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특별기획 한중수교 25년 新東亞-미래硏 연중기획 中·国·通

북한, 대만 따돌린 25년 전 ‘동해 사업’ “이제는 부상한 中이 韓에 힘 투사하려 해”

한중수교 주역 신정승 전 주중대사

  • 이문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북한, 대만 따돌린 25년 전 ‘동해 사업’ “이제는 부상한 中이 韓에 힘 투사하려 해”

1/4
  • ●中이 큰 나라 되리라 누구도 예상 못해
  • ●北이 말 안 듣는다는 中 주장에도 일리 있어
  • ●美中 전략적 갈등 심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
  • ●남중국해가 韓에 ‘제2의 사드’ 될 수 있어
북한, 대만 따돌린 25년 전 ‘동해 사업’ “이제는 부상한 中이 韓에 힘 투사하려 해”

[지호영 기자]

신정승(65) 전 주중대사는 대(對)중국 외교의 산증인이다. 외무부(현 외교부) 동북아2과장으로 일할 때(1990~1993) 한중수교 교섭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2008~2009년 주중대사를 지냈다. 국립외교원 중국연구센터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난 후 현재 동서대 석좌교수(중국연구센터 소장)로 있다. 



암호명 ‘동해 사업’

한중수교는 1992년 8월 24일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외교와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실용주의 철학이 맞아떨어졌다. 한국은 우방(友邦)이던 대만과 단교했으며 중국은 혈맹이던 북한에 실망감을 안겼다. 한중은 비밀 교섭창구를 통해 수교 협상을 진행했다. 수교 협상 암호명은 ‘동해 사업’이다.

7월 7일 서울 광화문 미래전략연구원에서 신 전 대사를 만나 한중 관계의 과거·현재·미래를 물었다.

중국과 수교한 지 25년이 됐습니다. 감회가 새롭겠습니다.
“한중수교 교섭은 북한과 대만을 따돌려야 했기에 극비리에 진행됐습니다. 외무부에서도 몇 사람만 알았죠.”

한중수교 협상 예비교섭 수석대표이던 권병현 전 주중대사는 부친이 병환이 났다고 둘러대고 외무부 청사에 나오지 않았으며 신 전 대사도 병원에 입원했다고 소문을 낸 후 수교 작업을 진행했다.

“1991년 4월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北京)을 찾은 이상옥 외무부 장관에게 수교 교섭을 시작하자고 제안합니다. 첸치천이 회고록에 한국이 수교를 제안해 응했다고 썼는데, 수교 교섭을 정식으로 먼저 제안한 쪽은 중국입니다.”
첸치천 전 외교부장은 ‘10가지 외교의 기록(外交十記)’이란 제목의 회고록에서 한중수교 과정을 소개하면서 1992년 8월 이전 한중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은 ‘금지된 지역’이었다. 중국인 중에 그곳에 가본 사람이 거의 없다.”

한중 관계는 수교 후 25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두 나라는 현재 서로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규정한다.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했다. 지난해 7월 한국이 주한미군에 사드를 배치할 부지를 공여하기로 결정하면서 한중 관계는 얼어붙어 있다.

 “한중수교 교섭은 보안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가족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어요. 언론에 노출돼 외부에 알려지면 북한이나 대만이 어떻게든 방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동빙고동 안가에서 권병현 수석대표, 안기부 직원 1명과 수교 교섭 준비를 시작했죠.” 



“한국, 북한 동등하게 대하라”

중국인에게 한국은 ‘금지된 지역’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중국도 똑같았고요.  
“한국 정부는 1980년대부터 중국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1983년 강원도 춘천에 중국 민항기가 불시착했을 때 베이징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건을 해결해줬죠. 그 후 인민해방군 해군 잠수정이 영해에 들어온 사건도 있었습니다. 함상 반란이 일어났는데 주동자들은 망명을 원했습니다. 예전엔 비슷한 일이 생기면 대만으로 넘겨주곤 했는데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잠수정 사건은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민항기는 눈에 보이니 외부에 공개할 수밖에 없지만 잠수정은 달랐습니다. 비밀리에 처리했죠. 선상 반란이 일어난 경우에는 국제법상으로도 선박이나 잠수함을 해당 국가에 되돌려주는 게 원칙입니다.”

민항기, 잠수정 사건이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됐겠군요.
“그렇죠. 중국과 국교는 없었으나 무역이 일부 이뤄질 때예요. 한국과 중국에서 개최되는 스포츠 행사에 양국 선수단이 참가했고요.”

수교 교섭 때 중국이 까다롭게 나오진 않았습니까.
“베이징이 특별히 요구한 것은 대만 문제 빼놓곤 없었어요. 대만과의 단교가 핵심이었죠. 중국과 수교한 세계의 모든 나라가 대만과 국교를 끊었기에 단교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일찍부터 했습니다. 대만을 포기하면서 우리가 뭘 얻을지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죠. 한중수교 이전까지 중국의 대(對)한반도 외교는 북한 일변도였습니다. 한국과 북한을 동등하게 대하라는 등의 요구를 했습니다.”

북한 핵 문제가 본격화하기 이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 핵 문제는 그때도 존재했어요. 1989년 미국 관리가 첩보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갖고 소련과 중국을 방문해 북한이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구축한다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중국과 수교 교섭을 하면서도 베이징에 북한 핵 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대만과의 단교 과정이 매끄럽지는 못했다면서요. 한중수교 3일 전인 1992년 8월 21일 주한 대만대사관에 단교 문서를 전달하면서 3일 내로 나가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만의 일방적 견해일 뿐입니다. 중국과 대만 모두 프레임을 만든 후 자신들의 주장을 집요하게 해 사실로 믿게 하는 일에 능숙해요. 이상옥 장관이 한중수교 교섭 과정에서 대학 강연 등을 포함해 수차례 한중관계 정상화가 머지않은 시기에 이뤄질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공식 통보 수일 전에 예고하기도 했고요. 대만대사관이 한중수교가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주관적 바람(Wishful Thinking)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1/4
이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목록 닫기

북한, 대만 따돌린 25년 전 ‘동해 사업’ “이제는 부상한 中이 韓에 힘 투사하려 해”

댓글 창 닫기

2017/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