수 있었다.

    인간복제 반대론자들은, 이처럼 높은 실패율은 무시한 채 단지 성공할 경우만 부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패율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자궁 내 유산, 급사 증후군, 치료 불가능한 유전적 결함 등의 문제가 발생할 때에도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처럼 처음부터 실패하거나 도중에 사망하는 복제인간은 현재로서는 그대로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들이 있는데도 ‘결국 복제인간 탄생은 시간문제’라며 공개 실험을 선언하고 나선 과학자들이 있다. 미국 켄터키대 생식학과 파노스 자보스 교수와 이탈리아 인공수정 전문의 세베리노 안티노리 교수는 지난 1월28일 “인간복제 연구를 위해 10쌍의 불임부부가 자원했으며, 지중해의 한 국가로부터 연구를 허가받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인간복제 연구 목적은 불임치료로, 윤리적이고 자격 있는 연구팀에 의해 공개적으로 행해질 것이며, 현재 세계적으로 인간복제가 연구되는 만큼 우리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시도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즉 자신들과 같은 연구진이 공개적으로, 명확한 책임 소재를 밝히고 연구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리처드 시드 박사나 종교단체인 라에리안협회가 후원하는 클로나이드사처럼 인간복제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팀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 실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 보인다. 이들의 계획에 따르면 복제인간은 2003년경에 태어날 예정이다.

    한편 인간복제가 아닌 제한적 연구 목적의 배아세포 복제에 대해서도 찬반양론이 대립하고 있다.

    복제기술을 신체의 특정 부분에만 선택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의료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초기에 배아세포의 복제는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도태되는 배아세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폐기처분하면 그만인가.

    복제기술의 효용

    이 문제는 과연 배아세포를 인간으로 간주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판단 여부와 맞물려 있다. 세포분열이 시작된 뒤 14일 정도가 지나면 독립된 생명체로서 뚜렷한 생물적 징후가 나타나는데, 이 시기를 한 인격체의 기준점으로 삼자는 의견도 있고, 아예 배아복제 자체를 원천적으로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는 불임연구 같은 제한된 목적만 허용하여 엄정하게 감시하자는 견해도 있다.

    이상은 우리나라의 경우고, 현재 영국에서는 여러 종교단체가 반대하고 있지만 연구를 위한 인간배아세포 복제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 상·하원에서 통과된 상태다. 연구 목적의 배아세포 복제를 허용한 나라는 영국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인간복제를 시도하려는 과학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제인간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생명체 복제는 의학적으로 매우 유용한 기술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질병을 앓으면서 신체 장기의 일부를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치명적인 종양이 발생한 위장을 통째로 제거하는 경우도 있고, 한편으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생체복제 기술을 이용하면 해당 부분만 고스란히 복제하여 이식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는 인체의 어느 부분이든 교체가 가능하다. 당뇨·심장 이상·알츠하이머병 등 세포의 퇴화로 일어나는 광범위한 질환을 치료하는 데도 이용할 수 있다. 더구나 자신의 체세포를 떼어내 복제하는 것이어서 생리적 거부반응 같은 것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부모자식 간에도 혈액형이 다르면 수혈이 불가능하지만, 생체복제기술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몸 일부를 떼어냈다가 다시 붙이는 과정이므로 부작용이 없다. 생체복제로 인해 인류가 얻게 될 의학적 혜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사실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런가 하면 인간복제는 자손을 얻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국내에서도 복제소를 탄생시킨 서울대 연구팀에 그런 의뢰가 있었다는 비공식보고가 있지만, 인공수정과 같은 방법으로도 도저히 2세를 얻을 수 없는 부부의 경우 마지막으로 인간복제 기술에 호소해볼 수 있다.

    또한 동성애자들처럼 애초부터 양성생식이 불가능한 부부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물론 입양 등이 바람직하겠지만, 당사자 중에는 ‘혈육’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1978년 8월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시험관아기’가 탄생했다. 정자와 난자는 여성의 몸 안에서 수정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여러 이유로 이 과정이 여의치 않은 부부의 경우 체외에서 인공적으로 수정하게 된다. 이처럼 시험관 안에서 수정된 뒤 엄마의 자궁 안에 착상해 자라고 태어나는 아이가 ‘시험관아기’다.

    처음 시험관아기가 태어날 당시 전세계는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거나 ‘생명의 존엄성을 더럽혔다’는 등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아무도 시험관아기를 특별하게 거론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시험관아기가 태어났고 또 계속 태어나고 있다. 이전에는 ‘불임’으로 고통받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이 이 인공수정 기술로 2세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또 그렇게 태어난 시험관아기들도 자연수정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물론 인간복제는 인공수정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지만, 70년대 말의 시험관아기도 당시로서는 대단히 첨예한 이슈였다.

