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현대인 심장 조이는 납

  • 이정호 / 동아사이언스 기자 sunrise@donga.com

    입력2009-11-03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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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 심장 조이는 납

    납이 검출된 중국산 인형

    로마제국의 존재는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로마의 광대한 영토는 중세를 지나 현대에 이르는 동안 어느 국가도 재현하지 못했다. 영토 크기는 단순히 넓은 땅의 의미를 넘어선다. 로마는 여러 민족의 독특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제도를 녹여낸 용광로였다.

    광대한 로마를 유지한 건 정교한 ‘수도’ 시스템이었다. 로마의 제도는 시민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꽃을 피웠고, 그 도시를 운영하는 데 수도는 필수였다.

    도시 바깥의 수원지(水源池)에서 수도를 따라 이동한 물을 납으로 만든 관을 통해 가정에 공급했다. 납은 잘 구부러지는 성질 때문에 식기 재료로도 널리 쓰였다. 심지어 특이한 맛을 낸다며 포도주에 납을 섞어 마셨다. 하지만 잘 알려졌듯 납은 치명적 독성을 지닌 중금속이다. 당시엔 그 유해성을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 귀족의 출산율이 낮았던 게 납 중독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 납의 공포가, 오래전 로마가 아니라 현대 도시를 떠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간담을 서늘케 한다.

    미국 하버드대 마크 웨이스코프 교수팀은 보스턴에 사는 평균 연령 67세 남성 868명의 뼈에서 납 농도 증가 추이를 관찰했다. 9년에 걸친 조사 결과, 몸 안에 쌓인 납 농도가 높은 남성은 농도가 낮은 남성에 비해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무릎 안쪽 뼈인 슬개골과 정강이뼈 경골에 X선을 쏴 납이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했다. 연구팀이 뼈에 집중한 이유는 쌓인 납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반감기 때문이었다. 반감기가 슬개골은 8년, 경골은 10년가량이지만 혈액은 30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납이 쌓이는 정도를 측정하려면 혈액이 아닌 뼈를 분석해야 한다.

    납 중독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건 일상용품이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납을 포함한 휘발유가 주된 오염원이었지만 이 같은 휘발유는 규제로 인해 판매되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집에 칠해진 페인트, 낚시에 쓰이는 추, 일부 도자기 유약, 그리고 장난감에서 납이 묻어나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런 현실에도 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선 납이 심혈관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특히 건설 분야 노동자는 작업 과정에서 납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출산율을 떨어뜨려 로마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는 납. 그런데 그 납이 현대인의 삶을 위협한다. 납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로마인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과학자와 정책 당국자가 어떤 대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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