    그런데 최초의 시험관아기가 탄생하기 몇 달 전 서양에서는 이상한 책이 한 권 출간됐다. 1978년 3월에 첫 출간된 이 책은 우리나라에도 ‘복제인간 : 허구인가 사실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이 나왔는데(1978년 말에 최초의 번역판이 나왔다가 절판된 뒤 근년 들어 재출간됨), 지은이는 데이비드 로비크라는 과학 저널리스트다.

    이 책은 ‘어느 독지가가 동남아시아의 모처에 연구소를 차려놓고 대리모까지 구해놓은 뒤 자신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현재 임신중’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세부적인 묘사가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복제인간을 탄생시키기까지의 과학적인 서술이 매우 전문적이어서 당시 서양 학계에서는 이 책의 진위와 찬반을 놓고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저자가 어느 자본가의 돈을 받고 집필했으며 책이 출간된 뒤 그 자본가와 관련된 생명공학 회사의 주가가 뛰어올랐다는 것이다. 결국 사실이 아닌 허구로 일단락되는 분위기였지만 아직까지 속시원하게 밝혀진 내용은 없다. 시험관아기 탄생에 때맞춰 일종의 센세이션을 노리고 연출된 해프닝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책을 SF(공상과학)로 분류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복제인간의 인권

    좀 성급한 걱정인지는 모르지만, 복제인간과 관련된 사회의식의 저변에는 상당히 왜곡되고 불순한 선입견이 깔려 있다. 이로 인해 장차 복제인간이 탄생하게 되면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신문에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은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복제원숭이 두 마리가 서로 껴안고 있는 사진 위에 ‘넌, 복제야!’라는 낙인을 찍어놓은 것이었다.

    ‘…모양은 흉내낼 수 있지만 그 약효와 기술만은 흉내낼 수 없습니다’라는 카피를 단 그 광고는 미국 오리건주 보건과학연구소가 낸 것이었다. 당시에 그 광고를 접하고는 생명체복제기술에 대한 사회·윤리 의식의 부정적 단면이 벌써 노출된 듯해 씁쓸하고 안타까운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사실 그 원숭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복제원숭이가 아니었다. 어른 양의 세포를 복제한 영국의 복제양 ‘돌리’와는 달리 태아세포를 이용한 경우로, 두 원숭이는 부모만 같을 뿐 성별이 다른 남매간이고, 당연히 유전적으로도 100%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복제의 순도(純度)가 아니다.

    우려되는 것은, ‘넌, 복제야!’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다. 아직은 인간복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지만, 예측불허의 속도와 방향으로 급변하는 세태에서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벌써부터 복제생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대중매체를 통해 공공연히 전파된다면, 나중에 태어날지도 모르는 복제인간의 인권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생물의 복제는 골동품 복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복제품 ‘모나리자’는 진품 ‘모나리자’의 가치에 비길 바가 아니지만, 생명은 무생물과는 달리 혼이 깃들인 존재다. 생명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이란 육체가 태어난 과정으로 차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복제인간도 완성되고 독립된 인격체로 태어난 이상, 보통 인간과 똑같이 대우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관아기’를 차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에일리언4’에는 이와 관련된 상징적 내용이 등장한다. 복제인간으로 태어난 주인공 여성은 괴물처럼 생긴 자기 복제인간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그는 원래 200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그 당시 혈액을 채취한 과학자들이 8번을 시도한 끝에 주인공을 복제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여 7명의 기형아가 먼저 태어났다. 주인공은 연구 목적으로 그들을 보존하고 있던 과학자들에게 격렬한 분노를 느끼며 자신의 복제 자매들에게 죽음의 안식을 선사한 것이다.

    이 경우는 인간복제의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형아로 태어난 복제인간들을 더 이상 실험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SF작가의 극단적 전망

    미국의 SF작가 조 홀드만은 ‘영원한 전쟁’(1975)이라는 작품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월남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작가는 이 작품에서 전쟁의 허무함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이 유전공학이나 인간복제와 관련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오랜 우주전쟁 끝에 지구로 돌아와 보니, 상대성원리에 따른 시간지연 효과 때문에 자신이 출발했을 때보다 까마득히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접한 먼 미래의 지구사회엔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주인공은 망연자실하고 만다. 유전공학과 복제기술의 발달로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 태어났고, 그 뒤부터는 오로지 그의 복제인간만 만들어내 인류의 대를 이어가도록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정은 하나의 은유적 표현일 뿐이지만, 유전공학과 인간복제 기술이 계속 발달하면 21세기 말쯤의 세상은 지금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지금의 시험관아기처럼 복제인간이나 유전공학 기술도 사회적으로 널리 시행될지 모를 일이고, 어쩌면 어느 정도의 부작용도 파생되었을 것이다.

    획기적인 사회적 통제제도나 과학기술이 완벽성이 갖출 수도 있고, 반대로 참담한 실패와 좌절을 겪고 나서 완전히 잊혀진 금기의 영역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초에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래 과학기술은 언제나 우리 인간들에 의해 저주도 되고 희망도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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